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마음이란 곧 무심(無心)을 뜻한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다. 마음이 주가 되어 모든 일을 시키나니, 우리는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행복이 뒤따르리라.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붓다가 말하는 '순수한 마음'은 곧 '무심(無心)'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이것을 명심하라.
붓다 같은 사람의 말을 옮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노릇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붓다 같은 사람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한다. 그는 일반적 의미을 지닌 일상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일상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전달하려 하기 때문이다.
붓다의 경험에 대해 언급할 때 일상 언어는 전혀 무의미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대는 이 문제점을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붓다가 전혀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낮선 언어는 아무 의미도 없는 횡설수설처럼 들릴 것이다.
그것이 '지버리쉬(Gibberish)'라는 단어가 생겨난 이유이다.
이 단어는 자바르(Jabar:이슬람 신비주의자)라는 수피(Sufi)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혀 새로운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상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중국말을 들어 보라. 그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에게 있어서 중국어는 말도 안 되는 난센스(non-sense)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이러할진대, 붓다가 새 언어를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사정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오직 붓다 만이 제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붓다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처한 문제점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일상 언어를 쓴다면 그의 경험을 전달할 수 없다.
반면에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다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그 중간 지점에서 매우 고심해야 한다. 그들은 그대의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에 그들의 색깔과 맛을 부여할 것이다.
병은 그대의 것이지만 그 안에 들은 술은 그들의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병이 그대의 것이기 때문에 술 또한 그대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그대는 계속 술병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가끔씩 술을 마시고 취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붓다 같은 사람들의 말을 옮기기 어려운 이유이다. 붓다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우회적인 의미을 부여했다.
그래서 붓다 주변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언어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