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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지내다보면 슬픈 소식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묻기도 합니다. 왜?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기는 답을 알고 싶어도 알지 아니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인생이란 자체가 답이 없이 사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답은 다 끝내고 가서 알게 되겠지요. 서두르지 말고 묵묵히 걸으면 됩니다. 답답하겠지요. 원래 인생이 답답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앞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지 않았습니까? 물론 답을 알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냥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이라고 하지요. 그야 좀 다른 사람들입니다. 범접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저 닮아보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전쟁도 끝날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끝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을 더 쌓아야 하겠습니까?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욕심 조금만 버리면 됩니다. 물론 자존심까지 덧붙여있으니 그만큼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에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책상 앞에 있는 우두머리들이야 자기 머리 붙어있으니 걱정도 안하겠지만 당하는 것은 힘 없는 국민이지요. 국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존재들, 세상 어디든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나라를 지키는 것은 바로 그 국민들이지요. 높으신 양반들이야 도망갈 곳이라도 있겠지만 힘 없는 국민은 있는 자리를 떠나면 갈 곳이 없으니 말입니다. 거참!!
2월도 반이 지났습니다. 희망은 점점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다시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납니다. 담주를 위해 즐겁게 주말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
2025년 2월 15일 김종우 목사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 2 : 13 - 14)
<말할 수 없는 비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숨겨져있던 악보를 꺼내서 피아노 건반을 부드럽게 달립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고 잠시 후 한 학생이 연습실로 들어섭니다. 그가 피아노 밑에 발이 보이는 것을 이상히 보며 몸을 굽힙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렇게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즘 언어로 ‘썸’을 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직 그만한 나이가 아니었는지, 아니면 갓 20대가 된 젊은이의 순진함이 서려있어서인지 두 사람의 연애는 간질간질하다시피 진전됩니다. 그냥 바라보며 그리고 마주하며 눈으로 하는 연애입니다. 헤어지며 연락처를 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핸드폰이 없답니다.
요즘 세대에 핸드폰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의아해하는 ‘유준’에게 응대합니다. 꼭 있어야 하나요? 하기야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지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편함도 없습니다. 그냥 없이 살았던 때를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래, 수업 시간에 만날 수 있고 학교에서 보면 되니까, 그런 식으로 물러섭니다. 그렇게 만나서 걷기도 하고 이야기하며 지냅니다. 때로는 음악 이야기, 슬쩍 가족 이야기도 나오지만 깊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 그리고 가벼운 만남, 크게 무리하지 않는 대화와 만남이 이어집니다. 때로는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합니다. 집 근처에서는 집과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헤어집니다. 엄마가 걱정할까봐?
그렇게 정아와 만나고 있지만 유준에게는 전부터 가까이 하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보다 활달한 성품의 ‘인희’는 정아의 차분함과는 대조적입니다. 인희에게는 유준이 이미 정해진 짝처럼 보입니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꺼’ 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유준이 다른 데 눈을 주는 것 같아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기야 그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요. 인희의 눈에는 어쩌면 유준이 혼자 바쁜 척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 사이는 탈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희가 유준에게 키스를 합니다. 그 순간 찾아온 정아가 그 장면을 봅니다. 그리고는 유준과 눈이 마주치고 뒤돌아 뛰어 도망갑니다. 놀란 유준이 쫓아갑니다.
사라진 정아를 찾으려 발버둥칩니다. 보아두었던 정아의 집에 편지를 꽂아둡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잘못 찾아왔다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왔습니다. 찾아갑니다. 그리고 정아의 어머니로부터 비밀을 듣습니다. 20년 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20년 전의 사람이었다고요? 유준이 정아와 지나온 과정을 돌아봅니다. 가만생각해보니 이상한 점들이 드러납니다. 정아가 자기 눈에만 보인 것입니다. 그랬구나 싶지요. 인희가 자기 행동에 아무런 이상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납니다. 상식적으로 그럴 수가 없는 일이지요. 비로소 그 동안의 정아의 비밀스러운 언행들이 하나하나 짝이 맞추어집니다.
이제 정아를 찾아야 합니다. 피아노 건반 바닥 밑에 껴있던 악보 ‘비밀’이 열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아가 미래 세계에 왔다가 지기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종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즈음 연습실 건물이 재건축에 돌입하느라 철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정아가 바로 그 시간 피아노를 치며 돌아가야 했는데 건물이 무너지면서 시간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유준이 부랴부랴 건물 철거 작업을 하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가며 연습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보았던 악보를 기억하며 피아노 건반을 부지런히 두드립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 후의 장면은 두 사람이 헤드셋을 두르고 함께 음악을 듣습니다.
