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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법문
불성광명[佛性光明] - 청화 스님[無住淸華]
선근인연
2009. 1. 8. 7:02
불성광명[佛性光明] - 청화 스님[淸華]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여래如來자리, 또는 부처님자리, 이 자리는 하나의 빛입니다.
그 빛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
얼마 안가서 계절이 바뀌게 됩니다. 아직은 바람결이 쌀쌀하지만 봄 그리고 여름이 오고 이내 다시 가을이 오고하는 이것은 누가 막으려야 막을 수도 없을 뿐더러,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宇宙 섭리攝理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참선參禪공부도 그와 같이 가장 쉽습니다.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한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生命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법法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가장 경비經費도 들지 않는 공부입니다.
그렇게 가장 쉬운 것이 어려운 한문漢文 문화권文化圈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最上의 보배 마니보주[摩尼寶珠],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란 말입니다. ㅁ 騎말탈 기 覓 찾을 멱
우리 중생과 도인道人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現象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 성품本性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 성품을 못보고 겉의 현상만 봅니다. 우리는 우선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과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參禪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본 성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本來 성품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듯 그와 똑 같습니다.
우리 중생은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어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가는 죽어서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본성품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故鄕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여래如來라고도 합니다. 여래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꼭 진리眞理 그대로의 성품을 보고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가고 같을 여如, 바로 진여眞如라! 진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그대로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생각할 때는 진리는 고정 불변한 어떤 교리敎理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모든 생명을 다 감싸고 있는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의본체宇宙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과거過去도 없고, 현재現在도 없고, 미래未來도 없고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 만능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력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자原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미흡하나마 우리는 지식知識으로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물리학적物理學的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역시 확실한 가르침은 못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불확정不確定성의 원리原理가 있지 않습니까. 전자電子라는 것도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모습을 바꾼단 말입니다.
다라서 중생衆生들이 볼 수 없고 전자현미경電子顯微鏡보다 더 미세한 기계를 이용해 유추할 수 있는 미시적微視的인 단계에서는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런 한 원자력의 위대한 힘을 우리가 편리하게 이용해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원자력 저쪽 세계는 광명光明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다 방사능放射能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을 위시해서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생물학적生物學的인 술어로 말하면 광합성光合成, 즉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식물도 태양광선太陽光線이 안 들어가서 된 것이 없습니다. 물질의 가장 미세한 저편 세계가 하나의 방사능 같은 방사放射 광명光明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합성되는 광합성光合成이라는 말 이전에 사실은 모두가 다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參禪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을 뚜렷이 설정을 해야만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맞은 수행修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어지고 또 거기에 계합契合된, 걸맞은 공부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 이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人格的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태양광선太陽光線과 같은 가시적可視的인 광명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원자 속에 들어있는 기운氣運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만 하더라도 굉장히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힘을 내지 않습니까?
하물며 원자력原子力보다도 더 순수한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광명이 부처님 광명인데 거기에는 무한無限의 환희광명歡喜光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광명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신비로운 힘을 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하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하였습니다.
그곳까지는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부처님 기도를 조금 모셨지만 부사의不思議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버리는 원리原理는 오염汚染된 생명이 차근차근 정화淨化되어 광명세계光明世界로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 생명生命인 광명 자체는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적現象的으로 잘나고 못나고 또는 학문적으로 지식이 많고 적음은 마음의 본바탕을 닦아서 가는 생명의 본질인 광명을 향해서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도 상관이 없고 또 과거에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앙굴리마라’는 나중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해서 도인이 되었지마는 그전에는 바라문교婆羅門敎 스승을 섬겨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바라문교 스승이 상당히 유명한 분이어서 한 500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앙굴리마라가 제일 미남이고 똑똑하고 또 능력이 제일 특출해 있었습니다. 그 바라문 스승의 아내는 제법 잘나고 예쁘게 생긴 분인데 그 바라문 스승은 나이가 많으니까 그 아내는 나이 젊고 똑똑하고 미남인 앙굴리마라한테 호감好感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차근차근 호감이 짙어져서 애정愛情으로 바꿔졌습니다. 그래서 바라문 스승이 외출하여 다른 곳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동안에 이 앙굴리마라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마음이 진실眞實한 분이고 또 스승의 아내이기 때문에 공정한 마음을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요구를 안 들어주니까 드디어 부인은 원심怨心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남편이 돌아오니까 일부러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또 옷에다 자기가 할퀴어 핏자국을 내놓고는 ‘앙굴리마라가 당신이 안 계실 때 욕보이려고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라문 스승은 아직 ‘내가 없다’ 는 무아無我의 도道를 성취한 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분기憤氣가 차올랐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를 골탕을 먹이고 파멸破滅 시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에게 말하기를
“그대한테 내가 여태까지 아껴오던 신비스러운 비결인 비수秘手를 전수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그대가 백 명의 사람을 죽여 한 사람한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공부를 하면 공부가 결정적으로 잘 된다!”
