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
출 9: 1-7, 마 25: 31-33
수년 전에 알래스카에서 어느 정유 회사의 유조선이 좌초되어 수백만 배럴의 원유가 바다를 오염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바닷물의 오염으로 인하여 갈매기와 많은 어류들이 죽었습니다. 해변을 청소하고 기름에 찌들려 죽어 가는 조류나 동물들을 살리려고 정부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썼습니다. 그 때 죽어 가는 두 마리의 물개를 살리기 위하여 한 마리 당 8만 달러를 들였습니다. 그 두 마리의 물개는 무사히 소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두 마리의 물개를 바다로 다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동물 애호가들과 자연을 사랑하는 많은 시민들은 박수를 쳤고 수천 명의 관중이 물개가 자기들의 서식처인 바다로 귀환하는 것을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마리의 물개는 바다로 보내진 뒤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수분 후에 범고래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살리려고 엄청난 돈을 들여놓아도 죽을 사람이 우리입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을 살리고, 또다시 실패하고 배반할 사람을 먹이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덕입니다. 선민이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죽을 사람이지만 살립니다. 엄청난 돈을 지불하시고 살려두신 사람들입니다.
왜 같은 땅의 생축들이 다 죽는데 이스라엘 생축은 죽지 않습니까? 선택된 백성의 소유니까 그렇습니다. 선택된 백성의 소유도 선택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얘기하시는 것은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목적에 우선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종살이가 애처로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고통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애굽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시고,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인관계입니다. 생활의 불편과 잠시의 고통을 주는 재앙에서 인간과 생축의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재앙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이제 직접 나서셔서 생축과 인간에게 직접 생명의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악질은 애굽의 신들에게 주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황소와 암소 등 생축들에게 악질을 내리게 하셔서 그들의 신이나 우상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재앙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축을 전부 죽게 함으로 경제적 심리적 타격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애굽에 있는 생축이 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들에 있는 생축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들에 있는 것들이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축들이 이전에는 듣지도 못하던 악질에 걸려 죽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 아닐까요? 구제역이니, 광우병이니 하는 짐승에 걸리는 병이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종입니다.
첫째, 여호와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다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 여러 번 나타나는 특징어입니다. ‘하이브림’이란 말은 “강 건너다”는 뜻의 ‘아바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히브리란 말은 강을 건너온 무리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유브라데 강을 건너 가나안에 이른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민족은 예로부터 노예와 같은 하찮은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살아온 위대한 선민임을 깨우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애굽의 잡신들과 구별되는 유일신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과도 비교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사람만의 하나님입니다. 애굽인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상과 신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지 않습니다. 우상이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십계명 1계명과 2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다음의 모든 것은 있으나 마나 한 것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안식일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3에는 십계명을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3:11에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4:6에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사야서에 특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우상에 기웃거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인과 애굽인을 구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애굽인을 싫어하고, 이스라엘을 구별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므로 싫어하셨고, 하나님을 믿으므로 구별하셨습니다. 이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둘째,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하였습니다.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은 애굽의 중요한 생축입니다. 이것들은 가축들입니다. 군사용, 농사용, 경제용으로 그들에게 아주 유용한 재산이며 삶의 수단입니다.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생축이 악질에 걸렸습니다. 아끼던 생축이 악질에 걸려 죽어보세요. 주인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가축과 애완 동물은 구분합니다. 애완 동물이 죽어보세요. 정말 마음이 아프지요. 제가 아는 어느 미국에 계시는 장로님은 일찍 미국에 가셨는데 한국에서 부인이 와서 미국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한국에서 올 때에 키우던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그 개가 아파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미국에까지 결혼하러 와서 개가 위로가 되고 말 친구였는데 죽고나니 얼마나 슬펐는데 보름을 밥도 안 먹고 울더랍니다. 그래서 그 남편 장로님이 결혼 초기에 너무 혼이 나서 다시는 개는 안 키운다고 합디다. 성경은 “여호와가 구별하리니”라고 합니다. 구별은 하나님이 직접 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십니다. 애굽인이 사는 땅과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을 구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하십니다. 구별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생축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생축이 백성으로 인하여 구별됩니다. 거룩한 백성의 생축은 거룩합니다. 속된 백성의 생축은 속됩니다. 나 때문에 나의 생축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나 때문에 나의 생축의 생명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룩하고 내가 구별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나 때문에 나의 것들이 보존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 때문에 나의 가축이 보존됩니다. 