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21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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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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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xHEhFaRt0M (오준혁 엘리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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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한때 본부에 머물면서 각종 수도회 안팎의 이벤트를 전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뿐 아니라 살레시오 가족들, 청소년들과 교우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들을 기획하고 주관했었는데, 힘겨운 일이었지만 보람도 컸습니다.
대성당을 꽉 채운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에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했습니다. 기획했던 행사가 잘 치러지고 나면 만족감에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사가 마음먹은 대로 술술 순조롭게 치러지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기도가 부족했던지, 아니면 홍보가 부족했던지, 그도 아니면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던지, 행사 시작 시간은 다가오는데, 썰렁한 행사장 분위기에 속이 바싹 들어가던 순간들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들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정성껏 마련된 잔칫상도 준비되었고, 이제 아들의 혼인 예식 시작이 코앞인데, 연회석이 텅텅 빈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초대장을 보냈건만, 어떤 사람은 밭으로 일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버렸습니다. 임금의 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을 거나하게 잘 차리시는 작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라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앞에 이스라엘 백성 측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정면으로 대놓고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듯합니다. 이번 초대는 가장 결정적인 초대, 마지막 초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또 다시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절의 이유가 너무나 허무맹랑해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국행 마지막 열차를 준비시켜놓고 지금 당장 결단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에 현혹된 이스라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끝끝내 열차에 올라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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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BAU_2fED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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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이유: 초대받은 자와 선택받는 자>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아무래도 얼굴에 검은 가면을 쓴 ‘다스 베이더’일 것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본래 제다이였다가 악의 힘을 이용하여 악의 주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래 ‘아나킨 스타이워커’입니다. 아나킨은 제다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콰이곤은 아나킨 안에 엄청난 힘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우주의 평화를 이끌어줄 예언된 자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제다이 수장들에게 그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요다 스승만은 그의 마음 안에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를 못 볼까 봐 두려운 거니?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낳지.” 이 말은 자신들을 따르려면 세상에서 소중한 것을 잃을 걱정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나킨은 이 규율을 어기고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나쁜 무리에게 심하게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분노에 찹니다. 다시는 사랑하는 이를 잃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의 마음에서 이런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본 우주 공화국 부의장은 그에게 어둠의 힘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합니다. 아나킨은 처음에 어둠의 힘을 이용하는 공화국 의장을 자기 스승 중 한 명에게 이야기하고 둘이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펠퍼타인 의장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너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선택을 해야 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메이스 원투가 그를 찌르려고 하자 그를 쳐냅니다.
펠퍼타인 의장은 아나킨 덕분으로 살아나 공화국을 독재 체제로 이끄는 다스 시디어스가 됩니다. 아나킨은 완전히 악한 사람이 되어 제다이를 모조리 죽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자기 아내를 갈라놓으려 하는 스승 오비완과 결투하게 되고, 그는 팔다리를 잃고 심한 화상을 입습니다. 그를 다스 시디어스가 다시 살려내 검은 옷을 입힌 것입니다.
