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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에서 찬양으로
시편 13:1~6
오늘 읽은 시편은 여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편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첫 부분의 두 절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픈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절에는 비길 데 없는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쓴 많은 시들을 보면 통곡으로 시작해서 기쁨과 찬양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깊은 내적인 모습을 봅니다. 한편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한 사람, 그리고 기뻐하며 찬송하는 다른 한 사람이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러한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우리 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 옛성품과 새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변덕 심한 날씨와 같아서 한쪽에서는 햇빛이 쪼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소나기가 많이 와서 햇빛이 가려지지만 그렇다고 햇빛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의 참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다윗을 보면 마치 우리가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도 고통 속에서 헤매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러셀은 “사람이 외부 공간은 점령하지만 자기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해 고민하는 약한 존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첫 부분에는 인간의 불만, 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부분에는 이 불만이 찬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 부분부터 보십시다. 1절과 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기 보면 “어느 때까지, 언제까지,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란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윗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기한이 있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도와 주시기는 도와주시는데, 오시기는 오시는데 언제입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잠깐이라도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 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사랑이 불변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지극히 진실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하는 울부짖음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다윗은 하나님이 꼭 자기를 잊으신 것처럼만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비단 다윗 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잊으면 참을 수 있으나 하나님이 나를 잊으면 나를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즐거워했지만 지금은 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하나로 처해 있는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태양이 가리워지면 대지가 어두운 것같이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 심령에서 숨어버리면 문자 그대로 우리 심령은 암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닥친 번민으로 인해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잊어버리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 뿐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사 49:15)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절대로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숨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숨기신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웃으시는 그 얼굴을 숨기는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오늘 우리도 이런 절규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로부터 숨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나 그 은총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루만 보지 못해도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은 보게 될까 겁이 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대하시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 숨겨졌던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뵐 때 우리는 수심 대신에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화창한 날씨만 있었다면 오늘의 추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계속적으로 성공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면 우리의 뇌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랍 속담에 “햇빛만 빛나면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비가 없으면 어떻게 초목이 자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얼굴을 숨기실 때 우리는 절망을 느끼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의 슬픔을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독백입니다. 자기 스스로 얻은 결론입니다. 사람은 이런 독백에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사역에 전보다 더 큰 축복을 예비하실 때 나에게 먼저 우울이 온다”고 했습니다. 어떤 성공이 있기 전에 먼저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소망의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42편에서도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절규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서 물을 길으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길으실 수가 있습니다. 영혼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샘물을 마실 때 참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것은 외적인 인간의 슬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내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내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했습니다. 외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죽는 것과 의가 불의에게 패했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1) 믿음에 힘을 더하소서 2) 나의 길을 인도하소서 3)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외부에서 당하는 고난이란 사탄과 사탄의 협력자들이 우리를 치켜올리고 그 다음에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내린 때에 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의 신앙입니다.
사무엘하 1장 19절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을 가드에게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믿음 떠나면 마귀들이 기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윗의 모습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의 찬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전에는 슬픈 탄식을 하였지만 여기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뭐랬어요?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 기쁨은 외부적인 기쁨이 아니라 본질상의 기쁨입니다. 그 마음의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입술로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우리의 감정을 자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때 우리는 감정을 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실 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참된 평강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믿음을 버티어 나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맛볼 때 이것이 참 평강이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아니하는 참 평안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고 그래서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통하여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 사람의 판단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을 비교해 보세요. 다윗은 “왜,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이렇게 하시겠습니까?”하면서 불만과 의심을 토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그가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하였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후대하셨도다 하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아서는 하나님이 왜 나를 잊으셨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가 나를 후대하셨다는 사실을 알고서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여호와가 나를 푸대접하셨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그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셨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이 한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그는 소년 때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고 거기서 충성스럽게 종의 일을 보았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누명을 쓰게 되었고 감옥에 갇혀 얼마나 억울하게 고생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세워 애굽의 바로 왕의 버금가는 총리 대신이 되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팔아 버린 형들이 굶주린 가운데 찾아왔을 때 원수를 갚으려면 갚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오히려 온 가족을 다 모셔다가 잘 대접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형들은 동생 요셉을 두려워하여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마는 세상 떠나기 전에 요셉에게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였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가슴이 아파서 울면서 형들을 불러,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각으로는 억울할 수도 괘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천대하고 박대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후대하였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이 망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이 가련한 사람이 자기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와 같이 대하시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크게 변했습니다. “전에는 슬픔과 불만투성이었지만 지금은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런 결심은 현재 뿐만 아니라 일생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입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교우 모두가 이렇게 “일어날 때, 일할 때, 잠잘 때 이 입술을 그대로 간수치 말고 찬송을 부르리라”하는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외로움이 사라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두려움이 가십니다. 찬송을 부르면 힘이 생깁니다. 감사가 솟아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내가 사는 동안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는 결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어떻게 통곡에서 찬양으로 바뀌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보장을 받아 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기 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인 저도 많은 번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부딪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마침내 저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용기와 신념, 그리고 감사와 찬송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짐을 주께 맡기고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다시 생각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또 생각이 날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고민과 문제를 모두 이야기하세요. 여러분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신 다음에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에 나와서는 맡기지만, 예배가 끝나면 다시 찾아 가지고 갑니다. 그러지 마세요.
