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 글 모음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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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이 오면
윤재석
초하루부터 비가 내린다.
산야의 풀과 나무들은 가뭄의 단비를 만났으니 마냥 반가울 것이다.
아침에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원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가까운 기린봉과 멀리 보이는 모악산엔 안개구름이 자욱이 펼쳐져 있었다.
먼 산의 안개 속에서 고향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싱그러운 4월을 맞아 나를 뒤돌아보고도 싶었다.
옥상에 올라오니 4월의 봄 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윗집 매화는 물기를 머금고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랫집 담장을 이루고 있는 대나무는 비에 젖어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건넛집 나무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찍찍거리고 쩍쩍하면서 중구난방이다. 그래도 싫지는 않다.
남녘으로부터 올라오는 꽃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아마 그곳에는 활짝 꽃을 피웠으리라.
남녘의 풍경과 꽃 소식을 빠짐없이 듣고 싶다.
이곳의 벚꽃은 며칠 지나야 피어날 것이다.
우리 집 분재의 벚꽃도 꽃망울을 맺고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집에서 벚꽃을 구경할 것 같다.
옥상에 몇 개의 스티로폼 텃밭에는 부추가 새파랗다.
작년 늦가을에 뿌려 놓은 상추는 제법 커서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찬거리가 될 듯하다.
봄이 오면 아내가 정성 들여 가꾸는 우리 집 채소 마당이다.
밑거름으로 깻묵이 좋다며 미리 방앗간에서 사온다.
퇴비 만드는 비법으로 아내는 비닐 포대에 발효시켜 둔다.
봄이면 일찍이 채소밭에 뿌려준다.
4월이면 되풀이하는 아내의 일거리다.
풀을 뽑고 물을 주는 모습을 보면, 아내의 채소를 가꾸는 모습이
농부 같아 보인다.
산에 나무들도 오늘의 비를 맞고 한결 바빠질 것이다.
메말랐던 뿌리와 가지에 영양제 같은 비가 왔으니 얼마나 신바람이 날까?
나뭇가지마다 생기가 넘치고 잎은 파랗게 피어날 것이다.
길가의 잡초가 비에 젖어 한 뼘은 자란 듯하다.
오늘 이 비가 개고 나면 따스한 봄볕이 자연을 깨워 줄 것이다.
4월이 오면 내 고향 농촌은 몹시 바빠진다.
4월이 오면 농촌은 미리 논을 갈아 놓는다.
나는 지게에 쟁기를 지고 아버지는 소를 몰고 논으로 나간다.
논배미 귀퉁이는 전날 삽으로 파서 논 갈기 편하게 해 놓는다.
아버지가 논에서 쟁기질을 하면 어머니는 새참을 가지고 논으로 나오신다.
이랴 저랴, 농부의 소모는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골짜기로 퍼져 나간다.
논갈이가 끝나면 소 주인집으로 쟁기를 가져다주던 일이 생각난다.
일손이 바빠진 농촌에서는 겨우내 외양간에 매어 놓았던 소를 몰고
밭갈이를 서두른다.
아직은 길이 덜 들어서인지 앞에서 소 코뚜레에 새끼줄을 매고
아내가 이끌고 다닌다.
길이 들지 않은 소의 밭갈이도 바쁜데, 강아지조차 쟁기 옆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밭갈이를 방해한다.
한 손에 고삐를 잡고 다른 손에 나뭇가지로 쥐고 강아지를 쫓는다.
그래도 강아지는 봄날의 햇빛이 마냥 좋은지 쟁기 옆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4월에 볼 수 있는 농촌 풍경이다.
보리밭에는 바람이 살랑거리고 일찍이 밟아준 파란 보리가 고랑을
꽉 메우고 있다.
보리농사는 풍년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보리 잎이 한 뼘 두 뼘 자라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청보리 물결이 일어난다.
보리는 우리의 주식으로 재배되었다.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다.
보리가 익기 전에 양식이 떨어져 배고픈 시기를 말한다.
이때를 춘궁기라 하여 정부에서 양식을 빌려주고 가을 농사를 지어
보리 값을 갚는다.
지금은 먹을거리가 많아 살이 쪘다고 야단들이다.
살을 빼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아도 넘치면 해가 되고 병이 생긴다.
4월이 오면 봄나물 캐는 처녀들의 모습이 아지랑이 속에서 아른거린다.
따뜻한 봄볕이 아가씨들을 밖으로 유혹했나 보다.
가르마는 반듯하고 머리는 동백기름을 발라서인지 햇빛에 더욱 윤기가 난다.
빨강 댕기는 젊은 총각들을 유혹하고 남음이 있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붉은 댕기 머리는 치렁치렁 등 뒤
저고리를 타고 내려와 엉덩이에 머물러 땅을 스칠 듯 말 듯 한다.
나물바구니는 쑥이며 냉이, 달래 등으로 넘친다.
봄바람에 홀린 처녀들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어떤 총각을 만나야 행복할까, 서로의 속내를 말하며 킥킥 웃다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간드러지게 웃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어 아쉽다.
처녀들은 모처럼의 나들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으리라.
그때의 예쁘던 그 아가씨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옛날의 고향 풍경들이 그립다.
농촌의 4월은 바쁘다.
풍년농사를 지으려면 방죽에 물을 많이 가두어 두어야 한다.
시냇물 가두는 보도 손질해야 하고 겨우내 얼어서 허물어진
둑은 다시 쌓아야 한다.
여름철 홍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루나 이틀 동안 괭이나 삽으로 물길을 손질해
두는 것은 농부들의 풍년마지 준비다.
4월이 오면 무겁고 칙칙하던 옷도 가볍고 밝은 색으로 갈아입는다.
봄나들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한결 화사하다.
목에 두르던 머플러도 벗고, 얇은 천으로 된 가벼운 옷으로 바뀐다.
계절에 관심이 많은 여자의 블라우스나 스커트가 봄바람에 살랑거리며
발걸음이 가볍다.
아가씨들은 각선미를 자랑할 기회라 여긴 듯 하얀 종아리를 내놓고 다닌다.
세상이 많이도 변하여 종아리가 나오는 것은 예사가 되어 버렸다.
4월이 오면 나도 일거리가 생긴다. 거실의 난과 꽃나무를 밖으로 옮겨야 한다.
한 해에 두 번은 이사를 하는데 가을이면 겨울에 얼까 걱정되고,
봄이면 햇살을 받고 튼튼하게 자라라고 이사를 한다.
나도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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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 하늘
윤재석
아침 여섯시쯤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도 방 앞뜰의 나무에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통에 일어나야 한다.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많이 얻는다는 말이 꼭 맞는 말인 것 같다.
새들은 정말 부지런한 동물이다.
자연히 우리부부도 덩달아 부지런히 일어나 일찍 식사를 하게 된다.
오늘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창문을 여니 처서를 지낸 초가을의
시원한 아침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의자에 앉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하늘이 아침 공기와
어울려 더욱 청량하다.
나의 마음도 시원하여 저절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맑은 하늘에 떠있는 하얀 구름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한가롭던 구름은 어느덧 활동사진의 스크린이 되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펼쳐져 지나가고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1960∼70년대의 일들을 이야기하면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금 70세 이상의 노인이라면 60년대의 생활상이 기억에 생생할 것이다.
바지를 입어도 팬티는 없었고, 저고리를 입어도 러닝셔츠란 없었다.
겉옷을 입고 속옷을 따로 입던 시대가 아니었다.
여름이면 학교에서 오다 책보와 바지저고리를 모래나 자갈밭에
그냥 벗어 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냇물로 뛰어 들어
그날하루를 보냈다.
몸에는 아직도 명지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이 무엇이 그리 재미있고
즐거운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놀기만 했다.
여름이라지만 물 속에서 오래 놀다보면 입술은 파랗게 변했고
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이때쯤이면 물가 모래밭에 신작로가 생겼다.
저마다 길쭉한 돌멩이를 하나씩을 주어서 밀고 다니면 장난감
자동차가 되었다.
몸은 온통 모래투성이다.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다시 물속에서 한참을 놀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는 늦게 왔다고 야단을 치셨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밥을 차려주면서 때가되면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하셨다.
이처럼 부모님들은 자식사랑이 대단하셨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부모님들의 사랑이다.
겨울이면 시냇물과 징검다리도 꽁꽁 얼어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져 물 속으로 빠지기도 했다.
조심조심 건너야 된다.
만일에 빠지게 되면 추운 겨울이라서 발이 몹시도 시리다.
학교에 도착하면 난로에 발을 녹이곤 했다.
여름에 물놀이를 하던 곳이 겨울에는 얼음판이 되어 팽이를 치고
썰매를 타는 놀이터로 변해 놀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얼음이 깨져 발과 바지가 젖어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로부터 혼쭐이났다.