고 하였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매우 정직하고 단순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스승을 숭배하기 때문에 그 말을 곧이듣고 차례로 사람을 죽여 나갔습니다. 그래서 99명까지 사람을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정말로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생에 선근善根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마지막에 부처님이 인연因緣이 도래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앞에 나섰단 말입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을 죽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해버리고 마을이나 거리에서는 사람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앞에 나오시자 기운이 장사이고 용맹스러운 앙굴리마라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칼을 내려 쳤지만 팔뚝을 딱 잡혀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굴복屈服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본래 선근이 깊어서, 크게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몇 년 안가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 하더라도 현상적인 모양은 설사 사기詐欺를 치고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 본 성품性品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따라서 참선參禪은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기가 갖추고 있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므로, 참선 공부할 때는 군더더기나 복잡한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오직 마음 닦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참선하는 공부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가장 빠른 것인가. 우리가 기왕이면은 빠른 지름길로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근기根機가 여러 계층이라서 과거세過去世에 학문을 많이 하고 경전經典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금생에 경經을 보다가 깨닫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새벽에 계명성啓明星,즉 금성金星을 보고 깨닫듯이 당唐나라 때영운대사[靈雲大師]같은 분은 복숭아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또한 동산양개[洞山良介]스님은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무정無情은 인간이나 기타 동물처럼 식[識]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정 설법이란 사람이 설법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다른 동물이 설법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무나 흙이나 돌이 설법說法을 하는 것이 무정설법[無情說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 말을 곧이듣기가 곤란스럽겠지요. 그러나 밝은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무정설법이 존재합니다.
부처님 경전 중 화엄경華嚴經에
진진찰찰[塵塵刹刹]이
구설구청[俱說俱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어떠한 미물微物이나 흙이나 또는 모든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구설구청俱說俱聽, 즉 함께 말씀도 하고 함께 듣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사法師가 설법說法을 하고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소중한 설법은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나무나 흙이나 돌이나 어떤 것이나 다 같이, 설법說法을 하는 동시同時에 같이 듣고 있습니다.
나무도 듣고 있고 소도 듣고 있고 다 듣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상식 범위 밖의 일이니까 우리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法 가운데는 분명히 그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우리 중생의 눈에 보이는 현상적現象的인 차원에서는 동물이 있고 사람이 있고 식물이 있고 이렇게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본성품本性品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생명生命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하면 사람이나 동물만 중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은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볼 때는 유정무정有情無情, 식[識]이 있는 것이나 의식意識이 없는 것이나 또는 유상무상,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모두가 다 중생衆生입니다.
따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즉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것이나 사바세계의 두두물물頭頭物物, 천지만유天地萬有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있을 것인가, 머리에가 있을 것인가?
불성佛性은 우리 머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 또는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몸 전체가 그런 불성의 화신化身입니다. 나무 핵심核心인 목심木心에 불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불성佛性이 화신化身입니다.
가끔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 부처님 법法이 현대적인 의미意味에서는 웬만한 것은 모두가 다 밝혀졌습니다. 물질物質이라는 것 역시 우리 중생이 보아서 이것, 저것 하는 것이지 물리학도物理學徒가 생각할 때 물질은 종말終末에 가서는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이 없습니다.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소박한 상식常識으로 보면 무슨 분자分子요, 산소酸素요, 수소水素요, 하지만 이런 것도 역시 어느 정도까지 대체적으로 말한 것이지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른바 미시적微視的인 미세한 분야까지 들어갈 때는 종당終當에는 텅텅 비어버리고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科學이라 하는 것은 공간성이 있는 즉, 모양이 있는 것은 알지마는 모양이 없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 공간의 범주 내에 든 것만을 과학으로 아는 것이지 그 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밖의 소식消息을 우리한테 가르치는 가르침도 모두가 그야말로 말씀들을 많이 했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납득이 가도록 해석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하늘이요, 하나님이요, 태극太極이요, 음양陰陽이요, 물질을 떠나버린 저쪽 소식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말들을 많이 하지마는 확실하게 우리한테 명증적明證的으로 가르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요즘엔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世界, 이른바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의 그런 세계의 것은 불교佛敎가 아니더라도 밝혀져 있습니다.
