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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중심 '광주'를 서사화한다는 것
“영화 - <택시 운전사>”
서울공대지 2017 Autumn No. 106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홍익대 강사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1. ‘광주’라는 문제 제기
<택시운전사>(장훈, 2017)를 두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처참한 살육에 관해 재조명하는 영화라고 설명한다면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영화는 그 시기의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면서도 결코 그 중심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지 않는다. 주인공이 역사적 현장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왜 그런 일이, 그리고 하필 그곳에서, 또 그토록 아무도 모르게 자행되고 있었는지에 관해 상술하지 않는 감독의 의뭉스러움과 마주하게 된다.
이에 대해 황진미 평론가는 “어리둥절한 외부인의 시선 이상의 것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장치로 영화가 내용적 깊이와 서사적 세련됨에서 모두 부족했다고 평한다.
이는 옳은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소시민의 각성이라는 익숙한 전개와 단순한 선악 이분법의 인물 구성, 황태술(유해진 분)의 집에서 벌어지는 시퀀스의 안이한 내용 구성, 종반부의 차량 추격전의 밀도 문제 등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많이 띤다.
특히 장훈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면 영화적 완성도에 대해 더욱 아쉬움을 느낄 듯 하다. 특수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해석적 태도를 드러내는 대신 여전히 그 희생자들에 대한 감상적 표현과 부채 의식에 공명할 것을 주문한다는 점에서 다소 일차원적인 반응을 유도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적인 코드로 평이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가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려내는 방식은 ‘광주(光州)’를 에둘러가면서 광주(廣州)에 이르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세속적 소시민으로서의 만섭
이 영화는 택시 기사와 승객이 광주로 갔다가 서울로 회귀하는 이틀간의 내용을 주된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 만섭(송강호 분)은 아내를 병으로 잃고 11살의 어린 딸 은정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택시 운전사이다. 간신히 개인택시 한 대를 몰면서 살지만 월세가 석 달이나 밀려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어느 날 우연히 기사식당에서 외국인 손님을 태우고 광주를 다녀오면 10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엿듣고 돈을 벌기 위해 그 손님을 가로채기로 한다.
한편, 일본 주재 독일 국영방송의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피터, 토마스 크레취만 분)는 한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전해 듣고 한국으로 들어온다. 군부에 의해 고립된 광주로 향하기 위해 약간의 영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택시를 한 대 빌리는데, 이때 도착한 사람이 만섭이었다. 두 사람은 광주로 향하지만 입구부터 봉쇄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서울로 돌아가려는 만섭과 광주로 들어가려는 힌츠페터는 택시 운임을 놓고 싸우다가 우여곡절 끝에 광주에 진입한다. 그러나 밖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상황이 광주에 펼쳐져 있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만섭은 피터를 버려두고서라도 서울로 돌아오려고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소시민인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을 느끼고 각성하게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성장서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장 이후 그의 삶의 궤적이 각성된 주체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군중 속에 숨은 범속한 생활인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만섭의 첫 번째 각성과정을 살펴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 경쾌한 노래와 함께 어두운 굴다리를 막 빠져 나오는 택시를 부감하여 설정쇼트(establishing shot)로 제시한다. 노란색 셔츠를 입고 <단발머리>를 흥얼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어느새 정면으로 돌아와 만섭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비춘다. 1980년은 막 70년대라는 터널에서 빠져 나온 활기와 정치적인 경색 국면이 양가적으로 공존하던 시기였다. 산업화로 넓어진 교량의 길을 초록색 브리사로 신나게 달리면서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믿음 위에 그는 서 있다. 하지만 데모 대에 의해 도로가 막히기 시작하자 그의 노래 소리도 멈추고, 더불어 초록 택시도 멈추게 된다. 