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대만 식민사
17세기의 스페인은 이미 더 이상 중천에 뜬 해와 같은 세계제국이 아니었다. 다만 네덜란드의 굴기와 포르투갈의 굴기로는 이베리아의 글로벌체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광활한 미주대륙과 필리핀영지를 가진 스페인은 계속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상대의 발걸음을 따라 이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대만을 향한다.
계획은 항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경제모델의 쇠퇴로 인하여, 스페인의 대만경략은 너무나도 빨리 끝이 난다. 네덜란드인들이 벌인 기륭(基隆)전투는 그저 이 재난을 끝장내는 최후의 일격일 뿐이었다.
16세기부터, 스페인의 해외사업의 중심은 미주지역이었다. 그들은 현지에서 넓은 영토를 확보했을 뿐아니라, 페루의 은광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제국이 된다. 비록 군사작전은 바라던대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스페인인들은 확실히 미주의 백은으로 세계를 바꾸어 버린다. 신교도국가의 굴기, 오스만투르크의 쇠퇴와 대명의 중흥개혁은 그 본능적인 반응으로 일어난 시대의 변화국면이었다.
극동에서 스페인인들은 1495년에 체결한 <토르데시야스조약(Tratado de Tordesillas)>에 근거하여 성공적으로 남양지역의 동부를 지배한다. 멕시코등지에서 출발한 2세대 정복자들은 여송(呂宋, 필리핀의 루손섬)의 대도시 마닐라를 점령하고, 보르네오제국의 수도를 점령한다. 미주에서 온 백은은 페루의 항구를 떠나, 괌등 중간기착지를 지나 현지까지 도착한다. 동아시아대륙에서 온 상인은 1567년 융경개관(隆慶開關)후 마닐라에 도착하여 직접 무역한다. 저명한 태평양항로가 이때부터 확실하게 개설된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 네덜란드인들이 동서에서 동시에 쇄도해 들어온다. 그리하여 확립된지 1세기에 미치지 못하는 남양국제무역은 철저히 교란된다. 빈번하게 선단을 보내어 습격하고, 아시아의 지방통치자들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그들은 스리랑카와 남양의 핵심지역에 세력범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정기적으로 마카오와 마닐라 두 항구를 봉쇄하는 것을 통하여, 명나라와의 국제무역을 철저히 독점하고자 한다. 스페인제국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바빠서, 해외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은 고귀한 시간을 벌어, 철저히 여송 등지를 제한한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부대는 바타비아에서 출발하여, 성공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던 대만에 상륙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질란디아(Zeelandia, 熱蘭遮城)을 건립하기 시작하자, 마닐라에 있던 스페인인들은 초조해진다. 왜냐하면 네덜란드인들이 대만에서의 세력을 확대하면, 하문(廈門)에서 마닐라로 오는 항로를 더욱 손쉽게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외무역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는 필리핀에 있어서 아주 심각한 타격이 된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초기의 포르투갈인들에 비하여 현지인들에 대한 태도가 훨씬 강경했다. 약간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로 무력을 쓴다.
그리하여, 마닐라당국은 반드시 방법을 강구하여 새로운 전진기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 태평양항로의 한쪽 끝이 정체된다. 그 나비효과는 필리핀과 미주에 미칠 것이고, 나아가 스페인본토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스페인인들은 비로소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병력에서 다시 인원을 빼내어, 대만북부의 거점을 건립하고자 시도한다.
1626년, 2척의 대형장범선(桨帆船) 전함이 호위하는 12척의 중국식 범선이 마닐라항구를 출밯한다. 100여명의 스페인관리, 병사, 선교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원정군구성원은 여송의 토착인들이었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대만동북부의 돌아 지금도 중요한 항구인 기륭(基隆)을 발견한다.