왜 우리 현대 인간人間은 불안한가?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물질도 분석해 놓고 보면 별것도 아니고 텅텅 비어버리는데 그러면 무질 밖의 소식,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생명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붕괴 됐는가? 마르크스주의도 굉장히 치밀한 과학적科學的인 시도試圖를 여러 가지 많이 했습니다. 거기도 대학도 나오고 박사博士도 나오는 그런 체제體制 가운데서 왜 그렇게 오래 못가고 붕괴가 되었는가?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 저쪽 소식, 아무리 물질적인 것은 이해를 잘 한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 자기 생명生命에 대한 소식消息을 모르면 사람은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을 평등平等하게 분배分配하고 또 생산을 한다 하더라도 생명生命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尊嚴性도 제대로 확보할 수가 없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항시 자기 스스로 불안스러운 마음을 제거除去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人間은 본래本來 부처이니까, 부처가 되어야만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물질物質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이른바 성품세계性品世界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물질이 아닌 동시에 성품세계이기 때문에 바로 생명生命입니다.
불성[佛性]이라는 말이나 부처님이라는 말이나 또는 생명[生命]이라는 말이나 모두 똑같은 뜻입니다. 불교는 바로 생명의 종교宗敎입니다. 요즈음 생명 해방 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모두가 다 생명生命 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불교佛敎언어로 견성見性을 해서 생명生命의 성품性品을 딱 체험體驗해 버려야 비로소 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지름길이 참선[參禪]공부입니다. 따라서 참선공부의 지름길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분명히 생명生命자리를 느껴야 합니다. 우선 이치理致를 얻어야 합니다. 내 생명의 뿌리와 네 생명의 뿌리가 다른 것이라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요.
공간성도 있다고 생각하면 내 생명, 네 생명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물질이 아닌
것은 자취나 모양이나 그런 흔적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 뿌리가 둘이나 셋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 차원에서 보면 일체존재의 생명生命이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일체존재 가운데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바로 보면 생명生命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선參禪 공부할 때는 생명의 소재가 무엇인가,
생명生命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마음이 열립니다.
참선공부工夫는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우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우고 또는 화두話頭를 들고 하더라도 참선參禪공부가 아닙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선先자, 깨달을 오悟자, 먼저 이치理致나 이해理解로 깨닫고 닦아야 참선 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하면 될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라 하는 것은 종당에는 텅텅 비어 버리고 생명生命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만법귀일
萬法歸一!
만법萬法은 일체존재一切存在를 가리킵니다. 만법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돌아갑니다. 생명은 무엇인가, 생명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종당에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천지우주天地宇宙는 하나의 생명生命 뿐입니다.
그 생명生命은 바로 빛입니다.
하찮은 생명 같으면 그 생명生命으로 해서 저 태양太陽이 나오고 은하계銀河系가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하겠습니까. 일체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일체지혜一切智慧를 갖춘 빛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것저것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 자리를 여의주[如意珠]로 비교해서 말합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는 마음 구슬이 여의주如意珠입니다. 따라서 생명生命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달도 나오고 해도 나오고 모두가 다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인연 따라서, 연기법적緣起法的으로 나옵니다. 그 생명 자체는 완전完全하고 완벽完璧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세계나 또는 인간人間세계, 천상天上세계나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성자聖者세계, 보살菩薩세계, 부처의 세계가 생명生命 가운데는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苦口叮嚀으로 생명의 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계는 광명정토光明淨土, 그야말로 광명세계이고 무량세계無量世界입니다. 또한 광명장光明藏이고 공덕장功德藏입니다. 하여튼 좋은 말은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보살菩薩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무장애보살無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부처님 이름도 굉장히 많습니다. 천지우주에 부처님 이름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 이름을 적은 책이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듯이 삼천 가지나 됩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그런 부처님들이 뿔뿔이 다 인격적으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있다고 생각할 때는 벌써 불교가 아닙니다. 공간성空間性이 있고 어떠한 형체形體가 있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뿔뿔이 있지 않고 생명체生命體 내에 들어있는 무량無量 공덕功德입니다. 그러기에 무장무애無障無碍, 조금도 장애가 없는 것이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 세계까지 가야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 즉, 성품을 보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 보기까지 그것이 쉬운 일인가? 단박에 되어버리는 것인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 즉, 말 한마디에 깨달아 버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마는[言下大悟] 사실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해오解悟가 앞서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해오 정도는 재주 있는 분들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겠지요.