때가 되면 바로 집으로 와야지 올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면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양말과 바지저고리를 장롱에서 꺼내주시면서
추울 테니 빨리 갈아입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이야 시장에서 옷을 사면 그만이다.
예전에는 하나하나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다.
낮이면 일을 하고 저녁이면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일일이 만든 것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자칫 잘못 하면 바늘에 손을 찔리기도 한다.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면 빨간 피가 솟아오른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이 아프기도 하시겠지만 꾹 참고 바느질을 하신다.
그때 어머님의 손을 한 번만 이라도 만져 드렸다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
제야 생각난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계절이 따로 없다는 것을…….
이처럼 부모님께서 애태우시던 내가 자식을 두고 손자를 보게 되었다.
내가 이제는 조금 이라도 부모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알 듯하다.
그러나 내가 안 들 얼마나 알랴?
자식에게 쏟는 정의 백 칸의 하나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을 하늘은 파란빛을 띄우면서 더욱더 높고 넓다.
부모님의 사랑은 아마도 이 가을 하늘보다도 더 넓어 끝이 없나 보다.
마음으로 부르는 '어버이의 은혜'란 노래를 마치니 나의 활동사진도
멈추는 것 같다. 오늘의 이 영상은 아련히 가슴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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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미줄
윤재석
우리 집은 유행가 가사처럼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 부부가 단란하게 살고 있는 단독주택이다.
아들딸들을 기르고 가르치면서 살아온 정든 집이다.
자그마한 정원에는 감나무, 향나무 몇 그루가 있다.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는 15-6년 전 직장동료와 함께 남쪽의 소거문도
여행길에서 가져온 나무다.
따뜻한 곳에서 자라온 탓인지 어느 한 겨울에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늦은 봄에서야 새싹이 돋는 일이 있었다.
나는 이 나무들이 죽은 줄 알았다. 추운 곳까지 가지고온 내가 간호를
잘 못한데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봄이 오면 거실에 있던 난과 꽃나무들을 바깥뜰로 모두 옮겨 놓는다.
여름이면 정원의 나무들은 무성히 자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 그늘 영향으로 여름의 무더위를 무난히 견딜 수 있다.
정원 꽃나무들은 꽃을 피울 채비를 하느라 바쁘다.
언제 피었는지 화분 곁을 지나다 보면 난향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은은하면서 맑은 난향은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다.
우리 집은 이렇게 나무와 꽃이 있어서인지 철따라 벌과 나비, 거미,
개미, 매미 등 여러 곤충과 새들도 함께 지낸다.
여러 곤충들은 저마다 생활방식이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개미는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협동과 질서를 지키고 매우 부지런하다.
여름 장마철을 대비해서 집수리를 하는지 무척이나 분주한 모습들이다.
벌은 공동생활을 하고 질서를 지키며 꽃 속의 꿀을 열심히 따
자신들의 식량을 하고 사람에게까지 봉사를 한다.
그늘을 찾아온 매미는 무슨 사연인지 그리도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른다.
사랑을 찾는 소리인지, 배가 고파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서로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다.
모두들 이처럼 바쁘게 더불어 살아가는데, 거미는 혼자 살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다.
거미줄로 그물을 처 놓고 먹이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게으름뱅이라 할까 기회주의자라 할까.
거미줄은 끈적끈적하다.
잠자리나 파리 등 다른 벌레가 거미줄에 걸리면 날갯짓만 할 뿐
거미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매미와 같이 큰 것도 거미줄에서는 꼼짝 못하고 거미의 먹이가 된다.
거미는 가만히 있다가 먹이가 걸리면 얼른 나와서 그 먹이를
거미줄로 칭칭 감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먹이의 체액을 빨아먹는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끈적끈적한 거미줄로 매미채를 만들어
잠자리며 매미를 잡아 초등학교 여름방학 숙제를 했었다.
하루는 내가 바깥 화장실에서 나오다 이 거미줄에 머리가 걸렸다.
내 머리는 온통 거미줄로 범벅이 되었다.
거미가 화장실 입구에다 거미줄을 쳐놓은 것이다.
나는 거미더러 지혜가 없는 여석이라고 나무랐다.
넓은 공간에 거미줄을 쳐 놓아야 먹이가 많이 잡히지, 이 좁은 공간에다
거미줄을 치면 먹이가 잡힐 것인가?
다음날 다시 거미줄이 머리에 감겼다.
두 번째는 화가 났다.
빗자루로 거미줄을 전부 걷어 버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거미줄이 있는지 살피지 못한 내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미가 나를 보고하는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앞을 좀 보고 다니지 그냥 다닌다며 투덜댈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거미줄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내가 거미줄을 걷어 버린다면 거미가 다시 줄을 치며 고생할 게 아닌가?
자기 집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면 어떨까.
거미도 이와 같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뒤부터 거미줄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니기로 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시간이 가니 익숙해지기도 했다.
옛말에 자기 몸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은 중요한 지위에 올라도 능히
직무를 수행할 수 있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적을 만난다고 했다.
나는 이 거미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화를 피할 수 있다는
지혜를 배웠다.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거미를 보면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란
생각이 들었다.
늦가을로 들어서면서부터는 거미가 거미줄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추운 날씨 탓인가 보다.
거미줄도 보수를 해야 하는지 거미가 보이지 않자 거미줄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아마 거미도 겨울을 지내려고 동면의 세계로 들어간 모양이다.
찬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는 곳에서, 겨울을 잘 지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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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겨울 햇볕과 함께
윤재석
아침 공기가 차갑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 정보대로다.
겨울이면 춥고 눈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막상 닥치니
추위에 몸은 움츠러들어 생활에 불편함을 느낀다.
아침 뉴스를 들었다.
하루하루 전해지는 뉴스가 희망보다는 참담하고 우울한 소식이 더 많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영민하지 못하면 국가는 혼돈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에 떨어지게 된다는 점을 자주 느끼게 한다.
해를 넘기며 벌어지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예부터 사람의 기본은 진퇴를 잘한 사람이라 배웠다.
나라가 빨리 안정이 되었으면 한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기린봉에 보이는 눈이 하얗다.
차가운 날씨에 녹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겨울의 햇볕은 포근하기도 하다.
거실에 옮겨 놓은 화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겨울잠에 빠져 있는 화초의 모습이 느긋해 보인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옹기종기 어깨와 팔을 맞대고 있는
모습들이 친근하다.
아마도 춥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바깥 자연과
더불어 지낼 일이 기다려지는 눈치다.
겨울이면 거실로 오고, 봄이면 바깥으로 나가는 환경에
순응하는 법도를 익히는 듯하다.
따뜻한 겨울 햇볕을 받으며 거실의 화초를 보면서 진퇴라는 말에
생각이 머문다.
어릴 때 다투고 싸우던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한 번 뒤로 물러섰다면 싸우는 일이 없었을 거 아닌가.
어려서 물 뿌리고 청소하며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고 나아감과
물러섬을 배워왔건만, 고희를 살아온 내게 진퇴를 아는가,
누가 묻는다면 제대로 실행을 못 하였으니 그저 웃을 따름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직분을 다하고, 일을 마치면 물러나야 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은 진퇴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매한 내가 진퇴를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마는
누구나 자신을 위한 생각은 있으리라 여긴다.
세상일은 진퇴로 이루어지고 마감한다는 생각이 든다.
순리와 천명에 따라 현명한 진퇴를 결정한 사람에게는
존경과 찬사가 뒤따르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역사에도 길이길이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진퇴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여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는 나라보다 개인의 영욕이 앞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생뿐만이 아니다.
전쟁에서도 진퇴의 판단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남는다.
현명한 진퇴로 사랑과 존경받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흔히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가. 태평 성대한 시대를 요순시대라 말한다.
요순의 뒤를 이은 우임금의 일화가 있다.
우는 치수 사업을 잘해서 태평성세를 이룬 임금이다.
치수 사업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청렴하였던지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면서도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모습을 보면서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지도자, 정치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가짐이
더욱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사에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고, 과일나무
아래서 갓을 바로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멀리서는 밭에서 오이를 따는 모습이고, 과일을 따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으로부터 의심 살만한 행동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정해지면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나라가 비리로 먹칠되어 있는 모양새다.
국가 비리로 법원의 심판을 받아 결과가 나올 것이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고 모두 발뺌을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고 존경했다면
오늘날의 탄핵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할 때 오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진퇴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한 나라의 혼돈 시대를 피할 수 있다.
국가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정체 상태이다.
하루 빨리 이 모든 일이 해결되어 나라가 정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따뜻한 겨울 햇볕을 받으니 바깥 추위를 잊은 듯하다.
