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두환 글 모음 14편
☆★☆★☆★☆★☆★☆★☆★☆★☆★☆★☆★☆★
《1》
감나무 이야기
임두환
가을이 점점 짙어가고 있다.
찌뿌듯한 몸과 마음을 달래고자 오랜만에 완주군 구이면 오봉산을 찾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산들바람까지 더해주니
집을 나서기 잘 했구나 싶었다.
오봉산 어귀에 들어서니 이른 아침부터 등산객이 줄을 이었다.
저 멀리 몽실몽실 솟아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에는 가을이 짙어지는 듯
울긋불긋 아름다웠고, 산길 따라 소모마을 밭 가장자리에는
감나무가 지천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감나무고장임을 짐작케 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마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주황색 대봉감에
감탄사를 연발했고, 산자락 감나무가지에 매달린 홍시(紅?)는 등불을
달아 놓은 듯 귀물이었다.
자연(自然)의 섭리가 아니고선 그 누가 이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놓았을 것인가.
고향마을 우리 집 뒤란에는 감나무 여러 그루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른 팔로 한 아름이 넘는 고목(古木)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감나무로 늙고 삭정이가 많아 아무나
함부로 오르질 못했다.
어느 날, 집안아저씨를 불러 감을 따던 중, 삭정이를 잘 못 디뎌
땅으로 떨어졌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다행히도 머리와 팔다리는 괜찮았지만 몸통이 땅에 부딪쳐 온 몸은
피멍이 들고 부어 올랐다.
그 때만해도 병원을 찾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네 어른들께서는
“큰일났네! 골병에는 똥물이 최고인데….”라는 말에,
똥통에 용수를 박고서 걸러마시던 일이 새삼스럽다.
내 고향 사옥(舍玉)마을은 감나무 골이라 불릴 만큼 감나무가 많았다.
감을 따는 가을철이면 장사꾼이 어디서 몰려드는지 장터를 방불케 했다.
어른들은 감나무에 올라가 간짓대로 감을 따야 했고, 아낙과 어린이들은
쉴 새 없이 선별작업에 들어갔다.
행여, 감 표면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봐 갓난아이 다루듯 조심했다.
감나무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우리 집엔 논농사가 적어 돈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감나무 ? 담배농사 ? 누에치기가 주된 수입원이었다.
다행히 밭에는 수시감을 비롯하여 넓적감, 재종감, 뾰족감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한 밑천 되었다.
그 돈으로 식량을 구하고, 밀렸던 수업료도 낼 수 있었으니,
감나무는 내 생명의 은인이자 구세주였다.
중국 당(唐)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은 유양잡조(酉陽雜租)에서
감나무를 이렇게 예찬했다.
‘감나무는 잎이 넓어 글씨를 쓸 수 있으니 문(文), 목재가 단단해서
화살촉을 깎으니 무(武), 겉과 속이 한결 같으니 충(忠), 치아가 없는
노인도 즐겨 먹을 수 있으니 효(孝), 서리를 이기고 오래도록
매달려 있으니 절(絶)이라 했다.
그 다음으로 목재가 검고(黑), 잎이 푸르며(靑), 꽃이 노랗고(黃),
열매가 붉으며(紅), 곶감이 희다(白)고 하여 오색오행(五色五行),
오덕오방(五德五方)을 모두 갖춘 예절지수(禮節之樹)이다.’라며
수많은 나무 중에서도 감나무를 으뜸으로 여겼다.
어린 시절, 감꽃과 감또개가 떨어지던 봄날이면 세 살 아래 여동생 경순이와
이것을 실에 뀌어 목걸이와 팔지를 만들고, 감꽃을 찧어 사금파리에
올려놓고 소꿉장난을 했었다.
감 말랭이를 주워 먹고 배가 부풀어 뒹굴던 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허기진 배를 홍시로 채워야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내 나이 벌써 일흔으로 그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감나무 밑에 누워 입안에 감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이 있다.
노력은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을 빗대어 꾸짖는 말일 게다.
씨앗을 뿌리고 땀 흘려 가꾼 사람만이 수확의 기쁨을 맛본다고 했다.
나는 몇 년 전 시내변두리 얼마 되지 않은 땅에 감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어 놓고 세월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대봉감이 빨갛게 익어 가는 날이면 손자손녀들과 농장에 둘러앉아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우리라.
☆★☆★☆★☆★☆★☆★☆★☆★☆★☆★☆★☆★
《2》
감동의 드라마 컬링
임두환
컬링경기는 짜릿한 스포츠였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의 여자컬링 대 표팀이 2018년 제23회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이 쾌거는 온 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겼고, 모두가 하나 됨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내 자신, 컬링에는 관심이 없었다.
얼음판에 맷돌 같은 것을 밀어 놓고서 빗자루로 닦는 희한한
경기도 있구나 싶었다.
동계올림픽이 시작된 지 일주일째 되던 2월 15일이었다.
여자컬링 대표팀이 세계랭킹 1위 캐나다를 꺾는 이변이 일어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온 국민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
이것 봐라! 이게 뭐지?’ 그때부터 컬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차전에서 일본에게 아쉽게 패했지만 그 뒤, 세계랭킹 5위까지
무너뜨리며 7승1패로 예선을 통과했다.
컬링경기는 4명이 한 팀으로 총 10엔드까지 치러진다.
엔드(end)마다 1명이 2개씩 번갈아가며 8개의 스톤(stone)을 밀어 넣는다.
하우스 중심에 상대의 스톤보다 많이 넣을수록 점수가 올라간다.
스킵(주장)이 스톤을 밀어 넣고 나머지 선수들은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스위핑(sweeping)을 한다.
스톤은 둥근 모양의 화강암으로 무게 19.9kg이하, 둘레 91.4cm,
높이 최소 11.4cm이다.
스톤은 얼음 표면과 편편하게 닿아 있지 않고, 접시 바닥처럼 좁은
부분만 얼음 위로 미끄러진다.
여자컬링 대표팀의 첫 출발은 이러했다.
김은정이 김영미에게 쪽지를 보낸 게 여고 1학년 때였다.
경북 의성 컬링장에서 김은정은 단짝친구 김영미를 불러냈다.
컬링 장으로 언니(영미) 심부름을 왔던 김경애가 친구 김선영을 합류시켰다.
비 인기종목의 설움과 무관심에도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열정과 투혼을 발휘했다.
휴대전화까지 반납하고 경기에만 집중했던 그들이었기에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팀 킴(Team Kim)’의 스토리가 가진 매력에는 압도적인 실력,
찰떡같은 호흡, 환상적인 스킬 등 3박자에 온 국민이
환호의 박수를 보냈으리라.
여자컬링대표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결승전에서 강호 스웨덴에 3대8로 패했지만,
우리나라 컬링역사상 첫 올림픽 준우승이란 성과를 거뒀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짜릿했던 경기는 일본과의 준결승전이었다.
10엔드 7대7 아슬아슬했던 찬스에서, 마지막 컬링스톤이 김은정 선수의
손을 떠났을 때였다.
온 국민이 숨죽이며 지켜보던 순간, 결과는 적중이었다.
8대7로 일본을 격파한 것이다.
그렇게 멋지고 통쾌할 수가!
그날의 벅찬 감동은 한마디로 ‘대한민국 만세!’였다.
경기를 끝마친 뒤, 컬링선수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진행자가 김은정에게 넌지시 물었다.
“경기진행 중, 어찌하여 유독 영미만 불렀습니까?’고 하자,
“영미~ 영미~’가 온 국민의 유행어가 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여러 선수들의 이름을 불렀어야 했는데….”
하며, 웃음으로 넘겼다. 알고 보니 ‘영미~’를 부른 것도 의미가 있었다.
‘영미~’라고 한 번 부르면 스위핑을 시작하라.
‘영미야~’는 스위핑을 멈추고 기다려라.
‘영미, 영미~’두번 부르면 더 이상 스위핑을 할 필요 없다.
‘영미야, 영미야, 영미야~ !!!’는 더 빨리
스위핑하라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제23회 평창동계올림픽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92개국 2,920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세계인이 하나 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우리나라는 사상 최초로 6개 종목에서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4개로 모두 17개의 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한마디로 성공적이었다.
경기장시설에서부터 경기진행, 관전매너,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은
일등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이었다.
특히, 개막식에서 보여준 1,218개의 드론(Drone)이 수놓은
오륜기(五輪旗) 퍼포먼스(performance)는 어디에 비할 수 없는
환상적 감동이었다.
2018년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가 3월중, 캐나다 몬타리오주
노스메이에서 열린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인기를 끌었던 여자컬링대표팀 ‘팀 킴’이
그대로 출전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최고유행어였던 여자컬링대표팀의
‘영미~ 영미~’가 전 세계인의 가슴에 또 다시,
감동의 드라마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3》
금 수저와 흙 수저
임두환
우리나라 속담에 ‘개천에서 용(龍)난다’는 말이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을 일컫는다.
