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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
전도서 7:8,9,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시작한 지가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제 나이도 벌써 62세를 넘기고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옛날 나이로 계산하면 며칠이 지나면 64세가 됩니다. 참 나이가 너무나 쉽게 먹어가지요? 제가 신앙 생활을 83년도 4월 마지막 주일에 시작했으니 신앙 생활한 지도 벌써 42년 동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다 보니, 2024년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앞으로 제 일생의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함께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이 살아온 그 인생 여전을 살펴보면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우리의 삶을 재정립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바람이 듭니다.
그러면 먼저,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인생 여정의 후반부를 아름답게 사신 분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멋지게 가꾸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은 나이 65세에 비로소 첫째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그 때부터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삼백 육십 오 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날마다 동행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아예 에녹을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예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에녹은 삶의 일상 속에서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자기 아이를 도저히 기를 수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것이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보호해주심과 양육해주심이 있어야 가능함을 절감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와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큰 아들 므두셀라 말고도 많은 자녀들이 생겼고 일상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생겼지만 에녹은 그 모든 일들을 동행하시는 하나님과 상의하며 맡기면서 하나님과 동역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데려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에녹이 느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많은 책임감이 따릅니다. 인생 길에는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 가기 전날처럼 설레임과 기대와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요 뜻밖의 시련을 겪으면서 인내도 해야 하고, 또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도 따르곤 합니다. 에녹은 그렇게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낄 때 하나님을 자기 삶의 동반자요 조력자요 보호자로 모셔들이고 늘 동행하는 삶의 방식을 택하였고 그 삶의 방식을 고수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남은 인생 길을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굳게 붙들고 의지함으로 주님께 가는 그 날까지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또한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야곱 역시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본래 야곱은 인간적인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난 기질상 질투가 많고 지면 못 배기고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갖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날마다 싸우며 경쟁하였고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는 날에도 형의 힘에 밀려 둘째로 태어나는 것이 억울하니까 형의 발뒷꿈치를 꼭 붙잡고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이 장남으로서 집안에서 늘 대접받고 아버지 사랑을 받는 것에 질투가 나서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는 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로부터 맹세로써 장자권을 넘겨받는 잔꾀를 쓰기도 하였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형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렇게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많고 인간적인 잔꾀에 능한 야곱은 형으로부터 분노를 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를 죽이려 드는 형을 피하여 외갓집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 도망치는 중에 벧엘 땅에서 돌로 베개를 삼고 노숙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시면서 야곱은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속에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이 되사 그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자, 야곱은 그 약속을 그대로 믿고 그 때부터 하나님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고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야곱의 성품과 기질이 하루 아침에 바뀐 것은 아닙니다. 외갓집에서 자기보다 훨씬 욕심 많고 잔꾀가 밝고 속임수에 능한 외삼촌 라반에게 20년 동안 양을 치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온갖 고생과 속임을 당합니다. 그는 외삼촌의 딸들과 결혼하면서 자녀를 낳으면서 야곱은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그에게 아내가 본의 아니게 네 명이나 생기고 자녀는 남자만 열둘이요 딸도 하나 생기면서 부양해야 할 사람이 늘었습니다. 종들도 많아지고 양떼들도 늘어서 관리해야 할 재산도 늘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외갓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자, 야곱은 도망치듯 외갓집에서 떠나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얍복강에 이르자 형 에서가 무장한 종들 4백 명을 거느리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왔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야곱은 얍복 강변에서 홀로 밤중에 남아 고민하는 중에 그에게 덤벼든 남자와 밤새 생사를 건 씨름을 벌입니다. 그런데 씨름하는 중에 자기가 상대하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는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자기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축복하면서 그 이름을 불명예스러운 야곱 대신에 승리자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 이후에도 야곱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럴수록 야곱은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고향으로 가는 길에서 떠나보내고 그 얼마 후에는 열한째 아들 요셉을 또 잃어버리는 마음고생도 하였습니다. 