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밤을 정진 삼매에 들어 있다가 새벽을 맞았다.
참 오랜만이다.
이렇게 기분 좋게 여명을 문지방으로 불러들인 지가....
좌복 위에서 천천히
몸을 풀다가 문득 지리산 토굴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그땐 참 좋았었지.
지금 이 순간처럼
환희로운 마음으로 매일 새벽을 맞이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겁도 없이 그렇게 정진을 했나 싶을 정도다
그러니까 1986년 8월 30일,
사미계를 받고 보름 만에
나는 걸망을 메고 전나무 숲길을 걸어 월정사 일주문을 나섰다.
당시 어느
어른 스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린 마음에 분별심이 가득하여,
저런 사람이
수행자로서의 자격이 있을까 하는 원망과 승단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런 곳에
몸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로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절을 뛰쳐나온 것이다.
그리고 폐인처럼 전국을 정처 없이
만행하다가 가을쯤 하동에 있는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섰다.
만행 다니다가 눈여겨 보아둔 토굴을 찾아간 것이었다
주인을 수소문하고 설득을 해 겨우 허락은 받았지만.
'이 사람 도대체 제정신이야?'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말이 토굴이지 밤을 저장하기 위해 임시로
산 중턱에 만들어둔 허술한 창고였기 때문이었다.
시멘트로 마무리도 하지 않은 블록에 천장도 없이
낡은 슬레이트 몇 장 걸려 있는 구멍이 여기저기 난 지붕,
용도가 창고이다 보니 난방용구들은 없는 것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토굴'이었다.
그 토굴에 걸망을 풀면서 나는 다짐을 했었다.
'그래. 여기서 죽자. 여기가 바로 나의 무덤이다.
한세상 나지 않은 셈 치고 이 자리에서.
생사의 일대사인연과 싸워 결판을 내자' 하는 마음 뿐이었다.
겁도 없이 정말 그랬다.
당시 내가 아는 것이라곤
행자 시절 틈틈이 보아둔 조사 어록 몇 권이 전부였다.
그 내용대로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한소식' 할 것같이 자신만만해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쯤 걸어가야 하는 아랫마을에서
석유곤로 하나와 간장. 된장, 김치. 수저 한 벌. 냄비 하나를 구했다.
드디어 나만의 회상이 생긴 것이었다.
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토굴에서의 첫날 밤을....
제불보살님 전에 죽비로
예불을 올린 후 흙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법계정인을 지으며 화두를 들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시심마 父母未生前 本來面目是甚麽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기 전의 나의 진면목은 과연 무엇인가.
이~ 뭣고!!
가끔 허리를 펴느라 고개를 들면
구멍 난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찬라한 별들이
나의 정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반짝였고,
산천초목이 모두
호법 신장이 되어 나를 호위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성성하게 밤을 지샌 적은 처음이었다.
수행자로서의 기쁨을 그제야 온몸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쌀이 떨어지면 더덕을 캐서 하동장에 나가 팔았고.
된장이 떨어지면 아랫마을에 가서 탁발을 해 왔다.
나중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토굴 밖에 김치나 쌀이 쌓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파출소에서
순경이 뭐 하는 사람이냐며 조사를 하러 온 적도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갔으니,
삭발과 면도는 아예 할 필요도 없었고,
옷도 허름한 광목 한 벌로 버텼으니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일.
그런 꼴을 보고 누가
수상한 사람이라고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그 겁 없고 어설픈 토굴 생활은 채 일 년을 가지 못했다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정진을 한다고 하였으나
이상한 경계만 몇 번 맛 보았을 뿐
도대체 정진에 더 이상의 진척이 없자
어느 날 문득. 내가 과연
바른 수행길을 가고 있기나 한 건지 회의가 들었다.
바로 선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공부를 하여도 경계에 이르러
그것을 점검해줄 스승이 없다면
자칫하면 혼자만의 '한소식'에 갇혀 확철대오는 차치하고
우물 안 개구리를 면치 못함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밤낮을 잊고 미친 듯이 산을 쏘다니던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선실을 박차고 나와 만행길을 나섰다.
이 산하 저 회상의 문전을 기웃거리며 떠돌기를 몇 달.
