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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장마』
출처-<민음사>
6.25 전쟁 73주년, 정전 70년
출처-<국가보훈부>
비극을 넘어 끔찍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1950년 6월 25일, 우리 삶의 터전인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 공식 명칭 ‘한국전쟁’이다. 단일 혈통에 단일 언어를 쓰는 한민족 사이의 전쟁에서 300만 명에서 6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는 대략 3,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10-20%가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보다 더 높은 비율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은 전쟁이다.
사상자도 엄청났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굉장한 피해가 있었는데, 사실상 이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은 한국인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한국은 정말 너무했어. 많은 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갔으니.”
(Korea was really bad. A lot of people died for nothing)
-한국전 참전 용사, 스탠 레빈(Stan Levin)-
관련 기사 링크 한국전 참전용사들, 그들은 왜 평화를 외칠까?
승자 없는 전쟁이었다. 남북한 모두 통일에 실패한 채 1953년 ‘종전’이 아닌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은 남의 이승만과 북의 김일성에게 자신의 정적과 반대파를 숙청할 명분을 제공했으며, 남한의 경우는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군사 독재 권력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징병제’가 실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냉전의 마지막 상징인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를 이루는 것은 세계사적 의의에 해당하며, 한민족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민족사적 과업이지만, 통일은 고사하고 ‘휴전’을 ‘정전’으로 매듭짓는 것조차 못한 채 70년이 흘렀다. 한때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종전’의 희망에 들뜨기도 했으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남북의 긴장과 갈등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6.25 전쟁 73주년을 맞이했다.
국군 소위 외삼촌과 빨치산 삼촌
출처-<KBS>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였다. 길고 음산한 장마가 한창이었고 밤마다 난리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개들이 극성맞게 짖어대는 날들이 이어질 때였다. 서울 사는 외할머니네가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고, 두 집안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말수가 적었다. 우리 집에서 외할머니는 그저 완두를 까고 또 깔 뿐이었다. 외할머니가 완두 줄거리를 치마폭에 잔뜩 꾸리고 앉아서 꼬투리를 뚝 떼어내고 속을 우비면 연둣빛 얼룩이 진 길쯤한 자실이 한 옆으로 비져나왔다. 외할머니는 몸에 익은 손놀림으로 완두꼬투리를 후벼서 자실은 대바구니에, 그리고 빈 깍지는 치마폭 안에 정확히 갈라놓았다.
그러나 외삼촌에 대해서 말할 때만큼은 달랐다. 외삼촌 이야기만 시작되면 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외할머니 말에 의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외삼촌은 멋쟁이였다. 하얀 얼굴에 오뚝한 콧날과 짙은 눈썹을 가졌으며 축구를 잘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 시합만 끝나면 ‘호말만한 츠녀’들이 떼를 지어 외삼촌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단정한 용모나 말씨에서 풍기는 섬세한 감각과 교양은 얼핏 여성적인 면이고, 무한한 기력을 배경으로 한 민첩한 동작과 차가운 결단은 과시 사내 중의 사내였다.」
네 외삼촌이 그렇게 멋져부렀어~
외할머니가 외삼촌에 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할 때는 내 머릿속에서 축구복을 입은 외삼촌이 한 마리 준마처럼 종횡으로 치달았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자랑이자, 이 난리 속에서도 꼿꼿하게 외할머니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외할머니에게 난리란 외삼촌이 육군 소위로 전투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되지 않았다. 외삼촌이 살아서 돌아오면, 외할머니의 난리는 끝나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이름 ‘건지산’. 건지산은 언제 보아도 의젓한 모습이었다. 지리산 자락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건지산은 낮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세모꼴의 머리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때때로 건지산에서 불길과 연기가 갑자기 솟아올랐다. 그러면 꼭 읍내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어른들은 시가전이 벌어졌다고 말하거나 어떤 동네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건지산에는 나의 (친)삼촌, 그러니까 외삼촌보다 세 살 많은 나의 (친)삼촌이 들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삼촌을 ‘빨치산’이라고 했다. 언제나 어린애 같던 삼촌, 난리가 나기 전에는 밀주나 밀도살을 심하게 단속해서 마을의 원성을 산 사람을 붙잡아다 혼을 내줘서 유명해진 삼촌, 나의 삼촌이 그 산에 있었다.