제다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다이가 되도록 부르심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세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하지만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는 신랑에게 합당한 신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았더라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결국엔 쫓겨나서 부르심을 거부한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부른 많은 아이 중 그분을 닮으려고 의사가 된 이들이 많습니다. 그냥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주신 이를 닮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가 되어야 혼인 예복이 입혀집니다. 혼인 예복은 신랑에게 합당한 순결한 신부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세례만 받았다고 멈추지 말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마지막 때 아무도 낙오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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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학생 때입니다. 가을이면 북한산으로 교구 신학생들이 소풍을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산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삼겹살, 김치찌개, 소주 한잔은 산행의 피로를 풀어 주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모여서 장기자랑을 하였습니다. 마칠 때는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가’를 부를 때도 있었고, ‘임쓰신 가시관’을 부를 때도 있었고,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공동체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수들의 공연장을 가면 한국의 관객들은 가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이터를 켜거나 야광봉을 들고 공연하는 가수와 함께하려고 합니다. 외국의 가수들은 한국 관객들의 ‘떼창’에 매료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가수는 노래하고, 관객은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가수와 관객이 공연을 통해서 하나가 되고, 함께 즐기는 것이 한국의 공연 문화입니다. 미국에서 야구경기를 두 번 보았습니다. 응원의 열기는 한국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한국은 야구경기에서도 단순히 관람하는 것을 넘어 응원을 통해서 선수들과 하나가 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한국은 미국과 다른 모습을 봅니다. 피정, 교육, 미사와 전례가 있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본당에 다양한 행사가 있습니다. 전 신자 도보성지 순례를 가기도 합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도 수리산 성지, 절두산 성지를 전 신자가 걸어서 순례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 구역별로 음식을 준비해서 나누었습니다. 전 신자가 기차를 타고 성지순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갈 수도 있지만 함께 가면서 친교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금마련 바자회를 하기도 했고, 체육대회를 하기도 했고, 본당의 날 행사를 하기도 했고, 전 신자가 바닷가로 여행을 가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매년 여름캠프를 갔습니다. 구역별로 연도대회, 성가 경연대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장례가 나면 빈소로 가서 함께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가 함께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도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행사가 있습니다. 장례가 나면 빈소에서 연도를 함께 합니다. 야외미사도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가 끝나면 친교실에서 음식을 나눕니다. 한국인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전례의 엄숙함을 따르기도 하지만 친교와 나눔을 통해서 신앙의 기쁨을 나누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종교는, 신앙생활은 어쩌면 하느님과 사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선으로 넘어오신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감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넘어서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곤 했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잘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이 오면 기쁘게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복을 잘 갖춘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름은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하는 재물입니다. 기도, 자선, 희생, 나눔입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예복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정결, 가난, 순명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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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1-14 :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잔치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모두 참석한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처음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나 오려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도들을 보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절) 임금은 살인자들을 없애고 박해자들을 죽여 버린다. 또 그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그들은 지옥의 영원한 불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잔치가 아무도 없이 치러질 수는 없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8-9절)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삶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이다.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분이 지니셨던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절)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갖추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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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예수님은 굶주리고 있는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냥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6,27)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가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배고프지 않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 먹겠다는데 강제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인간들을 하느님의 힘으로 고쳐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생긴(로마 5,12)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으니 전부 다 불치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냥 그렇게 앓다가 죽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도 있고, 또 자기가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사형 집행만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의 죄를 사면해 주고, 감옥에서 풀어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사형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형수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면도 거부하고 석방도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이고, 우리를 그 나라로 데려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는데, 그 나라에 가면 사랑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고, 사별의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를 거부하면서,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마태 11,28)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냥 멍에와 짐에 묶여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가 멍에와 짐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는 “구원과 해방을 줄 테니 와서 받아라.”라는 부르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잔치’로만 생각하면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순한 잔치 초대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한 갈림길에서 ‘사는 길’을 알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요한 6,68) 응답하면 살 것이고, 거부하면 죽음과 멸망을 향해서 갈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인생 전부를 걸고 즉시 선택해야 하는, 글자 그대로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누구에게나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 22,2-5)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는 길’을 버리고 ‘죽는 길’을 선택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영혼 구원에 관한 일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관한 일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에 관한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농사짓는 일과 장사하는 일이 왜 ‘죽는 길’인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온 세상’을 버려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는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받아먹는 사람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아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6절과 7절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은 심판 때에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8-10)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비유의 표현만 보면, 유대인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을 초대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구원사업의 순서, 또는 복음 선포의 순서를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 대신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창세 12,3) <11절-13절의 ‘혼인 예복에 관한 이야기’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 직접 연결되지 않는, ‘신앙인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응답이 완성됩니다. 바로 그것을 ‘혼인 예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는"(루카 14,30)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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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비유의 중심 주제는 늘 하느님 나라이고, 이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잔치로 비유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혼인 잔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저녁 식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언제나 문을 잠그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의 잔치는 기쁨과 무상성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잔치에서 이런 무상성의 특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잔치를 연다고 초대하면 벌써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무엇을 들고 가야 하나?’ ‘얼마쯤 넣어 가야 하나?’ 나아가 ‘꼭 가야 하나?’ 등의 별의별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요즘 세상에서 공짜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공짜라고 해 놓고 실제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무상의 초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성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두 불러오라는 비유 속 주인의 말은 속상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이가 초대받아 풍부하게 나누고 먹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잔치는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복을 마련하는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하느님 나라의 삶의 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잔치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거기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욕심만 차리고 저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 아는 이들 속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옷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 옷, 곧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양식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 음식을 즐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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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하느님의 초대>