정말 따지고 보아도 별것이 아니고 물리학에서도 종당終當에는 다 비었다고 하는데 결국은 남는 것은 생명뿐인지 유추해서 영리한 사람들은 그냥 모두가 생명뿐이구나, 이렇게 해서 마음을 모을 수가 있겠지마는 증명證明을 하려고 하면 쉽지가 않습니다.
증명證明을 해야만 온전히 자기自己 생명 가운데 들어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우리가 다 쓸 수가 있는 것이고 좀 맛을 볼 것인데 증명證明을 못하면 아무런 맛을 볼 수 없습니다. 팔만사천 경전經典을 앞으로 뒤로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는 별맛을 못 느낀단 말입니다.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서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꽉 차 있습니다. 우리 생명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등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량 세월 동안에 어떠한 인간이나 모두가 다 과거過去 어느 생엔가는 아수라 세계로 갔다가 지옥으로 갔다가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생명 가운데는 지옥에 들어가서 지은 업장業障 또는 아수라 세계에 가서 지은 업장 또는 개나 소나 돼지가 되어서 지은 업장 등, 많은 업장들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업장業障때문에 이치理致로 해서 조금 안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바탕인, 본 고향故鄕 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쉽게 증명할 수 없습니다.
증명을 쉽게 못하니까 사흘, 한 달 또는 일 년의 별시수행別時修行이 필요합니다. 홍인[弘忍] 스님 같은 분들은 6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오고 공부했습니다. 과거 중국 당唐나라 때, 신라新羅 때, 고려高麗때는 위대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춘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때는 자기 생명의 본바탕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확철대오廓徹大悟했습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단박에는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 갈 길은 오직 외길뿐입니다. 우리 본래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길밖에는 참다운 안심입명[安心立命]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평화平和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것,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나 노자老子의 가르침의 핵심은 '나'와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빨리 하고 싶습니다. 용龍이 제 아무리 용맹스럽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구름이 없으면 승천昇天을 못하고, 물이 없으면 힘을 못 씁니다. 호랑이도 영악스러운 동물이지만 언덕이 있고 산山이 있어야 비비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힘을 못 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성불成佛하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애쓰지마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소유所有가 있다는 관념觀念이 있으면 성불을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바른 존재의식이 있어야 성불의 길로 갑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중생衆生들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어야 공부가 속 빠르게 바로 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염불念佛만 많이 하면 된다. 또는 화두話頭만 의심하면 쉽게 깨달아 버린다 하는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일심一心으로 하면 마음은 모아지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원효[元曉] 스님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말씀하셨듯이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항시 부처님 공부에는 지혜智慧를 더불어 해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공[諸法空]의 지혜 즉,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지혜입니다.
현대의 불교는 생활불교生活佛敎이고, 생활불교를 하려면 있는 것 즉 현상적인 것을 좋게 해야 되는데, 모두 허망하다고 하면 어떻게 생활불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실존實存 따라서,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느끼는 실존적인 자리, 사람이 분명히 비었으면 비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입각해야, 공부도 되고 자기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집안, 사회, 국가國家, 세계世界도 편합니다.
'나'라는 것은 분명히 비어 있단 말입니다. 왜 비어 있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합合해 있기 때문에 비어있는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은 무엇인가? 인과 연도 역시 비어 있습니다. 사바세계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이 아닌 생명체가 그때그때 상[相]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본래가 물질物質이라면 물질이 이렇게 변變하고 저렇게 변해도 그대로 물질이 되겠습니다만, 물질이 아닌 것이 제아무리 상[相]을 이리저리 낸다 하더라도 물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로를 몇 천 번 곱하고 더해도 제로인 것처럼, 물질이 아닌 것이 구름 같은 모양을 내나 개 같은 모양을 내나 결국은 다 물질이 아닙니다.
