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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16 대선에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은 노태우 후보에게 졌다. 나, 김대중(DJ)은 27% 득표율에 그쳐 노태우(36%), 김영삼(28%)에 이어 3등을 했다. 언론에서 선거 패배의 원인을 양김(김대중·김영삼)에게 돌렸다.
자기네들의 대권 욕망에 빠져 단일화를 외면하는 바람에 숱한 학생·시민들의 희생과 투쟁으로 힘겹게 얻어낸 절호의 정권 교체 기회를 그르쳤다고 비판했다. 3등을 한 나에게 더 가혹하게 책임을 전가했다. 3등이 2등에게 양보해 양김이 합쳤을 경우의 55%는 노태우의 36%를 쉽게 제칠 수 있었다는 논리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13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은 영부인 김옥숙 여사. 사진 대통령기록관
우리 진영은 심각한 타격과 충격을 받았다. 정치를 하다 보면 재야 출신이 의외로 언론에 민감하다. 그래서 88년 4·26 총선이라는 절박한 대결전을 앞두고 야권 통합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태영 변호사는 나를 만나 땅을 치면서 “이제 다 망했다”고 개탄했고, 문익환 목사는 “김영삼과 합쳐라. 당을 뒤집어 엎어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합당을 촉구했다. 단일 야당이 제대로 되면 나는 당수가 안 돼도 좋다고 기자간담회를 통해 결단했다.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 김대중)과 통일민주당(민주당, 총재 김영삼)·재야의 3자 대통합이 이뤄지면 나는 2선으로 물러나 통합된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
김경진 기자
“김영삼과 합쳐라”
그러나 야권 통합은 무산됐다. 민주당 측에서 흡수 통합 방식을 고집했다. 김영삼(YS) 총재는 “총선에서 선거 혁명을 이룩해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야권은 대동단결, 정통 민주 세력인 민주당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통합 형식은 민주당을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오면 된다”고 사실상 평민당 해체와 투항을 요구했다.
평민당은 국회의원 선거를 하면 결코 민주당에 밀리지 않고,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공정하게 공천을 서로 반반씩 가르자는 조건도 민주당에서 받지 않았다. 대선처럼 총선은 ‘1여 3야’ 4파전, 즉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 대 평민·민주·공화 3분된 야당 세력이 맞붙는 싸움이 됐다.
재야 인사들이 1988년 2월 3일 대거 평화민주당에 입당한 가운데 문동환 목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나는 재야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박영숙·문동환 등 91명이 평민당에 입당했다. 재야 인사들의 제도 정치권 진입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국민적 신망이 있었고, 우리가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됐다.
평민당의 제1 야당 부상
나는 전국구(비례대표) 후보로 나섰지만 상위 1, 2번을 포기하고 11번을 택했다. 평민당은 잘해야 30석 정도 얻을 것이라는 세간의 관측대로라면 나는 국회 진입에 실패할 것이다. 우리 당이 11번까지 전국구를 따내지 못한다면 내가 국회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민정당, 민주당에 이어 제3 정당이었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었다. 열세였지만 대선에서 입증된 국민의 지지를 기대했다. 선거 당시 나는 총재직을 던지고 박영숙 총재 대행 체제였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일선에서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평민당 후보가 나온 지역은 밤잠을 안 자고 어디든 달려갔다.
전국구 11번의 배수진을 치고 ‘김대중 바람’을 일으킨 덕분에 4·26 총선에서 70석을 얻어 민주당(59석), 공화당(35석)을 따돌리고 제1 야당에 올라섰다. 지역구 54석, 전국구 16석을 차지해 나도 당선의 기쁨을 누리게 됐다.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125석 대 174석의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했다.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16년 만에 국회로 복귀한 1988년 5월 30일 13대 국회 개원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 중앙포토
나로선 16년 만에 국회에 다시 입성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피해 일본에 망명하며 국회의원직을 잃었지만 제1 야당 총재로서 되돌아왔다. 16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납치, 투옥, 사형 선고, 가택연금, 대선 낙마 등 수많은 고난과 좌절, 생명의 위협 속에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지만 86년 6월 항쟁으로 독재자를 무릎 꿇게 하고, 직선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앞장섰다.