이때 데모 대에서 빠져 나와 경찰을 피하려던 대학생이 실수로 그의 택시의 백미러를 부서뜨린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택시의 손상에 만섭은 차에서 내려서 화를 내지만 학생은 경찰에 쫓겨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영화의 이 첫 번째 시퀀스는 핵심 서사로 진입하기 이전에 깔리는 도입부의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80년대라는 시대를 진입하려는 한 명의 속악한 생활인인 만섭에 대한 영화적 위치 설정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섭은 시국의 분위기나 학생들의 데모 같은 것은 그저 배부른 투정이자 길이나 막히게 하는 걸림돌 정도로만 판단한다. 이러한 만섭의 인식은 니체의 구분대로라면 ‘낙타’와 같은 상태, 즉 거부할 줄 모르는 인식의 미각성 상태이자 노예도덕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전국에서 민주항쟁이 벌어지는 등 사회적 파고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저 생활계에 침잠해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만섭의 소시민적 욕망의 표상인 택시의 백미러를 그가 조소하는 데모대의 학생이 부러뜨리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곧 만섭이 자신을 추동하는 욕망에서 삐끗하게 됨을, 즉 대사회적 각성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 소박한 휴머니티와 직업 윤리
만섭의 의식 변화 과정은 피터와 광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만섭은 중동 붐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5년 간 근로자로 일했고, 그 경제적 기반으로 개인택시를 운전하게 되었음을 피터에게 자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수출’과 ‘애국’이라는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에 충실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피터는 그의 태도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만, 만섭은 이에 아랑곳 않고 신나는 음악을 틀고 ‘10만원’을 벌 요량에 들뜬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황폐화되고 음산한 거리의 분위기에 놀란다. 특히 "희망의 80년대로-"라고 써 있는 플랜카드가 반쯤 떨어져서 나부끼는 장면은 만섭의 소박한 인식이 허상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외지인이자 생활인인 만섭의 의식 변화는 일차적으로 광주에 공명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를 근본적으로 자기 직업윤리에 투철한 자로 위치시킨다. 끝내 만섭은 구체적으로 이 문제가 어떤 방면에서 발생하고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객도 역시 듣지 못한다.) 다만, 만섭을 추동하는 강력한 동기는 인지상정, 즉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마음이자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소박한 휴머니티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속물성만이 가득한 택시 운전사로 보이는 그이지만, 아들을 찾아 거리로 나온 남루한 노파를 차마 외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 지극히 대중적이고도 평범한 서사적 장치가 그것으로 또 익숙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만섭은 태도로서의 소박한 휴머니티와 방법으로서의 직업윤리로 광주를 경유해낸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는 대사는 그 재현의 본질-‘광주’라는 문제의식을 서사적으로 불편하지 않게 관객에게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광주가 여전히 곡해되고 소외화 되고 있는 실제현실의 층위에서 좀 더 많은 대중적–대중 영화적 차원이든/사회적 공론의 차원이든- 공감대를 위해서는 이 이야기를 광주시민과 그들을 곡해하는 자들 외에 제3의 시선으로 읽어낼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객관적 거리 두기의 태도로서 서사적 공감을 우회적으로 성공시키려는 의도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4. 목격자의 다큐멘터리
이 영화는 독일에서 온 백인 남자의 시선(소위 ‘푸른 눈의 목격자’)을 중요한 장치로 사용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광주’가 처음 발화되는 것도 피터의 입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설정은 자칫 서구적 권위의 인정욕망에 기댄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비판 받을 소지가 있는데, 오히려 그 부분이 이 영화에서 특이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서사의 중심축이 택시기사-승객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일반적인 버디무비(buddy films)의 장르적 성격과는 결을 달리한다. 즉 두 인물이 비슷한 캐릭터를 공유하거나 아니면 반대의 성격으로 갈등하다가 결국 화합하는 마무리를 가진 것이 일반적인 버디무비의 특징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만섭과 피터가 갈등하다가 같은 지향점으로 화합하게 되면서도 감정적 공유가 적은 편이다. 피터는 작중 인물로서의 입체성이 거의 표현되지 않아 배우 토마스 크레취 만의 연기적인 이채로움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면 때문에 쉬운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서구의 권위가 광주의 공적에 시혜적인 그늘을 드리우는 것을 제한한다. 대신 철저히 평면화된 인물이자 사태를 외부로 전달할 기자로서만 피터를 기능적으로 소비하고, 대신 그가 찍은 영상이 그를 대신한다. 즉, 광주라는 표상과 군부의 외설성이 외부로 드러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의 그의 다큐멘터리 화면이 피터의 입체성을 대신한다.