얼마 전부터 금 수저, 흙 수저 론이 부각(浮刻)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금 수저와 흙 수저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금수저이고,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흙 수저라고 한다.
금 수저를 물고 나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왕지사(已往之事)
흙 수저로 태어난 내 팔자를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라면
흙 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은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다.
이병철 회장은 3대가 천석꾼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정주영 회장은
초등학교졸업이 학벌의 전부였다.
정주영 회장은 지금의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 어린 나이에 4번이나
가출을 했었다.
16살이 되던 해, 쌀가게 배달부로 시작하여 성실함을 인정받아
쌀가게[부흥상회]를 인수 받았지만 시골에서의 생활은 숨통이 막혔다.
그는 소 판돈 70원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도 뚝심
하나로 버텨나갔다.
그리하여 1940년 '아도서비스‘ 자동차정비공장을 인수하게 되었고,
1946년 4월 ’현대 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하여 오늘의 현대그룹을
이루어낸 것이다.
정주영 회장의 업적이라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온 국민을 감동케 했던 1998년도,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북한의
고향 땅을 밟은 일이다.
19세 청년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86세 노구로 고향 땅을 밟았으니,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을까?
그 중 500마리는 새끼를 밴 소였고, 그 중 1마리는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소였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정상에 우뚝 선 그 분의 박진감 넘치는
인생사에 우리 모두 박수를 보내야 할 성싶다.
요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있다면 롯데그룹사건이다.
한마디로 집안 돌아가는 꼴이 가관이다.
경영권다툼과 금전 문제로 부자(夫子)와 형제(兄弟)간에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
법정에 나가서도 진흙탕싸움이다.
나는 금 수저로 태어난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존경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흙 수저를 물고 살아가는 민초들은 오늘 하루를 연명하느라
고군분투(孤軍奮鬪)인데,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금수저들의
갑질행동에 울분이 토해진다.
며칠 전, 어느 경제신문을 읽다보니 1살짜리가 임대주택 10여 채를
소유하고 있고, 18세미만의 사업자대표가 206명이라고 했다.
또한, 미취학 어린이들이 주식 2조8천 억 원, 18세미만의
주식 4조9천 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는데도 무감각이다.
이웃에서 100억, 1,000억, 수천 억 원을 가졌다 해도 관심 밖이니,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인터넷에서 ‘수저’ 종류를 클릭해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흙 수저로 시작해서 동, 은, 금, 다이아몬드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은수저쯤 되겠구나 싶었는데 은수저는커녕
동 수저에도 못 미쳤다.
그동안 내 자신 열심히 살아왔노라 싶었는데 허망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내가 걸어온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험난한 길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人生事 塞翁之馬)라고 했던가?
기쁠 때가 있으면 어려울 때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즐거움이 따랐다.
나는 산간벽지 농촌에서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마디로 흙 수저였다.
아버지가 54세 되던 해 저 세상으로 떠나시어 어머님과
동생들을 도맡아야 했다.
운 좋게도 일찌감치 직장을 잡게 되어 그런 대로 살아가나 싶었는데,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어야했다.
첫 시련은 20살이던 큰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내 곁을 떠나가 버렸고,
두 번째는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저질러 가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또 세 번째는 정년퇴직을 하고서 제2의 텃밭을 가꾸려는 중에
갑 계원이었던 임(林) 아무개에게 사기를 당하여 큰 낭패를 보았다.
눈앞이 캄캄한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야 했다.
내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 어머님과 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금수저의 갑질 논란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항공 조현아 땅콩회항사건’과 ‘백화점 모녀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현아 부사장이 비행기 1등석에 탑승했는데 간식[땅콩]을 제공할 때
매뉴얼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승무원에게 폭행과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이륙하던 비행기를 회항시켜 승무원과 사무장을
내리게 했던 대표적인 갑질 행패였다.
백화점 모녀사건도 꼴불견이다.
금 수저 집안의 어느 모녀가 백화점주차요원이 협조지시에 불응했다하여
땅바닥에 2시간이나 무릎을 꿇리고 모멸감을 주었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자본주의사회이고 물질만능사회라지만 그들에게도
가정과 인격이 있을 터인데 해도 너무하지 않았나 싶다.
어차피 삶은 경쟁이고 적응과 투쟁의 연속이다.
세상에는 돈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에 휘둘리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은 갈린다.
금 수저, 흙 수저도 상황에 따라서는 갑(甲)이 되고 을(乙)도
되지 않겠는가.
☆★☆★☆★☆★☆★☆★☆★☆★☆★☆★☆★☆★
《4》
길 고양이
임두환
오늘이 대설(大雪)이다.
서울지역기온이 섭씨 영하 7.8도라고 한다.
전국적으로 한파주의특보가 발령되어 여러 겹옷을 끼어 입었는데도
한기가 몸 속을 파고든다.
동장군의 위세는 정말 대단하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눈이 많이 내리고, 땅이 꽁꽁 얼어붙는다.
여느 동물들은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한겨울을 나지만,
길 고양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에게 겨울은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다.
길 고양이란 집에서 기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말한다.
나쁘게 말하면 도둑고양이요, 좋게 말하면 길냥이다.
옛날에 농촌에서 많이 보았던 동물인데, 요즘엔 도심지에서도 흔히 마주친다.
대낮에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어슬렁거리다가도 사람과 마주치면
꼬리를 내리고 은신처를 찾아 숨는다.
도심주변 야산이나 들로 나가기보다는 아파트주변에서
사는 게 편안한가 보다.
길 고양이는 음식물쓰레기, 벌레, 쥐, 조류 등을 좋아한다.
그들은 어려운 사냥보다는 구하기 쉬운 음식물을 찾는다.
먹이가 충분할 때는 하루 16시간을 자며, 시력과 청력은 사람의
여섯 배나 높다고 한다.
야행성동물로서 해질 무렵 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해가 뜰 때쯤에는
은신처로 돌아간다.
하지만 배가 고플 때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헤맨다.
호랑이와 같이 단독생활을 하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어린 시절, 길고양이에 대해 좋지 않은 간접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길 고양이가 담을 뛰어넘어 오더니 순식간에 앞마당
배나무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얼마 되지 않아 윗집 황구(黃狗)가 헐레벌떡 달려와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얼마쯤이나 되었을까?
배나무에 올라갔던 고양이가 날쌔게 뛰어내리더니 쏜살같이
사립문밖으로 사라졌다.
황구 역시 안간힘을 다해 고양이의 뒤를 쫒았다.
고양이와 황구가 나가자 무심코 사립문을 닫았다.
조금 있으니까 황구가 돌아와서 사립문을 열어달라는 듯 짖어댔다.
사립문을 열어준 게 화근이었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황구는 느닷없이
내 허벅지를 물어버리는 게 아닌가?
황구는 고양이를 놓친 화풀이를 내게 한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금도 내게는 희미한 그 때의 흉터가 남아있다.
길고양이는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을 어떻게 넘기는지 모를 일이다.
농촌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파트단지는 음식물분리수거가 철저해서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먹이를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터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했다.
길 고양이도 생명줄이 있으니 먹어야 살 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쓰레기봉투를 파헤칠 수밖에…….
새끼를 키울 때는 더욱 극성을 부린다.
새끼고양이는 3일만 굶어도 목숨이 위태롭다.
어미고양이가 새끼에게 영양을 보충해주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먹어야 한다.
그들이 쓰레기봉투를 파헤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겨울철에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그나마 들쥐와 새들도 자취를 감춰버린 허허벌판이지 않은가?
내가 아파트 동 대표를 맡은지 1년쯤 되었다.
어느 겨울날 집을 나서는데 길모퉁이에 고양이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마음이 야릇했다.
직감적으로 굶어죽었구나 싶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 날 바로 사료를 구입하여 물과 함께
아파트모퉁이에 놓아주었다.
길 고양이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이를 먹지 않는
습성(習性)이 있다.
첫 날에는 한 마리가 슬슬 먹이를 살피더니, 며칠 지나서 부터는
서너 마리가 동참했다.
처음에는 사료 5kg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한 달에 15kg이 들어간다.
가끔 통조림이라도 주면 고맙다는 듯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겨울철이면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내 손길에 그들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민들이 좋은 눈으로만 봐주는 게 아니다.
길 고양이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개체수가 늘어나는 게 문제라며
눈살을 찌푸린다.
동물도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길 고양이도 배가 부르면 쓰레기봉투를 뒤지지 않는다.
요즘에는 그들의 습성을 알고 부터 주민들도 하나둘씩 일손을 거든다.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길 고양이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져준다면
그들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올해 150여개의 ‘길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길 고양이를 위한 여러 가지 대처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하니
천만다행이다.
어쨌든, 사람과 길 고양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5》
꽃샘추위
임두환
생동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소리 소문도 없이 찾아든 봄기운에 얼음장 밑 물웅덩이에는
개구리가 짝을 찾느라 분주하고,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헤치고 돋아난
새싹들의 끈질김에서 봄이 왔음을 느낀다.
그뿐 아니다.