‘전두환·이순자 구속 처단 본부’ 참여 거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과 5공 청산이 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화는 우리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다. 노태우 후보가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5·18 진상 규명과 5공 청산 문제도 타협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 그랬다. “어떠한 정치 보복도 확고히 반대한다”는 전제 아래 “당시의 실질적 집권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진상 공개와 사죄”를 타협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재야에서 ‘전두환·이순자 구속 처단 운동본부’를 만들었는데 그들의 참여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정치는 원칙과 더불어 현실도 감안해야 한다. 전두환이 자진해 정권을 내놓고 물러서면서 직선제를 수용했다고 보는 국민도 상당수 있었다. ‘처단’이란 보복 모드는 민주화에 역풍을 불러올 수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11월 23일 5공 비리에 책임지겠다며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은둔을 시작했다. 백담사에서 부인 이순자 여사와 법회당에 들어가는 모습. 중앙포토
사람의 처벌보다는 제도와 법률을 통해 민주화를 일궈내야 한다. 그래서 전두환과 신군부의 죄상을 청문회를 통해 밝히고, 국민에게 알리려 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당신이 진정으로 6·29선언을 했고, 민주화를 하겠다면 당신 스스로 모든 것을 정리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5공 청산 정국은 88년 11월 전두환의 백담사 유배에 이어 이듬해인 89년 12월 5공·광주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는 것으로 사실상 매듭지었다.
노태우의 중간평가 족쇄 풀어줘
89년 새해 들어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가 이슈로 떠올랐다. 후보 시절, 당선을 위해 말한 것이 족쇄가 됐다. 여당 민정당 일각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반전시키려는 세력이 중간평가를 지지했다. 반면에 야 3당은 중간평가를 5년 임기 중 적어도 2년은 하고 난 뒤 해야지, 1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국민 여론도 중간평가는 아직 때가 아니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의 YS가 중간평가를 해야 한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왔다. 제1 야당 자리를 빼앗긴 YS는 판을 흔들고 싶었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어느 날 찾아왔다.
(기자): “민주당에서는 중간평가를 해서 노 대통령이 그만두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시키겠다고 합니다.”
(DJ): “그런 상황이 온다면 국민에게 다시 의견을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1989년 3월 18일 경기도당 결성대회가 열린 부천 시민운동장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공약한 중간 평가를 5공 청산 뒤로 연기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나와 YS는 민심을 물어야 했다. 평민당은 경기도 부천에서, 민주당은 충남 온양에서 중간평가를 놓고 각각 장외 집회를 열었다. 청와대는 집회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우리는 시기상조를, 민주당은 강행을 각각 주장했다. 우리 집회에는 시민 1만 명 이상이 모여 우리의 주장에 동조했다. 반면에 민주당 온양 집회에는 1000~2000명에 불과했다.
부천과 온양에서 민심을 본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감을 얻고 중간평가를 안 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론 분열과 사회 혼란 조성 등의 문제점들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중간평가를 거론하는 것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백지화를 선언했다. 중간평가라는 족쇄를 나와 우리 평민당에서 풀어줬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7월 7일 청와대에서 새로운 대북정책인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가 갔다 오라 하지 않았나?”
중간평가 문제가 해소되고 정국이 안정되는가 싶더니 큰 소동이 벌어졌다. 나는 3월 16일 청와대 뒤 올림피아호텔에서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의원 형제를 만났다. 앞서 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 동포의 상호 교류 및 재외 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남북 간 대결 외교 종결 등을 담은 7·7 선언(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했다. 북한 교류와 함께 북한에 방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방북을 허가하겠다는 조치였다.
(문익환): “북한에 갔다 오겠네.”
(DJ):“정부 허가를 받고 가십니까?”
(문익환): “허가는 안 받았는데….”
(DJ):“그렇게 되면 법에 걸리는데 어떻게 하시려고….”
(문익환): “그래도 가겠네. 저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DJ): “목사님, 북한에 갔다 오면 구속됩니다.”
(문익환): “노태우가 갔다 오라 하지 않았나?”
(DJ): “민주화 운동 하는 사람들이 탄압받습니다. 국민 여론도 그렇게 될 거예요. 민주화 운동이 침체 상태로 들어갈 겁니다.”
(문익환): “조금 더 생각해 보겠네.”
1989년 3월 27일 북한 김일성과 밀입북한 문익환 목사가 면담 뒤 손을 맞잡고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구속, 탄압, 침체’를 걱정하는 나의 말을 문 목사는 듣지 않았다. 며칠 뒤인 3월 25일 TV를 보고 있었는데 문 목사가 북한 김일성과 회담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 자격으로 문 목사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초청을 받고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과 만나고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 목사는 실정법을 어긴 불법 행위를 했다.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귀환한 그는 곧바로 구속됐다. 국가보안법상 지령수수, 잠입탈출, 찬양고무 등의 혐의였다. 예상대로 거센 후폭풍이 불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좌경 성향의 반(反)국가단체를 뿌리 뽑는다”며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민련’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재야 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나섰다. 문 목사의 순수한 열정이었지만 이재오·이부영 등 400여 명이 구속되는 등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DJ 정치생명을 끊으려는 공안 정국
공안 정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월 어느 날 김원기 원내총무가 말했다.