지친 몸을 이끌고 토굴로 돌아오는
밤 기차 속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운명처럼 어느 노보살님을 만났다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고
행색도
한 벌로 버텨온 광목옷이 겨울 찬 바람을 막아내기도
힘들 만큼 찢어져 형편없는 몰골로 쓰러져 자고 있는
내게 그 보살님이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젊은 스님이 어떡하다 이 꼴이 됐습니까?"
들은 체도 안 하고
잠을 자고 있는 나를 다시 흔들어 깨웠다.
"스님, 괜찮으시다면 말씀 좀 나눠도 될까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무례한가 싶어 눈을 반쯤 뜨고 그 보살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백발이 가득한 그 노보살님을 보는 순간.
'아! 이 보살님은 예사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세를 고쳐 앉아
그 보살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백발에 어울리지 않게 곱게 늙으신
얼굴과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참맑게 사시는 불자 같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내 사정을 애기하니
자기는 젊어서 혼잣몸이 된 이후
인천 용화사 보살 선방에서 지금까지 참선을 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스님들을 지켜봤는데
나처럼 계 받고 얼마되지 않아
섣부른 신심 하나만 믿고 토굴 정진하다가
잘못된 스님들을 몇이나 봤다는 것이었다.
보살이 하는 말이라고 불쾌하게 여기지 말라면서,
지금이라도
큰스님이 계신 대중처소에 가서 도반들과 탁마도 하고
어른 스님들의
경책도 받으면서 기초를 다진 뒤에
토굴 생활을 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넷다.
그랬다.
그 순간 나는
그 보살님이 방황하는
내게 공부길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나타난
인로왕보살처럼 느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보살님이 하신 말씀을
내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답은 벌써 내가 먼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터뜨려줄 시절 인연이 아직 도래하질 않았던 것이다
그길로 나는 토굴로 돌아와 마음을 정리하고 짐을 꾸렸다.
해인사 강원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제대로 다시 시작하자.
이렇게 하여 나의 겁 없고 어설픈.
그러나 내 삶에 있어 가장 치열하게 온몸을 던져
살았던 일 년 반 정도의 지리산 토굴 생활은 끝이 났다.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하도 바람이 많이 불어
움막 이름을
----풍산방'이라 해놓고
젊은 날 목숨을 내어놓고 정진하던 그때가....
그 후
해인사 선방에서 용맹 정진할 때
혜암 방장스님께서 대 중에게 늘 하신 법문이
---"공부하다 죽어라!"였다. 공부하다 죽어라.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좌복 위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처절하게 정진할 수 있는가.
머리에서는
'그야 물론이지' 하며 지령을 내리지만,
과연
가슴 으로 머뭇거림 없이 실천할 수 있는가.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무문관에 들어왔건만
지난 시간들을 점검해볼 때 완전 함량 미달이다.
어쩌다 오늘 새벽처럼
정진 삼매에 잠깐 든 것 가지고
슬며시 기분이 좋아 이렇게 들떠 있으니
아! 언제나 이 업신에 이끌림을
취모검로으로 일도양단하고 무생곡을 부를 수가 있을까
오늘 아침. 모처럼 맑고 기분 좋은 아침을 맞으며
지리산 토굴 시절을 잠시 회상하여보았다
그래. 까짓것 뭐 별거 있겠나.
이 한샘생 안 난 셈 치고 공부하다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수좌가 정진하다가 회복 위에서 죽는 것만큼
값지고 행복하고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 죽자! 공부하다 죽자!
아침공양 후 삭발을 했다.
무문관 들어 두 번째 삭발이다.
수염까지 텁수룩했는데
삭발을 하고 나니 아주 상쾌하다.
머리 상처도깨끗이 나았다.
빨래까지 해서 방에 불을 올려놓고 펴 말렸다.
비는 여전해 내리고 있다.
아마도 영향력이 큰 태풍이 지나가나 보다
무문관 주위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치 큰 폭포수 옆에 있는 듯하다.
해제가. 딱 보름 남았다.
해인사 선방에서는
내일 새벽부터 용맹정진 일주일 하곘구나.
이제 마지막 남은 보름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정진을 해야겠다
오후 들면서 비가 그치고 간간이 햇살도 나왔다.
며칠간의 비였지만
호우로 내렸기 때문에 한여름에 나온 햇살이라도 반갑다.
바깥 기운도 청해지고
나도 오늘은 괜스레 신심이 나서
종일 좌복 위에서 정진 삼매에 들었다.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
8.8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