오늘 본문 5절 다윗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고통을 여호와 앞에 맡겼을 때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그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만한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그를 의뢰하세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의뢰 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의뢰 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사하여 주십니다.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의지하세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거짓말했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마세요. 그러나 그리스도가 진실하다면 그를 의뢰하세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를 의뢰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가 전능하신 구세주라면 그를 의뢰하십시오.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할 때 다윗과 같은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의뢰케 하십니다. 나는 대접받을 사람이 못되는데 후대해 주시니 감격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생활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들로 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평스러운 일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고 도와 주셔서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후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 하나가 이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무겁게 왔으나 돌아갈 때는 가볍게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낙심 가운데 왔으나 돌아갈 때는 소망 중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맥없이 왔으나 돌아갈 때는 용감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울면서 왔으나 돌아갈 때는 찬양하며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원망을 찬양으로
성경본문 : 시편 13: 1-6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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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 가운데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빨리 변하느냐 천천히 변하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변화를 지켜보는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이런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를 주도해 가는 변화의 주체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변화를 당하고 있는 변화의 객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안에 생명을 담고 있는 생명체들은 변화를 주도해 갑니다. 산자락에 작은 씨앗 하나가 바람에 날려 와 뿌리를 내리면 그 일대가 달라집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솟고 가지가 뻗어갑니다. 점점 자라서 거목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그 주변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들이 날아오고, 각종 곤충들이 그 나무를 기대어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거목이 죽어 생명이 소멸되면 변화를 당하게 됩니다. 이 죽은 나무는 곤충과 버섯류의 먹이가 됩니다. 세균들에 의해 부패하며 해체되어갑니다. 주변 환경과 다른 생명체들에 의해 변화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심령 깊은 곳에 영생이 있는 사람은 변화를 주도하며 살아갑니다. 환경이 열악하고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결국 환경을 바꾸어 가고 상황을 좋게 만들어갑니다. 자신도 변화시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갑니다.
그러나 그 심령 속에 영생이 없는 사람들은 변화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 있게 되면 그 환경의 영향 속에서 부정적으로 변화해 갑니다. 좋지 않은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이끌려 악화되어갑니다. 그러면서 환경을 탓하고 상황을 원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심령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변화를 주도해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환경과 상황까지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 말해 그 심령 속에 영생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변화를 당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한 가지 놀라운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 자신의 심령 속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바로 원망이 찬양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원망에서 찬양으로
우선 그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본문 1-2에서 하나님 앞에 깊은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본문 5-6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원망이 찬양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원망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의문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2에서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이 무려 4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원어로 ‘아드 아나’(Ad Ana)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데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 힘겨운 것은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갑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갑니다. 하루가 지났나 싶으면 한 시간 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지났나 싶으면 하루 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는 때로는 시계가 고장이 난 것처럼, 때로는 시계가 멈춰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고통을 견디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 좀 지나가 주면 좋겠는데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아서 괜히 시간에게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다윗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탄식으로 깊은 원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선 그 원망의 화살이 하나님께로 집중됩니다. 1절을 보면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 라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 숨어계십니까?”라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통의 한 복판을 지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게 되는 첫 번째 원망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왜 하나님께 응답하지 않으시느냐는 원망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어버리셔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원망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피해 숨어계신 것 같아서 원망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잊지 않으십니다. 다만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사 49:1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곁에 함께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과 씨름하다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시 41: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의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그 원망이 자신에게로 집중됩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가 못나고 내가 연약해서 이정도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번민하고 이렇게 마음에 근심을 하는지 속이 상하고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니 어떻든가요? 이 분의 말씀이 의외였습니다.
