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불러내셨을까
창세기 12:1~9
찬 379장(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370장(주 안에 있는 나에게)
오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매우 먼 거리입니다. 그 거리는 수천 km의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오는 과정에는 수많은 지리적 장애물도 많고 험하기도 하고 강도들과 같은 위험 요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약속을 주시고 그 먼 곳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옮기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셈 족속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원주민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다면 아브라함을 먼 거리에서 오게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 동방 땅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셈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채 벌거벗고 자는 중에 아들 함이 그 아들 가나안과 더불어 와서 노아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나가서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으로 방에 들어와 아버지를 조용히 덮어주었습니다. 그 때 깨어난 노아가 그 일을 알고 이렇게 예언적 축복과 저주를 내렸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예언을 보면 하나님은 셈의 장막을 축복하셨고 셈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나갈 때에 가나안 족속에서 약속의 일꾼을 찾지 아니하시고 셈의 후손 중에서 자기의 종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셈의 족속이 살고 있는 동방 땅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불러내셨고, 저주를 받은 가나안의 족속들이 살던 그 땅은 약속의 자손에게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그 땅으로 오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처럼 셈 족속 아브라함을 먼 곳에서 불러내 가나안 땅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분인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으로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멀리 떠나서 세상 문화에서 멀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는 매우 발전된 도시 문명을 누리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온갖 우상 숭배와 잡신 숭배들이 있었고 세상의 타락한 문화가 번성했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 데라까지도 다른 신들을 섬기는 가운데 있었노라고 여호수아 24:2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계속 머물러 있다면 주변의 세속문화와 타락한 종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계속 간직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깊은 신앙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 친척 아버지 집에서 떠나 아주 먼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내셨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를 정들었던 사람들과 환경에서 끌어내어 전혀 낯선 땅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멀리 불러내신 것입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게 하시고 천성의 본향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하시고 정들고 의지할 만한 친척들마저 다 떠나보내고 그를 홀로 가나안 땅에 올리운 것은 그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로 하여금 세상에서 오직 의지할 자, 도움을 받을 자가 하나님 한 분뿐이게 하기 위함으로 그렇게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만을 홀로 외로운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롯도 함께 따라왔지만 얼마 있다가 섭리 속에 헤어지게 하심도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지만 늘 떠돌이 생활하다시피했고 그는 죽을때에 오직 그의 아내 사라가 묻힌 헤스본의 막겔라 굴과 그 밭인 가족 묘지 외에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이로써 약속으로서 그 가나안 땅 전체를 그 후손의 기업으로 받을 것을 믿었지만, 그 자신은 그러한 세상의 땅을 차지할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나그네로서 살면서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땅에서는 그는 한평생 나그네와 행인으로서 지냈지만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며 떠나지 아니할 진정한 본향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있기를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소망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은 모든 신자들 우리들까지 포함하여 저 하늘에 쇠하지 않는 본향을 예비해놓으셨다고 히브리서 11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가나안 사람을 부르지 않고 저 멀리 있는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기에 아브라함은 신앙의 본질인 나그네 의식을 갖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결국 이 지상의 순례 길 저 끝에 영원한 하늘 본향을 있음을 바라보고 지상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한 신앙의 나그네요 순례자로서 이 땅에 살다가 저 하늘 본향에 들어서 진정한 안식을 누려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텃세를 당하고 쫓겨다니는 것처럼 불안정하더라도 아브라함처럼 늘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화와 소망을 갖고 살아갑시다.
넷째로, 가나안 땅이 유일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참 종교를 전파하는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라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시아 3개 대륙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발점으로서 최적인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륙의 학문과 물품과 사람들이 오고가는 그 역사의 중심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땅에 기업을 삼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이것을 증언할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다가 마침내 온 인류의 구주 예수님이 그곳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온전한 구속의 사건이 이루어진 후에 가장 빠르게 단시일에 걸쳐 그 구속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하여 일세기만에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까지, 저 동으로는 인도까지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세기 정도에는 영국까지 전파될 정도로 유럽 깊숙이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것은 바로 가나안 땅이 가진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적 지리적 통일된 체제와 맞물려 가나안 땅의 지리적 이점이 세계 복음화의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여러 이유로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실수가 없으시고, 그 모든 일에는 지극히 복된 섭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도 실수가 없고 우리 발걸음에도 하나님의 섭리적 뜻이 다 있습니다. 함께가는교회를 여기에 세우시고 우리 각 사람을 이 교회에 불러주신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날마다 성령 안에서 감사하며 순종하며 순례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낯선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나그네로 정처 없이 지냈지만, 그는 믿음의 아버지로 연단받았고 그 후손들은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귀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불러내어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남은 생애 세상에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감사함과 겸손함으로 순례길을 걸어갈 때 동행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하나, 한걸음씩 인도하시어 주님의 뜻을 다 이루고 하늘 본향에서 길이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인생의 참 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