푸른 하늘을 날며 조잘대는 작은 새들의 속삭임과 따스한 햇볕아래
매화 산수유 개나리의 꽃망울들이 금세라도 터질 듯 부풀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봄이 일찍 찾아왔다고 호들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삼월 하순인데도 동장군은 자리바꿈하기가
싫은지 심술을 부리고 있다.
엊저녁부터 회오리바람과 강추위가 몰아치더니, 전주(全州)지방 수은주가
섭씨 영하 12도까지 뚝 떨어졌다.
두툼한 잠바에 목도리까지 둘렀는데도 온몸이 움츠러들고
발걸음이 허둥대진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우리나라를 찾아드는 불청객이 있다.
겨울철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베리아 기압세력이 약화되면서
기온이 상승하다가, 일시적으로 강화되면서 발생하는
이상저온현상이 바로 꽃샘추위가 아니던가.
산수유와 매화는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전령사다.
혹한기를 이겨내며 새 생명을 잉태하는 봄이 오면, 나의 굴곡진
지난날이 되새겨진다.
내 삶에서도 꽃샘추위는 비껴가질 않았다.
한마디로 파란만장의 세월이었다. 직장 동료였던 L친구는,
“두환아, 다른 사람 같으면 한 번의 일만 겪어도 죽을 맛인데,
너는 엄청난 일을 세 번이나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살고 있으니
정말로 대단하다.”라고 격려를 했다.
내가 수렁에 빠졌다고 해서 허우적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아내와 더불어 아들, 딸이 있고, 어머님과 여섯 명의
동생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임씨 집안의 대들보였던 나로서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뛰어야 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길거리에서 잠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내 삶에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꿈과 희망을 키워나간다면
성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과
‘인생은 생명(生命)이 있는 한 희망(希望)이 있다.’는 글귀를 좋아했다.
이것을 책상머리에 써 붙여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음에 새겼다.
철부지였던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아리송할 뿐이다.
겨울의 끝자락이 사위어가고 대지에 일렁이는 꽃샘추위가 닥치면 여지없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등장한다.
나는 여태껏 이 뜻을 ‘봄이 와도 아직은 봄이 아니다.’ 라고만 알고 있었다.
사실인즉, 춘래불사춘이란 말은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하여,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詩)
‘소군원’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는 걸핏하면 처내려오는 북방의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후궁을 흉노족 왕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궁녀들의 초상화집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중 아주 못생긴 왕소군(王昭君)을 찍었다.
흉노의 땅으로 떠나기 전 인사를 하러온 왕소군의 실물을 본 황제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궁녀들의 초상화는 궁중화가 모연수가 그렸다.
그런데 미모에 자신이 있는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못나게 그려졌고, 그래서 황제의 눈에 들지 못했다.
왕소군이야말로 월나라 서시, 삼국지의 초선, 당나라의 양귀비 등과 함께
4대 미인으로 꼽혔지만, 황제의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북방으로 팔려가야 했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흉노의 땅에서 봄을 맞아야 했던 왕소군의
심정을 대변해서 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생겼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는 뜻이다.
그 당시의 왕소군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짠하고 애처로워진다.
나는 어린 시절을 들개처럼 살았다.
봄에는 뒷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여름에는 개울에서 헤엄을, 가을에는
열매를 찾아 산 속을, 겨울에는 얼어붙은 논배미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그 뿐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구나 마을 앞 공터에 모였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석치기 팽이치기 자치기 술래잡기 등을 하면서
개구쟁이로 자랐다.
내 나이 내일 모레가 칠순인데 아직은 끄떡없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어느 토요일이었다. 전주(全州)에서 살고 있는 딸, 순옥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온가족이 모여 점심을 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족이라면 아내와 나, 딸 순옥이와 사위 송중섭, 외손녀 보연
보람이가 있고, 아들 진영이와 며느리 기은영, 친손자 지훈이까지
모두 아홉 명이다.
순옥이는 밖에서 멋지게 한 턱 내겠다고 우겼지만, 아내는 그 돈 가지면
온가족이 오붓하게 먹을 수 있다며, 집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외손녀 송보연은 초등학교 5학년, 보람이는 3학년이다.
친손자 임지훈은 백일을 넘긴지 40 여일이 된다.
손자손녀를 자랑하면 칠푼이가 되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여주면
1만원을 내야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 손자손녀도 재롱과 함께 얼마나 예쁜 짓을 하는지 오전에 보았어도
오후가 되면 또 보고 싶다.
기우(杞憂)일지 모르지만 요즘, 자녀를 한둘만 낳아 기르다보니
과잉보호가 문제다.
내 손자손녀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온실 속에서 자란 식물처럼
나약해 보이니,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햇볕도 쬐고, 비바람도 맞고, 꽃샘추위도 겪게 해서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주는 게 어른들의 할 일이려니 싶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법도 배워야겠지만, 내 자신과 싸우는 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꿈과 희망이 가득한 새봄, 내 인생의 텃밭을 가꾸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내 자신의 거울을 끊임없이 들여다볼 일이다.
어제보다 오늘을 좀 더 멋있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멋진 인생이 될까,
그것을 깊이 연구해야 하려니 싶다.
☆★☆★☆★☆★☆★☆★☆★☆★☆★☆★☆★☆★
《6》
난국회(蘭菊會)
임두환
봄비가 내리더니 온갖 생명들이 꿈틀거린다.
엊그제만 해도 꽃샘추위로 몸살을 앓았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
봄기운이 완연하다.
산수유 꽃과 매화가 물러서기도 전에 벚꽃 목련꽃 철쭉꽃
라일락꽃이 함께 어우러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늘은 난국회(蘭菊會)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난국회는 고창(高敞)에서 근무하면서 뜻을 같이했던 기관장들끼리
2001년도에 만들어졌다.
이호종 군수님을 비롯하여 경찰서장 이용준, 산림조합장 이성진,
우체국장 유태길, 농산물검사소장 박승희, KT지점장 유점동, 수협장
김요병, 담배인삼공사지점장 임두환, 지적공사지사장 이민태, 삼양사지점장
성영제, 대대장 엄주훈, 사업가 정낙진으로 모두 12명이다.
이 모임의 명칭인 란(蘭)은 봄을 상징하고 국(菊)은 가을을
상징하고 있어서, 우리는 매년 봄가을에 모임을 갖는다.
난국회가 발족한지 16년째인데도 날이 갈수록 정이 두터우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2000년 12월에 담배인삼공사 고창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관사를 리모델링(Remodeling) 하는 동안, 전주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겨울철이라서 어려움이 많았다.
집을 나설 때는 우중충한 날씨였는데도 정읍을 거쳐 고창에 들어서면
눈이 수북하게 쌓여 딴 세상에 온 듯했다.
담배를 팔아야 먹고사는 우리 회사로서는 담배차량이
움직일 수 없으니 낭패였다.
영업실적도 문제였지만 책임자인 나로서는 안전이 우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은 숯덩이처럼 타들어 가는데, 판매인들로부터
항의는 왜 그렇게 빗발치던지…….
고창지역은 눈이 한 번 내렸다하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은 치워도 끝이 없었다.
그래서 고창에서는 겨울만큼은 고창이 아니라 ‘눈창’이라고 부른다.
고창은 인심이 온후하고 문화유산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바다와 산과 들녘이 함께 어우러져 살기 좋은 곳이 바로 고창이다.
난국회는 고창에 터를 두고 있어서 웬만하면 고창지역에서 모임을 갖는다.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서둘러 집을 나섰다.
고창으로 가는 길에 정읍천변 벚꽃터널을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진해군항제 광양매화축제 구례산수유 꽃 축제를
다녀왔다고 자랑이지만, 나는 아직 내 고장 진안(鎭安) 마이산벚꽃축제만
다녀왔을 뿐, 전주 시내를 벗어난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 한 듯싶다. 정읍천변 벚꽃터널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소 중 한 곳이다.
천변에서 내장산입구까지 40여 년생 1,800여 그루가 16Km나 되는
벚꽃 길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푸른 물빛과 샛노란 개나리와 하얗게 흐드러진 벚꽃터널은 나를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다. 전주에서 왔다는 어느 상춘객은,
“정말, 여기만한 곳이 없네요. 멀리까지 벚꽃놀이 갈 것 없어요.
너무 황홀하네요.”
라며, 탄성을 자아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들어선 하얀 벚꽃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수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내 앞을 훨훨 날고 있었다.
이번 모임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겉으로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눈물을 흘려야했다.
난국회를 15년간이나 이끌었던 이호종 회장께서 향년 86세로 2014년 10월1일
별세했기 때문이다.
이호종 회장은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고창군수를 역임하던 시절, 내 고장 담배 피우기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셨다.
그 당시만 해도 지방자치단체의 자립도가 빈약하여 지방세를
담배소비세로 충당해야 했는데, 외산 담배회사에서는 금품과 물품공세로
틈새시장을 노렸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조총을 가지고 달려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창
칼과 활로 대항해야 했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난국회원들은 의병이었고 이호종 군수는 의병장이었다.