성령기도회나 ME 강의를 나가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예상만큼 모이지 않아 준비한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절해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나마 오기로 약속한 이들마저 펑크를 내 이렇게 작은 수로 모임을 진행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봉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처럼 황당하고 허망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인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다 늦기만 하여도 화가 날 터인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하찮은 일상사를 돌보느라 오지 않고,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니 이런 모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이라면서도 하느님에게 거저 얻는 구원이기에 우리가 너무 값싸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 하도 마음 좋은 분이시라 너무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억지를 부릴 줄 모르시는 우리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며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 상처받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기회를 주시는 우리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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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강우 클레멘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임금의 아들은 그리스도이며, 첫 번째 나오는 종들은 예언자들이고 그 뒤에 나오는 종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잔치 풍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이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되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 아들의 잔치에의 초대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그들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 받음은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저 주는 은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외면하기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참된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종들에게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는 임금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 선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런 사랑과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하는 것과 우리 신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나 창녀나 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 초대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되어 있었으며, 이런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시켜 설명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베푸는 천상잔치에 어울리는 옷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회개와 굳은 신앙의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잔치는 기쁨의 잔치이지만 또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십자가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을 우리는 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지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란 싫은거고 없으면 좋은거고 나와는 상관없어야 하고, 그냥 장식품으로만 남아 나를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길을 내 안에서 걸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늘 우리들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에 걸맞는 삶을 예수님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오늘 하루도 기쁘게 생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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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임금의 아들은 그리스도이며, 첫 번째 나오는 종들은 예언자들이고 그 뒤에 나오는 종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잔치 풍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이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되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 아들의 잔치에의 초대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그들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받음은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저 주는 은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외면하기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참된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종들에게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는 임금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 선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런 사랑과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하는 것과 우리 신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나 창녀나 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 초대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되어 있었으며, 이런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시켜 설명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베푸는 천상잔치에 어울리는 옷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회개와 굳은 신앙의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잔치는 기쁨의 잔치이지만 또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십자가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을 우리는 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지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란 싫은거고 없으면 좋은거고 나와는 상관없어야 하고, 그냥 장식품으로만 남아 나를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길을 내 안에서 걸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늘 우리들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에 걸맞는 삶을 예수님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오늘 하루도 기쁘게 생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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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을 받거든>
마태오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부르심을 받거든>
하느님께서
부르실 거예요
하느님께서는
부르시는 분이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부르심을 받거든
그저 그러려니 말아요
부르심에 마땅한
사람이란 없으니까요
그러니 말이지요
부르심을 받거든
설렘으로 곱게 품어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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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인 예복은 마음의 옷>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치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맞은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보람과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이지만 은총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일에 핑계를 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부들은 혼인 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혼인 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 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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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잘살고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복한 집이 있습니다. 남편은 좋은 직장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녀들은 모두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재테크를 잘해서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정은 행복한 가정일까요?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회사 일 때문에 늘 바빠서 가정일에 소홀히 하고, 남편이 보기에 아내는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부모는 자녀가 전혀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간에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한 가정일까요? 만약 이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보였다면, 멀리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우울하고 답답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더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유럽에 가면 엄청나게 큰 성당들을 봅니다. 이 성당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당과의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즉, 성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앞의 문제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바빠서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여유가 될 때 열심히 하겠다는 공수표를 날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에만 집중하게 되면 결국 하느님을 보지 못해서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우선 유다인의 상류 사회에서는 잔치를 베풀고 친지들을 초청할 때 두 번에 걸쳐 초청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먼저 잔치 준비과정에서 일정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준비가 다 된 후에 승낙한 사람에게 또 다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잔치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절하면 커다란 실례가 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거절하는 사람에 대해 임금이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핑계는 모두 세속생활에 관한 사연이었습니다. 즉, 눈앞에 놓인 물질의 소유나 세상사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이어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라고 해놓고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혼인 예복은 바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비유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비록 자격 없음에도 구원의 잔치에 불렸지만, 그 잔치에서 즐기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생활이라는 예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예복도 챙겨 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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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삽시다>
- 초대받은 손님들이 되어 -
"착한 목자 주님을 닮게 하소서."
