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꽃 목욕탕
유계자
꽃 뭉치가 샤워기 같다
일 년에 단 열흘만 개장한다는 등꽃 목욕탕
강변의 사각정에 올려놓은 등꽃, 사방에서 틀어놓은 샤워기처럼 보라색 물이 쏟아진다
등꽃 그 뜨신 향기에 먼저 민들레가 몸을 담그고 멧비둘기도 날개를 적시고 바람은 털썩 바닥에 앉아 신을 벗는다 막 들어온 햇살이 꽃뭉치 샤워기를 끝까지 틀어놓는다
어질어질 물길은 깊어져 온통 보라빛 향기 속으로
자주 응급실을 들락거리던 한 여자가 시든 몸을 담근다
부은 발을 주무르고 훈김 오르는 물방울이 안경 속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돌아앉은 그녀의 등을 멧비둘기가 꾸욱꾸욱 밀어주고 있었다
풀어진 여자가 탕 속에서 나오자 참새 몇 마리 슬픔의 각질들을 서둘러 치우고 등꽃 목욕탕은 노을을 받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유계자 시집, {물마중}(근간)에서
시인은 언어의 사제이며, 그의 언어사용능력은 하늘이 부여한 재능과도 같다. 천재란 타고난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의 산물이지만, 그러나 이 후천적인 재능 역시도 타고난 재능과 결합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시인이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듯한 노력없이는 어느 누구도 시인이라는 왕관을 쓸 수가 없다. 상징과 은유를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듯이, 상징과 은유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은 그의 ‘명명의 힘’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세종대왕이 한자문자에 맞서서 한글을 창제했듯이, 최초의 사물과 최초의 사건에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종족창시자가 천지를 창조하고 그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유계자 시인의 [등꽃 목욕탕]은 그가 최초로 명명한 시이자 자연의 목욕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때는 어느 봄날이고, 장소는 어느 강변의 사각정이다. 일년에 단 열흘만 개장하는 [등꽃 목욕탕]은 자연의 목욕탕이자 만물의 목욕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보랏빛 꽃송이는 샤워기가 되고, 사방에서 틀어놓은 샤워기에서 보라색 물이 쏟아지면 민들레가 몸을 담그고 멧비둘기가 날개를 적신다. 바람도 털썩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고, “어질어질 물길은 깊어져 온통 보라빛 향기 속으로/ 자주 응급실을 들락거리던 한 여자가 시든 몸을 담근다.” “부은 발을 주무르고 훈김 오르는 물방울이 안경 속으로 후드득 떨어”지면 “멧비둘기가” “그녀의 등을” “꾸욱꾸욱 밀어”준다. 목욕을 마친 여자가 등꽃 목욕탕을 나오면 참새 몇 마리가 “슬픔의 각질들을 서둘러 치우고” 유계자 시인의 [등꽃 목욕탕]은 저녁 노을을 받을 채비를 서두른다.
천의무봉----. 푸른 하늘, 푸른 들판, 자연의 [등꽃 목욕탕]에는 어느 것 하나 부자연스럽거나 흠결이 있는 것이 없다. 강변의 사각정은 등꽃 목욕탕이 되고, 수많은 등꽃들이 샤워기가 되어 보라색 물을 쏟아내면 민들레가 몸을 담그고 멧비둘기가 날개를 적신다. 바람도 털썩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고, 한 여자의 시든 몸을 멧비둘기가 꾸욱꾸욱 밀어준다. 멧비둘기가 여자의 몸을 꾸욱꾸욱 밀어주면, 몇 마리의 참새들이 그녀의 슬픔의 각질들을 서둘러 치워주고, 유계자 시인의 [등꽃 목욕탕]은 저녁 노을을 받을 채비를 한다. 자연과 동물, 인간과 자연, 동물과 식물, 아침과 저녁 노을 등이 조화를 이루며, 이 세상의 때묻은 마음과 병든 몸이 다 치유된다.
‘시간의 일치’와 ‘장소의 일치’와 ‘연기의 일치’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유계자 시인의 [등꽃 목욕탕]----. 시는 천국이 되고, 천국은 만물들의 삶의 터전이 된다. [등꽃 목욕탕]은 유계자 시인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열정의 소산이 되고, 그의 열정이 극적인 사건의 전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대서사시가 된다. 이 세상의 삶은 보랏빛 등꽃처럼 화려하지만, 그러나 그 화려함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슬픔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아니, 아니, 이 세상은 화무십일홍의 유한성이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영원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2023년 10월 9일, 세종대왕께서 1446년 이 세상에 최초로 훈민정음을 반포하셨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유계자 시인의 [등꽃 목욕탕]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우리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그 진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