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불가능하지만 과연 가능한 때가 올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은 안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어찌 단정하겠습니까? 우리의 역사는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발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것이 가능하게 되면 역사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역사책이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 그냥 불가능한 일로 지속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하기야 현재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바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상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을 감당하기도 벅차니 말입니다.
시간을 넘나들고자 하는 것도 진작 사람들의 욕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 바람 속에도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아마도 저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지나간 시간 속에 아픈 기억들이 있을 테니 말이지요. 바꾸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트라우마도 있는 것이고 오래도록 때로는 인생 끝나도록 아픔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서 고치고 싶습니다. 다시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냥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지만 상상의 세계로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대리만족을 하면서 이겨나가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있습니다.
하필 사랑의 고백을 하려던 그 날 자살이라니!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그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어느덧 십년, 근처를 지나는데 그 때의 사진관이 그대로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들러봅니다. 주인어른도 그대로네요. ‘서준’이라고 맡긴 사진이 있나요? 다행히 그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십년 전에 찍은 흑백사진 고작 여덟 장이 들어있습니다. 집에 돌아와 하나하나 보다가 그 때의 아픔이 도져서 하나를 불에 넣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있는 것입니다. 사진 동아리 사무실에 들어서자 발견한 서준의 죽은 현장이 떠오릅니다. 왜? 그 때도 지금도 바로 그것이 의문입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왜?
제한된 시간, ‘하린’이는 그 때의 아픔을 지우려고 사진을 불에 태웁니다. 그 순간 당시 과거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깜짝 놀라지만 과거가 현실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바로 그 현장에 그 때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지금의 의식과 더불어 그 당시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사진은 여덟 장, 그것이 기회입니다. 다시금 서준이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던 때를 즐기면서 사건을 더듬어갑니다. 그리고 당시 서준이와 라이벌처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동급생이 있습니다. 과연 그가 서준이를 해할 동기는 충분합니다. 현실로 돌아와 그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추적하여 경찰의 도움을 받아 체포합니다.
그런데 극구 부인합니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 목격자라는 것이지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런 사실을 서준이 누나가 알아챕니다. 그리고 사진을 도적질하여 자신도 과거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목격자를 처리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건은 새롭게 드러납니다. 당시 자살사건으로 빨리 종결지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엄마가 그 아픔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비록 입양아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고통에서 벗어나려 그 사건을 가지고 더 이상의 진전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지요. 부검도 허락지 않고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습니다. 그 가정을 들여다봅니다. 친 딸이 그 아들과 비교되며 소외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친자와 입양아 사이의 갈등을 부모가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시간을 오락가락하면서 진전됩니다. 끝난 사건이 새롭게 부각되고 숨겨졌던 범인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서준이와 하린이의 예쁜 연애 이야기가 범인 추적 스릴러로 변신합니다. 멜로드라마가 범죄 추적 이야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멜로드라마의 행복한 마무리로 종결됩니다. 두 가지 장르의 맛있는 비빔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시간여행을 한다면 미래로 가보기를 원할까요,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할까요? 영화도 그 양쪽이 모두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실제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어느 쪽이 많을까요? 과거는 고치러 가는 것이고 미래는 새롭게 살아보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때 주로 밝고 더 행복한 생활을 꿈꾸고 실현하기보다는 재앙을 만난 시대를 그리곤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왜 이렇게 어두울까요? 아마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구의 위기 탓일 겁니다. 여기저기 곳곳에서 그 위기에 대하여 경고를 하지만 거의 마이동풍입니다. 마치 ‘돈룩업’ 영화와도 같지요. 거참! 영화 ‘블루버스데이’를 보았습니다. 침울한 생일이지만 밝게 끝나니 다행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복된 설과 연휴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