햇병아리였던 나로서는 천군만마를 얻게 되어, 고창지점관내
외산 담배 점유율 0%를 유지하는 공을 세웠다.
고창은 선운사와 더불어 고인돌군(群)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보존된 성곽 모양성이 있고,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고택과 인촌 김성수 생가, 서정주의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고창하면 고창수박 복분자 주꾸미 풍천장어기 있고, 여름이면
구시포와 동호해수욕장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고창은 내가 3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체험했던 곳이어서,
나는 고창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난국회는 백전노장들의 모임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고창지역
발전에 공을 세웠지만, 퇴직하고서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오래 만나다 보니 우리의 우정은 더 깊어졌다. 문화유산해설사로, 시 수필
화가로서, 전문경영인과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을 과시하며 만나면
이야기꽃을 피운다.
내가 난국회의 모임을 기다리는 이유는 또 따로 있다.
다름 아니라 먹는 재미 때문이다.
고창의 풍천장어구이에 복분자를 한 잔 걸치면 셋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고, 구시포 암주꾸미는 쫄깃쫄깃하여 한마디로 죽여준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무르익어간다고 한다.
저 넓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짐 때문이다.
술이 오랜 동안 발효되어야 제 맛을 내듯이 절친한 친구가 필요하다.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다면 돈을 주고라도 사귀어야 하고,
그래도 없다면 어린 시절부터 한 명 두 명 더듬어 볼 일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가 중요하다.
기쁠 때나 외로울 때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겠다.
나 역시 제2인생의 텃밭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어느 모임에서나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우를 수 있는 윤활유가 되어야겠다.
☆★☆★☆★☆★☆★☆★☆★☆★☆★☆★☆★☆★
《7》
내 나이 어느덧 일흔 살
임두환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기린봉을 바라보면
흘러가는 세월과 마주한다.
시시때때로 일고 스러지는 사계절의 변화무쌍이 내 마음을 일깨워준다.
봄에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에서 아기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 듯하고,
여름은 녹음이 짙어 가는 산봉우리에서 호연지기를 품던 청춘이고,
가을은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한 폭의 수채화에서
성취감을 맛보는 중년이다.
겨울은 그동안 버거웠던 삶의 짐들을 내려놓고,
노년의 여유로움을 즐겨야할 나이인 듯하다.
내 나이, 어느덧 일흔 살이다.
오늘도 여느 때나 다름없이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에 다가섰는데
낮선 사내가 거울 앞에 엉거주춤 서있는 게 아닌가?
거무스레한 얼굴에 구레나룻이 보인다.
얼굴에는 삶의 굴곡진 흔적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데 유난히
코만 우뚝하다.
그도 내 모습에 놀랐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제기랄, 많이도 변했구나!’ 날강도 같은 세월이 어느새
내 육신을 훑고 지나갔다.
“너는 내가 아니다. 난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어.”
속절없는 줄 알면서도 거울 속의 사내에게 저항을 해 보았다.
오늘은 내가 칠순(七旬)이 되는 날이다. 딸 순옥이와 아들 진영이가
이 날을 위해서 적금을 들어 놓았다며, 칠순접대를 마치고는
아버지 어머니 둘이서 오붓하게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하지 않는가.
정말 고마웠다.
자식들의 성의를 보아서도 온 집안과 친지들을 모시고 그럴듯하게
접대를 해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요즘, 최순실 국정농단(國政壟斷)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彈劾) 사건으로
나라 안팎이 시끌벅적하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나의 소신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어머님을 모시고 일곱 남매가족과 처족(妻族)을 초청하여
40여명이 전주 송천동 ‘터죤뷔페’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아들 진영이가 가족대표로 인사를 잘해주어 대견했고, 딸 순옥이와
손녀 송보람이가 특별공연으로 ‘내 나이가 어때서’ 반주에 맞추어
춤을 선사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참으로 흐뭇한 시간이었다.
조촐한 자리였지만 내 곁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육의 정,
가족들이 있구나 싶으니 감개무량했다.
1950년대만 해도 회갑(回甲)을 넘긴 노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칠순(七旬)이라면 그 마을의 상노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집안에 회갑이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돼지를 잡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며 마당에 차양막(遮陽幕)을 치고 멍석을 깔고서
손님을 초대했다.
그 날은 마을잔치나 다름없었다.
아낙네들은 허리를 펼 틈도 없이 손길이 바빴고, 집안 젊은이들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회갑잔치가 어느 정도 어우러지면 가족과 친족들이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그 시절, 어렵사리 살면서도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고 베풀었던
따뜻한 인정만큼은 지금도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색깔의 삶을 살았을까?
푸른색, 빨강색, 아니면 노란색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삶의 색깔은 달라지겠지만 인생은
가꾸는 자의 몫이 아니던가.
인생이 살아가는 동안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갈밭도 있다.
내 인생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가방 끈이 짧다보니 갖은
수모(受侮)를 겪어야 했다.
자갈밭에 넘어졌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나서 뛰어야 했다. 설한풍(雪寒風) 몰아친
겨울에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느 곳에 가서 칠순이라고 명함을 내밀면,
“야, 이 사람아! 이제야 일곱 살인가? 저리 비끼게.”
할 정도로, 모두들 젊게 살고 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어르신은 90세인데도 하루를 거르지 않고
산책을 하신다.
낮에는 노인복지관에서 바둑과 서예에 몰두하며 시간을 즐기신다.
언제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어쩌다가 자리를 같이할 때면 농담도 잘하신다.
늙으면 죽음 복이 최고라면서 ‘팽팽하게 살다가 꼴까닥 죽는 것’
이 희망이라고 하셨다.
일본(日本)에서는 80세에 죽으면 요절(夭折)이고, 90세에는
영면(永眠)이고, 95세가 넘으면 천수(天壽)라 한다며, 지금 태어난
아기들은 120세까지 살 것이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하지 않는가?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에서 첫째는 할 일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도 생각을 바꿔야겠다.
지난날 쌓였던 삶의 묵은 찌꺼기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노년의 텃밭을 가꾸어 그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내 나이 70이면 인생 제2막을 살아가는
중장년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다가오는 내 인생의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사랑의 군불을 지펴야겠다.
몸은 비록 늙어간다 해도 희망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행복은 내 곁에 있을 게 아닌가?
☆★☆★☆★☆★☆★☆★☆★☆★☆★☆★☆★☆★
《8》
내 인생에서 즐거웠던 10대 뉴스
임두환
내가 벌써 고희를 맞았다.
1947년 12월 6일(음력)생인 나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1100번지에서
아버지 임병문 님과 어머니 양순남 님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6?25전쟁과 4?19학생혁명, 5?
16군사쿠데타를 겪었다.
1970년도부터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어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OECD에도 가입하는 등, 세계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흐뭇하다.
고희를 맞았으니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에 내가 겪었던 즐거운
10대 뉴스를 간추려본다.
1. 내 사랑, 박금옥과 결혼하다
1973년 1월1일, 순창군 팔덕면 서흥리 백암마을에서 6남매 중
셋 째딸로 태어난 박금옥과 결혼했다.
그때 내 나이 27살, 아내 박금옥은 24살이었다.
그 당시 예식장도 있었지만, 나는 전통혼례를 택했다.
함진아비와 마부를 앞세우고 신부 집 마당에 들어가
전통혼례식을 가졌다.
박금옥과 결혼하게 된 동기는 박금옥의 오빠와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있으면서 도탑게 지낸 덕이다.
제대하고서 그 집에 놀러 갔던 게 인연이었다.
나를 처음 본 친구어머니는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하며, 외모도 괜찮고, 직장까지 가졌으니
사윗감으로 제격이었으리라.
그 분의 끈질긴 권유로 박금옥과 결혼이 성사되었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산골촌놈이 부잣집 규수를 데려왔으니
산나물 뜯으러 갔다가 꿩알을 주워온 셈이다.
2. 꿈에 그리던 직장에 들어가다
1969년 10월, 군대생활을 마친 뒤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농협대학교에
들어가려고 수능시험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마을에 살던 J선배로부터 엽연초생산조합중앙회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난에 쪼들린 나로서는 취직하는 게 급선무였다.
7남매 중 장남으로서 집안을 이끌어가야 했다.
엽연초생산조합시험에 응시하기로 작정하고 2개월간 머리를 동여맸더니,
결과는 합격이었다.
전국에서 30명을 채용했는데 그 중에 내가 들어간 것이다.
엽연초생산조합중앙회 교육원에서 7개월간 교육을 이수한 뒤,
진안엽연초생산조합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엽연초생산조합에서 4년간 근무하고는 또 전매청특채시험에 합격하는
행운을 얻었다. 전매청, 전매공사, 담배인삼공사, KT&G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34년간을 봉직하면서 고창? 진안지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3. 사랑하는 딸, 아들을 결혼시키다
딸 순옥이와 사위 송중섭은 2003년 10월 18일, 아들 임진영과 며느리
기은영은 2011년 11월 5일에 결혼을 했다.