외할머니의 꿈과 외삼촌의 전사
어느 날 밤, 잠시 꺼끔해지는 빗소리를 대신해서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짬을 메울 때, 온 식구들이 외할머니가 거처하는 건넌방에 모였다. 개들이 점점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이가 거의 다 빠져서 합죽해진 입두덩을 끊임없이 달싹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외할머니는 지겹도록 꿈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있었다.
「“내 말이 틀리능가 봐라. 인제 쪼매만 있으면 모다 알게 될 것이다. 어디 내 말이 맞능가 틀리능가 봐라.”」
위아래를 통틀어 일곱 개밖에 남지 않은 이빨인데, 난데없이 무쇠로 만든 커다란 족집게가 입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기중 실하게 붙어 있던 이빨 하나를 우지끈 젖뜨려 놓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이모의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외할머니는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듯이 중얼대기만 했다. 모두가 그 중얼거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갑자기 개들이 일제히 짖어댈 때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아버지를 찾아온 구장의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는 중얼거림을 반복하고 있었다. 구장이 가고 나서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이모의 만류에도 그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아버지는 외할머니 앞에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앉아서 젖은 종이쪽을 만지작거렸다. 구장이 주고 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쥐어짜 내듯이 온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외할머니는 아무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강마른 두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 진작서부텀 이럴 종 알고 있었응게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
그러자 어머니의 울음이 별안간 절정에 이르러 방 안이 온통 뼛속까지 갉는 듯한 아픈 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구장이 가져온 것은 외삼촌의 전사 통지서였다.
외삼촌....
외할머니의 저주와 할머니의 분노
외삼촌의 전사 통지서를 받은 이튿날, 그날 오후도 장대 같은 벼락불이 건지산 날망으로 푹푹 꽂히는 험한 날씨였다. 마루 끝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별안간 무서운 저주의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빨치산이 득실거린다는 건지산에 대한 저주였다.
「“더 쏟아져라! 어서 한 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에 숨은 뿔갱이마자 다 씰어가그라! 나뭇틈새기에 엎딘 뿔갱이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러라! 한 번 더, 한 번 더, 옳지! 하늘님 고오맙습니다!”」
할머니가 분노했다. ‘뿔갱이’라는 말은 삼촌이 인민군을 따라 어디론지 쫓겨가 버리고 난 후부터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지금까지 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는 비교적 괜찮았다. 외삼촌과 이모를 공부시키겠다고 서울로 떠난 외할머니네가 어느 날 피난 보퉁이를 들고 나타났을 때, 사랑채를 비우라고 하며 같이 살자고 먼저 말한 것도 할머니였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저주 이후 두 할머니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버렸다.
「“우리 순철이는 끈덕도 없다, 끈덕도 없어. 무신 일이 생겨야만 쇡이 시연헐 티지만 순철이 갸는 쏘내기 새도 요리조리 뚫고 댕길 아여.”」
할머니는 외할머니의 저주 앞에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타박하며 삼촌의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당당히 드러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외할머니는 ‘드럽고 챙피시러서’ 우리 집을 나가겠다고 악을 써댔다. 당황해하며 그런 외할머니를 말리는 아버지에게 할머니는 ‘니 동상 어서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예펜네’와 너까지 한통속이 되었나며 차라리 자신이 나가겠다며 아버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먹구름에 덮인 건지산 날망으로 연거푸 시퍼런 벼락이 꽂히고 있었다. 전에는 거의 매일 밤 볼 수 있던 봉홧불이 장마가 시작되며부터는 숫제 자취를 감추었다. 이따금 건지산 쪽에 눈을 주면서 마루 끝에 앉아 있는 외할머니의 뒷모습은 너무도 허전해 보였다.」
두 할머니가 단단히 한판 벌인 뒤로 외할머니는 말이 없어졌다. 벼락불이 쳐도 외할머니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완두를 까는 것만이 죽는 날까지 자기가 맡은 유일한 일이라는 듯 끊임없이 손을 놀릴 뿐이었다.