그 때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 알았지만 사실은 요셉이 형들의 질투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세월이 흘러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대기근을 만나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찾아온 형들을 만나는데, 형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그 둘째 형 시므온을 볼모로 취하고 형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막내아들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의 형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양식을 건네준 후에 이르기를 애굽의 국무총리가 둘째 시므온을 붙잡고 있고 그가 막내 동생 베냐민도 데려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합니다. 그 말을 듣자 야곱은 또 다른 아들들도 잃어버리는 불운을 염려하면서 절대로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결국 기근이 심해져서 양식을 또 구해야 할 때에 베냐민을 그들 손에 딸려 보내면서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세기 43:14,15)
이 고백 속에는 야곱이 그 동안 자기 마음의 애정과 야망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살았지만 도저히 자기 손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성상 욕심이 많고 잔꾀가 많아서 늘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살아왔던 야곱은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길에 자기이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점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게 된 결과 야곱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다시 만나게 되고 그의 가족들 모두가 애굽의 고센 땅에서 평안히 살게 되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되니 큰 민족을 이루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돌아와 한 민족, 한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는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처음 70년 기간은 욕심과 기질을 따라 살았다면 그 후 77년 동안은 점점 깎아지고 닳아지고 깨뜨려져서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영안이 밝아지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숙해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기질과 성품과 지혜롭지 못한 판단 때문에 우리 삶에 많은 고난과 역경과 실패가 점철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이 된 후에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점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서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다 맡기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 눈이 점점 밝아지고 우리의 삶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지고, 상처가 영광의 흔적으로 바뀌어지고, 하나님께서 내가 바라고 꿈꾸고 추구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영광스럽고 더 영원한 축복으로 덧입혀주시는 후년의 삶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야곱은 현대인들의 초상과 같은 기질의 소유자입니다. 이 시대의 야곱들인 우리도 야곱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드립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굴곡이 지독히 많았던 야곱의 후년의 인생 길을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빚어가신 것처럼 우리의 앞날도 그렇게 복되게 빚어가실 줄 믿습니다.
또한 사무엘 선지자는 어린 시절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으로 어린 시절에 성전에 바쳐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서 일찍 떠나 하나님의 성막에서 심부름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자고 깨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어린 사무엘은 그를 훈련시키는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소년 시절부터 친히 불러서 그에게 선지자의 사역을 맡겨 일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무엘은 소년 시절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쓰임받기 시작하여 블레셋 국가로부터 늘 괴롭힘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의 불충과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군대에 뺏기는 영적 암흑기 동안 사무엘은 꿋꿋히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은 점점 변질되어 여러 죄에다가 한 가지 더 인간의 왕을 세우려고 하는 악을 더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영적 인도함에 불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이방 나라들처럼 자기들도 왕을 가지고 군대를 가지고 정식으로 정부 관료를 가지고 이방 나라와 견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임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는 사사 제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인간의 세력을 더 의지하는 불신앙적인 요구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주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베냐민 지파의 사울 왕을 세우면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자리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 공식적인 은퇴식 때에 길갈이라는 곳에 모든 백성들을 불러 놓고 신임 왕인 사울도 함께 오게 한 후에 백성들 앞에서 사무엘은 은퇴사를 하면서 그 은퇴사 맨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며 마무리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사무엘상 12:23~25)