다만 진동振動과 운동運動의 차이差異로 해서 이 모양 저 모양, 나요 너요 하는 것이지, 본 바탕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조금도 변동變動이없습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의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본 성품 자리에서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옥地獄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축생畜生으로 사람으로 와서, 우리 업장業障이 잠재의식[潛在意識]에 차곡차곡 축적蓄積되어 있다 하더라도, 본성품[本性品]에서 볼 때는 조금도 오염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관悲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버릇을 한 번 붙여 놓으면 떼어 내기가 어려워서 그 버릇 때문에 시간을 오랫동안 끌게 됩니다. 시간을 단축하여 빨리 떼기 위해서는, 비록 지금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금생今生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해서 업장業障이 많다 하더라도 내 머리카락 끝에서 발끝까지 부처님 성품으로 충만해 있다.
다시 말하면 내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광명光明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천지우주의 광명과 하나가 된 분, 조금도 흠이 없이 천지 우주의 생명 자체가 되신 분이 부처 아닙니까, 따라서 부처의 견해, 즉 부처님의 안목인 불안佛眼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차별差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천지우주가 모두 다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부처님의 광명으로 보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무슨 욕심慾心을 낼 것이고 무슨 미움과 사랑 즉 애증愛憎을 낼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그 곳까지 꼭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물이 살 때인 주겁住劫인데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안 가서, 차차 파괴破壞가 되는 시기인 괴겁壞劫이 옵니다.
기독교 종말론終末論에서 서기 천구백 몇년 며칠에 지구地球가 종말 한다고 하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만 휴거携擧라 해서 하나님이 들어 올려서 공중으로 구제救濟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불교佛敎는 이러한 비과학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徹頭徹尾 합리적合理的입니다.
지구나 다른 천체天體가 오랫동안 주겁住劫을 거치다 보면 차츰차츰 불가역不可逆의 에너지[Energy]인 엔트로피[Entropy]가 증장增長하여 다 불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이 증명證明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英國의 호킹[Stephen W.Hawking; 1942 -]박사 같은 분도 약 100억 년 정도 되면 우주宇宙가 점진적으로 파괴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 물질세계는 결국은 다 파괴가 되고 그 후에는 텅텅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
즉, 그때는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생명生命 자체인 진여眞如 불성광명佛性光明으로 환원還元되어 버립니다. 그 때는 성불成佛하기 싫어도 성불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불경佛經을 보면 겁진소시劫塵消時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선정皆當禪定이라 했습니다.
즉 괴겁壞劫이 다해서 천지天地가 파괴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깊은 삼매에 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종당에는 꼭 성불成佛해야 합니다. 다만 성불을 빨리 못하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가르치고 아프고 죽고 이별하곤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參禪 공부는 제일 쉬운 안락安樂 공부입니다. 왜냐하면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불할 것이라고 하여 지금 낮잠을 자고 게으름 부리고, 또는 망상妄想을 한다 하더라도 성불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 간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섭리攝理에 편승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가만 두어도 몇 억 년 뒤에는, 우주가 다 파괴될 때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윤회하면서 고생을 한없이 하겠지요. 기왕이면 금생에 석가모니 같은 도인이 나왔을 때 성불을 해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하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성자聖者만이 실상實相을 봅니다. 성자의 청정안목淸淨眼目에서 보는 것만이 진실眞實이고 사실事實이며, 범부凡夫가 보는 것은 설사 학문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바로 온전히 실상實相을 못보고 가상假相만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안 보이지만 성자의 가르침 따라, '너요 나요, 이것이요 저것이요'가 없이, 천지우주가 모두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며 본래 부처라고 느끼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화두話頭도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염불念佛도 그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선공부가 되는 것이지,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또 화두만 의심疑心하면 깨달아 버린다는 식으로 해서는 지름길이 못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석가모니釋迦牟尼나 각 성자가 말씀한 이치를 우리 마음에 딱 두고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렇게 이치를 안 여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씀드리면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인공[主人公]을 여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고향故鄕을 여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향 떠난 사람들이 고향을 가고 싶을 때에 고향 소재도 모르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갈 곳은 성불의 길이므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길목을 알아야 합니다. 길목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요, 주문呪文입니다.
