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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참깨
도정기
앞산 자락에 새하얀 아카시아 꽃 활짝 핀 4월 말 때마침 단비가 촉촉이 내려 참깨밭을 일구기로 하였다. 참깨는 올해 처음 심는다. 대풍을 꿈꾸며 신품종인 슈퍼 참깨 씨앗을 구입해 놓았다.
모든 작물은 거름과 비료를 많이 주어야 튼튼하게 잘 자라 알찬 열매를 맺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으로 복합비료를 듬뿍 뿌리고 거름을 넣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나를 부르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윗마을에 사는 초등학교 동기 친구가 지나가다 차를 세워놓고 부르는 것이다. 친구는 고향을 지키고 있었지만 난 대구에서 살다 보니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친구다. 하던 일손을 멈추고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나누다 참깨 심으려고 비료와 거름을 넣고 있다고 했더니 깜짝 놀란다. 참깨는 비료와 거름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비료와 거름을 주면 너무 웃자라 참깨 꼬투리는 잘 달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농작물마다 특성이 있어 물을 특히 좋아하는 작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물도 있듯이 거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물도 있단다.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올해 대풍의 꿈은 물거품이 될 뻔했다. 이미 뿌린 비료를 다시 걷어내었다. 초보 농부라 손발이 고생이다.
씨앗을 넣고 가는 모래로 덮어주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가늘고 노란 싹이 뾰족 머리를 내민다. 저렇게 연약한 싹이 언제 자라 참깨를 맺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하루를 몰라보게 잘 자란다. 씨앗 넣는 일이나 포기를 속구는 일은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이라 고역이다. 뼈마디가 굵은 남자에게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벌려 놓은 일이니 감내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커시아 꽃향기 그윽한 앞산 기슭에서 뻐꾸기가 힘내라고 뻐꾹 뻐꾹 뻐뻐꾹 응원가를 불러준다. 내가 들어 본 응원가 중에 가장 신나는 응원가다. 지나가던 산들바람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살며시 닦아 주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항상 마주치는 바람이 오늘처럼 이렇게 고마운 줄은 미처 몰랐다. 처음 싹이 틀 때는 너무나 연약하여 보잘것없더니 한두 달 만에 어른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에 내 키만큼 자라 가지를 치고 연분홍 꽃 탑을 층층이 쌓아 올려간다.
폭염이 한창 기세를 부리던 8월 초순 다른 밭에서는 벌써 참깨를 베어 말리고 있다. 나의 참깨는 아직 잎이 무성하고 꽃도 한창 피고 있다. 제일 아래층 꼬투리도 입 벌릴 생각은 추호도 없이 파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아마 게으른 주인 닮았나 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참깨밭 일굴 때 비료 주던 우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향에서 농사짓는 친구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친구는 친절하게도 참깨밭 까지 와서 살펴보더니 아직 좀 더 있다가 베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참깨도 품종에 따라 일찍 수확하는 품종도 있고 좀 늦게 수확해야 하는 품종도 있단다. 마을 어른 한 분이 하시던 재미있는 말을 전해주었다. 일찍 수확하는 참깨는 쌀밥이고 늦게 수확해야 하는 참깨는 보리밥이라고 하시더란다. 결과적으로 일찍 수확할 수 있는 참깨 품종이 좋은 것이란 뜻이 아닌가. 난 좋은 품종을 심는다고 다수확 할 수 있는 신품종을 어렵게 구입했는데 신품종이 보리밥이란 말인가. 불과 사오십 년 전만 해도 너무나도 가난하여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때쯤에는 양식이 떨어져 풀뿌리와 푸성귀로 연명하던 보릿고개가 있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보며 얼마나 빨리 수확할 수 있기를 학수고대했을까. 그래서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빨리 수확할 수 있는 품종이 좋은 것이라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보리밥이면 어떻고 쌀밥이면 어떠랴 많이만 수확할 수 있다면 앞으로 몇 주일이 아니라 몇 달이라도 기다리마.’
아직도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8월 말 더디어 맨 아래층 꼬투리가 누렇게 익어 가지런한 치아를 살며시 드러내며 입을 벌리기 시작 했다. 참깨는 베는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한다. 너무 일찍 베면 덜 여물은 죽정이가 많고 너무 늦게 베면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떨어져 애써 농사지어 밭에다 헌납하게 된다. 비가 온 직후나 아침이슬 마르기 전에 베는 것이 좋다고 한다.