만섭과 피터가 광주에 겪는 주 서사가 진행되다가 그가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하면 음향의 변화와 함께 화면은 16mm필름의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바뀌고 마치 보조 서사처럼 기능한다. 중심 서사가 진행되던 현재의 화면에 덧입혀지는 그 조악한 화면들은 실제의 역사와 영화적 장치가 조우하여 효과적으로 표현된 장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5. 관찰에서 체현으로
만섭이 각성에 이르는 두 번째 과정은 관찰자로서 직접 그 폭력 앞에 부당하게 붙잡힐 때이다. 관찰자는 타인의 고통에 절대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폭력 안에 들어갈 때에라야 만이 그의 각성은 현실감을 얻는다. 이는 만섭의 행동을 통해 셰레이드로서 표현된다. 영화에서 현장과 만섭의 거리감 드러내는 장면들이 많다. 만섭은 늘 시위 현장의 화면 왼쪽으로 혹은 위쪽으로 빠져 나와 현장을 지켜보고 공간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을 인지하게 된 이후에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관찰자의 입장인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사복팀장(최귀화 분)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우연히 한 골목에 이르렀을 때 만섭은 벌거벗겨져 입과 손을 결박 당한 채로 트럭에 태워져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 부분은 영화 속에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며 그 표현은 의도적으로 현실감각을 뛰어넘도록 처리된다. 추격전의 극심한 피로와 공포에 질린 만섭이 마치 백일몽을 꾸는 듯 화면은 붉게 처리되고 골목 끝의 사람들의 모습은 도살장 앞에서 울부짖고 있는 돼지들을 연상시킨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들을 바라본 만섭의 놀란 눈의 클로즈업과 공간을 울리는 음향이 이 대중 영화의 한 장면을 매우 특별한 것으로 바꿔버린다.
만섭이 그들을 바라볼 때 환각인 듯 그 장면은 아주 빠르게 지나쳐버리고 여전히 무지몽매한 가운데 상황 판단을 채 하기도 전에 그에게도 폭력이 날아든다. 아무리 서울시 성동구 화양리에 사는 택시운전사 김만섭이라고 외쳐봤자 그 목소리는 짓밟힌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복조장의 논리 회로는 사유 없이 직관적으로 사로잡힌 이념의 고압적 태도를 보여준다. 만섭은 공권력의 이름으로 짓밟힐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재식의 말을 온몸으로 체현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만섭의 클로즈업된 눈이 묶여있는 사람들을 볼 때 관객은 그 시선을 다시 따라가게 되는데 이는 동일시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강력한 정서적 감응력으로 관객에게 호소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비로소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서사적으로 제3자의 시선을 취하고 있는 방식의 미덕을 발견한다. 광주의 고립을 외부에서 지켜보면서 객관적으로 전달할 시선, 그들의 희생을 증명해줄 존재로서의 만섭의 위치는 그런 의미에서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시민적 주체의 잠재력
영화의 종반부에서 만섭은 결국 ‘서울에 두고 온 어린 딸아이’로 설정된 자신의 생활계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는 신화적인 영웅적 주인공도 아니고 민중을 이끄는 선각자도, 모더니즘의 회의하는 지식인 주체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차의 룸밀러에 비친 자욱한 안개로 뒤로하고 광주를 나오는 것은 영화적 개연성에서 자연스럽다. 그가
딸아이를 위한 구두를 사고, 광주의 기억 따위를 툴툴 털어버리고 서울로 향하기 위해 순천의 대로변을 지날 때 언제나처럼 그의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라는 노래가 더 이상 유행가 가사로 즐겁게 불리어 지지 않을 때 그는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그가 광주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었고, 데리고 나와야 할 손님이 그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총에 맞은 사람들을 후송시키기 위해 금남로에 뛰어들 때 우리는 이념과 상관없이 그를 응원하게 된다. 이 영화는 광주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당시의 자료들로 분노를 추동하는 대신 가장 소박한 휴머니티적 공감으로 광주를 바라봐주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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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현재에도 그 잔상이 드리워진 역사적 소재를 영화화하는 한 방식을 보여준다. 역사에 대한 단순한 재현이란 존재하기 어렵고 어떠한 판단이나 의도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다른 영화들-희생자에 집중(장선우, <꽃잎>)하거나 계엄군의 죄의식에 집중한 영화(이창동, <박하사탕>), 가해자에 대한 끝내지 못한 복수를 감행하려는 영화(조근현, <26년>)-이 쌓아올린 레퍼런스에서 그다지 새로운 해석을 해내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자에 따라서는 퇴행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고 지난한 싸움을 통해 다시 환기되고 설명되고 인식되어야 하는 역사적 문제 앞에 이 영화는 낮게 포복하고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살아있으나 껍데기만 남은 시체, 유령 같은 인간인 아우슈비츠의 ‘무젤만(der Muselmann)’처럼 살지 않기 위하여 차를 돌렸던 만섭은 각성된 주체가 되었지만 끝내 공적인 치하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영화 속에서 그는 다시 이름 없는 한 시민으로 택시를 운행하며 광화문 거리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결국 한두 명의 영웅적 인물 대신 범속한 시민적 주체에게 내재되어 있을 잠재력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주가 다시 영화로 호명될 때는 단순한 재현이나 공감적 태도 이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광주를 경유해 돌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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