(김원기): “이상한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DJ): “무슨 얘기인가?”
(김원기): “우리 당 서경원 의원이 북한에 갔다 왔다고 그럽니다.”
(DJ): “에이, 가기는 뭘 가. 김 총무, 혹시 사전에 그런 말 들은 일 있는가?”
(김원기): “전혀 없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DJ) : “그럼 헛소문이겠지.”
괜한 낭설이라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다급하게 찾아온 김원기 총무의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
(김원기): “오늘 서경원 의원을 만났는데 북한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DJ) “서 의원을 당장 불러 박세직 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 인계하시오. 당도 생각 안 하고, 국민 여론도 생각 안 한 행동이네.”
서경원 평화민주당 의원이 1989년 6월 27일 공안당국에 체포돼 구속 수감되는 장면. 앞선 88년 8월 밀입북한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됐다. 중앙포토
당 지도부와 상의도 없이 방북했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박세직 안기부장은 자진 신고를 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왔다. 그런데 며칠 뒤 박 부장이 물러나고, 서동권 전 검찰총장으로 교체됐다.
공안 당국은 6월 27일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을 터뜨렸다. 서 의원이 1년 전인 88년 8월 북한 여권으로 프라하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타고 19일 평양에 도착, 21일까지 머물면서 김일성과 면담했다는 것이다. 구속된 서 의원은 모진 고문과 함께 나의 연루 여부를 추궁당했다. 검찰과 안기부는 서 의원이 나에게 보고한 뒤 북한에 다녀왔고, 북한에서 받은 돈 중 1만 달러를 나에게 줬다는 허위 사실을 날조했다. 제1 야당 총재인 나를 용공 혐의로 엮어 정치생명을 끊으려는 저열한 수작이었다.
서경원 평화민주당 의원의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기 위해 1989년 8월 2일 서울 중부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 왼쪽부터 김옥두 비서실 차장, 한광옥 의원, 김대중 평민당 총재, 권노갑 의원, 박상천 의원(당시 직함 기준).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나는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심야 조사를 받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서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말했다”가 고작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서 의원으로부터 방북 사실을 미리 보고받아 알고도 당국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不告知罪)로 나를 불구속 기소했다. 그나마 재판에서 서 의원이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 밝힌 뒤 나에 대한 공소는 취소됐다. 이것이 내가 서경원 밀입국에 개입했다는 사건의 실체였다.
문 목사, 서 의원 사건에 이어 한국외대 임수경 학생의 방북 사건까지 겹쳐 89년은 온 나라가 수배와 검거로 점철된 공안 정국에 휩싸였다.
DJ 뺀 그들만의 ‘3당 합당’ 전조
공안 정국을 계기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다시 보며 괘씸하게 여겼다. 내가 중간평가 문제로 난처한 처지에 몰리던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대통령직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기부장을 교체시켜 나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공작을 폈다. 나와 평민당을 거덜내려던 저열한 의도였다고 본다.
1989년 6월 밀입북한 한국외대생 임수경(22)양이 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재야 시민운동 인사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그들은 원칙을 얘기하지만, 정치는 원칙을 지키면서 현실에 입각해 행동해야 한다. 소영웅주의적 생각으로 하면 일을 악화시킨다. 나는 민주화 과정에서 투쟁도 했지만, 과속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공안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민주당과 공화당의 도움은 없었다. 나와 평민당만 당했다. 90년 새해 벽두에 터진 민정당·민주당·공화당 그들만의 ‘3당 합당’의 전조였던 셈이다.
18회〈3당 합당의 전말〉이 이어집니다.
lwk0****2023.07.29 10:41
그러하니 물태우가 나라르망친격이군 ! 전두환 대통령은 감옥에서 일주일을 물한잔 않마시고 단식했다느 ㄴ데 물태우는 들어가자 마자 밥한그릇반찬까지 다비우고 밥좀더달라햇다는것아닌가 ?
좋아요9화나요6
czar****2023.07.29 00:04
김대중이 무슨 슨/상아냐? 고졸홍어가 그짝 동네는 사기만 치다가 더이상 사기칠게 없어서 상고 나온 무시관 샠길 슨/상이라고 가짜 라벨 붙여서 사기친다고라고라. 인간말종 홍어들 지구를 떠나라.
좋아요80화나요30
chan****2023.07.28 11:21
선생님은 못됀다. 김대중 선상님, 선상님. 또 전라도 천년사 쓰네. 죽어서도, 돼져서도 , 선상님.
좋아요67화나요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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