날마다 예수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바치는 화살기도입니다. 매일 일기처럼 쓰는 강론이며 때로는 참회록懺悔錄같은 회개의 고백같은 강론입니다. 강론을 쓰며 주님 안에서 위로와 치유를 받고 자신을 추스르며 바로 잡는 시간입니다. 어제는 “착한 목자 영성-사제는 사업가(businessman)가 아닌 목자(shephred)다-”라는 주제의 강론이었는데, 오늘 강론을 쓰면서 이대로의 어제 하루의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졌던 이후는 오전 1시 전후로 일어나 강론을 쓰는 것이 완전히 습관화되었습니다. 어제는 오전 12: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온힘을 다해 강론을 쓴 후, 하느님 은총에 우선 감사하지만, 독수리 타법에 많은 시간 참 힘들게 쓴 강론인데, 때로 이것뿐이 안되나 자괴감自愧感, 좌절감挫折感에 잠시 빠질때도 많습니다. 꿈속에 강론을 완성해 놓고 좋아하다 꿈깨어 허전한 마음에 다시 강론 쓰기도 부지기수입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를 삽시다-초대 받은 손님들”인데, 어제 저는 지인의 초대를 받아 하루를 지내고 오후 늦게 저녁기도 전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여 휴대폰 공간이 찼다하여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지우며 무수한 자연 풍경의 사진들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습니다. 가장 좋아하여 매일 산책시 찍은 사진은 주로 세 장면이었습니다.
수도원 정문에서 주차장까지 난 1.하늘길, 수도원 십자로 중앙 불암산 배경의 2.예수성심상, 그리고 불암산 배경의 단아한 수도원 3.성전, 셋이었습니다. 이 세 장면은 제 영혼 깊이 각인되어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이끄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로 하늘길을 통과해 주님을 뵈옵고 주님의 집에 머무는 삶을 상징합니다.
어제는 오전에 코로나 이후 처음 지인의 배려로 고맙게도 아파트 내 사우나 목욕탕 안에서 편안한 휴식시간을 가졌고, 오후에 만난 형제로부터 점심식사 후 기탄없이 솔직하게 쏟아내는 말을 수시간 경청했습니다. 코로나 이전 약 4년 전 일인데 저에 대해 얼마나 서운했던지 그때의 일을 다 토로했습니다. 들으면서 노년의 가난과 병고가 얼마나 심각한 사회문제인지 깨닫습니다. 물론 소수의 부자들과 고액 연봉자들이나 고액의 연금을 받는 분들에게는 여유있는 노년이겠지만, 대부분 가난한 이들은 병든 노구老軀를 끌고 70대 넘어서도 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형제가 마음에 담아놨던 어렵고 힘든 사정을 쏟아 놓고 싶어 참으로 모처럼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점심식사 후 그런 시간을 기대했는데, 가도록 했다는 것이었고, 그 서운함이, 한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노년의 어려움은 마땅히 사정을 털어 놓을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책보다는 우선 자기 말을 경청할 대상을 찾은 것입니다. 이래서 사제는 경청하는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결국 착한 목자의 사목 방문차 외출이 된 셈입니다. 어제 형제의 말을 장시간 들으며 깊이 공감하면서 많이 자신의 부족을 뉘우쳤고 부끄러웠습니다. 당시 이런 사정을 눈치챘다면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 들었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마음 깊이 사과했습니다.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한 형제가 고마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되어 착한 목자가 되어 형제의 진심을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귀원 후에는 정말 몸이 불편하고 피곤했습니다. 밤 12시 반에 일어나 계속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원장에게 사정을 메시지로 전한 후 저녁기도, 끝기도만 참석하고 저녁식사는 생략하고 쉬다가 끝기도 후 8시 넘어 즉시 잠자리에 들었다 깨니 8월18일 오전 1시, 일어나 강론을 씁니다. 바로 오전 고요한 밤시간은 주님의 하늘 나라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지내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하늘 나라 축제입니다. 고해苦海인생을 축제祝祭인생으로 바꿔주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 축복을 받는 미사시간입니다. 미사시간뿐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은 손님답게 믿음으로 깨어 기쁘고 당당하게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이들은 주님의 하늘 나라 초대 잔치에 이런 저런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없어 결정적 선택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자주 자문하는 질문입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 초대에 응답해 하늘 나라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삶은 선물이 됩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다', 이 또한 제가 간직하고 지내는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하늘 나라 잔치의 초대 은총에 응답하여 최선의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과제라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초대가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초대에 응답해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하늘 나라 잔치를 사는 데에 값싼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아 잔치에서 쫓겨난 이가 바로 부르심의 은총에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던 이를 상징합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예복을, 진선미眞善美의 예복을 갖춰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평상시 삶을 반영하는 예복이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보다 더 좋은 하늘 나라 잔치 예복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미사 참석때의 의복은 단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내면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모두에게 열린 구원의 문, 하늘 나라 잔치이지만 제대로 삶의 예복을 갖춰입은 선택된 이들을 적다는 것입니다. 