화산이씨 왕족의 직계 후손인 이창근씨는 얼마 전 베트남에 귀화하기로 했다. 그는 한국에 살며 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따랐고 그에 대한 근원적 선택의 필요성을 느껴왔다고 한다. 그러다 베트남을 찾았을 때 베트남 정부가 그를 손님이 아닌 같은 국민으로써 내빈 대우로 맞았다. 그는 마치 연어가 옛 강을 찾아 회기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로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베트남 정부에 귀화 신청을 했고 베트남은 그의 뜻을 정중히 받아들여 지난 2009년 10월 5일 정부공문을 발부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1월 5일자에 최종 법안승인을 받게 됨으로써 이씨는 바라던 베트남 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용상 중시조로부터 26대손이며, 태조로부터는 31대손 왕족이다. 그가 오는 5월 중순경 베트남어로 출간되는 <황숙 이용상>의 출판기념회와 더불어 국적취득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소설가 강무학씨에 의해 1966년 출간되었던 <황숙 이용상>은 베트남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이 책은 다문화 시대의 공유물로써 재조명 받게 되었다. 이 책의 출판권은 이창근씨에게 있으며 번역에서 편집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창근씨는 중부 다낭에서 환경사업을 하고 있다. 폐비닐을 수거한 후 리사이클 해서 생활용품으로 재생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폐비닐 재생작업은 하루 3톤가량을 가공하는데 주로 다라나 돼지 먹이 통, 농수로 파이프 등 대략 30여 종의 상품들을 생산한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가족 모두 정체성 찾아
그의 가족은 아내와 딸, 아들을 합해서 모두 네 가족이다. 그 중 딸은 미국 필라델피아대의 베트남어학과 유학 중이고 아들은 하노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요즘 청소년들은 역사의식이 없고 신세대 물결에만 휩쓸려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한다. 바로 이 점을 우려하여 그는 아들에게 중고등학교 과정 모두 현지 로컬 학교를 다니게 했다. 조상의 땅이 베트남이니 이곳에 올곧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들은 이 왕조의 후손으로 조명 받고 자라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고 한국어와 베트남어 또한 모두 능숙하다. 일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동시통역을 맡아 베트남 기자단에 모니터링 하기도 했었다. 이창근씨 자신도 이왕조의 후손으로써 한국에 베트남의 홍보대사 역할을 했었고, 이로써 베트남 신문의 최다 지면 소개의 인물이 되기도 했었다.
화산이씨, 한베 다문화 가정의 시조
그는 이번 하노이 정도 천년의 행사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를 고민하다 역사소설 <황숙 이용상>을 베트남어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는 출간 기념행사를 빌어서 가족 모두와 아버님까지 국적을 허락해준 베트남 정부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꼭, 이 땅에 아버님을 모시고 싶다고도 했다.
화산이씨는 현재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오랜 상징이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전 세계의 비엣끼우들, 즉 세계전역의 재외동포들에게 화산이씨의 귀환을 들어 민족 정체성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 귀국을 망설이는 그들에게 760년 만에 찾은 이왕조 후손의 귀화는 곧 민족 정체성에 대한 뼈있는 한 마디기 때문이다. / 이산 기자
화산 이씨는 비(非)중국계 귀화 성씨로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왕인 이태조 이공온(李公蘊)의 7대손이며, 6대 임금 영종 이천조(李天祚·)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1226년 정란을 맞아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을 데리고 바다 너머 표류하다가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하였다. 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이용상에게 그 지역의 땅을 주어 그를 화산군으로 봉하여 정착을 도왔다. 원나라 침입했을 때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화산으로 칭하였다. 현재 36대까지 내려왔으며 총 천여 명이 살고 있다.
화산이씨 왕족의 직계 후손인 이창근씨는 얼마 전 베트남에 귀화하기로 했다. 그는 한국에 살며 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따랐고 그에 대한 근원적 선택의 필요성을 느껴왔다고 한다. 그러다 베트남을 찾았을 때 베트남 정부가 그를 손님이 아닌 같은 국민으로써 내빈 대우로 맞았다. 그는 마치 연어가 옛 강을 찾아 회기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로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베트남 정부에 귀화 신청을 했고 베트남은 그의 뜻을 정중히 받아들여 지난 2009년 10월 5일 정부공문을 발부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1월 5일자에 최종 법안승인을 받게 됨으로써 이씨는 바라던 베트남 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용상 중시조로부터 26대손이며, 태조로부터는 31대손 왕족이다. 그가 오는 5월 중순경 베트남어로 출간되는 <황숙 이용상>의 출판기념회와 더불어 국적취득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소설가 강무학씨에 의해 1966년 출간되었던 <황숙 이용상>은 베트남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이 책은 다문화 시대의 공유물로써 재조명 받게 되었다. 이 책의 출판권은 이창근씨에게 있으며 번역에서 편집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창근씨는 중부 다낭에서 환경사업을 하고 있다. 폐비닐을 수거한 후 리사이클 해서 생활용품으로 재생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폐비닐 재생작업은 하루 3톤가량을 가공하는데 주로 다라나 돼지 먹이 통, 농수로 파이프 등 대략 30여 종의 상품들을 생산한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가족 모두 정체성 찾아
그의 가족은 아내와 딸, 아들을 합해서 모두 네 가족이다. 그 중 딸은 미국 필라델피아대의 베트남어학과 유학 중이고 아들은 하노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요즘 청소년들은 역사의식이 없고 신세대 물결에만 휩쓸려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한다. 바로 이 점을 우려하여 그는 아들에게 중고등학교 과정 모두 현지 로컬 학교를 다니게 했다. 조상의 땅이 베트남이니 이곳에 올곧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들은 이 왕조의 후손으로 조명 받고 자라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고 한국어와 베트남어 또한 모두 능숙하다. 일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동시통역을 맡아 베트남 기자단에 모니터링 하기도 했었다. 이창근씨 자신도 이왕조의 후손으로써 한국에 베트남의 홍보대사 역할을 했었고, 이로써 베트남 신문의 최다 지면 소개의 인물이 되기도 했었다.
화산이씨, 한베 다문화 가정의 시조
그는 이번 하노이 정도 천년의 행사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를 고민하다 역사소설 <황숙 이용상>을 베트남어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는 출간 기념행사를 빌어서 가족 모두와 아버님까지 국적을 허락해준 베트남 정부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꼭, 이 땅에 아버님을 모시고 싶다고도 했다.
화산이씨는 현재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오랜 상징이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전 세계의 비엣끼우들, 즉 세계전역의 재외동포들에게 화산이씨의 귀환을 들어 민족 정체성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 귀국을 망설이는 그들에게 760년 만에 찾은 이왕조 후손의 귀화는 곧 민족 정체성에 대한 뼈있는 한 마디기 때문이다. / 이산 기자
화산 이씨는 비(非)중국계 귀화 성씨로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왕인 이태조 이공온(李公蘊)의 7대손이며, 6대 임금 영종 이천조(李天祚·)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1226년 정란을 맞아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을 데리고 바다 너머 표류하다가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하였다. 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이용상에게 그 지역의 땅을 주어 그를 화산군으로 봉하여 정착을 도왔다. 원나라 침입했을 때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화산으로 칭하였다. 현재 36대까지 내려왔으며 총 천여 명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