폭염도 피하고 참깨 알이 떨어지는 것도 방지하기 위해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에 출발하였다. 참깨밭 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다. 도착하니 먼동이 터고 어두움이 물러났다. 야외용 자리를 펼쳐 놓고 참깨 알이 떨어지지 않게 갓난아기 다루듯 한 포기 한 포기씩 조심해서 베었다. 간혹 입을 딱 벌린 꼬투리의 참깨는 고향 땅이 그리운지 사르륵사르륵 고향 노래 부르며 떨어진다. 그래 그 작은 몸으로 싹을 틔워 올해같이 사상 유례 없는 폭염에도 이렇게 알찬 결실을 보았었으니 조금 돌려주는 것도 도리가 아닌가. 아직 반도 덜 베었는데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니 온몸이 비를 흠뻑 맞은 듯하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빗물처럼 볼을 타고 내린다. 참깨 씨 넣을 때는 뻐꾸기가 울더니 참깨 베는 오늘은 내가 울고 있다. 폭염속에서 참깨와 사투를 벌이다 보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아직 참깨 단 묶는 작업은 많이 남았는데 이미 체력은 고갈되었다. 새벽에 나오느라 간단하게 요기만 하고 온 터라 시장기까지 든다. 가져온 참을 먹고 쉬어하기로 했다. 잘 넘어가지 않는다. 너무 피곤하면 입맛도 없다더니 아마 그런가 싶다. 고소한 참깨 냄새는 농부들의 땀 냄새가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9월 초 참깨 농사의 마지막 참깨 터는 날이다. 깻단을 거꾸로 잡고 막대기로 탁탁 치니 하얀 참깨가‘사르륵 사르륵’노래 부르며 솟아진다. 나는 음악에 소질이 없어 노래를 부르지도 못하고, 감상할 줄도 모르지만 정말 듣기 좋은 노래다. 내가 작사 작곡한 명곡이다. ‘사르륵사르륵’노래에서 피어나는 고소한 참깨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것 같아 입안에서는 군침이 절로 돈다. 길지 않는 두 이랑을 심었는데 한 말 하고도 두 되나 되니 대풍이다.
이렇게 초보 농부의 참깨 농사는 참깨밭 일굴 때 비료 넣는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고마운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풍을 거두었다. 이래서 고향의 죽마고우가 좋은가 보다. 요즈음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참깨는 값싼 중국산을 섞어서 국산이라고 판매하는 못된 상인들이 있다고 한다. 특히 참기름은 더욱 믿을 수가 없단다. 늦게 수확하는 참깨는 보리밥이라고 한다지만 나에게는 일찍 수확하는 쌀밥참깨보다 더 소중한 보리밥 참깨다. 그래도 나의 땀으로 수확한 국산인데 중국산보다야 좋지 않을까. 두 아들 집과 우리 이렇게 셋집이 먹고도 남을 양이다. 올해는 내 손으로 가꾼 참깨로 깨소금과 참기름을 맛있게 먹으면서 참깨처럼 고소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염원해 본다.
첫댓글 죄송합니다. 잘못하여 삮제되어 다시 올렸습니다. 도정기
참깨농사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초보자가 참깨농사를 지어 대 풍작을 거두었으니 이제 자신감이 생겼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많은 소출 올리고 쌀밥참개 생산 바랍니다. 정성이 묻어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소한 깨소금 냄세가 나는 참깨 농사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부럽습니다. 울 영감 참깨 농사를 3년을 짓더니 연속 실패라 참깨 농사는 포기 하네요. 그런데 올해 모두 참깨 농사 잘 됐다고 하니 내년에는 한 번 더 시도해 본답니다. 잘 읽었습니다.
처음 심은 참깨가 대풍이네요, 모든게 정성, 선생님의 정성과 땀의 결실이라 생각됩니다. 참깨는 한지 작물이라 올 같은 해는 모든밭에 참깨가 풍작이라 하더군요, 장마가 긴 해는 참깨 농사가 어렵지요. 손수지은 참깨로 건강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