고서인 소학의 쇄소, 응대, 진퇴의 구절이 생각나서
다시 새겨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를 먼저 수신하고 치국에 뜻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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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울햇볕과 함께
윤재석
아침 공기가 차갑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 정보대로다.
겨울이면 춥고 눈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막상 닥치니
몸은 움츠러들어 생활에 불편을 느낀다.
아침 뉴스를 들었다.
하루하루 전해지는 뉴스가 희망보다는 참담하고 우울한 소식이 더 많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영민하지 못하면 나라는 혼돈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에 떨어지게 된다는 점을 자주 느끼곤 한다.
해를 넘기며 벌어지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예부터 사람의 기본은 진퇴를 잘 선택한 사람이라 배웠다.
나라가 빨리 안정되었으면 한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기린봉에는 눈이 하얗다. 차가운 날씨에 녹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포근한 겨울햇볕이 거실에 옮겨 놓은 화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겨울잠에 빠진 화초의 모습이 느긋해 보인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옹기종기 어깨와 팔을 맞대고 있는 모습들이 정겹다.
아마도 춥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바깥 자연과 더불어
지낼 일이 기다려지는 눈치다.
겨울이면 거실로 오고, 봄이면 바깥으로 나가는 환경에 순응하는
법도를 익히는 듯하다.
따뜻한 겨울햇볕을 받으며 거실의 화초를 보면서
진퇴라는 말에 생각이 머문다.
어릴 때 형제간에 다투던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한 번 뒤로 물러섰다면 싸우는 일이 없었을 게 아닌가?
어려서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하며,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고,
나아감과 물러섬을 제대로 하라고 배웠건만, 고희를 살아온 내게
누가 진퇴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실행을 못했으니
그저 웃을 따름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직분을 다하고, 일을 마치면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은 진퇴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매한 내가 진퇴를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마는
누구나 자신을 위한 생각은 있으리라.
세상일은 진퇴로 이루어지고 마감한다는 생각이다.
순리와 천명에 따라 현명한 진퇴를 결정한 사람에게는 존경과
찬사가 뒤따른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역사에도 길이길이 비판을 받는다.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 진퇴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여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이는 나라보다 개인의 영욕이 앞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생뿐만이 아니다. 전쟁에서도 진퇴의 판단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가려진다.
현명한 진퇴로 사랑과 존경받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흔히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태평성대를 요순시대라 말한다.
요순의 뒤를 이은 우임금의 일화가 있다.
우는 치수사업을 잘해서 태평성세를 이룬 임금이다.
치수 사업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청렴했던지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면서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모습을 보면서 반성해야 할 일이려니 싶다.
대한민국의 지도자, 정치하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고사에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고, 과일나무 아래서 갓을
바로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멀리서는 밭에서 오이를 따고, 과일을 따는 것으로 오해받기 때문이다.
남으로부터 의심 살 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나라가 비리로 얼룩진 모양새다.
국가 비리로 법원의 심판을 받아 결과가 나올 것이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고 모두 발뺌을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와 국민을 걱정했다면 오늘날 대통령이
탄핵을 받는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할 때 오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진퇴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한 나라의 혼돈시대를 피할 수 있다.
나라의 모든 분야가 정체상태다.
하루 빨리 이 모든 일이 해결되어 나라가 정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따뜻한 겨울햇볕을 받으니 바깥 추위를 잊은 듯하다.
고서인 소학의 쇄소, 응대, 진퇴의 구절이 생각나서 다시 새겨 보게 되었다.
나를 먼저 수신하고 치국에 뜻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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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중 철과 도롱태
윤재석
창의력은 변화를 가져온다.
고향 마을 내동리 내동산 정상에서 마을 뒤쪽으로 공중에 철사 줄을 매단
역사가 이루어 졌다.
마을 뒷산은 높고 길은 비탈져 마을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산길
다니기가 매우 불편하고 위험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효율적인 작업 방법을 찾아낸 것이 공중철이다.
마을 사람들이 공중에 철사 줄을 매달았다 하여 공중철이라 이름 붙였다.
마을 사람들이 산에서 풀과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지고 다니려니 길이
비탈지고 자갈밭이라서 미끄러워 매우 위험했다.
눈 오는 겨울철은 더욱 길이 미끄러워서 다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위험과 사고를 방지하고 안전하게 산에서 일을 할까
생각한 것이 공중철의 설치였다.
공중철을 생각한 원리는 서울 남산 구경을 갔다 케이블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창안한 것이다.
마을 회의에서 사업추진위원장에 Y씨, 부위원장 T, S, P씨 등이
주축이 되어 공중철 설치를 기획 설계하여 마을사람과 차근차근
이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지금의 유격 훈련장에서 사용하는 하강 훈련도구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1957,8년 전이다.
처음에 여러 개의 철사 줄을 한 줄로 이어서 설치했다.
그런데 풀이나 나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음매 부분이
떨어져 실패했다.
마을 사람들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두께 0.5mm 길이 1,000m의 철사 줄 두 묶음을 사왔다.
2개의 철사 줄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새끼줄 꼬듯이 하여 887m의
산 정상 큰 바위에 철사 줄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두 개의 철사 줄을 새끼 꼬듯 했는데 어떻게 해서 산 정상까지
끌어 올렸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풀이나 나무를 매달고 내려오는 기구를 마을 사람은 도롱태라 불렀다.
도롱태는 케이블카를 매달고 있는 모습과 비슷했다.
철사 줄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홈을 팠다. 짐을 매달고 철사 줄에
도롱태를 매달면 케이블카처럼 내려왔다.
887m산 정상에서 마을 뒤편까지 걸리는 시간은 풀이나 나무 한 다발에
1분정도 걸렸다.
풀 한 짐이면 약 5-6분이면 되었다.
내려오는 시간은 30분이 걸렸다.
2시간 걸리던 시간이 35분으로 단축되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루는 풀을 하러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나는 점심을, 아버지는 도롱태를 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넓은 골짜기가 눈에 들어 왔다.
풀이며 나무가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열심히 풀을 베어 그 자리에 말렸다.
십여 일 동안 풀을 베어 말렸다.
집에 올 때가 되면 마른풀을 한 짐씩 공중철에 풀을 매달아 내려보냈다.
내려가는 모습이 비행기처럼 빠르고, 그 소리도 요란했다.
이 같은 일을 열흘정도 계속했다.
집에 오면 다시 작두로 풀을 썰어서 퇴비로 만들어 논과 밭에
거름으로 사용했다.
신기하다는 생각과 사람의 창의력은 무한하다는 걸 느꼈다.
공중철을 타고 내려온 풀이 도착지에 오면 도롱태가 벗겨지도록
철사 줄에 고무 고리를 연이어 끼워 놓았다.
도착지에서 자기 집 풀을 받아서 치워야 한다.
다음 사람 것과 섞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먼저 낙하지점에서 기다리다 풀을 지고 집으로 왔다.
마을 사람들은 매일 이처럼 공중철을 이용하여 풀과 나무를 했다.
1950년대는 비료를 구입하기 어려웠다.
퇴비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정부에서 퇴비증산을 적극 장려하던 때다.
마을 사람들은 공중철을 이용하는 재미로 열심히 하여 집집마다
퇴비더미가 쌓였다. 실적이 좋은 마을은 표창도 했었다.
당시 내동리 공중철은 화제였다.
전북도지사 이하영이 공중철을 시찰하고 표창도 했었다.
이 마을 P라는 분은 1,400평에 보리농사를 지었다.
집집마다 보리농사를 하여 타작을 하면 보리 가마가 토방을 꽉 메웠다.
보리농사와 벼농사로 두 번씩 풍년을 맞이하니 생활이 해졌다.
58년 전의 일인데 상상할 수 없는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창의력이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마을 사람의 끈질긴 노력으로 공중철을 설치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면
된다는 정신과 힘을 합하면 이루어진다는 협동과 근면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은 농촌인구가 많이 줄었다. 도시로 삶의 터전을 찾아 나간 때문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연료가 석유나 가스로 바뀌고 있다.
퇴비로 짓던 농사는 여러 종류의 비료가 농작물의 특성에 맞게 생산되니,
공중철의 이용도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지금도 내동리 뒷산 큰골에는 공중철의 자취가 남아 있다.
887m의 높은 산 정상에 1,000m의 철사 줄을 두 줄로 새끼 꼬듯 하여
이끌고 올라간 일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내동리 근대의 유물로 보존하는 게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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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린봉에 올라
윤재석
무상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2009 기축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가는 해가 아쉬워서인지 아니면 시기인지 12월 마지막 날 저녁
눈이 소리 없이 내려 온 천지를 하얗게 덮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 사람이 다닐 곳 내 집 앞을 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삽과 비를 들고나섰다.