처음에 스페인인들의 대만경략은 순조로웠다. 기륭항구의 입구에서 그들은 방어에 적합한 작은 섬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Santisima Trinidad)라고 부른다. 최초의 정복자들은 섬에 마름모꼴의 요새를 건설한다. 이 곳을 대만개척의 기지로 삼는다.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이 전략요충지를 방어해낼 수 있었다.
3년후인 1629년, 스페인인은 이미 대만서북부 연해를 항해한다. 그들은 내륙에 들어가기 아주 적합한 담수하(淡水河)를 발견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담수(淡水, 단수이)에 두번쨰 요새인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요새를 건설한다. 스페인 병사들과 선교사들도 산토 도밍고를 기점으로 하여,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간다. 한편으로 토착인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장했다.
일부 사람들이 보기에, 이 새로 건립된 스페인의 대만식민지는 이미 마닐라를 대체할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원인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닐라 자체는 스페인의 미주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미주의 백은이 유입되지 않으면, 마닐라는 하문과 마카오의 상선들이 오도록 할 요인이 없었다. 향료군도에서 대량으로 상품을 가져올 수도 없었다. 이와 비교하면, 담수는 지도에서의 위치가 더욱 뛰어났다. 거기는 스페인이 통제하는 괌에서 더욱 가까웠고, 동아시아의 또 다른 은광소재지인 일본에도 가까웠고, 질란디아의 네달란드함대에게 항로가 쉽게 차단당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만일 순조롭게 진행되었더라면, 스페인인들은 담수를 중심으로 큰 범위의 영지를 건립했을 것이다. 스페인의 대만식민지도 미주총독지역의 주요무역대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닐라를 오히려 자신들의 경제적 부용(附庸)으로 삼을 수 있었다. 대만섬도 충분한 면적이 있어 개척자들은 섬에서 식량산업과 경제작물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록 스페인귀족관료 내부에서 이는 구이익분배문제에 영향을 주는 큰 일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장악한 왕실에 있어서는 전혀 손실이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담수에 계속하여 사람이 들어오고 화물이 들어온다면 서남해안의 네덜란드인들을 상대하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은 금방 발견한다. 그들은 대만개척에 필요한 노력과 댓가를 저평가했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심각하게 고평가했다. 계획을 작성한 사람들은 역사적 요인을 경시했다. 대만은 지금까지 해상세력이 눈독을 들이던 곳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럽상선이 이미 정기적으로 일본에 도착하는 시대에 전체 섬의 대부분 지방이 아직 미개발상태여서, 이전이 네덜란드인이나 이후의 정성공집단이나 모두 대량의 인력을 투입하여 토지를 개간해야 했고, 바라던 만큼의 수익을 얻어내지 못했다. 인력자원이 양자보다 못한 스페인인들에게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전체 식민지 존재기간동안 담수등 요새의 식량은 여전히 마닐라에서 수입해야만 했었다.
스페인인은 또한 발견한다. 현지의 부락은 그들이 쉽게 지배하기 어렵다는 것을. 외부세계와의 연락이 결핍되어 있어서, 토착민들의 문화수준은 여송지구보다 훨씬 못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을 동원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통제, 교육, 지도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다른 부족간의 충돌에도 간여해야만 했고, 힘은 들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중재자역할도 해야 했다. 이런 일들을 완성하기 전에는 대량의 토지에 인력을 투입하여 개발하기는 어려웠다. 현지의 화물을 수출하려는 바램은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반대로, 기후가 좋지 않고, 토지가 척박하여 열정을 지닌 식민자들을 더 많이 데려오기도 어려웠다. 발전효율이 남쪽의 네덜란드인에 비하여 좋지 않게 된다.
스페인제국의 해외식민모델은 많은 정도에서 담수등 거점의 발전을 제약했다. 현지가 이미 흡인력과 경쟁조건이 없는데, 그들은 시종 더 많은 영나라유민, 여송인 혹은 일본인들이 새로운 땅으로 와서 개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얼마 되지 않은 인구로 환상에 의존하여 성공하려는 단일한 경제모델로 제대로 개발하지를 못한다. 미주총독지역의 스페인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지리적 조건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해지는 담수에서 오는 물건이, 마닐라에서 오는 물건보다 가격이 비싼 것이다.