길목을 안다 하더라도 고향故鄕 생각을 수시로, 끊임없이 해야 빨리 간절히 가진단 말입니다. 공부하면 차근차근 자기 몸도 마음도 맑아 옵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계행戒行을 잘 지켜서 몸이 청정淸淨하면 마음도 청정해지고, 그 역逆으로 마음 청정하면 몸도 따라서 청정해 집니다.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이 더욱 익어져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확 트일 때가 있습니다. 확 트일 때 가서는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이 몸이 내 것인가? 이것이 내 몸인가?' 이만큼만 되어도 자기 몸을 위해서 남을 희생犧牲시킨다거나, 자기가 당선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한다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금생今生에 우리가,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정도는 못 된다 하더라도, 공부를 해서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면 자기 몸도 마음도 쏙 빠져 버립니다. 이것이 불교용어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며, 그러한 때의 기분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환희충천[歡喜衝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잘 입고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아야 행복幸福한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참다운 행복은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은 더욱 더 맑아지고 또 모든 사람이 다 귀엽게 보이고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두 생명生命으로 보이게 합니다.
이런 행복幸福은 어디에 견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행복을 우리가 놓치고 안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어가다가 더 밝아지면 그때는 정말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전기電氣에서 나오는 빛도 원래 우주에 빛이 있으니까 나오는 것이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말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광명光明, 즉 빛을 보고 몸이 가벼워지면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어 착한 마음이 차근차근 깊어집니다. 애매하게 자기를 비방誹謗한다 하더라도 별로 책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타사비 왕비는 그야말로 못난 얼굴이었는데 빛을 봄으로 해서 졸지에 미인美人이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法에는 아름다움도 예술藝術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온전히 빛을 볼 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우리한테 그것이 온단 말입니다. 공부를 해도 실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얻은 것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런 광명光明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생명生命 자체이고, 광명이며,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우주宇宙에는 빈틈도 없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적광[寂光]이 충만充滿해 있다고 생각하면서 화두도 의심하고 염불도 하면 이른바 도인들이 말씀하신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서 지혜와 선정이 같이 어울려져서 공부가 속빠른 것입니다.
念念相續 염념상속
畢命爲期者 필명위기자
十卽十生 십즉십생
百卽百生 백즉백생
그러기에 도인들 말씀에도 염염상속念念相續 필명위기자畢命爲期者! 생각 생각에 부처님 경계, 생명의 광명인 부처님의 본 성품을 놓치지 않고서, 내 밖에나 안이나 충만充滿한 광명자리를 훤히 느끼면서, 염불念佛이나 화두話頭 참구參究를 한다면 필경위기畢命爲期라! 자기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한다면
십즉십생十卽十生 백즉백생증百卽百生證,
열 사람이 하면 열 사람 다 성불成佛하고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生命은 위대偉大한 것입니다. 잘나고 못나고, 가난하고 부자이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한테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생명을 믿고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도 하면 참 쉬운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마음도 편便하고 몸도 편便하고 다 편便한 것입니다.
자비심慈悲心이 더 우러나와서 집안도 평화平和로와집니다. 특히 우리 보살님들은 집안에서 정말로 자비로운 보살의 화신化身이 되셔야 합니다. 아무 말씀으로나 하실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비심으로 자기 남편이나 자식子息이 참으로 자기 자신을 따를 때까지 하셔야 합니다.
공부를 참으로 했다면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어 부드러워져서 누구하고 시비是非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같이 차근차근 보이니 어떻게 시비是非가 되겠습니까.
공부가 깊어지면 일체공덕一切功德이 다 드러납니다. 꼭 금생에 자기 생명生命의 본 고향故鄕자리를 가셔야 합니다. 다소 제대로 못 간다 하더라도, 몸도 마음도 잊을 정도의 아주 쾌적한 경안심[輕安心] 또는 광명光明이 보일 수 있는 정도까지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량無量 공덕功德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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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마음의 고향 修行者法門 제2권 [상상예찬 刊]
♧ 음악 : 한마음 수채화 http://blog.naver.com/yonsei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