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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SC 37.1)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조건은. 단순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의 사유를 받기 위하여. 무슨 괴로운 일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은총을 받기 위하여 또는. 우리의 죄과를 속하기 위하여 멀고 지리 한 순례나 또는. 고통스러운 고행(苦行)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SC 37.2) 사도는“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고 하였다. 그대들의 죄를 사유(赦宥: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그대들의 죄를 자복[자백하여 복종]하고 또는, 그대들의 잘못을 피차[서로 간]에 자복하라.
만일 그대가 그대의 친구나 이웃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대는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대를 쾌히 사유하여 주는 일은, 그가 할 일이다. 그 다음으로 그대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구할 것이니, 이는 그대가 손해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요, 그대가 그에게 손해를 입힘으로 그의 창조주와 구속자에게 죄를 범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홀로 참되신 중보자 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니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히4:15)고, 또한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같은 사람으로 고통을 함께하셔서, 그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심을) 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온갖 불의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있는 자이시다.(SC 37.3)
자기의 죄를 자복함으로 하나님 앞에 저희 마음을 겸비하게 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첫째 조건도 이행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다시 회개할 것 없는 회개를 경험하지 아니하고, 죄를 미워하는 가운데서 심령의 참된 겸비와 통회(痛悔:진심으로 회개)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였으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죄의 사유를 구한 것이 아니요,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평강을 얻지 못한 자이다. 우리가 과거의 지은 죄의 사유함을 받지 못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겸비하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진리의 말씀에, 응종(應從:진리의 말씀에 순응하여 복종)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까닭이다.
여기에 대한 명백한 교훈이 있다. 죄를 자복[자백하여 복종]하는 일은 공중 앞에서 하거나 사사로이 하거나 충심으로 할 것이요,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죄인에게 자복을 강요할 것이 아니다. 자복은 경솔하게 주의 없이 할 것이 아니니, 죄의 가증함을 실감하지 않은 자들에게 자복을 강요할 것이 아니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자복은,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길을 찾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傷:심령이 가난하고 각종고통에 당)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34:18)라고 하였다.(SC 37.4) 진정한 자복은 언제든지 명백하게 하고 또한, 지은 죄를 꼭 지적하여 자백한다. 죄 가운데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복하여야 할 성질의 죄도 있을 것이고, 또는 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자복하여야 할 허물도 있다.
또 어떤 죄는 공중에 대한 죄이므로, 공중 앞에 자복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자복이든지 그대가 범한 죄를, 꼭 지적해서 명확하고도 요령 있게 해야 한다.(SC 38.1) ‘사무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저들은 죄의 결과로 고통을 받았나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방위(防衛:방어해 지킴)하고 옹호(擁護:편들어 보호)하시는, 그의 권능에 대한 신임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저들은 우주의 크신 통치자를 배반[배척]하고, 저희의 주위에 있는 나라들처럼, 치리(治理:인간의 직접통치)받기를 원하였다. 저들은 평안함을 얻기 전에, 아래와 같은 솔직한 자복을 하였다. “모든 죄에 왕[인간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삼상12:19)하고 저들은 가책[책망]받은, 바로 그 죄를 자복하였다.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그것이 저희 심령을 괴롭게 하고, 저들을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하였다.(SC 38.2) 진정한 회개와 개선(改善:좋게 고쳐 순종)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 받으시는바 되지 못한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나니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불순종]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目前:당장 눈앞)에서 너희 악업(惡業:죄악의 생활)을 버리며, 약행(惡行:악한 길과 행동)을 그치고 선행(善行:선하고 진실한 삶)을 배우며 공의(公義:공정한 진리)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伸寃:원통함을 구하여 해결)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辯護:약한자를 보호)하라”(사1:16,17).
“전당물[저당 잡은 물건]을 도로 주며 억탈물[억지로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律例:율법과 규례)를 준행[철저하게 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충고태도가 간절하여] 살고 죽지 않을지라.”(겔33:15). 사도 ‘바울’은 회개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謹審:믿음의 순종에 대한 걱정)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절실하고 절박]하게 하고 얼마나 변명(辨明:사유의 결과에 대한 설명을)하게 하며, 얼마나 분(憤:원통)하게 하고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고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一切:일체의 모든 것을)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SC 39.1)
죄가 도덕적 지각(知覺:진리의 깨달음)을 둔(鈍:순응하지 않고 고집으로 불손)하게 하는 때에, 그 악행을 행한 자는 자기의 품성의 결점을 분별[선악을 판단]치 못할 뿐 아니라, 그가 범한 죄의 흉악(凶惡:흉포하고 완악하며 참혹)함을 깨닫지도 못하나니, 악행 하는 자가 죄를 깨닫게 하는 성신[성령]의 능력에 복종[깨우침의 인도하심에 굴복]하지 아니하면, 그가 아직도 자기 죄에 눈먼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의 자복은 진정(眞情:양심이 진실)하지 못하고, 간절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기 죄를 자복할 적마다 자기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여사여사[이러저러]한 사정(事情:일의 처지와 형편)이 없었다면 자기는 비난(非難:흠과 결점의 책잡힘)받는 바, 그 일을 아니하였으리라고 한다.(SC 40.1)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먹은 후에 그들은, 수치(羞恥:당황 부끄러운 처지)와 공포(恐怖:불순종의 죄가 주는 막연한 죽음의 두려움)의 느낌으로 가득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저의 죄를 핑계[비겁한 변명을]하여서, 그 무서운 사망선고를 면[모면]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께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물어 보실 때에 ‘아담’의 대답은, 그 범죄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돌리고 또 일부분은 그 아내에게 돌려 말하기를,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였다. 여인은 그 허물[그릇되게 저지른 사정]을 뱀에게 돌려 말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3)하였다.