마당에서부터 대문으로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계단을 거쳐
골목길을 쓸었다.
너무 많이 내린 눈이라서 비로는 쓸 수가 없었다.
삽으로 눈을 치웠다.
약 60-70미터의 골목길을 치우고 나니 추운 것도 잊어버렸다.
오늘 내가 치운 이 눈길을 다른 사람이 편안히 걸을 걸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2층 계단이며 옥상을 쓸고 나니 저절로 아침운동이 되고 말았다.
차에 쌓인 눈을 쓸어 내리면서 보니 20센티는 족히 온 듯 했다.
기축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보냈다.
내일이면 경인년 새해다. 경인년은 백호 띠의 해란다.
백호 띠 해의 밝은 태양을 맞는 해돋이를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길이 너무 미끄럽고 조심스러워 잠시 뒤로 미루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3시경에 기린봉 등산준비를 했다.
아이젠도 챙겼다.
기린봉 입구인 벽송암에 도달하니 산길이 미끄러워 준비해온
아이젠을 매고 등산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젠은 고무줄 끈이 있어서 깔끔했다.
내 아이젠은 약 20년 전 것이다.
맬 끈이 허리띠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너덜너덜하다.
아이젠도 세대차가 나는가 싶다.
눈길에는 그래도 아이젠이 최고다.
넘어지는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으니까.
기림봉 중턱에서 정상을 보니 어느새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눈길이 팍팍하고 힘들었다.
그곳 정상에 도착하니 겨울 찬바람이 불어 왔다.
정상에 앉아 전주 시가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모두가 눈으로
덮인 설원이었다.
몸은 기린봉에 앉아 있는데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갔다.
내가 나서 자라던 그 고향도 눈으로 산야가 뒤덮여 있을 것 같다.
눈이 내린 날이면 눈을 돌돌 뭉치고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어 눈썹과
수염은 솔잎 가지로, 눈과 코 그리고 입은 숯으로 만들어 붙이고 나면
손이 시리다.
얼른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 밑에 손을 넣으면 따뜻했었다.
눈을 꽁꽁 뭉쳐 눈싸움을 하던 추억도 아련하다.
그때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면서 뛰놀던 고향 친구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고 나 혼자 기린봉에 올라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고향 친구들도 이제 나처럼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되었으리라.
세월은 너무 빠르다.
어릴 적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벌써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 할아버지가 기린봉 정상에 앉아 2010년 경인년 새해의 소망들을
가슴에 새겨 보았다.
1), 우리 식구들의 건강을 맨 먼저 생각했다. 건강이 있어야
다른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늦게 뛰어든 수필공부지만 지도 교수님의 열성과 주위
좋은 분들이 많으니 열심히 해야겠다.
3,) 붓글씨 연습과 문인화도 배우고 때때로 익혀 그치지 말고
천천히 해도 중단하지 말자.
나는 눈 덮인 설원 기린봉에서 이렇게 새해 다짐을 했다.
이 다짐들이 꼭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다.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새해 다짐을 하고 나서 기린봉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눈앞에는 눈 동산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쳤다.
기린봉에서 내려오려니 길은 미끄러웠지만 아이젠 덕으로 별 어려움 없이
내려 올 수 있었다.
선린사 옆에는 여러 중류의 운동기구가 있다.
내려오는 길이라 운동을 하려고 그곳에 들렀다.
어떤 학생이 어머니, 동생들과 어우러져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학생이 던진 눈덩이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직감과 함께
거의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그 눈덩이를 막아냈다.
내가 막지 않았다면 그 눈덩이는 나의 얼굴을 명중시켰을 것이다.
하마터면 새해 벽두에 안전사고가 날 뻔했다.
학생과 어머니가 미안해하면서 사과를 했다.
나는 괜찮다며 안심을 시켰다. 내심으로는 아직 내 동작이 느린 편은
아니라며 스스로 위안을 했다.
오늘 기린봉 정상에서 다짐하고 소망했던 일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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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를 설레게 한 검정운동화
윤재석
고무신을 신던 시절 누구나 한 번 신어보고 싶던 신발이 운동화다.
운동화, 얼마나 신고 싶었던 신발인가.
귀한 신발이어서 아무 때나 신는 신발이 아니었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에나 신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 아니면 신기 어려웠던 신발이다.
신발은 인류 문명 발달의 척도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지금도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는 부족이 있다.
TV 연속극이나 풍속도를 보면 서민은 짚신을 신었지만.
양반은 가죽신발을 신었다.
짚신은 곧 서민의 신발이다.
먼 길을 떠나는 길손의 괴나리봇짐에는 어김없이 짚신이 매달려 있었다.
짚신은 쉬이 떨어지기에 길을 가다 바꿔 신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는 나무하러 갈 때는 짚신을 신었다.
나도 시골서 짚신을 신어본 기억이 있다. 짚신이 보기보다
가볍고 발이 편했었다.
짚신에서 고무신 시대로 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군산 경성고무공장에서 나오는 만월滿月표
고무신이 생각난다.
익산의 천일고무신공장에서 생산되는 천天자표 고무신도 있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만월표 고무신이 대단한 인기였다.
그때는 최고의 신발이었다.
고무신의 색깔이 검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바뀌어 흰 고무신이 나왔다.
고무신이 대중화되더니 그 다음에는 운동화가 나왔다.
처음에는 검정운동화였으나 그 뒤 파란 운동화도 나왔다.
고무신에 비하면 가격이 비싸 운동화 신기가 어려웠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라야 신을 수 있었다.
특별한 행사가 있어야 신는 신발이었다.
설날 신으라고 아버지께서 검정운동화를 사 오셨다.
밤이면 머리맡에 놓고 잠을 설친 일도 있다.
가끔 만져보고 신어 보기도 했다.
그 신발을 보면서 설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던 때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여수 오동도로 수학여행을 갈 때도
검은색양복과 검정운동화를 사 오셨다.
새로 사 온 양복과 운동화를 보니 눈이 번쩍 뜨였다.
어찌나 좋은지 그 날 저녁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설날처럼 운동화를 만져보고 신어보고 방 한쪽에 소중히 잘 놓았다.
마음 설레게 하는 신발이었다.
이제 돌이켜 보면 철없이 좋아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동화는 가볍고 참 편하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찰 때
이 신을 신고 차면 공이 멀리 나갔다.
고무신을 신고 공을 차면 공 따로 신발 따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
고무신만이 하늘 높이 날 때가 있었다.
고무신에서 발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끈으로 신발을 동여매기도 했다.
운동화는 앞에 끈을 잘 졸라매면 운동화가 빠져나갈 염려가 없었다.
달음질할 때도 고무신은 헐떡거리지만 운동화는 이때도 진가를 더욱 발휘했다.
지금 내 운동화는 가까이 사는 아들 녀석이 가끔 사준다.
내 신발이 낡으면 “아버지, 운동화가 떨어지면 말씀하세요.
사 드릴게요.” 한다.
그러겠다고 대답은 하지만 어떻게 떨어질 때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들이 나간 뒤 아내가 농담 삼아 말을 건넨다.
“당신 참 좋겠소! 말만하면 아들이 신발을 사 준다니.
그래서 아들 낳고 딸 낳으려고 하는 모양이지?”
나는 운동화를 신으면 발이 편해서 잘 신고 다닌다.
값비싼 운동화도 있지만 대체로 가격이 저렴한 쪽을 택한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좋다.
요즈음 상표가 있는 운동화는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십만 원을 훌쩍 넘는다.
옛날 어린 시절에 신던 검정 운동화가 비싼 신발이었다.
요즘엔 검정운동화를 보기 어렵다.
추억의 신발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얀 운동화를 주로 신는다.
깨끗한 느낌이 들고 발도 편해서다.
신발의 변화는 인류 문화와 흐름을 반영한다.
짚신에서 고무신, 운동화로 변했다.
지금의 운동화는 멋을 부리는 시대로 변했다.
운동화의 기능이 다양해졌고, 색깔도 울긋불긋 천연색이다.
쓰임새에 따라 종류도 많다.
축구화, 육상화, 등산화, 농구화, 등 자기가 신고 싶은 신발을
마음대로 골라 신을 수 있다.
참 편한 세상이 되었다.
옛날보다 더 좋은 운동화를 신으면서도 검정 운동화를 신을 때보다
설레는 마음이 없다. 감정이 무디어졌나 보다.
검정운동화는 추억의 신발이다.
밤잠을 설치게 하던 그 신발. 공을 차거나 달리기할 때면 꼭 옆에 있던
검정운동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던 검정운동화의 추억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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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무 이발사
윤재석
흐트러진 머리나 볼품 없는 머리를 손질하여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사람을 이발사라 한다.