소경 점쟁이의 예언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어쩌다 한나절씩 선심 쓰듯 빗발이 그치긴 했으나 찌무룩한 상태는 여전했다. 낮게 뜬 철회색 구름은 갑자기 악의에 찬 빗줄기를 시도 때도 없이 주룩주룩 흘리곤 했다. 토방이고 방바닥이고 사방 어디라도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그저 찌르기만 하면 선명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읍내에서는 야음을 틈탄 또 한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우리 동네까지 콩 볶듯 어둠을 두드리는 총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동생네의 안부가 걱정되어 새벽같이 읍내에 다녀왔다는 동네 사람 하나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습격은 빨치산들이 되레 혼꾸멍이 나는 것으로 끝났으며, 많은 숫자의 빨치산 시체들이 경찰서 뒤뜰에 전시되어 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그리고 연고자가 나타나면 시체를 인도해 준다더라는 말까지 전했다. 어린 나조차도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행장을 차리고 빗속을 향해 걸어갔다. 읍내로 가는 것이었다. 삼촌의 시체가 있다면 찾아와 장례라도 치러줘야 할 테니 말이다.
놀라운 것은 할머니의 태도였다. 동네 사람이 눈치 없게도 할머니까지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지만 할머니는 가소롭다는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할머니의 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용하디 용하다는 소경 점쟁이 덕분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하루 날을 받아 쌀말이나 머리에 얹고 고모가 말해 준 소경 점쟁이를 찾아 나섰다. 소경 점쟁이는 할머니에게 놀라운 신탁을 전했다. 그것은 ‘아무 날 아무 시’에 삼촌이 성한 몸으로 집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무 날 아무 시’는 며칠 뒤였다. 읍내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삼촌의 시체는 없었다는 말을 하자, 할머니는 기고만장했으며 소경 점쟁이의 예언은 할머니에게 더욱 벅찬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거 봐! 엄니 말이 맞지? 우리 아들은 살아서 온다니께
「결국 우리 식구들은 하나같이 어떤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에 싸여 예배의식의 한 절차처럼 서로 ‘아무 날 아무 시’란 주문을 나직이 외어가며 불사신 우리 삼촌의 무사귀환을 신심 깊게 확인하기를 끝없이 되풀이했고......」
‘그날’ 나타난 것
장맛비는 계속되었고 ‘아무 날 아무 시’, 그날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등쌀에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할머니는 우선 어머니를 시켜 장롱 속에서 꺼낸 비장의 옷감으로 한복을 마르게 했고 삼촌이 전에 즐겨 먹었다는 호박전을 터무니없이 많이 장만하도록 했다. 그리고 손수 고사리나물을 무쳤으며 상하기 쉬운 음식은 소금에 절이고 콩기름으로 튀겨 단단히 갈무리했다. 할머니의 걱정은 단지 장맛비에 잠겨버린 징검다리였다.
「“야가 틀림없이 읍내 쪽으서 올 챔인디, 강이 저 모냥이니 야단이다, 야단!”
“어머님은 별 걱정도 다 허시우. 강물이 좀 짚다고 틀림없이 올 아가 못 오겄소? 장마철이면 질이 잘 맥힌다는 걸 저도 알 티닝게 석교다리로 돌아서라도 때가 되면 어련히 오겄지요.”」
할머니는 온 집안에 장명등을 내달아 환히 밝혔다. 저녁밥만 먹고 나면 집집마다 불을 꺼버리는 마을에서 우리 집만이 환하게 밤을 밝히고 있었다. 이제 고모와 외할머니까지도 할머니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아무 날 아무 시’에 삼촌이 무사 귀환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완전히 집안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 날 아무 시, 그날 아침이 되었다. 밤새 장명등이 꺼진 것에 분노한 할머니는 방문을 꽝 닫고 들어앉았고, 이모와 고모까지 모두 동원되어 장마로 어지럽혀진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했다.