왜 주님은 뱀을 지으셨나이까? 왜 주님은 그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옴을 허락하셨나이까? 하는 질문이, ‘하와’가 자기 죄를 변명하는 말 가운데 암시(暗示:책임전가 악함내포)되어 있나니, 이리하여 ‘하와’는 저희가 범죄 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자기변명(自己辨明: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움)의 정신은, 거짓말하는 자의 아비[사단마귀]에게서부터 시작되어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나타내었다. 이런 종류의 자복은 성신[성령]의 감동을 받아 된 것이 아니니,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담당하게 하고, 그 죄를 속임이나 외식(外飾:겉치레만의 이중적 모습)없이 자복하게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불쌍한 ‘세리’와 같이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하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예수께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분의 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연고(緣故:거룩하신 사랑과 자비심의 이유)이다.(SC 40.2)
성경 가운데 있는 진정한 회개와 겸비의 실례(實例: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본보기)는, 죄에 대한 핑계나 자기변호가 섞이지 않은, 자복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쓰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 죄를 아주 흉악한 그대로 진술(陳述:거짓 없이 자세하게)하고, 자기 죄과를 경감(輕減:괴변으로 가볍게 절감)시키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可便:찬성)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激忿:격노)하여 외국성(外國省:이웃나라 도시)까지도 가서 핍박(逼迫:심히 괴롭히고 박해)하였”(행26:10,11)다고 하였다. 그는 또 주저(躊躇:머뭇하고 망설이지)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악한 대장이)니라,”(딤전1:15)고 하였다.(SC 41. 1)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바리”에서 지불된, 대가(代價:독생자의 피 흘린 십자가)를 얼마만큼 이해하게 될 것이니, 한 아들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복하는 것처럼 참으로 참회(懺悔: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절실히 회개)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 기록하였으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죄악]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하였다.(SC 41.2)
그리스도의 사유하시는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저희의 품성이 불완전하고 저희의 생애가 결함이 많은 것을 느끼므로, 저희 마음이 과연 성신[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는지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 나는 말하노니, “낙심하여 뒤로 물러가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과실[피조물로써 생명말씀의 불신죄과]로 인하여,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담하지 말자.
비록 우리가 원수에게 실패를 당하였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거나 싫어하는바 되거나 배척당한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中保:구주께서 자신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의 구속함을 이루게)하신다. ‘요한’은 말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중보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16:27)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지 말라. 그는 그대를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순결함과 거룩함이, 그대에게서 반사(反射:그리스도품성 표현)됨을 보시고자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기만 하면 그대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확실히 믿으라. 우리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구주의 능력을 의지하자.
