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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8
#요한계시록 #Revelation 22:14-15
14 自己 두루마기를 빠는 者들은 福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生命나무에 나아가며 門들을 通하여 城에 들어갈 權勢를 받으려 함이로다
"Blessed are those who wash their robes, that they may have the right to the tree of life and may go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
Beati, qui lavant stolas suas in sanguine Agni : ut sit potestas eorum in ligno vitæ, et per portas intrent in civitatem.
μακάριοι οἱ πλύνοντες τὰς στολὰς αὐτῶν, ἵνα ἔσται ἡ ἐξουσία αὐτῶν ἐπὶ τὸ ξύλον τῆς ζωῆς καὶ τοῖς πυλῶσιν εἰσέλθωσιν εἰς τὴν πόλιν.
두루마기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예수님의 의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성도들이 자기 두루마기를 빨아야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진주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와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자연스럽게 해석하기가 어려워진다. 예정론에 입각해서 두루마기를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빨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딱히 매끄럽지는 않다. 문맥상 두루마기를 받아놓고도 빨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제단 밑에서 자신들의 억울한 일을 갚아주실 것을 탄원하는 순교한 하늘의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흰 옷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받는 상급이기 때문에 빨아야 할 두루마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땅의 사람들이 받게 되는 두루마기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가지 밭에 뿌려진 씨앗 비유도 주님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파되지만 그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도 있고 잠시 믿다가 저버리는 자들도 있고 듣고 믿어 순종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사람들이 이 땅에서 받게 되는 두루마기도 받자마자 버리는 자들도 있고 잠시 입다가 버리는 자들도 있고 입고는 있어도 더러워진 상태로 내버려두는 자들도 있고 항상 깨끗하게 빨아입는 이들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될 것 같다. 좀 더 의미를 교회에 국한한다고 한다면, 복음 사역이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이나 소명이나 은사 등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복음의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자는 사역의 두루마기도 빨지 않으며, 사역의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자는 복음의 두루마기도 빨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 시대에 복음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자기 두루마기를 빨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단지 옷을 빠는 수고 정도 밖에 안되는 한편 그들이 받게 될 하늘의 상급은 어마무시하므로 절대로 낙심하거나 배교하지 말고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순종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가 복음으로 인해 받는 손해나 불이익이나 어려움들은 단지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거나 입었던 옷을 스타일러에 거는 정도의 수고에 불과한데도 그것 조차도 귀찮아하고 힘들어한다.
15 개들과 占術家들과 淫行하는 者들과 殺人者들과 偶像 崇拜者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者는 다 城 밖에 있으리라
Outside are the dogs, those who practice magic arts, the sexually immoral, the murderers, the idolaters and everyone who loves and practices falsehood.
Foris canes, et venefici, et impudici, et homicidæ, et idolis servientes, et omnis qui amat et facit mendacium.
ἔξω οἱ κύνες καὶ οἱ φάρμακοι καὶ οἱ πόρνοι καὶ οἱ φονεῖς καὶ οἱ εἰδωλολάτραι καὶ πᾶς φιλῶν καὶ ποιῶν ψεῦδος.
개들은 두루마기를 입고서 시궁창과 진흙탕과 배설물을 뒹구는 자들이다. 점술가들은 두루마기를 주신 분이 아니라 다른 자에게서 받았다고 하며 자기를 따르면 두루마기를 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다. 음행하는 자들은 자기가 받은 두루마기를 미끼로 다른 사람을 유혹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자들이다. 살인자들은 자기가 입은 두루마기를 다른 사람들의 피로 물들이는 자들이다. 거짓말 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입은 두루마기를 벗도록 하거나 두루마기를 입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자들이다.
#20210908
#신명기 #Deuteronomy 31:14-15(2)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광야의 이스라엘 1세대들에게는 그들의 인생이 기껏해야 최대 40년 밖에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황량한 광야에서 모두 죽을 것이라는 선고가 비참한 저주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광야 40년의 하루하루는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는 괴로운 징벌의 나날들이어서 그야말로 죽지못해 살 수 밖에 없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 40년 형을 선고받은 죄수와도 같아서 거의 모든 죄수들이 오랜기간 감방생활을 하게 되면 어느새 거기에 적응해서 의미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로 광야라는 감옥생활에 자기들도 모르게 익숙해져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1세대들은 마치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자기 잘못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놓고서는 여전히 불만과 원망을 품은채 아들 이스마엘에게 이런저런 악의적인 하소연을 늘어놓았던 것처럼, 자기들의 패역함과 죄악들을 돌아보지 않고 피해자마냥 온갖 악의적인 원망과 악담을 가지고서 자녀들을 키웠을 것임이 너무나 자명하였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로 약속된 2세대들 조차도 40년이 차기까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자기들이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았던 애굽에서의 일을 들먹이며 모세를 대적하였던 것이다.