우리 집 뜰에는 향나무 네 그루와 다른 몇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한 해 겨울을 지나고 나니 나무가 제멋대로 컸다.
모양이 별로 좋지 않아 가지치기를 했다.
가지를 치고 다듬으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려면 정성과
노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향나무 가지를 다듬으며 하루 나무 이발사가 되었다.
향나무는 모양이 제멋대로 였다.
지난봄에 가지 다듬기를 해 주었건만 한 해를 지나고 나니 제멋대로
커 버렸다.
철쭉꽃과 사철나무도 제멋대로 자랐다.
향나무와 사철나무는 가지 다듬기 작업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고 싶었다.
봄볕이 따뜻하니 나무와 화초에는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상사화는 이른봄부터 파란 싹을 내밀고 올라오더니 지금은
무더기로 피어, 푸른빛을 자랑하고 있다. 장미가 가시는 날카로워도
찔레꽃 새싹처럼 윤기를 머금은 채 돋아나고 있었다.
심은 지 4년이 된 감나무가 작년부터 열매를 맺더니 올해도
열매를 맺으려고 새눈을 내밀고 나왔다.
동백나무는 붉은 꽃망울을 탐스럽게 피우고 있다.
질서도 없이 핀다.
활짝 핀 꽃이 있는가 하면 이제야 꽃망울을 맺은 녀석도 있다.
그래도 보기 좋은 꽃이다.
화사한 동백꽃이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금 있으면 장미와 감나무도 꽃을 피울 것이다.
그 때는 벌과 나비도 와서 우리 집은 꽃과 벌 나비들이 한데 어울린
마당놀이가 펼쳐질 것 같다.
제멋대로 자란 향나무를 잘 다듬어서 보기 좋게 만들어야겠다.
가지치기 가위를 찾아서 숫돌에 문질러 나무 가지가 잘 잘리도록 했다.
시골서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경험을 살려 손질하니 가위 날이
봄빛을 받아 빛난다. 작업이 잘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처음은 낮은 곳부터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가지치기 가위에 잘려 나가는 향나무의 상큼한 내음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향나무 가지가 잘려 나가는 고통이 있을 걸 생각하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다.
그렇다.
자연 그대로 크도록 놓아두는 것이 순리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나무를 자르고 휘고 감는 등, 나무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사람의 욕심이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되고 있다.
오랜만에 가지치기를 하니 피곤했다.
향나무 가지치기를 한참 하니 쉬고 싶었다.
모자를 벗고 그대로 돌에 주저앉았다.
앉아있는 내 모습을 보고 옷을 깨끗이 하지, 흙이 묻고 더러워지면
빨래거리가 된다며 아내가 핀잔을 한다.
그래도 아내가 손에 음료수와 먹거리를 준비해 가지고 왔다.
당신이 최고라면서 칭찬을 해주니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낮은 곳을 마치고 이번에는 사다리를 준비하여 높은 곳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해마다 가지치기를 해야 하니 사다리가 필수작업도구가 되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사다리를 가져왔다.
둘이 하던 작업을 아내는 사다리를 잡아주고 나만 작업을 하니
땅에서처럼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몸의 중심을 잡으랴, 작업을 하랴 하니 피로가 쉽게 몰려왔다.
팔과 다리에서 힘이 점점 빠진다.
그렇다고 작업을 멈출 수는 없다.
향나무는 차차 깔끔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몸은 피곤해도 향나무의 보기 좋은 모습에서 노력의
대가를 얻은 듯 흐뭇했다.
초벌 가지치기를 끝내고 다시 다듬기 작업을 했다.
멀리서 보고 손을 보아야 할 곳은 다시 손질했다.
다듬기는 정성을 들이고 꼼꼼히 살펴보아야 손질할 부분을 찾아낸다.
어떤 일이 쉬우랴!
정성이 들어가고 노력해야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 수 있다.
아름다움은 마음을 즐겁게 한다.
향나무의 가지치기가 어쩌면 수필 쓰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나무는 하나의 주제요, 가지들은 하나의 단락이라 여겨졌다.
향나무의 초벌 가지치기작업은 수필의 초고쓰기작업과 같으며,
향나무의 다듬기 작업은 수필을 고치고 다듬는 작업이나 다를 바 없다.
향나무가 가지 다듬기로 아름다운 모습을 찾는 것은 수필 쓰기에서의
문맥 다듬기로 좋은 수필을 빚는 것과 같다.
향나무의 가지치기는 봄날 하루의 일이지만 수필의 다듬기는
일 년 내내 빠짐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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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의 개똥철학
개똥철학은 사전적 의미로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철학인 듯
내세운 것이라 했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것,
자신의 경험 등에서 얻은 기본적 생각이라 적혀 있다.
황달이라는 병으로 고생하면서 어떻게 하면 다시는 병에 안 걸릴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식욕이 떨어지고 피곤해서 병원을 찾았다. 진찰 결과 황달이라 했다.
황달이란 병은 간디스토마로 인해 담도가 막히면 담즙이 혈액으로
흡수되어 일어날 수 있는 질병이다.
황달이 심하면 간경화나 간암으로 발전하는 병이다.
황달은 다른 암과도 관계가 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잘못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두 주쯤 먹어도 별 효과가 없었다.
황달에 대해서 이곳저곳에 물으니 민간요법으로 인진 약쑥을 달여 먹으면
좋다는 말을 들었다.
한약방에서 황달에 대한 문의를 하고 약쑥을 사 왔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5월이라 날씨가 더웠다.
아내는 내가 사온 약쑥을 약 단지에 넣고 달이기 시작했다.
막내인 딸을 등에 업고 약 단지 앞에 엎드려서 약을 달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보였다.
5월의 뜨거운 햇볕에 아내의 얼굴은 땀에 젖어있고 등에 업힌 딸애의
발은 포대기 밑으로 나와서 땅을 쓸고 있었다.
제 엄마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잠에 빠져 세상 모든 것을
다 잊은 듯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내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뜨거운 햇볕에서 저런 고생은 없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낫고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병은 호전되는 기미가 없었다.
황달에 좋다는 약을 구해다 먹었어도 약효가 없었다.
다른 병원을 찾아 다시 진찰을 받았다.
황달이 아닌 것 같다면서 대변 검사를 했다.
검사는 내가 보는 자리에서 했다.
검사를 하던 의사가 황달이 아니라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의사가 현미경을 한 번 보라고 했다.
내가 현미경을 본들 무엇을 알 것인가. 변속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
자세히 보라고 했다.
8자 모양처럼 생긴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의사가 그것이 간디스토마라고 했다. 황달은 아니냐고 하니
황달이 아니란다.
지금 의사의 말이 옳다면 나는 오진을 받고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다.
간디스토마는 민물고기에 서식하고 있다가 사람이 생선회를
먹을 때 간디스토마의 유충을 같이 섭취하게 되므로
간디스토마에 감염된다.
간디스토마에 감염되면 담도암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생선회를 너무 즐길 일이 아닌 듯 했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유념해 두고 조심할 일이다.
간디스토마 약을 처방해 주면서 국산은 없고 수입 약이라면서
시내 오거리에 있는 D약국을 소개해 주었다.
이 약국은 주로 수입 약을 취급했다.
약명은 헵톨이라 했다.
아직은 간디스토마 약이 없단다.
독일에서 수입한 약인데 가축의 기생충 퇴치용이라면서 약이 독하니
하루 먹고 하루 쉬어서 먹으라 했다.
약값이 금값보다 비쌌다.
다행히도 나는 이 약을 먹고 건강을 되찾았다.
누구나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건강이기도 하다.
황달이라는 병과 간디스토마로 고생하는 나를 정성으로 간호해 주는
아내의 힘든 모습을 보고 생각한 것이 있다.
사람을 성현과 사람, 바보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성현은 세상일을 겪지 않고 미리 깨달은 사람, 사람은
세상일을 겪은 뒤 깨달은 사람, 바보는 세상일을 겪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성현처럼 세상일을 미리 깨닫지는 못해도 사람같이 겪은 일은 깨닫는
사람으로 살 것이며 바보처럼 겪은 일을 깨닫지 못하고
살지는 말자고 생각을 했다.
잘못된 일은 깨달아서 두 번 다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나의 잘못으로 아내와 식구들이 고생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잘못된 일을 반복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나의 개똥철학이다.
이 개똥철학을 실천하려 해도 그리 쉽지 않다.
실천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생각하면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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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산초당을 찾아서
윤재석
여행은 즐겁다.
