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북도 번성했던 남한강변 목계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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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3:07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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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성했던 남한강변 목계나루
조선 후기의 5대 하항 중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에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 백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었다. 1948년에 하항의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마포 다음가는 한강의 주요 항구였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라고 하였다.
목계나루
목계는 조선 후기의 5대 하항 중 하나로, 백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열차가 개통하고 목계교가 건설되면서 지금은 번성했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울시에서 편찬한 『한강사』를 보면 “목계는 강 건너 가흥리를 마주 보고 있는데 가흥에는 남한강 수계(水系)에서 가장 큰 세곡창이 있었다. 충주, 음성, 괴산, 청안, 보은, 단양, 영춘, 제천, 황간, 영동, 청풍, 연풍, 황산의 13개 고을에서 거둬들인 세곡이 이 목계나루에서 배에 실려 서울의 마포나루로 운송되었다. 그래서 이 나루에는 항상 51척의 선박들이 배속되어 있었으므로 남한강에 있는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도 가장 번잡한 나루였다”라고 쓰여 있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보통은 한 달에 한 번쯤 목계장이 섰는데, 날이 가물어 물길이 시원치 않거나 날이 추워 강이 얼어붙어 배가 오지 않을 때에는 두 달에 한 번씩도 섰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충북선 열차의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 기능이 완전히 끊기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 목계반점, 목계슈퍼 등 상호만이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신경림은 그의 시 「목계장터」에서 번성했던 목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허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의 서편은 곧 중원군 소태면 노량리 청계산 자락에 있는 청룡사(靑龍寺) 골판짜기(동학(洞壑))다. 청룡사는 공민왕 6년에 창건되었다가 폐사되었다. 조선 중기에 충주목사를 지낸 이만영은 폐사 후 이 절을 찾아 “걸어서 청룡사에 도착하니 절도 한가롭고 스님 또한 한가롭다. 어찌하여 종소리 들리지 아니하는가. 아마도 어지러운 세상 흘러나 갈까 두려워함이라”라는 시를 남겼다.
서쪽으로 운계천 건너가 강원도 원주다. 동쪽은 북창에서, 서편은 청룡사까지를 강북 여러 마을이라 부른다. 강을 임한 경치가 매우 좋고 땅에는 사과나 담배를 심지만 남한강 남쪽에서 달천 서쪽까지의 기름진 땅에는 미치지 못한다.
청룡사 위전비
청룡사는 고려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전비는 숙종 18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청룡사의 창건과 경영 등에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목계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는 내창촌은 조선시대 사창(현재의 면과 같은 행정단위인 사에 두었던 곡물 대여 기관)이 있었던 곳으로, 천년에 걸쳐 이름난 마을이다. 산중에 들판이 트여서 바람기가 조용하고, 지역이 매우 넓어서 여러 대를 사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가춘리 미례골은 예로부터 환란이 일어났을 때 피난처였고, 중원군 엄정면 괴동리의 억정사(億政寺)에는 보물 제16호로 지정된 대지국사비(大知國師碑)가 있으며, 괴동리 밤밭 서쪽 앞산에는 대한제국 말에 명성황후가 감싸주었던 무속인 진령여 대감이 지은 암자인 백운암(白雲庵)이 있다.
청풍의 서편에 있는 황강촌은 수암(遂庵) 권상하가 살던 곳이다. 권상하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송시열의 문인이다. 남인이 정권을 잡자 관계 진출을 단념했던 그는 청풍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득세하면서 송시열이 제주에 유배되자 제주로 달려가 이별을 고한 뒤 의복과 서적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송시열이 정읍에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화양동 서원에 만동묘와 대보단을 세워 명나라의 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권상하는 그런 의미에서 송시열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한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에 있는 보각국사의 묘탑이다. 사리공에 사리와 옥촛대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석등과 사리탑과 탑비를 나란히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성했던 남한강변 목계나루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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