이런 상호작용의 실패로 스페인의 대만식민지는 십여년동안 실질적인 발전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 현지의 수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수의 상층부는 자신이 지배하는 좁은 지역을 가지고, 태평양 양안의 삼각무역을 진행하려고 하게 된다. 이처럼 현지인들을 중시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외부경제요소만 고려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 담수는 마닐라에 비교할 수 없게 될 뿐아니라, 심지어 스페인의 궁정에서는 손해만 보는 군더더기로 여기게 만든다. 미주의 은광이 고갈되자 담수의 경제도 금방 쇠락한다. 일단 마닐라로부터의 양식공급이 조금만 늦어져도 식량문제가 발생한다.
스페인 대만식민지의 최대적수는 질란디아의 네덜란드인이다. 이들은 계속 북부의 국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적수인 스페인, 포르쿠갈과 마찬가지로, 아주 유한한 병력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각 전장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담수당국이 강대해지면, 네덜란드인은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
1640년이후, 스페인의 대만식민지가 쇠락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된다. 크게 기대를 걸었던 산토 도밍고는 인력이 철수한다. 많은 사람들은 필리핀으로 되돌아갔다. 과거에 대만에 상주하던 소규모함대로 같이 사라진다. 그저 최후의 400인만 남아서 힘들게 기륭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1641년, 본부를 질란디아에 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번은 스페인거점에 대한 시험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스페인인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만총독을 맡고 있던 파울루스는 사전에 기륭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의도를 상대방에게 알린다. 이번 원정에서 비록 패퇴하였지만, 네덜란드인들은 분명히 보았다. 상대방의 번격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1642뇬 8월, 진정한 네덜란드원정군이 기륭으로 간다. 4척의 갤런범선과 7척의 소형전함의 엄호하에, 369명의 병사들이 섬에 성공적으로 상륙한다. 그들이 직면한 것은 단지 400명의 스페인인과 여송 토착민으로 구성된 수비군이다. 비록 스페인요새의 방어수준이 낮지는 않고, 먼저 섬을 차지한 스페인인들이 고지를 선점하고 있기는 했지만, 포병진지가 완성되면서, 공격의 화력이 계속 산티시마 트리니다스 요새 내부로 퍼부어진다. 근대의 마름모꼴 요새체계에 대하여 이는 가장 치명적인 공격수단이다.
6일간의 항전을 거쳐, 요새내부의 스페인인들은 투항한다. 깃발과 모든 화포를 내놓은 후 인원들은 모조리 마닐라로 돌아가는 배를 탈 수 있도록 허락받는다. 시간이 너무 짧아서, 필리핀에서 증원행동을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비록 필리핀총곡이 기륭을 잃은 것으로 문책을 받기는 하지만, 스페인인들은 이후 전혀 반격계획같은 것은 세우지 않는다.
네덜란드인은 기륭을 점령한 후, 현지가 그다지 경영가치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옛날의 스페인요새의 규모를 축소시켜, 상징적인 방어부대만 남겨둔다. 더욱 일찌기 포기한 담수에 그들은 새로 요새를 만든다. 다만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인력자원이 부족했다. 요재 자체는 나중에 정성공과 만청의 군대가 접수하고, 마지막에는 19세기에 영국영사관 건물이 된다.
스페인 대만식민지의 신속한 쇠퇴는 전략적으로 본말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은 자신이 가진 여러 문제로 인하여, 해외경쟁분야에서 네덜란드 도전자만큼 강하지 못했다. 대만북부의 식민방안은 그저 본능적인 반응에서 나온 미봉책일 뿐이었다.
그래서 산토 도밍고는 확장될 수 없었다. 상인들을 질란디아나 마닐라로 유인한 것은 여전히 미주 혹은 일본의 백은(白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