모세나 히스기야처럼 삶의 기한을 통보받는 것은 마치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것처럼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시적으로 자기의 죽음을 통보받지 못하고 불확정적인 상태에서 살아가게 된다. 다만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실은 누구든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죽음 이후의 영원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기 시작하게 되고 중생 이후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앙이 성화되어가는만큼 죽음과 영원에 대한 인식도 점점 뚜렷하고 명확하게 되어간다. 때문에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오랫동안 육체의 소욕을 누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조금씩 버리고 어느 순간에 죽음이 찾아오건간에 개의치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영원을 바라보며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산 제물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노화 과정 뿐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인해 육신의 후패함을 겪더라도 어느정도의 본성적인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육신이 후패해진만큼 영원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음을 인식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남들보다 현저하고 급격하게 육체의 후패함을 겪는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남들보다 그리 많지 않음을 자각하게 되므로 마치 모세와 히스기야가 매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던 것처럼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남들보다 더 복음으로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성도들의 인생은 표면적으로는 많은 육체의 한계로 인해서 남들보다 두드러지게 보이는 확연한 성과는 없을지라도 전 재산 두 렙돈을 헌금했던 과부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는 건강한 신자들의 삶보다 더없이 풍성한 산 제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목사들이 자기들의 사역에 부여된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인생에도 분명한 수한과 한계가 있듯이 목사의 복음사역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은 이를 일부러 외면하고 마치 자기들은 죽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복음사역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고는 한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교회법으로 정해진 정년을 무시하고 사역 기간을 임의로 연장하기도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마치 여호와께 버림받은 사울 왕이 억지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처럼 자기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넘겨주려는 불법세습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목사들은 교회를 위한 복음사역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실상 그 심령 깊은 곳에는 복음 사역을 빙자한 육체의 소욕과 탐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 뿐이다. 건강상의 문제나 재정상의 문제나 가정상의 문제 등으로 정상적인 복음사역을 진행할 수 없게 되거나 복음사역이 훼방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거기까지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그 목사에게 부여하신 사역의 경계선임을 알고 기꺼이 내려놓고 후임 목사에게 인수인계 할 수 있어야 한다.
#20200908
#레위기 #Leviticus 19:37
37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주신 율법은 대체로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도덕법과 제사법과 시민법이 그것이다. 도덕법은 크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1-4계명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5-10계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자의 구체적인 규례들은 제사법으로, 후자의 구체적인 규례들은 시민법으로 마련되었다. 물론 이 법들은 여호와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심령에 새겨주신 것이지만 그들이 범죄하여 쫓겨나고 자손들이 나면서부터 망각과 왜곡을 일삼게 되어 형체가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었는데 광야에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구체화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율법과 규례들은 그 자체를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래 도덕법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연관성을 인식하면서 지켜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과거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제사를 이루신 후에는 그 문자적인 규례 자체는 폐기가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예식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일을 비롯한 공적 예배를 드릴 때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기본으로 하는 예배 모범을 따라 격식있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복음 사역을 좀 더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한 직분제 구성이나 권징 등의 모든 요소들도 크게 보면 교회의 예식법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 교회의 예식법은 과거의 제사법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미주알고주알 세세하게 하나하나 규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사들과 목사들이 성경을 통해서 올바르게 유추한 가운데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정립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아주 흠없이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어지간해서는 방향성은 틀리지 않기 때문에 각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예식법의 세세한 부분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해서 불만을 표하거나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마땅히 개선되어야 할 요소가 있으면 교회 내에서 제직회 등의 공적 회의 등에서 의견을 표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제사법은 도덕법의 1-4계명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인만큼 이를 잇는 교회의 예식법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교회와 신자들은 예식법이라는 형식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령을 내용으로 담아야 한다. 통상적인 때에는 주일마다 모든 신자들이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여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요즘처럼 코로나와 같은 비상시국에는 오히려 우리의 예배 모임이 이웃의 안위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각자의 집에서 자체적이건 온라인이건 떨어져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너그럽게 허용된다. 다만 이러한 문명의 이기에 젖어들어서 비상시국이 진정된 이후에도 모임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이런 때에 더욱 우리의 예배 모임이 하루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시민법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만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한정된 것이므로 복음이 전세계로 퍼진 때에는 각 나라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의 시민법의 문자적인 적용에만 국한되어 폐지된 것이지 시민법에 내포된 그 본래 의미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직접 주신 시민법들이 바로 도덕법의 5-10계명의 실행방식들이어서 이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을 준수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사도들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를 따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정된 국가 제도를 따르고 준수했듯이 오늘날 모든 교회들도 각자가 속해있는 국가의 제도를 마땅히 준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고 무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 교회들은 이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마치 불가침영역인듯이 행동한다. 그래서 복음의 원리에 따라 국가와 정부의 권세에 순종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들의 유익에 따른다. 그러고서는 성경을 교묘히 덧입혀서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의 뜻인 양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셨어도 성전세를 내셨고 빌라도에게 저항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재판을 받으셨다. 위대한 신앙개혁가 칼빈 선생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프랑스 왕에게 기독교 강요의 헌사를 바치며 그의 권세를 지극히 공경함으로 드높인다. 교회는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을 조금만 건들면 미친듯이 짖어대고 달려드는 미친개 마냥 국가 지도자에게 저주와 비방을 퍼붓고 정부에 거역하기 일쑤다. 그런 미친개와 같은 교회들은 결국 국가 지도자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향해 저주하고 비방하는 것이므로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쇠몽둥이 찜질을 당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들보다 거룩하고 탁월하게 구별하시려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 율법을 주신 것은 복음으로 인해 이것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가볍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하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그저 죄사함과 용서와 은혜만 강조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율법의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아예 무효화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는 커녕 세상의 상식보다도 못한 이기적인 민폐 집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주님의 자녀라면 우리에게 주신 성경과 성령으로써 율법을 지키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세상이 우리를 보며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전광훈 집단의 이만희 신천지보다 더 악랄한 만행으로 인해 한국 교회의 저열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고 중세 시대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교회처럼 더이상의 자정 능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께서 한국 교회에 내리실 처절한 징벌을 받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