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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인도하시는 하나님, 경배 받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1-1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aGLNPyg-t_I
본문은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께 경배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동방은 페르시아이며 지금의 이란입니다. 그들은 별을 연구하던 중에 특이한 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민수기 24장에 보면 메시야의 별이 나오는데 그들은 이 별이 이스라엘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경배하러 왔기 때문에 당연히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들의 말을 듣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유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미가서 5:2의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헤롯왕은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를 찾거든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박사들은 왕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그들을 앞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헤롯왕에게로 가야 하는데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동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설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통해서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경배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1. 인도하시는 하나님
동방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을까요?
1)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때 남아있던 유대인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물었던 이유는 그들이 동방에서 메시야의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별이 민수기 24:17에 나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발람선지자의 예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발람 선지자가 환상을 봤습니다. 그 환상은 발람 시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일이 이니라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자기가 사역하던 때보다 약 1,450년 후의 일을 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이 한 말씀을 붙잡고 별을 연구하다가 메시야의 별을 보고 예수님께로 가게 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야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갔지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것은 성경학자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은 헤롯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미가서 5:2 말씀에 근거해서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방의 박사들은 성경 미가서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아서 베들레헴에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의 인생의 등불입니다. 우리가 캄캄한 세상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19:105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가 가야 하는 길을 보여주는 등이요 빛입니다.
2) 지성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머리를 장식품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머리를 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머리를 의지하는 것이 문제이지 머리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왜 지혜를 주셨겠습니까?
시편 53:2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지각은 히브리어로 lk'c;(사칼)이라는 말인데 ‘지혜롭다, 총명하다, 지혜롭게 행하다’의 뜻으로 지성적인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악을 분별하기 위하여 성경도 주셨고 양심도 주셨고 지성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성의 인도를 받기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5:14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 말씀에 보면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각은 영적 감각을 말하며 참된 통찰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통찰의 의미는 ‘전체를 환하게 내다봄. 예리하게 꿰뚫어 봄’의 뜻으로 지성적인 부분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페르시아에서 메시야의 별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로 향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분의 별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한 판단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방의 박사들을 지성으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하면서 지성도 타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지성을 사용해야 하지만 반드시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들이 민수기 24장의 말씀만이 아니라 미가서 5장의 말씀까지 알았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입니다. 인간 지성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선생 된 자들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겠다고 세상과 담을 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사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합니다.
4) 초자연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향하던 동방의 박사들은 메시야의 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별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였고 예수님이 계신 집에서 멈췄습니다.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인도하심이었습니다.
5) 꿈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12절에 보니 그들은 꿈에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서 다른 길로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자기도 예수님께 경배할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박사들을 꿈을 통해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한두 번도 아니고 338번이나 나옵니다. 김상복목사님은 사람들이 잘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이렇게 여러 번 말씀하신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또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인도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도하심인 이유는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44을 보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예수님에게 가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나를 다시 살리십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인도함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 로마서 8:14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8:28과 연결해서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해석이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런 시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보면 지금 형편에 의하여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좋아 죽으려고 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힘들어 죽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현재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범사를 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오래전 한 목사님이 백령도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배에 타려고 하니 경찰이 안 된다며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배에 너무 많이 타서 더 이상 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흥회를 인도할 강사라서 꼭 이 배를 타고 가야 됩니다.”, “안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야 됩니다.”, “못 갑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경찰을 확 밀어내고 배에 뛰어오르려 하는데, 경찰이 목사님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사님이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의 온몸과 가방이 물에 다 젖었습니다. 여관으로 돌아온 목사님께서 젖은 성경을 말리고 있는데,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경찰관이었습니다. “목사님, 제게 감사하세요.”, “무슨 말이오? 감사는 무슨 감사요?”, “목사님, 목사님께서 타려던 배가 침몰했어요. 풍랑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죽었답니다. 저 때문에 목사님이 산 줄 아세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 목사님처럼 우리가 가는 길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배에 타려고 하다가 바다에 빠진 것처럼 문제가 꼬일 때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속상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고 보니 배에 타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인도십니다.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경배 받으시는 예수님
오늘 설교에서 두 번째로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경배 받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동방의 박사들의 나이가 몇 살 정도 됐는지 모르지만 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갔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예루살렘이 소동을 했지만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런 시대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여명의 학생들에게 단어 연상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교수는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어보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적어낸 대답은 ‘성탄 추리’, ‘가시나무’, ‘선물’, ‘칠면조’, ‘휴일’, ‘캐롤’, ‘산타클로스’ 등등 모두 각각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적어낸 학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온 세상이 축제 분위기로 들떠있지만 정작 예수님께 예배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1년 이상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당시에는 길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험한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물도 없고 식량 구하기도 어려운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강도를 만나도 구해줄 사람도 없는 무서운 길이었습니다. 교통수단이라야 낙타를 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멀고 험한 길을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드린다는 단 한 가지 일념으로 여행한 것입니다.
