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또 말썽입니다.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 이사를 가는 건 순전히 인터넷 탓입니다. PC방을 가려고 나왔는데 왜 나가면 고프지 않던 배가 고플까요? 스테이크+토마토 파스타+카스를 시켜 놓고 에스더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자는지 공사를 치는 중인지 공음만 울립니다. '스더롱'에 들어가 블로그 글들을 읽었어요. 만화 삽화를 언제 배웠을까요? 부러워요. 엄마에겐 철학을, 아빠에겐 드로잉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글을 읽고 제발 그렇게 하시라고 답했어요. 대체적으로 글이 많이 부드러워진 느낌을 받았지만 철학적 사유가 여전히 어렵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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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도망' 글을 더 좋아합니다. 학원 로고(수랩)를 낙관으로 사용할 때 청색 바탕이 너무 강렬해서 작품을 침해하는 것 같아 '양각'으로 글씨만 나오게 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비 말뜻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아비에게 대는 건지 요지부동입니다. 자식도 다 품 안의 자식이지 아비 말을 잘 듣지 않아요. 병동 일지는 쓰고 있겠지요? 서대문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본격적으로 수렴청정에 들어간 흔적을 발췌했습니다. 예주가 경희대 실기 시험 치는 학생들 인솔하러 왔다고 했어요. 허걱. 격세지감이 든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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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 소묘로 사실적인 인상을 유지 하면서 이목구비를(혹은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 조금씩 강조하기. 언제나 그렇지만 예주 쌤의 최대 장점은 비래감이다. 그림의 부분에 집중하는 듯 하지만 절대 한 곳에 매몰되지 않는다. 무엇을 그리던 전체적으로 큰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알람이 울리듯 전체를 점검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내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무리하곤 한다. 이런 노력은 형태와 완성도에서 어김없이 드러난다. 이 사람이 그림을 대하는 태도다. 연필로 할 수 있는 가장 어른스러운 마음 아닐까. 곧고 담담한 선은 덤(에)" "오우 엑설런트! 작품도, 심사 평도 베리 긋!(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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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욱 하는 승질 죽이시라!
같은 분노라고 해도 켜와 결이 같지는 않습니다. 부아를 돋우는 언동에 발끈하는 개인적인 것도 있고, 가랑비에 옷 젖듯 누적된 불만에서 비롯된 집단적 노여움도 있을 것입니다. 격렬한 공화 혁명을 겪은 프랑스에서는 ‘르상띠망(ressentiment)’이란 말이 쓰입니다. 분노·적의를 뜻하는 영어의 ‘resentment’와 비슷하지만, 담긴 뜻이 더 다채롭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르상티망은 불안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패배주의적 분노라고도 하고, 아등바등 늘 제자리 걸음 하기도 벅찬 삶의 허무함에 대한 억압적인 각성이라고고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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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반복하다가 '르상띠망'이란 단어가 새롭게 확 다가왔어요. 니체 형님은 좌절된 욕구에 대한 원인을 타자에게 찾아요. 다들 아시는 것처럼 타인을 원망하거나 바꾸려는 감정을 '원한'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르상띠망이란 단어는 '파괴적인 의지를 가지면' 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파괴적인 의지'가 아닌 '생성의 의지' 혹은 창조의 의지'를 가지고 타인을 바꾸려는 것은 '역능 (puissance; force)입니다. 단어 하나에 이렇듯 심오한 뜻을 함유케 한다는 차원에서 한자 못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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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좌절/분노)+부정(함께 죽자)=원한(르쌍띠망)
부정+긍정(세상은 원래 그런거야)=허무주의(nihilism)
긍정(모순적 삶 사랑)+긍정(아모르파티)=생성/창조/초인(Übermensch)
니체 철학의 핵심은 르상띠망 넘어 위버멘쉬(Übermensch) 가 아닐까요?
2024.7.19.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