그리하면 “내 얼굴을 돕는”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SC 64.1)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영적 깨우침의 은혜와 사랑)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비교]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단의 미혹[기만 유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성령]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覺醒:진리의 깨달음이)시키고 있는 증거이다.(SC 64.2)
자기의 죄가 흉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의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깊은 사랑이 뿌리박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은, 그의 신성한 품성을 감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의 도덕적 결점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미점(美點:아름답고 거룩한 품성)과 탁월[유일하신 창조주의 위엄으로 만유위에 영원무궁]하심을 보지 못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다.(SC 65.1)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적다고 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 구주의 무한하신 순결과 사랑 가운데서 존중할 만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를 사유하시는 자에게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속절없음[人生無常:因果應報⇨善(永生) 惡(永滅) 자유의지의 選擇自由]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 때에, 그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도움을 요구하는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게로 이끌게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더욱 고상한 관찰을 하게 될 것이고, 그의 형상을 더욱 완전히 반사하게 될 것이다.(SC 65.2)
하나님의 허락[약속]은,“너희가 전심(全心:온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고 하셨다. (SC 43.1) 온 마음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야 하나니,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그 변화가 우리에게서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본래[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성신[성령]은 우리의 형편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진술[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자세히 깨우쳐 주시고 동행]하였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2:1)“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성한 곳이 없”(사1:5,6)다.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인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그에게 사로잡힌 자”(옛 번역)(딤후2:26)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시고, 놓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는 전적변화, 즉 우리 온 성질갱신[성정을 새롭게 하심]이 요구되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SC 43.2) 자신과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이기적인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굴복]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어려운 자아와, 선악의 생명을 건 그리스도 깃발아래 싸울 용기)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은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SC 43.3) 하나님의 정부는 사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맹목적 굴종이나 무리한 제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부는 이지(理智:슬기로운 진리)와 양심에 호소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서로의 주장을 토의]하자”(사 1:18)함은 “조물주”[창조주“]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하신 초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피조물들의 의사를 강제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 마음과 이성적으로 하지 않는 경배는 받으실 수 없다. 다만 억지로 굴종하는 것은 마음과 품성의 진정한 계발을 방해할 것이요, 사람으로 한갓 자동제어기계[로봇기계]가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니다. 그는 그분의 창조력의 극치(極致:지혜와 능력의 정점)인 사람이, 가능한 최고 한도까지 발달하기를 원하시는 최고의 복을 우리 앞에 놓으셨다. 그는 그분의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기를 청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의 속박에서 놓이고 못 놓이게 되는 것은, 우리 선택(選擇:자유의지로 선과 악의, 영생과 영멸결정 중 진리의 말씀신뢰)에 달렸다.(SC 43.4)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에게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은 일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하셨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재물의 신(神:잡귀신)은 많은 사람의 우상(偶像:창조물들 형상)이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저들을 사단에게로 붙들어 매는 금 사슬이다. 명망(名望:인간적 영예욕망)과 세속적 명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이다. 이기적 안락의 생애와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적 속박은,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반은 주의 것이 되고, 반은 세상 것이 될 수 없다.[두 마음 절대불가-영멸심판]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SC 44.1)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 하고 옳은 품성을 닦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자칭(自稱:스스를 그리스도인이라고]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 감동하지 못하고, 다만 저들은 천국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서 이행[선택순종]하려고 한다. 이러한 신앙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실 때에 심령은 그의 사랑과, 그와 함께 교통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져 그가 그리워져서 따를 것이다.
그를 명상(冥想:눈을 감고 마음속 깊이 성찰함)으로 하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모든 행동의 원동력(原動力: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다. 억제할 수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응하기 위하여, 최소한도 얼마를 바쳐야 할지를 묻지 아니하며 또한 가장 낮은 표준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저희의 구속자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나]되기를 바랄 것이다. 저들은 열성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저희가 바라는, 목적물[영생복락]의 가치에 상당한 흥미를 나타낼 것이다.
이러한 깊은 사랑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것은, 한갓 말뿐이요 건조무미(乾燥無味:무미건조)한 형식과 힘든 고역(苦役:고되고 힘든 일)이다.(SC 44.2) 그대들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너무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셨는가?” 스스로 질문[자문자답]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모든 것 - 생명과 사랑과 고난 -을 주셨다. 그런즉 그처럼 큰 사랑을 받을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가, 어찌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바치기를 아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생애[인간 삶]의 순간마다 우리는, 그의 은혜의 축복을 받아온 자이다. 이 까닭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무지한 불행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았는지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찔림을 받은 그를 바라보면서도 그의, 모든 사랑과 희생을 멸시(蔑視:업신여겨 무시)하는 행동을 즐겨 행할 것인가? 영광의 주께서 받으신 한없는 굴욕을 생각할 때에 분투(奮鬪:온몸 다해죽을 결투)와 자아겸비[겸손히 회개]를 함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어찌 원망[억울해]할 것인가?(SC 45.1)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과 축복을 구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고, 기도를 하면서 어찌 용서성[용서하는 성정]이 없는 정신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가납되어 사유함을 받게]되기를 바랄진대, 우리는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자 하는 그와 같은 모양으로, 그와 같은 정도로 남을 [먼저]용서하여야 할 것이다.(SC 97.1)[주기도문 암송]
기도를 꾸준히 [끊임없는 “묵상”으로 “간구”]하는 일은, 응답을 받는 한 조건이 된다. 우리의 믿음과 경험이 자라나기를 원할진대, 우리는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항상 하며”(롬12:12),“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골4:2)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勤愼:삼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라”(벧전4:7)고 권하였다.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가르쳤다.[(살전5:16-18) 봉독]
‘유다’는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성령[성신]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유20, 21)라 하였다.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와서 우리의 생명으로 들어오고 다시, 순결과 거룩함이 우리의 생명에서 하나님께로 흘러 돌아가는 것이다.(SC 97.2)
[우리생활의 필수품인 ‘휴대폰’같이, 일상에서 계속적 교류의 전파를 생각해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함께 반성과 회개의 시간을 공유하시고,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께 간절히 축원하시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