하늘은 흐렸지만,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 집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고 완전히 잔칫집처럼 되었다. 진시가 지나 열 시가 다 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흩어져 갔다. 오직 할머니만이 곧 나타날 삼촌과 모자 겸상을 하겠다며 아침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집 개 ‘워리’가 갑자기 대문 쪽을 향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의 함성이 들렸고 수저질을 하던 아버지의 손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나는 숟가락을 아무 데나 팽개치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 눈에는 손에 돌멩이 아니면 나뭇개비 같은 것들을 든 조무래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꿈틀꿈틀 기어오는 기다란 것이 거기에 있었다. 눈어림으로만도 사람 키보다 훨씬 큰 한 마리의 구렁이였다.」
구렁이였다. 나는 어린애의 본능으로 잽싸게 헛간으로 달려가 지게 작대기를 양손으로 힘껏 거머쥐었다. 그리고 구렁이가 내 쪽으로 가까이 오기만 하면 단매에 요절을 낼 요량으로 작대기를 쥔 양 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억센 힘으로 내 팔을 움켜잡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손이었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마치 헌 옷가지가 구겨져 흘러내리듯 그렇게 마루 위로 고꾸라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목격했다.」
어느 틈엔가 방을 나와 구렁이를 본 할머니가 쓰러졌다. 삽시에 우리 집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어머니!!!
두 할머니가 맞잡은 손
이 모든 북새 속에서도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은 사람은 외할머니 혼자였다. 외할머니는 놀라우리만큼 침착한 태도로 사태를 진정시켰다. 외할머니는 서릿발 같은 호통으로 구렁이에게 돌을 던지는 조무래기들을 내쫓고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구렁이는 어느새 마당 감나무 올라앉아 있었다. 누런 몸뚱이를 둘둘 감고서 철사처럼 가늘고 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구렁이의 꼬리는 무엇에 얻어맞았는지 거지 반동강이 날 정도로 상해 있었다. 외할머니는 두 손을 천천히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하며 구렁이에게 다가갔다.
「“에구 이 사람아, 집안 일이 못 잊어서 이렇게 먼 질을 찾어왔능가?”」
외할머니는 꼭 산 사람을 대하듯 위를 올려다보면서 조용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나 구렁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할머니는 안방에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뻣뻣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고모가 인사불성이 된 할머니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겨 내렸다. 내 손에는 빗질로 얻어 낸 한 줌의 흰 머리카락이 쥐어졌다. 외할머니는 호박전과 고사리나물이 놓인 도래소반 위에 불씨가 담긴 그릇을 놓고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태웠다.
「“내가 자네를 쫓을라고 이러는 건 아니네. 그것만은 자네도 알어야 되네. 냄새가 나드라도 너무 섭섭타 생각 말고, 집안일일랑 아모 걱정 말고 머언 걸음 부데 펜안히 가소.”」
꿈쩍도 하지 않던 구렁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렁이는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구렁이가 꿈틀꿈틀 기어 외할머니 앞으로 다가오자, 외할머니는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길을 터 주었다. 구렁이는 누런 비늘가죽을 번들번들 뒤틀면서 땅바닥을 기었다. 어느덧 구렁이는 우물 곁을 거쳐 넓은 뒤란을 통과해 숲이 우거진 대밭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할머니가 처음 뱉은 말은 “갔냐?”였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말은 외할머니에게 “고맙소.”라고 말한 것이었다. 정기가 꺼진 우묵한 눈으로 외할머니를 보며 할머니는 목이 꽉 메인듯했다. 외할머니가 할머니를 위로했다.
