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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이라는 게 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마음>에 대해서이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우리의 본질도 선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 인간에게 수많은 고통과 번뇌, 그리고 슬픔을 일으키고,
동시에 인간에게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해준, 칼날의 양면과 같은 인간의 마음이란 존재는 대체 그 구성 요소가 무엇일까?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겪어 왔던
모든 전쟁과 투쟁, 불화와 질투, 오해 등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파헤쳐 들어가 보도록 하자.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마음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거울이 없으면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듯이, 마음이라는 것도 우리가 살아 있지 않으면, 즉 우리에게 생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이라는 하얀 종이 위에 경험(과거)이라는 것이 하나 둘씩 쌓여서 마음이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속에는 갖가지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경험과 지식들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거울과 우리 인간의 마음과는 차이가 있다.
거울은 어떤 대상을 비출 때 그 대상만이 거울 속에 비치고 그 외의 것은 사라진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비추면 그 전의 대상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은 다르다.
우리의 마음은 대상을 비추면 그 대상이 마음속에 기억으로 들어와 버린다.
그리하여 다른 대상을 비출 때도 그 전에 들어왔던 대상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의 어딘가에 계속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에게 아직 ‘나(에고)’라는 관념이 시작되기 전의 아주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애들은 친구와 놀다가 싸우더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재미있게 같이 논다.
그러나 어른들은 누구와 싸우고 나서 그 다음날에 그 사람을 또 만났을 때는 피해 버리거나 기분이 매우 나빠진다.
그렇다면 어린애와 어른의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어린애의 경우는 어제의 경험(과거)이 현재의 순간에 개입하지 않아서 순수하게 대상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이것은 거울과 같은 상태),
어른의 경우는 지금 현재의 순간에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끼어들어 대상을 순수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선입관이라는 게 전부 이와 같다.
사실 지금 눈앞의 그 사람은 어제와 다르게 이미 변해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어제 잠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서양 영화를 봤는데, 내용이 아주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패션모델인 여주인공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횡단보도를 지나기 위해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저쪽에서 차가 달려오는데 갑자기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놔두면 차가 아이를 칠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 때 이 여자가 뛰어들면서 아이를 밀쳐냈다.
간발의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이 여자가 차에 치여 버렸다.
그 순간 그 장면을 본 사람 중의 한 여자가 그 자리에서 또 쓰러졌다.
그 여자는 바로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는 가운데 병원의 앰뷸런스가 와서 그 두 여자를 싣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실려 간 두 여자를 살펴본 의사는 두 여자가 모두 죽었음을 확인했다.
아니, 그 아이의 어머니는 완전히 죽고, 모델 아가씨는 뇌만 살아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의논하여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아이 엄마의 몸은 아무런 손상이 없고 모델의 몸은 엉망이 되었으니 모델의 살아 있는 뇌를 아이 엄마 몸에 이식합시다.”
드디어 이식 수술에 들어갔다. 조마조마한 시간이 흘러갔다.
얼마 뒤, 수술이 성공리에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여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아직 침대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며칠 뒤, 그녀가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본 순간, 그녀는 “악!”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예전의 자신의 몸이 아니라, 어느 중년 여인의 뚱뚱한 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는 사람이 찾아와도 그녀는 알아보는데 남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녀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은 바로 그녀의 과거의 경험의 집합체인 ‘나(에고)’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날씬한 몸매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몸이 자신이라고 알고 살아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 몸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게 되어 있다.
날씬함이 영원한 실체는 아니다.
얼굴이야 수술을 하면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몸이야 시
간이 흐르면서 뚱뚱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우리 몸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만약 그녀가 거울을 보는 순간에 기억을 상실했다면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이 원래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녀의 기억, 곧 과거의 경험의 집합체인 ‘나(에고)'인 것이다.
진실은 실존밖에 없다.
지금 그녀 앞에 놓여 있는 거울 속의 모습만이 현실이요 진실이다.
우리가 거리를 걷다 보면 가로수들이 허리가 뚝 잘려 서 있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나무들이 다음해 봄이 되면 새로운 가지가 나오면서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사람들이 나무처럼 그렇게 팔다리가 잘렸다고 한다면 과연 제대로 싱싱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절망에 빠져 살아가거나 자살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나무는 싱싱하게 살아가고, 사람은 절망하거나 자살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무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똑같아!”
아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 똑같다.
겉모습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나무는 과거라는 기억을 갖지 않고 항상 현재의 순간 순간을 살아가지만, 사람은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참된 모습인 양 생각하고
그 기억으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나 기억은 자라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허상이다. 허상을 믿으면 항상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 허상은 항상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허상인지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만이 사는 나라에 팔다리가 없는 아이가 태어났다면 과연 그 아이가 팔다리가 없다고 절망할까?
물론 아닐 것이다. 당연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바로 과거의 경험인 기억에 불과하다.
생명만을 믿고 살라! 팔다리가 잘렸더라도 우리의 생명은 변함이 없다.
그 생명이 우리의 본질이다. 그 외의 것은 모두 허상이다.
그 허상에 집착하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은 순수 현재뿐이다. 생명은 끊임없는 흐름이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두 번째 들어갈 때는 처음의 그 물은 이미 흘러가 버린 뒤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의 삶은 알고 보면 대부분 죽은 과거로써
현재의 살아 있는 삶을 끊임없이 망쳐 가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경험의 집합체, 곧 기억이요 죽어 버린 과거인 것이다.
여기서 ‘나’를 좀 더 과학적으로 파헤쳐 들어가 보자.
‘나’라는 것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다. 에너지는 물질이다.
물질은 <만유인력의 법칙>, <관성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마음도 에너지 덩어리이므로 이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물리物理와 심리心理는 궁극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보자.