딸 순옥이는 유아교육과를 졸업하여 사립유치원에서, 사위 송중섭은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제대하여 교도직공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아들 진영이는 KT&G에서, 며느리 기은영은 농협중앙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순옥이 내외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인 송보연과 4학년인 송보람이
자매가 착하게 자라고 있고, 아들 진영이내외에게는 18개월째 되는
임지훈이가 태어나 말을 배우느라 재롱을 떨고 예쁜 짓을 하고 있다.
4. 내 보금자리를 마련하다
1973년도 1월에 결혼하여 1985년도 3월에 내 집을 마련했으니
12년만의 일이다. 그동안 7차례나 전세방을 전전긍긍하다가
전주시 인후동 변두리에 25평짜리 국민주택을 마련했다.
이사를 마치고 문기둥에 ‘임두환’이라는 문패를 달았을 때의
기분을 그 누가 알아줄 것인가.
이 집에서 아들딸을 키우고 가르치며 정들었던 곳인데, 송정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다.
지금은 전주시 인후동 안골지역에 자리 잡은 풍광 좋고 아늑한
인후휴먼시아아파트에서 노후를 즐기고 있다.
5. KT&G 지점장으로 퇴임하다
내가 1975년도 8월 1일자로 전매청남원지청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동안 농림직으로 남원지청에서 근무하다가 6년 만에 행정직으로
전환하여 진안, 전주, 익산, 김제, 남원지점을 거쳐 전북본부 영업부와
총무부에서 근무했다.
총무부에서 인사담당 3년, 총무과장 4년을 거쳐, 2001년 2월 7일자
고창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점장에 오르기까지는 길고도 험난한 세월이었다.
고창지점장 3년, 진안지점장 3년간 재직하다가 내 고향 진안에서
명예롭게도 정년퇴임을 했다.
6.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치다
1966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하면 취직을 빨리 할 것인가 고민했다.
결론은 농협대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농협대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취직이 되니 군복무를 마치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자원입대하여 논산에서 6주의 기본교육과 광주포병학교에서
4주간의 주특기교육을 마친 뒤 자대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미군부대 ‘카투사’로 특명을 받은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터라 어안이 벙벙했다.
인천교육대에서 2주간의 카투사기본교육을 마치고 미1군단 76포대로
배치를 받았다. 난생처음 침대생활에 양식과 커피를 마시며,
미군병사들과 생활을 하다 보니, 딴 세상에 온 듯했다.
처음에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지만 제대할 무렵에는
통역까지 맡아 할 수 있었다.
카투사로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던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미력한 힘이지만 카투사라는 긍지 하나로 우리나라를
홍보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자부심으로 남는다.
7. 첫 수필집을 발간하다
내가 늦깎이로 수필을 배우겠다고 입문한지 9년째다.
처음으로 수필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9월이었다.
내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수필로 빚어서 한 권의 수필집을 내고 싶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309호실 문턱을 밟았을 때만 해도
수필이 나에게는 생소했다.
김학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습작에 몰두한 결과 2008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봄호에서 신인상을 받고 수필가로 등단했다.
나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으로 평소 써왔던 습작을 정리하여
첫 수필집 『뚝심대장 임장군』을 이 세상에 내놓았다.
8. 어머니 팔순잔치를 해드리다
어머니는 1929년 6월 26일, 진안읍 가림리 사인동에서 양귀남 님의
둘째 딸로 태어나셨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회갑 전에 돌아가시고 홀로 7남매를 가르치고 결혼까지
시켜야 했으니,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으리라.
2008년 7월 27일, 우리 7남매 가족은 진안 통일로가든에서 고향마을
어르신들과 여러 친지들을 모시고 팔순잔치를 해드렸다.
어머님께서는 흐뭇해 하셨고, 우리 7남매가족들도 뿌듯함을 느꼈다.
9. 밝은 빛 교회 안수집사가 되다
내가 교회에 나간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2011년 9월 25일 오후3시, 임직식에서 안수집사 직분을 받았다.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시면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는 안수집사 직분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기로 했다.
이제는 평신도가 아닌 중직자로서 믿음에 있어서나 모든 행동거지에
각별히 유념해야 되려니 싶다.
10. 재전(在全) 진안읍 향우회장이 되다
2012년 12월이었다.
전주시내 전라도음식이야기 한식점에서 재전(在全) 진안읍(鎭安邑)
향우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전임집행부 임기가 만료되어 새 임원진을 뽑아야 했다.
먼저, 진안읍향우회장을 선출해야 되는데 추천을 하지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진안부군수를 지내셨던 고문께서 한마디 했다.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직전회장은 누군가
점찍어 놓은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하며 다그쳤다.
직전회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차기 회장으로 임두환 씨가 적임자인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원 박수를 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임기 2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400여명의 재전진안읍회원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진안읍발전에 일조했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뚜벅뚜벅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오면서 우직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어느새 내 인생도 가을을 맞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데 어떻게 살아야 좋은
인생이 될지 모르겠다.
한세상 살아가면서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
《9》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임두환
박근혜 피고인의 수인번호 503호! 이름 에 따라붙던 대통령의 존칭이 아니라
수인번호가 그를 대신했다.
박근혜는 일각의 예상대로 형사합의부 1심에서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온 국민을 분노케 했고, 평화적 촛불혁명을 일으켰던 국정농단사건의
장본인으로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2018년 4월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박근혜 피고인의 공소사실 18가지 가운데 16가지를 유죄로 인정했다.
"피고인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권한을 남용했고, 그 결과 국정질서에
큰 혼란을 가져왔으며,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에 이르게 됐다.
그 주된 책임은 헌법이 부여한 책임을 방기한 피고인에게 있다."
고 꾸짖었다.
1심 재판에 넘겨진지 354일 만에 나온 사법부의 역사적 결단이었다.
박근혜 피고인은 ‘정치보복’이라며 마지막 선고 날까지도
법정출석을 거부했다.
이렇게 염치없고 뻔뻔스런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니,
참으로 수치스러웠다.
국정농단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2016년 9월 미르? 케이 스포츠재단
강제모금으로 출발된 국정농단 의혹은 검찰과 특검수사를 거치면서
양파껍질 벗겨지듯 드러났다.
박근혜와 정치성향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전 분야에 걸쳐 이루어진 사건으로 단체지원금을
차단하고, 운동선수를 출전명단에서 제외시키며, 단체임원을 좌천시키는 등
야비한 짓을 일삼았다.
한마디로 입에 맞는 떡만 골라 먹고 싶었던 것이다.
합의부1심 재판에서 24년이라는 중형을 피하지 못한 이유는, 국정농단과 함께
약 232억 원의 뇌물수수협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정유라 승마지원금 73억 원과 롯데 70억 원, SK 89억 원의 간접뇌물이
발목을 잡았다.
국정혼란과 대통령파면의 주된 책임은 박근혜와 최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만 늘어놓고 있으니, 이를 두고 철면피(鐵面皮)라 했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정치를 잘 할 줄 알았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쓰며,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치를 배웠고, 국회의원생활도 원만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홀몸이어서 국정농단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동생, 근영이와 지만이도 청와대에 얼씬도 못하게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박근혜 정부에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부정부패만은 척결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016년 9월 20일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이 터진 6개월 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파면결정을 내렸다.
청와대 문건유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이화여대 입시학사비리,
세월호사건, 비선진료는 물론 비선실세 최순실의 인사개입,
청와대수석비서관회의 참석, 취임연설문작성 관여 등 청와대 기밀문서까지
멋대로 받아보았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박근혜의 무지와 무능이 봇물 터지듯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피고인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며 침묵으로
항변하고 있다.
본인이 떳떳하다면 당당하게 법정에 나와서 해명하면 될 게 아닌가?
유아독존(唯我獨尊)에 고집불통이 스스로를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박근혜 나이가 올해로 66세이다.
그에게 징역 24년은 출소할 때 90세로 종신형이나 다름없다.
또, 벌금 180억을 갚지 않으면 노역장에서 3년간 노역을 해야 하니,
이 역시 마음이 아프다.
2016년 11월 4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문을 읽어 나가다가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때만해도 감정으로
호소하면 통할 줄 알았을 것이다. 예전에 국무총리를 지냈던 K씨는
“박근혜는 대통령을 할 게 아니라, 아버지 추모 사업이나 했어야 할 그릇
이었다.”고, 혹평(酷評)한 적이 있다.
박근혜는 요즘, 황제수감 중이다. 일반인독방이 1.5평 남짓한데 박근혜는 3.2평의
독방을 사용한다.
TV, 변기, 세면대, 관물대, 책상 겸 밥상, 접이식 매트리스, 냉난방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다.
오전 6시에 기상하여 오후 8시면 취침에 들어간다.
식사는 독방 안에서 해결하고, 식사를 마치면 세면대에서 식판과 식기를
설거지하여 반납하면 끝이다.
건강유지를 위하여 일광욕에 운동까지 시켜주고 있으니, 이게 황제수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느 네티즌(netizen)은
“부럽습니다. 평생 독방에서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호텔스위트룸에서 지내시니까 먹여줘, 재워줘, 보호해줘…. 정말,
황제호화생활이군요?”라고, 비아냥거렸다.