경배가 뭡니까? 예배입니다. 2절과 11절에 보면 경배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헬라어로 proskunevw(프로스퀴네오)입니다. 뜻은 ‘예배하다, 경의를 표하다, 경배하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저는 최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기는 했지만 저를 만나서 고난의 길을 걸은 것을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날 설교에서 여러 가지 은혜를 받았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9:4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을 말했습니다. 그들의 특권이 뭡니까?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입니다. 유대인의 특권 중에 하나가 예배였습니다. 예배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여기 보면 마리아는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신앙이 훌륭했고 하나님께서 선택한 특별한 분이지만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드린 선물 속에 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세 가지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린 것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대단히 가치있는 것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있는 헌금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도 어쩌다보니 그것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선물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1)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황금은 왕권을 의미했습니다. 역사가 세네카는 당시 중동에는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왕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선물이 황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2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본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성경에서 약속한 왕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는 다른 왕이십니다. 골로새서 1:16을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의 왕은 피조물인데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과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까지 창조하신 분입니다. 세상 임금은 자기 나라만 다스리는데 예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권불십년이라고 세상에는 영원한 왕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크기는 거대한데 특이한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작습니다. 문의 높이가 1m 20cm 밖에 되지 않습니다. 원래는 그 문이 높고 넓게 지어졌는데, 말을 타고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좁고 낮게 수리해 놓았습니다. 문이 작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홀로 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목사라고 자식이 아버지 덕에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누구 때문에 설 수 있고 누구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람 때문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은 머리를 숙이는 겸손이 동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탄생교회에 들어가는 사람은 문이 낮기 때문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처럼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만이 나의 왕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단독자로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신앙이 됩시다.
2)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유향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 중에 가장 많은 제사가 소제입니다. 소제는 다른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감사드리며 드리는 일종의 감사 제사였기에 모든 제사 후에 거의 소제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소제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유향이 필요했습니다. 제주는 유향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랐습니다. 불에 사르기 때문에 화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연기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성전의 분향단 위에는 늘 향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습니다. 향을 내는 향품은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으로 섞어 버무려 태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향은 24시간 타고 있어야 했습니다.
강문호목사님은 청진기라고 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의사이고, 망치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목수이듯이 유향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유향은 제사장이 사용하는 것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유향을 선물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데 이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향하여 길을 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고 돌아가시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버린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 내용을 히 10:19-20에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5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3) 대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몰약은 시스터스(cistus)라고 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진입니다. 몰약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몰약으로 시작하여 몰약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몰약을 선물로 받으셨고 죽으셨을 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도 몰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죄를 범한 인간은 죄의 값을 지불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동방의 박사들은 예언적인 의미로 아기 예수님에게 몰약을 선물로 드린 것입니다.
윌리엄 홀만 홀타가 그린 [죽음의 그림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전에 목수일을 하셨는데 일을 하시다가 너무 피곤하셔서 기지개를 켜는데 벽에 그림자가 비쳐졌습니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기에 그림자는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 십자가를 마리아가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태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사셨으며,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속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히 경배 받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두 가지를 나눴습니다.
1.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을까요?
1)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 지성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3) 선생 된 자들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4) 초자연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5) 꿈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어떤 상황이 되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경배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경배한 이유는 그들의 선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황금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2)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을 의미하며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연결하시는 사람입니다.
3) 대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몰약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나의 인도자로 믿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왕이신 예수님을 예배합니다. 나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배합니다. 나는 대속자이시신 예수님을 예배합니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