나 때문에 나의 땅이 보존됩니다. 나 때문에 나의 사회가 보존됩니다. 정말 이번에는 그 분 때문에 우리 민족이 보존되고, 백성이 잘 되고, 나라가 번성하는 그런 대통령이 꼭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모두가 그런 대통령을 뽑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7절에는 “바로가 보내어 본즉”이라 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 신하를 급파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생축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생축과 이스라엘의 생축을 엄격하게 구분하신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생축은 죽지 않았습니까? 생축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주인들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숭배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 생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이므로 애굽의 생축은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생축은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외에 엉뚱한 것을 숭배하지 않으면 재앙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면 우리 가축과 우리 땅이 복을 받습니다. 지난여름 우간다에 갈 때 일입니다. 수도 캄팔라에서 김정윤선교사의 사역지인 네비 지역까지는 두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수시로 반란군이 나와서 차를 습격하고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 일행이 와서 들으니 저희들이 간 길 말고 다른 길에 그날 낮에 반란군들이 나타나서 차를 습격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걸음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다른 길이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 길은 어려움을 면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다치지 않게 보호하시고 여호와의 손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우리가 찬양합니다. 낮의 해가 우리를 상치 못하며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과 세상의 편을 얼마나 잘 구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법도를 지켜 행하면 악인에게 임하는 병도 임하지 않게 하십니다. 신명기 7:15에는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별은 항상 엄격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양과 염소를 구별하십니다. 양은 절대 염소의 우리에 들지 않습니다. 염소는 절대 양의 우리에 들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나의 것들이 구별되고 성별 됩니다. 내가 사는 땅, 내가 사는 집, 내가 가진 재물, 내가 일하는 직장이 성별 되어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레위기 11:44에는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기한을 정하여 일을 행하십니다.
이전에 모세는 두 번이나 ‘내일’이라고 기한을 정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기한을 정합니다. 개구리가 온 땅을 뒤덮었을 때에 모세가 내일 없어질 것이라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파리의 재앙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바로에게 내일이면 파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다시 악질이 온 생축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급속하게 임함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한번도 어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어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시간을 어기지 않는 하나님은 앞으로도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어기지 않고 다 이루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9에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는 긴급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내일”이라고 예고하고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는 이제 구약 시대처럼 예고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는 아무도 모르게 옵니다. 마태복음 24:42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 갈라디아서 4:4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예정하신 때가 차면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오셨습니다. 성탄이 되면 우리의 마음에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인 토마스 머튼은 성경은 때가 찬 시간을 중시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그 때는 감정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추수나 추수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사도행전 1:7에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때를 알 수 없지만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어김없이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시장 타이밍(market timing) 혹은 기회의 창(windows of opportunity)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들의 기본적인 뜻은 성공의 기회는 오직 한번뿐이므로 기회가 찾아올 때에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도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의 때를 놓치는 것은 생명을 잃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민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의미를 부여한 만드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을 “때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적절한 시기가 될 때에 하나님은 변화를 일으키시며 크로노스는 카이로스로 변합니다. 일상적인 시간인 크로노스 안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론
바로는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내리신 은총도 보았습니다. 자신들에게 내린 재앙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다시 완강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카이 라나제트(Khay Rahnajet)라는 사람은 이라크인으로서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요인을 암살 목표로 암살을 목적으로 우편폭탄을 봉투에 넣고 우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표를 적게 붙여서 그 우편물이 자신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이 우편 폭탄인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편물을 열다가 그는 폭사했습니다. 위험을 잊은 사람은 그 위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잊은 사람은 목숨을 잃습니다. 자신의 함정에 자신이 죽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자신의 완고함으로 죽습니다. 마음이 완강한 사람은 자멸하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죽어야 끝이 납니다. 자신의 주변에 아무리 징조를 봐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