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내 맘대로 죄짓고 살겠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안심하고 마음껏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을, 그 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미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니까 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은 돈이 만족을 준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입니다.
죄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엉뚱한 데서 그 빈 공간을 채워보려 하는 몸부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너는 죄를 마음껏 짓고 있고 거룩함을 보이지 않으니 구원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진이며 오진을 했기에 해결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바리새적인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너의 행동을 볼 때, 너는 구원받지 않은 게 분명하다!'니요?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삼상16:7).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동만을 보고 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문장 안에 "그러니까 죄 마음껏 짓고 살아도 된다."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변화되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 그러니까 내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행동으로 정체성이 정해지지는 않습니다. 태어나 보니 한국인이 듯이,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 보니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는 정체성이 먼저입니다.
"태어나 보니 한국인이고 한국인 국적을 가졌으니 이제 마음껏 동남아 사람처럼 살아야지." 이것은 한마디로 정신 이상입니다. (동남아 비하 아님) "은혜로 구원받아서 의인이라고 하니까 이제 마음껏 죄짓고 살자." 이것도 정신 이상입니다.
사실, '죄를 짓자'라는 생각은 '나는 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나는 죄인이니까 죄를 짓자'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남자로 인정받았으니까 이제 마음 놓고 여자로 살자'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없듯이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으니까 맘껏 죄짓고 살자'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마음껏 죄짓자는 사람에겐 그 사람의 진짜 정체성이 의인임을 알려줘야 합니다. 혹시 그 사람이 자기는 자기 정체성을 안다고 한다면, 모르면서 아는 걸로 미혹돼 있는 상태거나 지식으로는 알지만 믿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너의 행동을 볼 때, 너는 구원받지 않았고 그러니까 지옥행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진만 일삼는 실력 없는 의사와 같은 발언이고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실까요? 물론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내가 동남아 사람처럼 살기를 원치 않고한국 사람처럼 살기 원하시듯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란 의식이 없이는 한국인으로 살 수 없듯이 내가 의인이란 의식 없이 의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란 우리의 행동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만으론 안 되고 뭘 더해야 한다'는 논리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부터 있어왔던 정말 어리석은 주장들입니다. 도대체 뭘 더해야 한다는 걸까요? 갈라디아 교회는 할례를 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행위가 끼어들면 아주 복잡해집니다. 자, 들어보십시오. 예수만 믿어선 안 되고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면, 어제 믿고 내일 할례 받으려고 했다가 오늘 죽은 사람은요? 아니면 너무 어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요? 자, 그리고 제일 어리둥절한 부분은 이겁니다. 여자들은요? 어떻게 할례를 받습니까? 할례를 받을 신체기관이 남자들에게만 있는데 그럼 여자는 다 지옥간단 말입니까? 이렇게 믿음 외에 행위가 끼어들면 복잡해지는 이유는 그 논리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누군지 아는 자들에게서는 거룩한 행동이 자연스러운 열매로 맺힙니다. 여자가 여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듯 내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 믿는 자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거룩한 행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 노력도 하라고 성경은 말을 합니다. "너의 정체성이 이러니까, 이제 이렇게 살아라" 바울의 서신은 모두 그런 내용입니다. 1, 2, 3장이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4, 5, 6장은,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살아라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바른 순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복음의 반대이며 그렇게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내가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된 것을 알고 깨달아야 의로운 행동이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 열매는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시작점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드러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나의 행동을 보고 나의 구원 여부를 판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who를 알면 do가 됩니다. being이 완성되면 doing이 나와야 진짜입니다. 즉 정체성이 굳건해 지면 거룩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에 우리의 행함은 중요치 않다."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는 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완성하신 일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아 의인이 되었으니 앞으로 의인답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