이게 무슨 창피인가? 이럴 줄 모르고 최진실의 국정농단에 놀아났단 말인가?
대통령 권한을 남용하고 국정질서를 문란케 한 죄!
이게 바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온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항고심에서는 거짓해명을 일삼지 말고 떳떳하게 단죄를 받았으면 한다.
그것만이 당신의 양심을 살리는 길이라 믿는다.
몸은 비록 고달플지 모르지만 마음이 편안해야
천수(天壽)를 누리지 않겠는가?
☆★☆★☆★☆★☆★☆★☆★☆★☆★☆★☆★☆★
《10》
당신만 있어준다면
임두환
세월은 참 빠르다. 금쪽같은 세월이 빨리도 흐르고 있다.
벌써 내 나이 고희(古稀)라니 믿기질 않는다.
여태껏 나 자신을 늦여름쯤으로 여기고 살아왔는데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구나 싶다.
내 마음은 왠지 허전하고 야릇해진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늙으나 젊으나 모두가 건강타령이다.
건강을 챙긴다는데 그 누가 무어라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문제다.
이번 설 명절에는 연휴가 유난히 길었다.
설날이 월요일이어서 대체휴무까지 5일간이나 되었다.
그뿐 아니다.
다음 이틀간을 연차로 사용하면 9일간의 황금연휴였으니, 공직자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까 싶다.
올해 설 명절에는 약 3,700만 명과 2,400만 대의 차량이 움직였다고 한다.
인천공항을 이용한 해외여행객수도 무려 94만 명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렇게 됐을까?
추석이나 설 명절에 조상님과 웃어른을 찾아뵙지 않고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옛날에는 땀 흘리는 개미였지만, 지금은 즐기면서 일하는
개미들이라고 한다.
항변이라도 하듯, 너나할 것 없이 돈을 물 쓰듯 하고 있지 않는가.
배고프고 힘들었던 4,50년 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은 일이겠지만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땐
어른들에게 드릴 선물로 건강식품을 챙기기 일쑤였다.
나 역시 그랬다.
모처럼 나간 해외여행이라서 녹용으로부터 지네가루? 굼벵이가루?
곰 쓸개즙 등을 사들고 와서는 어머님께 드렸다.
오랜만에 어머님께 효도하고 싶었는데 그것들이 대부분
유사제품(類似製品)이었다니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다.
이번 설 명절, 아들 진영이와 딸 순옥이도 홍삼제품과
흑마늘진액을 들고 찾아왔다.
“아버지, 어머니! 몸에 아주 좋은 것이니 꼬박꼬박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세요.”라며 당부를 했다.
항상 철부지로 여겼던 아들딸이었는데, 결혼하여 손자손녀까지
안겨주며 오붓하게 살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저들도 먹고살기 빠듯할 터인데 극진하게 챙겨주니 할 말은 없다.
사실인즉, 부모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건강식품을
사들고 오는 게 문제다.
자녀들은 이것을 잘 챙겨 먹는 줄 알고 있겠지만 때맞추어
먹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것은 유통기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깝다며 먹어치우고 있으니
탈이 날까 오히려 두렵다.
아내는 시집온 지 벌써 43년째다.
강천사를 품고 있는 순창군 팔덕면 백암마을에서 6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커서 진안읍(鎭安邑) 하늘밑 첫 동네,
가림리 사옥마을로 시집을 왔다.
시집에는 시할머니와 시부모를 비롯하여 4명의 시동생과 2명의
시누이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설상가상으로 농토(農土))라고는 가재가 기어다니는 다랑이
논 몇 마지기와 녹두 밭 웃머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믿을 수 있던 것은 남편월급이었는데 쥐꼬리만한 그 월급으로
시댁까지 챙겨야 했으니, 아내의 심정은 숯덩이처럼 타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전주시 인후동 변두리에 25평짜리 국민주택을 마련할 때까지
여섯 번이나 전세방을 옮겨 nek니며 전전긍긍했다.
1973년도 1월 1일에 첫 살림을 꾸리기 시작하여 1985년도에
내 집을 마련했으니, 12년의 세월이었다.
말이 그렇지 우리에게는 너무도 기나긴 세월이었다.
남편만 바라보고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묵묵히 살아온 아내였다.
옆집에서는 TV ? 냉장고 ? 세탁기를 들여놓았다고 자랑들이었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직, 내 집을 마련하기까지는 모든 것을 사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요즈음 행복하기 그지없다.
아내가 가끔 바가지를 긁기는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 바가지로 나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이제는 아들딸을 가르치고 결혼시켜 손자손녀까지 두었으니
한 걱정은 놓은 셈이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은 두 내외가
정겹게 살고 있다.
풍광 좋고 아늑한 아파트에서 노후를 즐기고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여보, 금옥 씨! 우리 아프지 말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살아갑시다.
지난날 고생했던 일을 생각해서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당신이 나이 들어 한 가지 취미를 가졌다면 노래교실에 나가는 것이었지요.
당신은 개근상은 몰라도 정근상을 받을 만큼 적극적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노래가사에 눈을 맞추고 흥얼거릴 때면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가 분명 그랬지요?
나가서 고스톱을 칠망정 집안에 틀어 박혀 있으면 안 된다고….
사실은 우울증이나 치매가 올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오늘은 기분도 그렇고, 오랜만에 당신이 즐겨 부르던 양희은의 노래
<당신만 있어 준다면>을 함께 불러 봅시다.”
세상 부귀영화도 세상 돈과 명예도/ 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죠./ 세상 다 준다 해도 세상 영원 다 해도/ 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 (중략) 우리 아프지 말아요.
먼저 가지 말아요/ 이대로도 좋아요 아무 바람 없어요/ 당신만
있어 준다면/ 당신, 당신, 나의 사람/ 당신만 있어준다면 ∼
내 자신 젊어서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세월이 말해주는 것인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성격도 많이 변했다.
같이 늙어가면서 아내와 티격태격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아내와 다투면 이겨도 손해고 져도 손해라고 하지 않던가?
아내를 개에다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화가 있다.
개와 싸웠을 때,
“개한테 지면 개만도 못한 놈! 개하고 비기면 개 같은 놈!
개를 이기면 개보다 지독한 놈!”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내가 살아온 오늘까지를 전반전이라면 내일부터 시작되는
인생여정은 후반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후반전을 쭉정이가 아닌 알곡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내와 함께, 제2의 텃밭을 알차게 가꾸어야 하려니 싶다.
☆★☆★☆★☆★☆★☆★☆★☆★☆★☆★☆★☆★
《11》
막걸리아리랑 김치 쓰리랑
임두환
청명한 가을의 끝자락이다.
내 고장 전주공설운동장에서는 ‘막걸리 넘칠 때 김치 꽃피다.’라는
슬로건 아래 11월 4일부터 5일까지
‘제2회 막걸리아리랑 김치쓰리랑‘ 축제가 열렸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축제슬로건에서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걸리하면 들고는 못 가도 배에 채워갈 수 있는 나였기에,
몇몇 친구를 꼬드겨 축제장을 찾았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상설무대에서는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전한
‘당산작두굿놀이’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한쪽 모퉁이에서는 품바와
각설이타령이 관중의 배꼽을 빼고 있었다.
주변 103개 부스(booth)에서는 전통막걸리와 김치를 활용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전주는 맛과 멋의 고장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에서
음식창의도시로 인정받은 곳이다.
전주막걸리문화는 단순한 음주문화가 아니다.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다채로운 한식 안주가 나오는 곳이 바로
전주가 아니던가?
막걸리는 한국의 음식문화와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쌀로 대표되는 한국농경문화의 공동체정신을 표출하는 수단이었고,
한 많은 민중들의 애환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촉매제였다.
요즘에는 과학적으로 막걸리유산균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결과까지 나왔으니,
이젠 마음 놓고 권장할만하다.
엊그제 TV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막걸리 붐이 일어나 창
업하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가 방송되었다.
쌀을 주재료로 하는 막걸리가 세계시장으로 진출한다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쌀 농가의 시름이 한풀 줄어들 게 아닌가?
어린 시절, 우리 집에 큰일이나 명절이 닥칠 때면 할머니께서는
어김없이 막걸리를 담그셨다.
멥쌀을 가마솥에 찐 다음 수분을 건조하면 고두밥이 되었다.
여기에 누룩과 물을 섞고서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씌워 며칠 간
재우면 발효가 되어 거품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 됐다싶으면 청주를 떠내지 않고 걸러 짜내면 막걸리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 장날이면 어쩌다 한 번씩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할머니는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으레 주조장(酒造場)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입구에는 큰 술독에 막걸리와 자루바가지, 왕소금이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목마른 듯, 두 세 바가지를 들이키고는 나한테도
한 모금 마시라고 했다.
“할머니, 배고프면 국수를 사먹어야지 왜 막걸리를 마셔?”