오늘은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회원들이 문학기행을 떠나는 날이다,
해마다 갖는 행사이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고 느낄까,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며 기대가 된다.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자연을 즐기며 삶의 재충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오늘 문학기행은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귀양지였던 다산초당을
찾기로 했다.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다산초당이 있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을 찾아 아침에 문우들과 함께 출발했다.
모두 시간 약속을 잘 지켜 약속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4월의 아침이라서 시원하고 여행하기에는 날씨가 안성맞춤이었다.
복장은 원색차림이어서 생기발랄하고 활기차 보였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산하가 신록으로 접어들면서 푸른 숲을 이루고, 넓은 평야는 농사일로 분주했다.
6·25전쟁 이후 빈곤국가로 봄이면 먹을거리가 없어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세계 경제 대국이란 말은 듣고 있다.
우리 민족이 대단하고 영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어디든지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탁 트인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있다.
바깥 풍경이 초록으로 다가왔다가 휙휙 지나간다.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서 머물 사이도 없이 지나쳐 버린다.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다.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이치가 적용되는 것인가?
지나고 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시간이니 아쉬움이 남는다.
강진군 도암면까지 더 빨리 가고 싶어서 지름길을 택했다.
산골길은 구불구불하여 어릴 적 내 살던 시골길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이 된 듯 하다.
우리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좋은 경치가 있어도 때가 되면 식사하면서 천천히 여유를 가지라는 말인 성싶다.
내가 생활하던 곳을 떠나면 길손이 된다.
도암면 예약한 식당을 찾았다.
식사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식단을 골라 식사를 했다.
오늘 같은 날 반주 한 잔이 빠질 수 없다.
막걸리며 소주 등 기호에 골라 들었다.
나는 유리잔에 소주 한 잔을 붓고 거기에 맥주를 섞어 만든 소맥이
시원하고 짜릿해서 한 잔 했다.
다산박물관에 도착했다.
난감한 일이 생겼다.
월요일은 휴관하는 날이란다.
일요일 관광객을 위해 일하고 월요일은 쉬는 날이라는 설명이다.
다산박물관은 대지도 넓고 건물도 현대식으로 새로 지었다.
조경 사업은 많은 신경을 기울여 잔디밭이 잘 가꾸어졌다.
모정도 몇 군데 지어 놓아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편히 쉴 수 있었다.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를 거쳐 산 비탈길이었다.
자세한 이정표가 없어 조금 헤맸다.
이정표를 다시 정리했으면 싶었다.
앞에 다녀오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찾아갔다.
초당 가는 길로 들어서니 경사진 길이 나섰다.
경사는 점점 심해졌다.
산길은 더욱 울퉁불퉁하고, 길바닥에는 굵은 돌들이 초당을 찾은
손님들의 발길에 닳아서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담아갈 수 있기에 이리도 험한 길을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걸까?
돌과 어우러진 나무뿌리도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서 매끈매끈하다.
비포장도로 산길이어서 비가 오면 패이고 유실되어 걷기에 불편했다.
그래도 조선 시대 실학의 대학자인 다산이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했는지
보고 느끼고 싶어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유배생활에서 불후의 저서를 남긴 숭고한 정신과 마음가짐을
조금이라도 본받고 싶어서 이 초당을 찾으리라.
다산초당에 이르렀다.
초당이라 해서 옛날 시골집을 연상하고 왔는데 기와집이 나타났다.
관리하기에 편리한 기와집으로 바뀐 것이다.
경내는 청소를 해서 깨끗했다.
초당에서 맞은 맑은 바람이 이곳까지 오는 고달픔을 한 번에 앗아갔다.
초당에는 다산의 초상이 있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백련사를 찾아가는 길이 있었다.
백련사를 찾아가다 멀리 바다가 보인다.
유배생활에 지친 다산은 바다를 보며 자연과 함께하면서
심신을 달랬으리라.
다산의 생애가 떠오른다.
다산은 1762년 영조 때 경기도 광주군 호부면 마현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 정재원이며. 어머니는 해평 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집안이다.
당시 정치 상황에서 노론 벽파의 시파 타도에 몰려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두 번째 귀양지인 강진으로 온 다산은 윤박의 정자로 옮겨 다산정이라
이름하고 학문에 열중했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실학에 정진했다.
실학의 원류는 시조 격인 유형원에서 이원진.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져 왔다.
유형원은 전북 부안에서 실학의 연구서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실학을 본받아 경세를 연구했다.
다산의 대부분 업적은 귀양살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후진 양성에 정열을 기울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다산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500여 권의 저서가 있다.
경세유표는 국가경영의 지표를 저술한 것이다.
왕도정치로 백성이 국가 구성, 운영의 근간이 되어야 했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지방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을 밝힌 글이다.
흠흠신서는 지방관리들이 형사사건을 다룰 때 알아야 할 계몽서이다.
다산의 업적은 방대해서 이루 말할 수 없다.
유배 생활에 고달프고 어쩌면 자학의 시련을 안기도 했겠지만,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후세에 규범이 되는
저술을 남겼다.
훌륭한 그 정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다. 뒷산 그림자가 초당을 덮는다.
앞뜰에 이름 모를 작은 새가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다.
여러 날 이곳 사람과 지낸 듯 두려움을 볼 수 없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오랜 귀양살이 세월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많은 업적을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어찌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는 천천히 초당을 떠나 산길을 내려와 관광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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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덕과 함께 살기 바라는 고향 사람들
윤재석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팔공산 데미샘에서 발원해서 섬진강으로 흐른다.
어릴 때면 노다리(징검다리)를 건너서 학교에 다니던 추억이 어린 시냇물이다.
여름이면 학교에서 오다 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목욕을 한다.
꼬마들이 어울려 물장난을 하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곳이다.
겨울이면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던 곳이다.
그때의 동무들을 만날 수 없다. 모두 어디에 살고 있을까.
어른들은 낚시나 족대로 고기를 잡아 천렵하던 일들을 이제는 볼 수 없는 지
난 모습이 세월 속의 영상이 되고 있다.
마을 뒤에는 큰골이 있다. 내동산 높이가 887m로 높다.
산골도 깊어서 마을 사람들이 큰골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1957년도에 설치했던 공중철이 남아 있다.
큰골 정상 바위에 철사 줄을 매어서 골짜기 아래로 연결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산은 높고 험한 데다 산길은 비탈져서 나무나 풀을 할 때면
지게로 옮기다 보니 위험하고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창안한 것이 철사를 공중에 매달아 설치한 것이다.
주민들이 부르기 쉽게 공중철이라 불렀다.
이는 우리나라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근대 유물로 지정했으면 한다.
공중철은 마을 주민들이 창의력을 발휘해 설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철사 줄을 이어서 설치했다.
연결 부위가 나무나 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해 실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음매가 없는 1000m의 철사 줄을
서울에서 사들였다.
1000m의 철사를 두 겹으로 새끼 꼬듯 하여 큰골 정상 부분의 바위에
매다는 작업을 한 것이다.
정부의 지원 하나 없이 오롯이 마을 주민이 이룩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하였는지 불가사의한 일로 여긴다.
아마도 시골 마을에서 이런 일이 있는 곳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의 창의력은 무한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은 아버지의 산소가 있어서 가끔 찾는다.
옛 모정은 192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100년이 가까운 세월이 되었다.
해가 거듭되니 바람맞고 비에 젖어 퇴락해 갔다.
그 간의 몇 번의 수리를 했으나 무상한 세월에 사람의 손길로 감당할 수 없었다.
사람은 도시로 가고 이용자가 없다 보니 버려 두는 모습이 되었다.
관심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모정에 대한 정은 여전했다.
마을 앞 망덕거리 마을 회관 옆에 모정을 새로 짓는 모습을 보았다.
고향 사람들과 정겨운 만남의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자연히 지난날 일들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을 이장의 제의를 받았다.
아직 모정의 상량을 하지 못했는데 상량의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모처럼 고향의 일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잘 쓰는 글씨는 아니지만, 허락을 했다.
2017년 음 3월 3일에 상량을 하는 날이라 했다.
그때 와서 써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한다. 날짜에 맞추어 먹과
붓을 챙겨 그 날 모정의 상량문에 응천상지 삼광, 비인간지
오복(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이라 썼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상량 하는 날은 경사라 한다.
허물어져 가는 모정을 다시 짓게 되고 상량을 하는 날은 마을의 경사란다.
옛 어른들이 정성 들여 지은 모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마음이
한편 죄송하단다.
이제 다시 모정을 짓게 되니 어느 정도는 어른들에 대해 부끄러움은
면할 수 있다면서 모두가 즐거운 얼굴이다.
망덕(望德)거리에 새로 지은 모정의 상량문처럼 하늘의 순리에 따르고,
인간의 오복을 마련하면서 항상 평화로운 마을, 번창하는 마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사람들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이장 일을 보는 김상일의 부탁을 받았다.