새삼 경각심警覺心에 분발심奮發心을 지니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는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영적 탄력 좋은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제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오늘 지금 여기서 다시 새롭게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의 은혜로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일상에서의 하늘 나라 잔치이며, 결정적으로 실현되는 하늘 나라 미사 잔치입니다. 주님은 다음 은혜로운 주님 말씀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6,25-27,28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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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마태22,8)
<하느님의 초대!>
오늘 복음(마태 22,1-14)는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22,2)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상을 멋지게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초대 심부름꾼으로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과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마침내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혼인예복을 입고 오지 않은 이들을 호되게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그리스도인 답게 살자!'
예수님은 종종 '신랑'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교회와 그 구성원들인 우리는 '신부'에 비유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랑이신 예수님의 초대(부르심)를 받은 이들이고, 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예수님의 초대에 말로만 응답해서는 안 되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미사가, 그리고 받아 모신 성체가 '구원의 보증 수표'가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
내가 먼저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의 삶, 내가 먼저 회개하는 삶,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기쁨과 감사 속에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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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NkXmQISC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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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부르심이라는
핵심에
도달하는 길은
우리가
부르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부르심의 본질이
곧 선택이다.
부르심은
막을 수 없고
선택 또한
막을 수 없다.
선택된 이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이와같이
부르심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실천의 예복이
중요한 여정이다.
무엇보다도
실천이
따라야 한다.
실천의 선택이란
반성하며 희망하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선택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르심의 시간이다.
부르심이
부르심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선택 또한
아픈 것으로
드러난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부르심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선택이다.
같은 공간
다른 마음을
품고서는
부르심은
완성될 수 없다.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
비유의 이야기는
부르심에 충실한
이들의 나라이다.
아무리 좋은
초대도
우리자신이
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남의 잔치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잔치이다.
삶의 전부를
걸어야 만나게
되는 부르심의
핵심, 단 하나의
사랑이다.
단 하나의 사랑이
선택의 잔치에
들어오고 있다.
부르심 뒤에는
선택이 있고
선택 뒤에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이 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살게한다.
부르심에
감사하는
기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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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숨길 수 없는
불충한 우리들
모습입니다.
하늘 나라의
혼인잔치마저
거부하는 우리들
교만입니다.
교만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혼인잔치의
예복입니다.
내려놓음이
하느님안에서
갖추어야 할
우리의 참된
예복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최소한의 도리이며
최소한의 자세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은
이와같이 내려놓는
선택의 순간들입니다.
부르심은 자신을
내려놓는 선택입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내려놓음의
길입니다.
부르심은
내려놓음이며
선택은
내려놓음의
은총입니다.
내려놓음의
예복을 기쁘게
입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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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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