욕망과 만유인력의 법칙
우리가 처음으로 볼링이라는 것을 쳐봤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볼링에 대한 경험이 우리 마음속에 쌓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볼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아, 심심해! 뭐 좀 재미있는 게 없을까? 아, 그래! 볼링!’
만약 우리가 볼링을 한 번도 본 적 없고, 쳐본 적도 없다면 볼링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날 리가 없다.
자장면도 한번 먹어 본 사람이 다음에 또 먹고 싶어지는 것이고,
컴퓨터 오락도 해본 사람이 또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이라는 것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서 인력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욕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런 경험이 마음속에 너무나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욕망 또한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시골 사람보다 도시 사람들이 더 많다.
러셀이라는 영국의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 마을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크게 놀랐다.
‘이 사람들은 별로 즐길 만한 도구도 없는데도 하루 종일 무엇이 그리 즐겁지?
뭐가 즐거워서 흥에 겨워 춤추고, 먹고, 마시고 하는 거지?’
그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현대 문명인들은 가진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데 왜 그들보다 더 불행한가?’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원주민들이 영화를 본 적이 있을까?
TV를 본 적이 있을까?
오락을 해본 적이 있을까?
그들은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 거의 경험해 본 게 없다.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욕망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만약에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어린아이와 어른한테 각각 주면 거의 대부분,
어린아이는 과자를 집고, 어른은 다이아몬드를 집는다.
왜냐? 어른은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고, 어린아이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원시 시대에는 다이아몬드를 그저 장난감 정도로 가지고 놀았다. 비록 어른일지라도.
결국 어떤 것에 대한 경험(지식)은 인력을 갖고 있어서 그것이 욕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주장과 관성의 법칙
우리 마음의 구성 요소인 경험의 집합체는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해 보자.
만약에 여기에 책상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그것을 책상이라고 배워 왔고, 또 한 사람은 데스크desk라고 배워 왔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맞다’고 하면서 싸울 것이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나타나서 다 같이 책상이라고 말한 사람의 편을 든다면
평생 책상을 데스크라고 알고 살아왔던 사람은 미치고 팔딱 뛸 정도로 매우 화나고 기분 나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그것은 책상이라고 해도 좋고, 데스크라고 해도 좋고, 사과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사람이 정하기 나름이다.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경험 자체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의 차이로 서로 싸우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사실 둘 다 맞다.
이 세상에 '100% 맞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 언어 자체가 완전한 게 못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지개가 일곱 색깔인가? 아니다.
그 사이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미묘한 색깔들이 놓여 있다.
그러면 사실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 아닌 것이다.
‘사과는 빨갛다.’ 천만에. 사과는 노란 것도 있고, 파란 것도 있다.
‘저 놈은 나쁜 놈이야!’ 아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에게도 좋은 점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아니, 일부분만 맞는 말이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열 사람이 말했다면 그 열 사람의 말은 일부분씩은 다 맞는 말이다.
누가 더 많이 맞고, 더 적게 맞고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불완전한 언어로 된 지식을 100% 맞는 듯이 알고 주장하기 때문에
남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로 인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설혹 그 싸움에서 이길지라도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을 믿고 그것을 주장한다.
그러다가 누가 그 주장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고 나오면 그 지식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경험(지식) 자체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과 같다.
종교적인 지식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도 어차피 지식과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결국 우리 인간의 경험의 집합체인 ‘나(에고)’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강하게 고집하고 지키려고 하며,
그것은 바로 에너지 자체가 <관성의 법칙>을 갖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랑과 작용 반작용의 법칙
마지막으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
사람의 마음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이므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작용한다.
우리가 먼 길을 가다 보면 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인력의 작용의 이면에는 그 인력을 풀어 버리려는 작용도 동시에 갖고 있다.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
여기 물방울 하나와 바다같이 큰물이 있다고 하자.
이 물방울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햇빛에 증발해 버리거나 사라져 버린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물방울 자신은 자신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자신보다 큰 존재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작은 물방울과 큰 물방울이 가까이 있으면 작은 물방울은 큰 물방울에 가서 달라붙는다.
그러니까 부분은 전체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물방울 자신이 자신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바다 속에 뛰어들면 된다.
바다와 하나가 되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전체와 하나가 되기 위한 작용으로서 ‘사랑’이라는 현상이 있다.
사랑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뭔가 늘 끌어당겨서 존재하려는 마음의 인력권(욕망)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끌어당기기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신의 인력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마음의 인력, 즉 욕망이나 욕심을 가진 채로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진 채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은 100% 깨어지게 되어 있다.
물방울이 자신의 본모습을 유지한 채로 어떻게 바다와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와 하나가 되려면 물방울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사랑도 이와 같다.
자신의 경험의 집합체인 ‘나(에고)’를 희생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여자가 결혼하면 집에서 가사 일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여자와는 제대로 사랑할 수가 없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그 생각을 희생해야 한다.
그것이 상대의 행복이라면.
사랑은 ‘나’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왜냐?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나(에고)’의 인력(욕망, 욕심)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인 ‘생명(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마음의 아픔이 따른다고 하는데, 그 마음의 아픔이라는 것이 바로 ‘나(에고)’의 죽음이요 희생이다.
‘나’가 죽어야 우리의 본질인 생명(사랑, 조화, 자유)이 비로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나’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다 보면 어느 순간 ‘벗어나고파!’ 하는 심정이 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나(에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인 ‘생명(사랑)’을 발견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에 관한 얘기는 뒤에 가서 또다시 해야 되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인력의 작용(에고)’의 이면에는
그 ‘인력을 풀어 버리려는 반작용(사랑)’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랑학개론>(비움과소통 2013.12)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