후배이면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사람이 이름이 있듯
새로 지은 정자의 이름과 현판을 써 달라 한다.
마을 정자의 이름을 고향 사람의 글씨로 써서 걸면 좋겠다는 뜻과 함께
나에게 말한다. 거절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 길로 정자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여러모로 생각했다.
고향 마을의 정서가 서려 있는 정자의 이름이기에 생각을 거듭해서 얻은
이름이 머리에 떠올랐다.
망덕정(望德亭)이라 했다.
마을 회관 앞뜰의 이름이 망덕거리여서 망덕정이라 이름 지었다.
사람의 도는 덕을 으뜸으로 삼는다 했다.
재주는 삶을 보충해 주는 것으로 삼는다 했다.
덕과 재주를 두루 갖추면 으뜸이 되겠지만 덕이 있고 재주 없으면
덕은 가히 쓸 수 있으나 덕이 없고 재주만 있으면 그 재주는 쓰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덕을 중히 여기는 생각으로 마을 앞 길거리의
이름을 망덕거리라고 불렀으니, 그 깊은 뜻을 조금은 알 듯 하여
망덕정이라 한 것이다.
7월 7일 준공식 날이 되었다. 망덕정(望德亭) 현판식을 했다.
준공식장은 잔칫날 분위기다. 차일을 치고, 의자를 준비해 놓았다.
이날은 멀리 서울에서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찾아 왔다.
자주 만나지 못해서 모습이 많이들 변했다.
자기의 소개를 해야 알아볼 정도였다.
식전행사로 악기연주가 있었다. 모두가 즐거운 얼굴이다.
식장에는 군수와 면장 등 관계 기관에서 많이 참석해 준공식과
현판식을 성대히 마쳤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 덕을 바라는 마음과 자세로 살자는
옛 어른들의 바람으로 길 이름을 망덕거리라 부르며 살아왔다.
어버이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자식이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자식이 나가서 미쳐 돌아오지 않으면 부모가 기다리던 곳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덕을 바라고 살자는 망덕거리에 망덕정(望德亭)을 세웠다.
옛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은 망덕정신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이어서,
마음속 깊이 간직하리라 여겨진다.
시냇가 옆에는 솔밭이 있다.
그리 크지는 않아도 어려서부터 보아 왔었다.
솔밭 안에는 작은 방죽이 있다.
어른들이 도깨비 방죽이라 불렀다.
방죽 물은 맑았으나 파란 이끼가 끼고 방개들은 헤엄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느다란 몸집에 파란빛을 띄우는 물잠자리가 사람이 다가가면
금세 알아차리고 멀리 도망쳐 버리곤 한다.
지금은 솔밭에 작은 모정이 세워져 있다.
여름철이면 전주 등 외지에서 피서하려고 찾아오곤 한다.
옛날에는 음산한 곳으로 피하려는 곳이 이제는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고향 마을에 정자가 지어지고 있었다.
백 년 가까이 되는 모정이 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유래를 보면 아주 큰 마을로 알려져 있다.
마을 주변에는 그릇을 구워낸 도자기 조각들이 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마을에 도자기 굽는 도요지가 있었다는 증거다.
마을 앞에는 솔밭 거리란 곳이 있다.
섬진강 상류로 시냇물이 흘러 지나는 곳이다. 많은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휴식 공간으로 정자가 여러 개 지어져 있다.
휴식 차 찾아온 손님을 맞아 주고 있다.
어렸을 때 이곳을 솔밭 거리라 불렀다. 작은 방죽이 있었는데
도깨비 방죽이라 부르기도 했다.
저녁 늦게 학교에서 집에 올 때 이곳을 지나면 공연히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었다.
도깨비 방죽이 있은 솔밭 거리를 빨리 지나고 싶은 마음에서
빠른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마을 사위에는 백운의 경치 좋은 곳이 있다. 덕태명월(德泰明月)
덕태산에 솟아오르는 밝은 달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덕태산 옆에는 선각산이 자리하고 있다.
우뚝 솟은 산머리에 하얀 구름이 산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다 하여
선각귀운(仙閣歸雲)이란 글귀로 나타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앞에 보이는 덕태산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와
저녁달을 보면서 인간의 호연지기를 가다듬고 사람으로 갖추어야 하는
자중과 지덕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선각산의 유유자적한 구름을 보면서
안빈낙도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마을 뒤에는 내동산이 자리하고 있다. 산간 지방이라 앞뒤로 큰산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내동산은 경치가 빼어난 산이다. 전설도 가지고 있다.
내동산에는 폭포가 있다.
내산락폭(萊山落爆)이라는 경치를 읊은 글귀가 내동산의 운치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이산을 백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백마가 태어나 장수를 기다리다 죽었다는 전설이다.
땀띠나 피부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서인지 여름이면 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약수라 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곤 한다.
경치가 아름답고 산 정사에서 조망이 좋아서 전주 등 외지에서 오는
등산객이 찾아온다.
내동산 정상에 오르면 진안의 명산인 마이산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
마을 뒷산의 골짜기를 큰골이라 부른다. 내동산 높이가 887m로 높다.
산골도 깊어서 마을 주민들이 큰골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1957년도에 설치한 공중철이 있다.
큰골 정상의 바위에 철사 줄을 매어서 마을 뒤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놓은 것이다.
마을주민들이 산이 험하고 비탈져서 나무나 풀을 할 때면 지게로 옮겨야 했다.
위험하고 사고가 자주 일어나 생활에 불편을 느꼈다.
이러한 불편과 위험을 없애기 위해 설치한 것이 공중철이다.
공중철은 철사 줄을 공중에 매달았다 해서 주민들이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데미샘에서 발원 섬진강 상류의 물이 흐르고 있다.
데미샘은 장수와 백운과의 경계에 있다.
해발 m로 높은 산이다.
데미란 말은 천상을 의미한다는 내력이다.
하늘에서 내린 물이라는 뜻으로 높은 산자락에서 솟아난 샘을 말한다.
시냇가에는 작은 솔밭이 있다.
정자와 마루 등이 마련되어 여름이면 피서객이 몰려와 쉬고 가는 곳이다.
예전에는 여름철 비가 와 홍수가 지면 시냇물을 건너지 못해
학교를 결석하던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넓은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자동차가 다닌다.
홍수로 인해 생활에 불편을 받는 일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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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데미샘을 찾아서
윤재석
봄이 다 가기 전에 데미샘을 찾고 싶었다.
이 샘은 섬진강의 발원지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섬진강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데미샘을 풀이하자면 천상봉에 있는 옹달샘, 즉 천상샘이란다.
데미샘을 찾아 가 자연의 풍광에 빠져 볼까 한다.
아침 일찍 일행과 전주에서 출발했다.
하늘은 잿빛 구름이 끼고 봄비가 오락가락 날리고 있었다.
고향인데 아직까지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섬진강의 발원지를 보러 가는 기대에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증이 들기도 했었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관촌 오원천과 임실 옥정호를 거쳐 곡성
구례를 지나 광양만으로 흐르는 강이다.
이 강의 유래도 있다.
왜구가 강 하류를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자 왜구가 놀라서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두끼비 섬蟾자와 나루 진津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했다 한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굽이굽이 흐른다.
이 지방 넓은 평야에 젖줄이 되고 있다.
관촌을 거쳐 백운으로 들어서는 고개를 넘으니 마이산이 멀리 보였다.
반송리에 도착했다.
반송리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앞에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나무를 상징하여 반송리라 부른다는 것이다.
구남각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고려 말 충신 최양의 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최양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 와 머물렀다.
그 기념으로 자손과 주민이 최양의 충절을 본받고자 세운 비각이다.
마을 주변에는 인삼재배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농가의 소득을 올려 주는 특용작물이다.
농촌의 수입이 예전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물길 따라 조금 올라가니 벚꽃 길이 열렸다.
언제 심었는지 제법 큰 나무였다.
벚꽃은 아침 비에 젖고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겨울의 눈송이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이백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멋진 시를 지었을 텐데…….
벚꽃 길은 이어졌다. 시골이라지만 농촌의 모습이 바뀌었다.
벚꽃 길 주변에는 펜션과 민박집이 들어서 있다.
물 좋고 경치가 아름다우니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길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길 위쪽에는 벚꽃이 활짝 피었다.
하얀 색이 더욱 빛났다.
이곳 데미샘을 찾아온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을 테니까.
어느새 데미샘 관리소에 도착했다.
승용차는 관리소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서 올라가야 된단다.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는 중간마다 놀이터나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놀이장, 문화마당, 무지개 연못, 등의 안내판을 세웠다.