이제 단순 연애 이야기는 식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색다른 요소들을 가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기야 우리네 삶이 다양한 사건사고 속에서 이어지며 연애도 그런 다양한 삶 속에서 생겨납니다. 때문에 각사람의 연애 이야기가 모두 흥미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기발해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게 되고 벌이도 됩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 중에 ‘시간’은 늘 도달 불가능의 숙제입니다.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시간을 뛰어넘고 싶어합니다. 이야기 속에서라도 해결을 찾으려 합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속에 사랑 이야기를 가미한다면 새로운 맛이고 멋입니다.
한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비싼 피아노를 건물 안에 두고 건물을 철거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나요? 처분하고 무너뜨려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가 원작이 따로 있다고 했는데 원작에도 그렇게 나오는가요? 그렇다 치고 경험들 하셨겠지만 연애할 때는 환경도 예쁜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보는 즐거움이 있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다 경험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연령대별로 연애 감정도 다를 것이라 짐작합니다. 20대 초반의 풋풋한 사랑이 그리워지고 삼삼하게 추억해보는 즐거움 또한 가집니다. 한편 김칫국물부터 먹은 인희가 가엾기도 합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Secret: Untold Melody)을 보았습니다.
준비됐나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을 3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천국복음을 전파하셨고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당부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마 10 : 5 - 6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누구에게로 가라 하십니까? 이스라엘 집 곧 하나님 백성 유대인들에게 가서 사역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막연히 사람들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백성에게 오셔서 사역하신 것입니다. 하다 보니 그 이웃 지방까지 가실 때도 있었지만 사역의 중심지는 바로 유대 땅입니다. 그렇지요? 하신 일이 전도와 교육과 치료 사역이었는데 그 중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교육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까? 자기 딴에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아는 지식입니까? 이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해야 합니다.
여태 듣고 배워서 아는 대로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없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렘 14 : 8 - 9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상상이 됩니까? 구원자로 오셨는데 구원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여라 하면 사람들이 모이겠습니까? 내 말 좀 들어봐라 한들 들어주겠습니까? 그러니 어쩝니까? 일단 사람들이 모여야 전도를 하든 말씀을 가르치든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치료사역을 하신 겁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고 문둥병자가 깨끗이 낫는 역사가 나타나니 사람들이 모이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지요. 뭐 하시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려고 그러신 겁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 모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복음을 듣고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단순히 호기심으로 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캐보려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데 뭐라고 하십니까? 죄 사함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랬더니 대뜸 반발을 삽니다. 가보겠습니다. 막 2 : 5 - 7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아니 중풍병을 고치는데 죄와 무슨 상관이 있지요? 아무튼 이 말씀에 대뜸 성경을 안다 하는 서기관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뭔데 죄를 사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목적하신 바가 있는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으려 할까요? 그런 역사를 보여주었음에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줄 수 있습니까?
천국, 곧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는 누가 들어가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들 곧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만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집에 동네방네 사람들이 다 들락날락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버지 집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 들락거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비밀번호를 장치했다고 하였습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이 비밀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번호가 무엇으로 되어 있답니까? 비유로. 그러니 이 비유를 알지 못하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여태 무조건 믿기만 하면 다 끝나는 줄 알고 신앙했습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하나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그럴지라도 비밀번호 모르면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갑니다. 실제로 내 집이지만 나도 내 집 비밀번호를 모르면 들어갈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부수고 들어가렵니까? 물어봐야지요. 알아내서 누르고 들어가야 합니다.
모르면 어떻게 한다고요? 물어봐야 합니다. 누구에게 물어봅니까? 이웃집에 물어봅니까? 경비실에 물어볼까요? 그 사람들이 우리집 비밀번호를 압니까? 알 리가 없습니다. 누가 압니까? 그야 우리 가족이 알지요.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문제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가르쳐준다고 해도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어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한 마디로 가족이라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니 자기 가족도 몰라봅니까? 치매 걸렸습니까? 맞습니다. 영혼이 병들었으니 알아볼 수 없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혔으니 더 이상 하나님 가족이 아닙니다.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어야 합니까?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마귀의 가족이 되었으니 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알려줘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땅을 마귀의 손에서 회복하시고자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초장부터 말썽이 생겼습니다. 잘 아는 대로 아담이 언약을 깨고 마귀와 손을 잡은 것이지요.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신 후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십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창조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보내 그곳에서 번성하게 하시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신 놀라운 약속이지요. 그들은 세상을 다스릴 하나님의 선민이요 성민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약속인지 보겠습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 놀라운 약속을 하신 것입니까?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시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 땅에서 누가 수행해야 한다고요? 바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역사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보내십니다. 죄에서 구속하시고, 마귀에게서 건져내시고, 하나님나라 전초기지를 세우시고 마귀와 싸워서 물리치고 온전히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처음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창 1 : 27 -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생육, 번성, 충만해서 정복하고 다스려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마귀에게 붙은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에게 그 사명을 인계하셨습니다. 지도자를 세우고 백성을 맡기셨습니다. 물론 하나님 백성이라 하지만 모두 아담의 후예가 되어 죄에 묶여있었습니다. 그 백성을 건져내어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땅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땅입니다. 마귀에게서 도로 찾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인생들이 더 중요합니다.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하나님 백성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간 점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니 오히려 그 사자를 쫓아냅니다. 더 많이 보냅니다. 다 쫓아내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말이 됩니까? 안 되겠다 싶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이제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그들의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마 21 : 33 - 39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이 농부들이 하나님 편이겠습니까, 마귀의 편이겠습니까? 자기네는 누구에게 세를 받았습니까? 그러니 누구 소속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소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는 짓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합니까, 악합니까? 하나님이 가만두시겠습니까? 문제는 이 문제를 알고 있다, 모르고 있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만듣고 보니 누구 이야기입니까?