그리고 사무엘은 그의 은퇴 후 그의 약속대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며 선하고 의로운 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약속을 지킵니다. 그랬더니 사울 왕이 나의 40살에 왕이 되어 처음에는 좀 잘하는 듯 싶더니 결국 이기적이고 불순종하면서 나라가 점점 흔들리는 그 때에 사무엘이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블레셋이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감히 이스라엘을 강하게 침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중보 기도가 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막아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가 은퇴 후에 살던 그의 고향 마을 라마 나욧 동네는 얼마나 성령의 감동이 강했는지, 사람들이 사무엘의 동네 라마 나욧에만 들어가기만 하면 포악한 군인들도 순한 양이 되고 귀신 들렸던 사울 왕마저도 다윗을 체포하려고 라마 나욧 동네에 피한 다윗을 잡으려고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영에 취해서 하루 내내 누워서 예언을 하면서 지낼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이 얼마나 은퇴 후에도 기도했던지 그 동네 전체가 성령의 구름 기둥, 불 기둥이 덮여서 그곳에 발을 딛는 자들마다 성령에 사로잡혀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이 세상을 떠나자 악한 왕 사울마저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면서 무당들을 내쫓고 죽이는 영적 개혁 운동을 잠시 펼칠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소년 시절부터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온통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씀으로 사는 충성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과 같은 이웃의 악한 나라가 사무엘의 생전에는 이스라엘을 감히 침범해 들어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도 앞으로 사무엘처럼 현직에서 은퇴하여 일선에 아니한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사역에 도리어 더 집중하도록 합시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자녀들을 위하여 더욱 뜨겁게 기도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더 집중적으로 읽지 못하였던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믿음의 선현들이 연구한 성경의 진리들을 더 광범위하고 자세히 읽고 배우면서 남은 생애를 진리를 배우는 일에 힘쓰고 또 이것들을 자기의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전하며 가르치며 살아갑시다. 그리할 때에 사무엘의 노년의 그 아름다운 삶을 인하여 나라가 보호를 받고 그의 동네 라마 나욧이 성령의 성지가 되어 사람들이 들며 나며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나라와 교회와 가정의 모든 자녀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늘 충만하고 우리와 접촉하는 이들마다 다들 성령의 감화 감동의 역사가 나타나는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앞서 언급한 분들 외에도 여러 훌륭한 분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사역의 중반기에 영적 침체를 겪었지만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고 그의 사역의 후반부를 다시 멋지게 살다가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불의 사자 엘리야도 그러합니다. 엘리야도 잠시 침체를 겪었지만 하나님께 다시금 만지심을 경험하고 다시 용기를 얻어 끝까지 충성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 역시 스승 엘리야가 불말과 불병거 타고 가고 하늘로 올라가던 중에 하늘에서 떨어진 엘리사의 겉옷을 발견하고 그것을 입고 선지자의 사역을 이어 행하였는데, 엘리사 역시 하나님께 가는 그 날까지 충성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성령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은 그가 죽어 돌무덤에 묻혀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죽어 장례 나가던 중에 갑자기 모압의 도적떼들이 쳐들어옴으로 정해진 무덤에 그 시체를 묻지 못한 채 임시로 가까운 곳에 있던 엘리사의 묘실에다가 들어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게 되자 그 죽었던 사람이 곧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노년까지 뼈속까지 성령의 감동이 있었고 죽어 살이 썩고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 뼈에 성령의 역사가 남아서 그 뼈를 닿자 죽은 자까지 살리는 기적이 일어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사도 스승 엘리야처럼 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하나님이 부르실 그 날까지 유지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 선지자도 조국 유다 왕국이 이미 망하여 먼 타향 바벨론에 끌려왔다가 운 좋게 궁중 생활을 하는 특권을 누렸지만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에게 절하거나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학문의 지혜와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주셔서 바벨론 시대에 나라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와 바사 왕국이 들어섰을 때에도 나라의 국무총리를 계속하였던 큰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한 시기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으며, 아무리 높은 관직에 올랐어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적자들이 다니엘을 참소하여 국무총리의 자리에서 다니엘을 끌어내리려고 삼십 일 동안에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넣는다는 조서를 만들어 왕의 어인을 찍어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어인이 조서에 찍힌 것을 알고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예전부터 하던 대로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대적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고발하여 다니엘은 결국 사자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들을 다 막아버렸기 때문에 사자들이 다니엘을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하였으니, 그 다음 날 다니엘의 생명을 염려한 왕이 아침 일찍이 찾아와 사자굴에서 사무엘을 부르니, 사무엘이 살아서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다니엘을 끌어올리니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왕이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와서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넣게 하니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그렇게 충성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많은 영적 환상을 보여주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많이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다니엘 12:13)