시골을 상징하는 가재와 개구리, 두루미, 등의 조형물도 설치하여
오는 사람들의 산행이 편안하도록 해놓아서,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이 샘의 관리를 위해 애쓰는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쉬다 가다를 거듭하니 시간이 더 걸렸다.
이정표의 안내를 받아 데미샘이 있는 산길로 들어서서, 작은 다리를 건넜다.
산길은 돌을 깔아 깨끗하고 넓어서 비가 오는데도 옷이 젖지를 않았다.
가다 보니 나뭇가지에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군산 개인택시 새만금산악회라 씌어 있었다.
다른 한쪽은 인천우정산악회라 적혀 있다.
우리나라 여러 산악회에서 이 샘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데미샘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무는 울울창창하고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 오니 다람쥐가 나타났다.
어릴 적에는 마을 숲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또 만났다.
등에 갈색 문양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꼬리를 똑바로 세우고 이쪽 돌에서
저쪽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가 무슨 일인지 다시 내려온다.
다람쥐를 보니 다람쥐를 잡으려고 쫓아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다람쥐는 오늘 보니 참 귀엽다.
빗방울이 간간이 뿌려 우산을 폈다.
비는 와도 마음은 즐거웠다.
맑은 물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청량한 공기는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숨을 깊이 내쉴 때는 내 안의 찌꺼기가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다.
빗방울은 길가의 산죽에 뿌려진다.
도르르 굴러 내린다.
저 물방울이 모여 섬진강을 이루는가? 데미샘의 물줄기는 돌 틈을 타고
졸졸 흐르고 있다.
마음을 씻어줄 청량수로 느껴졌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나무에 새들이 노래하고 있다.
우리를 반기는 환영사로 들렸다.
저들의 환영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안타깝다.
환영사에 답사를 못하다니, 미안했다.
주위 환경이 깨끗하다.
물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돌에는 이끼가 파랗게 끼었다.
저 이끼가 데미샘의 물을 정화해 주어서 이리도 맑은가 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다.
이끼 낀 돌 틈으로 흐르는 물이 하도 맑다.
가슴을 열고 내 안의 구석을 한 번 깨끗이 씻고 싶다.
데미샘에 도착했다.
옆에 정자가 있어 찾아온 손님의 휴게소가 되고 있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 샘물은 층층이 돌로 쌓인 돌 틈에서 흘러내렸다.
샘 위는 바위와 돌로 산골을 메우고 있다.
이곳에서 샘물이 졸졸 솟아나고 있다.
명산의 줄기에서 솟아난 물이라서 큰 강을 이루는 성싶다.
이곳에서 나오는 저 물이 섬진강 212 Km의 장강을 이룬다니,
내 고향 데미샘이 자랑스럽다. 이곳의 자연을 만끽하고 벚꽃 길을 따라
물길을 따라 돌아왔다.
나무는 뿌리가 깊어야 바람에 견디고 물은 근원이 길어야
마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데미샘은 억겁을 두고 자연을 살찌우며 오래 이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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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두 분의 어머니
윤재석
두 분의 어머니가 계셔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한 분은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이시고, 다른 한 분은
나의 건강을 빌어주시는 어머니이시다.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만 나의 무병건강을 빌어주시던
어머니는 돌아 가셨다.
봄을 맞아 산하가 파란색이 되고 바람이 산들 불어오니
두 분 어머님이 생각난다.
어릴 때 어느 날 집에 오신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께서 앞으로 어머니라 부르며 모시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곁에서 보시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집에 어머니가 계시는데 어찌 다른 분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모시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본 그 어머니의 모습은 단정하고 편안해 보였다.
얼굴이 하얗고 머리는 곱게 빗어 낭자를 하셨다.
부모님과 그리고 그 어머니와는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신 듯했다.
세 분의 모습은 무척이나 친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루에 앉으셔서 안부를 물으며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식사 때가 되면 꼭 함께 식사도 하셨다.
새로 오신 어머님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같은 어머니면 한 집에 살아야 하는데 어찌 갑자기 오신 분에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섬기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어디에 살고 계셨는지,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다.
나는 그 뒤로 그분이 오시면 어머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드렸다.
어릴 때 일이라 집에 계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으로 알고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그 분이 오시면 손님을 대하듯 하셨다.
나는 으레 ‘어머님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받은 그 분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 새끼 많이 컸다고
하시던 게 생각난다.
부모님께서 이분과 서로 존경하며 지내니 나는 어머니가
두 분이 된 것이다.
옛날에는 사주를 보고 병이 많고 명이 짧으면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커다란 나무나, 불상에 팔아 명을 잇는 풍속이 있었다.
나의 사주를 보니 병이 많고 명이 짧아서 암자의 불상 아들로 판 것이다.
이곳에 계신 분이 나의 무병과 짧은 명을 이어 주려고 빌어주신
어머님이셨다.
그 뒤 이분과 나는 어머님과 아들 관계가 되어 지낸 것이다.
이곳 암자에 계신 어머님에 대한 부모님의 배려가 대단하셨다.
부모님께서는 이 분이 매우 고마우신 것이다.
아들의 건강과 명을 잇기 위해 애쓰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설날이나 추석, 명절 등이면 우리 집에 오셨다.
부모님은 그분이 오시면 정중하게 맞이하고 쌀과 다른 곡식을
챙겨 드리셨다.
어머니는 내 생일이면 나를 데리고 불상을 모시는 어머님이
계시는 곳으로 찾아갔다.
우리 집에서 약 3km 되는 거리였다.
어머니와 내가 찾아간 곳은 산골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초가 한 채와 헛간 한 칸이었다.
초가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었다.
백운면 동창리 은안리 암자다.
시루에 떡을 하고 밥을 새로 지어 정화수와 함께 차려 놓고
두 분의 어머님이 불상 앞에서 나란히 불공을 드리셨다.
이때서야 이분을 어머님이라 부르고 모시라는 참 뜻을 알았다.
결혼 한 뒤로도 우리 부부는 이곳에 찾아와 불공을 드렸다.
나의 생일 전날 와서 같이 자기도 했다.
나의 생일은 정월 초순이다.
겨울 추위가 여전하여 빙판이 된 시골 산길은 낙상의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했다.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찾아가자 벌써 커서
장가를 갔다며 좋아하셨다.
자신이 무병과 건강을 위해 빌어준 아들이 결혼한 것을 보고
퍽 기쁜 모양이었다.
아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떡을 하고 밥을 지었다.
양초와 김이며 다른 반찬을 준비해서 어머님과 아내가 정성스레
불공을 드리는 모습이 두 분 어머님이 불공드리던 모습과 비슷했다.
나의 무병 건강을 빌어주시던 어머님은 돌아 가셨다.
좀 더 오래 사셔도 될 연세인데 일찍 돌아 가셨다.
어머님 영정을 보니 내가 처음 인사드리던 때가 생각났다.
불상 앞에서 단아한 모습으로 정성껏 나의 무병건강을 빌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내 새끼 많이 컸다고 머리를 쓰다듬고, 궁둥이를 두드려 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지금까지도 건강하다.
살아오는 동안 가슴을 여는 큰 수술부터 조그마한 수술을
여러 번 했지만 모두 이겨내고 건강을 찾았다.
병 많고 명 짧은 아들을 위하여 불상에게 맡긴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의 힘이라 생각한다.
부모님의 권유로 나의 무병장수를 빌어 주신 어머님의 불공 덕이려니 싶다.
불상을 모시면서 나의 건강을 빌어 주신 암자를 찾아갔다.
내가 전주로 이사 온 뒤로 이곳을 찾아다니지 못했기에
꼭 한 번은 찾아보고 싶었다.
시골 산길이 자동차로도 다닐 수 있었다.
조그마한 초가였으나 큰집을 새로 짓고, 불상도 여러분을 모셨다.
마당도 넓혀서 자동차가 주차할 수 있었다.
작은 암자의 이름은 은안절이었다.
주인에게 나와의 관계를 말씀드렸더니 반가와 하셨다.
커진 규모를 보니 신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다.
변한 모습에 세월의 무상을 느끼며 앞으로 자주 찾으리라
마음먹고 떠나 왔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과 나의 건강을 빌어 주신 어머님이 아니면
지금의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을까.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께서는 살아 계시지만 건강이 좋지 않다.
건강을 빌어주시던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부모님과 어머님은 믿음으로 사신 분들이다.
말로 맺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다.
어른들의 두터운 신의信義를 본받고자 한다.
윤재석
대한문학으로 등단
대한문학작가회 회원
진안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삶은 기다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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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재석 글 모음 14편
감사합니다..김용호님
싱그러운 푸른 잎들처럼
생기있고 행복한 마음으로
미소가 떠나지 않는
멋진 5월의 마지막 휴일 되세요
추천"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