물론 처음에는 자기네 이야기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어보지요. 자, 주인이 온다면 이런 농부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자기들이 대답합니다. 그렇지요? 보겠습니다. 마 21 : 40 - 41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그러니 이 때는 이 이야기가 자기네 이야기인 줄 알았겠다, 몰랐겠다? 몰랐다는 말입니다. 참 웃기지요? 언제 깨닫습니까?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4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옵니까? 시 118 : 22 - 23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그렇습니다. 여기 건축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무엇을 건축하려는 겁니까?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기고 가장 귀한 돌을 주었더니 어떻게 했다고요? 내다 버렸습니다. 자기들 살려주려고 주신 건데 그게 버릴 겁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무엇으로 삼으셨다고요? 머릿돌입니다. 머릿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건물 앞에 뭐가 있는지 보시면 압니다.
하나님이 일하라고 맡긴 농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주셨는데?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잖아요. 그런데 내다 버렸습니다. 하나님 백성 만들라고 일 시켰더니 딴 짓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이게 결론입니다. 43절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제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이게 바로 우리 얘기로구나, 하는 것이지요. 깨닫고 나니 화가 납니다. 그러나 어쩌지 못합니다. 왜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백성들 때문입니다. 45 - 46절 읽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보는 눈들이 많아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야 백 번 죽이고 싶지요. 그러나 꾹 참고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슨 때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를 기다리는 것이고 예수님은 백성을 구원하실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얼마나 다릅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때가 서로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군데 빠진 부분을 읽겠습니다. 44절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 돌’이라고 하셨는데 이 돌이 무슨 돌입니까? 바로 앞의‘건축자들의 버린 돌’입니다. 그런데 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지요? 앞의 이야기에서 주인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이 전체적인 이야기는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비슷한 비유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사 5 :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여기서도 포도원이 나옵니다. 이 포도원이 무엇입니까? 7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포도원이 무엇이라고요? 이스라엘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뭐 하시겠다고요?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려는 사역을 이루시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합니까, 못합니까? 하나님 뜻과 계획대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최종적으로 그 아들까지 메시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맞이하기는커녕 오히려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니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네 입으로 말했습니다. 진멸하라고 말입니다. 알고 보니 그 진멸을 당해야 할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네입니다. 그렇게 알고 보니 더 화가 나지요. 아니 이게 여태 우리보고 죽으라는 이야기를 했잖아? 그렇지요? 웃깁니다. 자기 스스로 진멸당할 것을 자기네 입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자기 하는 말이 스스로 올무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하면 안 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제대로 깨닫고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진멸당하고 망하는 자들은 당시 로마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망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가장 신앙생활 잘한다고 찰떡 같이 믿고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네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그 당시를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 오실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그 주인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누가 건축자들입니까? 그 돌을 누가 버립니까? 잘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오십니다. 뭐 하려고 오시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다시 오신다고 생각하며 신앙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죽인다’고 하잖아요. 똑바로 알지 아니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단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주 재림 때는 심판하려 오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심판하려 하시는 겁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려고 오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누가 망합니까?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망합니다. 다시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야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심판받고 망하는 겁니까? 하나님 백성입니다. 재림 때 하나님 백성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어디서 심판을 시작한다고 말씀합니까? 벧전 4 :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 곧 교회에서 시작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초림 때 유대인들이 버림당한 것도 이유는 하나,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은 믿음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누가요? 하나님 백성이.
중요한 일은 바로 언약을 바르게 알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 언약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만 가지고 있음에도 몰라서, 아니면 잘못 알아서 못지킨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다면 마찬가지가 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래서 당신 백성이 알기를 그렇게도 원하셨습니다.(호 4 : 6, 6 : 6, 요 17 : 3) 우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그리고 다음, 그 때를 따른 양식이 무엇인지 알아서 찾아먹어야 합니다. 마 24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분변하고 있습니까? 주님 다시 오시는 날짜는 몰라도 징후는 알려주셨습니다.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는 마지막 나팔이 불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5 : 51) 들립니까? 아직 안 들립니까?
자 이제 질문해봅니다. 준비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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