“막걸리는 배도 부르고 기분이 좋단다.”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말도 일리(一理)는 있지만,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옛날에는 김치냉장고가 없다 보니 초겨울에 김장을 했다.
무와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씻다 보면 손발이 얼어서 오리발이 되었다.
동네아낙들은 많은 김장을 하면서도 고생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 때만 해도 3대(三代)가 한 집에 살던 터라, 김장김치는
한겨울의 양식이었다.
아낙들은 김장을 마친 뒤에야 한 해 일을 끝냈다며 발을 뻗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막걸리아리랑 김치쓰리랑 축제’ 한마당에는 한문화예술단 나눔
콘서트를 비롯하여 전통막걸리와 김치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놓았다.
‘막걸리전시관, 막걸리역사관, 김치 명품관, 김치 체험 관이 있었고,
행사로는 얼씨구절씨구전국노래자랑, 막걸리김치백일장대회,
전주공예품체험전 등이 멋과 맛의 고장, 전주를 알리고 있었다.
막걸리전시관에는 천지주가 ? 천둥소리 ? 남원막걸리 ? 완산벌막걸리 ?
장수번암막걸리 ? 진안홍삼막걸리 등 11종이 얼굴을 내밀었다.
김치진열관에는 포기김치 ? 총각김치 ? 열무김치 ? 백김치 ? 갓김치 ?
막김치 ? 깍두기 ? 겉절이, 등 20종이 진열되어 입맛을 돋우었다.
이번 행사는 맛과 멋의 도시인 전주에서 서민의 술이요,
우리의 어머니가 빚었던 술이며, 뚝배기에 마셔야 제 맛이 나는 전통막걸리에,
맛깔스러운 김치까지 어우러진 축제였다. ‘
막걸리 넘칠 때 김치 꽃피다’는 슬로건 아래 우리 한식문화가
내 고장 전주에서 활짝 꽃피고 있어서, 자부심이 들고 자랑스러웠다.
☆★☆★☆★☆★☆★☆★☆★☆★☆★☆★☆★☆★
《12》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임두환
매서웠던 칼바람은 스러지고 봄기운이 내 곁을 감돌고 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입춘(立春)이다.
요즘 들어 도시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농촌에는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입춘첩을 써 붙이고는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라며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를
써 붙이기도 한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풍년(豊年)을 기원하며 액운을 떨치고
복(福)을 바라는 정월대보름이고, 그 다음 일주일이면 눈이 녹고
날씨가 풀린다는 우수(雨水), 그 뒤 보름이면 땅속에서 동면하던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나온다는 경칩(驚蟄)이다.
우수경칩이 지나면 꽁꽁 얼었던 대동강도 풀린다고 했다.
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색깔에서, 아니면 소리,
그렇지 않으면 냄새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 곁에 봄의 전령사가 찾아온 게 분명하다.
어제는 고등학교동창 모임인 가로수(街路樹)회에서 입춘을 하루 앞두고
새봄 맞이 나들이를 다녀왔다.
가로수회는 고등학교동창 중, 마음에 맞는 친구 9명이 홀수 달에는
남자들, 짝수 달에는 부부동반으로 다달이 모임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부부동반으로 임실치즈파크를 다녀왔다.
임실 치즈파크는 임실군 성수면 도인2길 50에 자리하고 있는데,
한 눈으로 보아도 이색적이었다.
널따란 잔디밭에 스위스 형 건물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도 봄은 찾아왔는지 잔디가 파릇파릇하고 주변 홍 매화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봉오리가 부풀어 있다.
현대식으로 꾸며놓은 임실치즈 역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치즈 제조 발효관,
치즈체험관, 어린이놀이시설, 식당 등이 잘 갖춰져 있어 가족끼리
하루를 즐기는 기에는 더할 나위 없을 듯했다.
봄이 찾아오는 길목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내 고향 진안(鎭安)은 뒤뜰 둥구나무에서 짝을 찾아 울어대는
까치소리와 언덕배기 양지바른 곳에 쑥과 냉이를 캐는 아낙네의
모습에서 봄이 왔음을 느낀다.
남원(南原)은 지리산자락 고로쇠 물에서, 전주(全州)는 재래시장
노점에 펼쳐진 할머니의 보따리에서 봄 맛을 풍긴다.
이뿐이 아니다.
고창(高敞)에서는 바닷가 구시포에서 봄맛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고창에서 근무할 때였다. 이호종 군수는 고창에서 잡은 주꾸미는
암주꾸미이고, 군산이나 부안에서 잡은 주꾸미는 수주꾸미라며
어느 곳에서나 장담을 늘어놓았다.
이유인즉, 다른 곳에서는 마구잡이로 싹쓸이 하지만 고창에서는
소라껍질을 줄에 매달아 잡기 때문에 암주꾸미가 알을 낳으려고
소라껍질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주꾸미는 입춘(立春)에서 경칩(驚蟄) 때까지가 제철이다.
주꾸미 맛을 제대로 보려면 구시포해수욕장 근처 ‘
정자나무집’이 어떨까 싶다.
얼마 있지 않아 우수경칩이 지나면 숨죽였던 산천이 기지개를 펼 것이다.
얼었던 땅에서는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물오른 나뭇가지엔 새싹이 움트며,
공중에서는 종달새가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리라.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이라고 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일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고 기회는 주어졌을 때 붙잡아야 한다.
내 나이 벌써 일흔이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 뚜벅이 인생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내 인생은 즐거움보다는 후회가 많은 세월이었다.
놓친 고기가 크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기회란 앞에서 낚아채야지 뒤에서는 잡을 수가 없다.
기회 뒷다리에는 언제 날아갈지 모를 날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봄의 길목에 들어서니 작년에 심어놓았던 과일나무에 마음이 쏠린다.
매서운 강추위를 대비하여 감나무와 매실나무, 대추나무
몸통을 보온 스티로폼(styrofoam)으로 감싸 놓았는데 얼마나
죽었을지 궁금해진다.
날이 좀 풀리면 밭에 나가 찢겨진 멀칭비닐(Mulching vinyl)을 걷어내고,
또다시 논밭을 일구어 거름도 넣고 씨앗을 뿌려야 한다.
농촌에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연약한 씨앗이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매서운 동장군의 위세를 떨치고 아스팔트 틈새에서 자라나는
새싹의 생명력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봄기운을 머금은 공기가 날로 달라지고 있다.
남쪽에서는 산수유와 매화가 활짝 피었다는 소식이다.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 내 가슴은 벅차 오른다.
내 나이 벌써 일흔이 되었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즈음 모두들 열심이다.
젊어서 못 다한 꿈을 이루어 보겠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노인복지회관, 평생교육원, 동사무소에서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외국어를 비롯하여 음악, 서예, 문학, 그림, 댄스, 풍물 등 온갖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던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좋은 세상이다.
내 인생, 이제부터 제2막을 설계해야 할 때다.
늙어가며 추하고 주책없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앞으로 30년은 더 살아야 할 나이인데, 몸가짐을 자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싱그러운 새봄을 맞이해야겠다.
☆★☆★☆★☆★☆★☆★☆★☆★☆★☆★☆★☆★
《13》
사라지는 동네이발소
임두환
설 명절을 앞두고 동네이발소를 찾았다.
이발을 하고 사우나에서 몸이나 풀어볼까 했는데, 이발소 싸인 볼이 꺼져있었다.
셔터까지 내려져 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1Km쯤 떨어진 기린 이용원은 휴무일인 수요일이 아니고선
문을 닫은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걱정이었다.
나는 20여 년 동안, 기린이용원 단골이었다. 최00 이발사는 올해
73세로, 바리캉을 잡은 지 48년째라고 했다.
8평 남짓한 이발소는 화장대 이발의자 세면대 소파가 전부였지만,
분위기가 아늑했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빛바랜 이발사자격증에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작달막한 키에 흰 가운을 입고서 가위질하는
솜씨는 놀라웠다.
그는 이발을 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재치를 발휘하여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곳에서는 TV나 신문을 접하지 않고서도 세상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나의 쉼터였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던 그였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최00 이발사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이발사자격증 하나면
먹고살겠다 싶어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했다.
전주 어느 이발소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머리를 감겨주고,
면도를 하고, 이발사가 되기까지 15년 세월을 보냈다며,
지난날의 고초를 되새김질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이발소뿐만 아니라, 양복점 양화점
시계점 등, 기술을 익히려면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와 6?25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린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수 없었다.
가족을 한 명이라도 줄여보려고 아들은 꼴머슴으로, 딸은 식모로
내보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새경을 받는다는 것은 꿈속의 떡이었다.
굶지 않고 끼니를 때우는 것만으로도 구세주를 만난 듯 했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새마을사업이전까지만 해도 우마차가 아니면
지계로 짐을 날라야 했다.
밤이면 호롱불을 켜 놓고 어머님은 길쌈과 바느질을, 나와 동생은
책을 읽어야 했다.