“제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청소년 시절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 담배를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던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여러 차례 담배를 끊기로 다짐하고 애를 썼지만 결국 그놈의 담배를 끊지 못했던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기도해 드리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 원망은 다른 사람에게로 집중됩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탄식합니다.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게 된 것은 아무개 때문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웃고 자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밉고 원망스럽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생각이 납니다. 겨우 걸음마를 배워서 아장아장 걷습니다. 그러나 문지방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울어댑니다. 쫓아가서 달랩니다. 이 녀석이 문지방 쪽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문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웁니다.
장난감 자전거를 타고 방안을 휘젓고 다닙니다. 그러다 경대에 부딪혀서 넘어졌습니다. 내려서는 경대로 쫓아가서는 손바닥으로 경대를 치면서 뭐라고 야단을 쳐댑니다.
우리는 이렇게 원망을 타고 났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모두가 다 원망을 잘합니다. 요한 깔뱅은 이것이 우리 안에 깊이 잠재되어있는 ‘죄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고난이 다가오면 본능처럼 원망을 합니다. 우리 속사람 깊은 곳에 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자신을 향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향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가운데서 원망의 늪에 빠져버리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저주하고 자학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다고 모든 관계를 다 끊고 깊은 고독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도 무섭지만 고난 속에서 원망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원망 가운데서 벗어났습니다. 어찌 보면 어렵지 않게 원망에서 벗어났습니다. 벗어나도 확실하게 벗어났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고난을 사라지게 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고난을 이겨낼 비결을 터득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기를 도와준 것도 아닙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고난은 여전히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원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원망을 찬양으로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원망이 찬양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입니다. 1-2에서 그렇게 폭풍같이 원망을 쏟아놓던 다윗은 갑자기 5-6에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3-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3-4절은 바로 기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가 참 많은 것을 바꾸어놓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주님의 제자들이 뜨겁게 기도하자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생겨났고, 구원 역사의 새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기도가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사실 기도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로 가정이 변화됩니다. 교회가 변화됩니다. 일터와 직장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세상도 변화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기도하는 사람 그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기도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가득 찼던 원망이 기도하면서 기쁨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찬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록펠러는 미국의 전설적인 부자입니다. 나이 33세가 되었을 때부터 부자가 되기 시작하여, 43세 때 미국에서 가장 커다란 회사를 소유한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억만 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억만 장자가 된 53세 때에 뜻하지 않은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알로페시아’라는 탈모증 비슷한 병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썹도 빠지고, 몸도 초췌하게 말라가는 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의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록펠러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깊은 고통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밑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에 바빠 하나님과 멀어졌었던 것을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기도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록펠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가슴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그가 벌었던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뉴욕 맨하탄에 리버사이드처치를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곳에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록펠러 재단을 세웠고 여기에 자기의 전 재산을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료사업을 펼치게 했습니다. 물론 그의 몸도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복된 사람으로 복된 인생으로 변화시킵니다. 원망을 찬양으로 변화시킵니다.
다윗이 드린 기도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은 깊은 고난 속에 자기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원망을 하게 된 것은 자기의 눈이 어두워져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남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용감하게 골리앗과 맞섰던 일이 있습니다. 골리앗은 당시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던 거인이고 맹장이었습니다. 이 육안으로만 보면 다윗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과 맞섰습니다. 다윗은 영안을 열고 자기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믿음의 눈을 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골리앗과 맞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이 침침해 졌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망하게 된 원인이 바로 믿음의 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한 시각장애인이 결혼을 했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의술이 발달해서 이 사람도 개인수술을 하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났습니다. 드디어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막 붕대를 풀자 자기 앞에 한 중년 여자가 서 있는 것입니다. 20년간 자기를 헌신적으로 돌봐준 아내였습니다.
이 사람이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이렇게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망을 떨쳐버리고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고난 한 복판에서 “언제까지니이까?”라고 탄식하고 절규하던 사람이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면 원망을 찬양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찬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