다니엘은 그 생전에 수많은 왕들이 관직에 올랐다가 사라지고 나라마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기까지 하였고, 항상 궁중에서 많은 신하들의 권모술수와 왕들의 변덕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그를 끌어내리려는 음모들이 난무하는 중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를 그치지 않았기에 이처럼 극히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그의 말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직에서 은퇴 후에 비로소 그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 중에 하나님께 평안히 돌아가는 임종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기도하며 충성한 자가 누리는 평온한 임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노년이 되었을 때에 목에 칼이 들어오고 사자굴에 던져진다 해도 하나님 앞에 정한 시간 기도를 계속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렇듯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의 생애 속에 점점 생애가 무르익어갈수록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기도하면서 그 영혼이 아름답게 빚어져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잠깐씩 살펴본 에녹, 야곱,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외에도 다윗, 바울, 베드로 등의 아름다운 신앙 여정의 마지막이 참 아름다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를 남기고 불꽃처럼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간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 영국의 청교도들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일본의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순교를 무릅쓰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주기철, 최권능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18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 죠지 휘트필드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나는 녹 슬어서 없어지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고 싶다”
우리 신앙인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월이 무르익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신앙의 본질을 붙들기보다는 일상적인 생활에 익숙해져가면서 신앙의 생명력이 약화될 위험에 노출되곤 합니다. 하루 하루 맞이하는 시간들을 영원에 잇대어 살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교제하며 시간을 소모적으로 소비하면서 살기가 쉽습니다. 세상적인 여러 불안 요소들을 보면서 근심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근심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내면의 영혼은 점점 연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루어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3:16~18)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14)
그렇게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사명을 붙들고 뒤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던 사도 바울은 그의 나이 65세 정도에 다시 체포되어 로마 감옥에 갇혀 순교를 당하기 직전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6~8)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을 푯대로 삼아 그의 인생 여로의 길을 늘 달음질하면서 끝까지 완주하였던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아직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앞에 있는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달음질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그의 나의 65세에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주님 앞에 마침내 그렇게 후회없이 남김없이 다 자신을 불태우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인생의 시작점이 언제였고 어디에서였든지 간에 우리의 종착지는 모두 동일하니 곧 만유의 재판장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심판대인 것입니다. 그 날에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무엇을 얼마나 풍성히 누렸는가, 어떠한 지위에 올랐는가보다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재판장이신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상의 삶 동안에 얼마나 충실하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선하게 살았는가를 그의 저울에 놓고 달아 보실 것입니다. 또 주어진 사명, 맡겨진 의무를 얼마나 묵묵히 충실하게 감당했는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베풀어주신 진리의 계시의 빛을 얼마나 사랑하였으며, 그 교훈과 가르침을 얼마나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자 애썼는가를 달아보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복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것들을 또한 어떻게 베풀고 나누며 살았는지도 달아보실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여로에서 겪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주님을 본받아 인내하며 묵묵히 그 시련을 받아들이고 모욕과 멸시를 묵묵히 감내했는지를 달아보실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계속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고자 하나님 앞에서 엎드렸는지도 달아보실 것입니다. 또한 사죄와 영생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자로서 이 복된 소식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얼마나 안타까움을 가지고 전도하려고 애썼는지도 주님께서 달아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의 마지막 호흡을 내쉬고 우리의 심장이 멈출 때 일어날 일입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마지막도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끝이 나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시험과 고생이 많은 이 지상의 순례의 길은 결국은 한 여정의 끝으로 귀결됩니다. 그 끝 뒤에 우리는 다 생명의 주 되신 주님 앞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을 잘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의 지나온 삶보다 이제 남은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 한번 방향 정립을 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 말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보다 우리 인생의 끝과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타고난 기질과 체질과 삶의 경험 속에 깊게 새겨진 실패의 상처들이 많이 있어서 주님을 따라가고 닮아가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힘이 많이 들지만, 우리가 앞서 가신 믿음의 선배들의 행로를 본받아 최선을 다할진대 지금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좀 더 거룩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순종하며 겸손해지며 믿음과 인내의 삶을 살며 가진 것을 나누며 진리를 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적인 갈망이 더욱 깊어지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주님을 점점 더 사랑하다가 이 여정의 끝에서 사랑하는 주님께 올라가서 그와 더불어 평안히 쉬고 주님이 예비하신 몫을 다 받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