「“고맙소, 참말로 고맙구랴.”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외할머니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은 채 두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까무러친 할머니는 꼬박 일주일을 더 버티다 눈을 감았다. 안에 있는 아들보다 밖에 있는 아들을 언제나 더 생각했던 할머니에게, 식구들을 들볶아 대면서 삼촌을 기다리던 그 짤막한 기간은 사실, 꺼지기 전 확 타오르는 촛불의 찬란함과 맞먹는,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에 넘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분단 현실과 무관한 인생은 없다
1945년, 독일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우리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냉전이 찾아왔습니다. 갓 식민지 상태를 벗어난 가난한 신생 독립국은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야 했으며, 그 결과는 분단으로, 그리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지났습니다. 6, 70대들에게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들은 전쟁의 상처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겠지만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그 기억들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분단은 점점 고착화되어 가며 통일의 당위성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통일 비용을 걱정하며 그냥 이대로 남 따로 북 따로 사는 것이 옳다는 말도 자주 들립니다.
2019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중 8명은 통일보다 경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남북한이 한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는 항목에 대해서는 절반이 넘는 56%가 동의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통일을 위해서라면 조금 못살아도 된다’에 동의한 의견은 17%에 불과하지만, 반대 의견은 53%에 달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쭉 가다가는 한반도의 영원한 분단은 기정사실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사회이다 보니 ‘민족 통일’ 같은 대의명분보다는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의 반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연역법으로 친다면 옳지 못한 대전제로부터 도출한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개인 각자의 삶과 분단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단이라는 현실과 무관한 개인의 인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93년 노태우 정부가 끝날 때까지, 이 땅에 단 한 번도 민주 정부가 제대로 들어서지 못했고 군사 독재 정권이 권좌를 차지해 국민들을 지배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드높은 수준의 교육열과 근면성을 가진 국민들의 나라에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분단과 군사적 대립이라는 현실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경험과 휴전 중이라는 현실 속에서 ‘남침의 위협’은 대단히 훌륭한 프로파간다(propaganda)였습니다. 개인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경제 발전과 그 열매의 공정한 분배는 민주주의라는 사회 운영 원리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남북의 대립을 이용해 자유, 민주,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탄압하고 빨갱이로 몰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 그리고 국민들의 잠재의식 속에 ‘레드 컴플렉스’를 심어 놓는 것. 이것이 독재 정권의 탄생과 유지 비법이며, 그 잔재물들이 오늘과 같은 현실을 또다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기득권들이 절대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이유이며 남북 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거나 더 고조시키려는 이유입니다.
....우크라이나를 보세요. 평화 없는 번영은 결단코 없습니다.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 그것이 곧 내 삶의 질을 올려주는 것입니다. 삼성의 반도체 수출 따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말입니다.
“통일이 가져올 평화의 지분은 매우 클 것입니다. 분단 상태의 한국은 해양권도 대륙권도 아닌 반도의 남쪽에 처해 있어 지정학·지경학적으로 어렵게 살아왔어요. 그러나 통일을 하면 대륙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량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는 매우 크다고 봅니다. 남북의 경제교류협력을 활성화하면 인구가 1억 명 가까이 되는 엄청난 시장 규모가 됩니다. 수출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내수 시장중심으로 규모의 경제를 형성할 수도 있겠고요. 남과 북 사이에 경제적 상호 보완성은 매우 큽니다. 여기에 중국의 동북 3성과 러시아 극동지역이 경제적으로 연결되면서 한국경제의 새로운 블루오션이 등장할 것입니다.”
- ‘평화의 길, 통일의 꿈’, ‘문정인 편’ 中 -
6.25전쟁은 내전입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대부분의 나라들이 모두 내전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용서하는 것은 사과 없는 가해자이며 외부 세력인 일본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평화와 번영이라는 같은 배를 타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북한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단이라는 현실이 내 인생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는 이상 분단과 무관한 인생은 없습니다.
출처-<연합뉴스>
마흔일곱 번째 인생탐구는 6.25 전쟁 발발 73주년을 맞아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잃은 두 어머니, 육군 소위 어머니와 빨치산의 어머니가 맞잡은 화해의 손에 대해 소개해드렸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추신) 소설 '장마' 속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장마의 저자 윤흥길 작가 집안과 윤흥길 작가 친구 집안 이야기를 섞어서 각색했다고 한다. 밑의 영상은 소설 '장마'에 대한 윤흥길 작가의 인터뷰 영상이다.
/ 딴지일보 인빅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