내가 살던 사옥(舍玉)마을은 하늘 밑 두메산골이어서 이발소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어느 곳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달에 한 번씩, 돌팔이
이발사가 찾아와 머리를 깎아주고 봄여름에는 보리로,
가을겨울에는 쌀로 받아갔었다.
이발사가 동네에 나타나면 금방 소문이 퍼졌다.
너나할 것 없이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야 했다.
아이들은 항상 뒷전이었다.
어른들의 이발이 끝나야 아이들 차례가 돌아왔다.
이발사는 빨래판을 의자에 올려놓고는 다짜고짜 앉으라면서,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 올렸다.
어른과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바리캉은 달랐다.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기계는 고물이나 다름없었다.
기계를 밀어 올릴 때마다 머리가 깎이는지 뽑히는지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아프다고 소리치면 꿀밤이 주어졌다.
머리를 깎고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님께서 머리를 훑어보시고는,
덜 깎인 머리를 샅샅이 손보아 주셨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바리캉 하나로 머리를 깎다보니 기계충이 옮겨져, 온 동네 아이들의
머리에는 부스럼이 덕지덕지했었다.
요즘, TV에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지금 같았으면 어찌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내가 이발소를 처음 찾았던 기억은 어렴풋하다.
아마도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일 게다.
그 때는 학생들 머리가 2∼3Cm쯤 되면, 훈육선생님이 머리에
오솔 길을 내주었다.
동네에서 돌팔이에게 머리를 깎다가 처음으로 이발소에 들렀던
나로서는 딴 세상을 만난 듯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회전의자에 푹신푹신한 소파는 신기해 보였고, 소파에 앉은 손님들은
한담을 나누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 때가 겨울이었다.
이발소 중앙의 연탄난로 위에는 양동이가 놓여 있고, 머리를 감길 때는
한 조리의 물을 푸고는 한 조리의 찬물을 부어놓아 항상 미지근했다.
난로의 연통을 고정해놓은 철사 줄에는 젖은 수건들이 걸려있었고,
면도사는 가끔씩, 비누거품이 묻은 면도솔을 따뜻한 연통에 문질렀고,
면도날이 무디어지면 귀퉁이에 못박혀 있는 가죽띠에 무두질을 했었다.
더벅머리 애송이는 세발을, 어여쁜 아가씨는 면도를, 주인장 이발사는
정성스레 이발을 하면서도 어린 나에게까지 친절을 베풀던,
그이발사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요즘, 누가 이발소에 가나요? 아버지도 한 번 미용실에 들러보세요.”
아들 진영이가 하는 말이다.
세상은 변해도 많이 변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문전성시로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이발을 해야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미용실로 발걸음을 하고 있으니,
동네이발소는 파리를 날릴 수밖에…….
기린이용원은 동네사람들의 쉼터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던 곳이었다.
요즘 들어, 하나둘씩 동네이발소가 사라지고 있으니, 이걸 어찌하랴?
☆★☆★☆★☆★☆★☆★☆★☆★☆★☆★☆★☆★
《14》
슬로시티 청산도
임두환
청산도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슬로시티(slowcity) 청산도(靑山島)는 하늘도,
산도, 바다도 푸르고,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느림을 통해 행복을 일깨워주는 청산도에서 섬사람들을 만나
하룻밤을 지새우며 파도소리랑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초등학교동창 다섯 명이 오래 전부터
부부동반모임을 갖고 있었다.
모임을 가진 지 오래되었지만 격월(隔月)로 얼굴만 확인하고
헤어질 뿐 바깥나들이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S가 주선하여 1박2일 코스로 꿈에 그리던
청산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이었다.
완도항에서 페리호로 45분쯤, 거리상으로는 19km쯤 달리면
청산도항에 닿았다.
항구가 마치 소쿠리 안 같아서 파도를 막아주는데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5개 섬으로 이루어진 청산면의 인구는 약 2,500명으로 반절은
농사를 짓고 반절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요즘에는 관광객들이 찾아와서 도움이 된다며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면소재지 도청리는 육지의 소도시에 버금갈 만큼 에너지가 넘쳤고,
이곳저곳 펜션에서는 여행객을 맞이하느라 손길이 바빴다.
우리 일행은 도청리를 벗어나 해안가 아늑한 곳, 권덕리 유자향펜션에
여장을 풀고 곧바로 범바위 전망대에 올랐다.
청산도는 2011년 12월에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레베인 키안티’시장인
파울로 사투르니가
“빨리 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
라고 주장하며, 마을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존하면서
느림과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국제적운동이라 할 수 있다.
슬로시티는 국제연맹본부의 현지답사를 거쳐 일정기준을 통과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슬로시티가 출범한 이래 27개국 174곳으로 불어났는데, 우리나라에는
청산도를 비롯하여 11곳이 지정되어 있다. 내가 사는 전주한옥마을도
이 곳 중 하나이다.
전주한옥마을은 전주시 풍남동과 교동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건물인 한옥(韓屋)이 800여 채나 밀집되어 있다.
골목골목에는 전통문화시설과 향토음식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늘과 산과 바다가 푸르른 청산도가 있다면, 느릿느릿 변화하는
도시 전주에는 멋과 맛을 이어가는 한옥마을이 있어서
내 마음도 뿌듯해진다.
청산도는 가는 곳마다 돌담으로 쌓여 있다.
논두렁 밭 두렁이 그렇고, 집들도 모두가 돌담 집이다.
심지어는 묘지도 돌담으로 둘러져 있으니, 언뜻 보면 제주도를
연상케 한다.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돌에 구멍이 숭숭 나있지만 청산도는 하나같이
구들장 돌처럼 얇고 넓적하다.
땅만 일구면 지천으로 돌이 나와 처치곤란이란다.
지형은 가파르고 물이 부족하다보니 농사를 짓는데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구들장 논이다.
청산도 구들장 논은 섬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케 하는 혁신적인
농업관개시스템으로 2013년 1월, 농림 축산 식품 부로부터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 이듬해인 2014년 4월,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주관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구들장 논은 제일 밑층에 크고 넓은 구들장 돌을 깔고서 층층이 돌과
흙을 쌓은 뒤 제일 위층에는 진흙으로 다져 놓아 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으려는 섬사람들의 슬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청산도는 느리게 걷고 깊게 파고드는 슬로우 길에서 참신함을 느낀다.
슬로우 길은 주민들이 마을과 마을로 이동하던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청산도를 온전히 구경하려면 느릿느릿 걸어야 제격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어버스를 이용한다.
투어버스를 타게 되면 슬로우 길을 따라 스쳐가기 쉬운 청산도의
숨은 이야기를 해설가인 운전기사에게 들을 수가 있다.
우리는 승용차를 가지고 들어간 것이 후회스러웠다.
승용차는 마음대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안내판에 의존하다보니,
그 지역 본모습을 속속들이 알 수 없어 아쉬웠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권덕리에 있는 범바위였다.
보적산 8부 능선의 가파른 곳에 위치한 범바위는 어미호랑이가
뒤따라오는 새끼를 돌아보는 형상이었다.
범바위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탁 트인 바다 비경(秘境)과
청산도 전겅(全景)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한 폭의 거대한 풍경화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문도와 제주도가 보인다고 해서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가뭇없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서편제’ 촬영지 당리마을이었다.
당리마을에는 그 당시 촬영했던 초가집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서편제의 주인공 유봉과 송화, 동호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청산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것은 고인돌이었다.
읍리마을에는 고인돌 16기가 있었는데 20여 년 전, 도로공사 때
훼손되어 지금은 3기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청산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여 더욱 감명을 받았다.
청산도 슬로우 길 10코스에는 지리해수욕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폭 100m에 길이 1.5km의 백사장에는 밀가루 같은 잔모래가 펼쳐져
이채로웠다.
주변 언덕에는 200여 년 된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텐트가 필요 없을 정도였고,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은 장관이었다. 언젠가 짬을 내서라도 손자손녀들과
더불어 온가족이 꼭 한 번 다시 찾고 싶은 곳이 지리해수욕장이었다.
청산도를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갯바위 낚시터, 상서마을
옛 담장, 진산리갯돌해변, 향토역사문화전시관 등이 있다.
청산도에 들어서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슬로우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파란바탕의 나무목각에 달팽이그림이 청산도를 알리는
일등공신인 것 같아 눈길이 쏠렸다.
청정지역 청산도를 다녀오면서 아쉬움이 있다면 생선회를
먹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하필이면 그 무렵 거제도에서
콜레라균이 검출되었다는 소식 때문에 생선회 맛을 보지 못하고
전복죽으로 대신해야 했다.
공기 맑고 아늑한 섬,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하늘과 바다와 산이
푸른 아름다운 곳이었다.
일상(日常)에 치어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면 느리게 걸어야 하는 곳,
청산도를 다시 찾고 싶다.
☆★☆★☆★☆★☆★☆★☆★☆★☆★☆★☆★☆★
첫댓글 임두환 글 모음 14편
감사합니다.
싱그러운 푸른 잎들처럼
생기있고 행복한 마음으로
미소가 떠나지 않는
멋진 5월의 마지막 휴일 되세요
추천"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