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끝날 들러리랑 기차로 정동진을 다녀왔다.
늘 강원도가 좋아, 산이 좋아 그랬기에 바다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끔씩 바다 보고싶다고 투정을 부리는 들러리가
여름여행으로 푸켓을 다녀오고나서부터는 점점 더 자주 바다 타령을 한다.
아들이 주말에 기숙사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말엔 엄두를 못내고
무료하게 보내던 긴 연휴 끝에 바다 가자니까, 그것도 기차 타고 가자니까 들러리는 애처럼 좋아한다.
아침 너무 여유부리다 출발이 좀 늦어 약간 난폭한 질주끝에 영주역에 도착하니 기차 시간이 10분쯤 남았다.
8시 53분발 강릉행 표를 끊고 기차에 타니 거의 텅 빈 객실에 우리 포함 대여섯명이 전부다.
이렇게 한가해서 늘 좋긴한데 대신 수지가 안맞아서인지 구식 오래된 객차다.
카페열차도 없고 자동판매기만 있는 ...
어쨌건 널려 있는 빈자리 덕에 창 밖 풍경이나 햇빛 방향 맞춰 맘대로 자라를 바꿔가며 갈 수 있어서 좋다.
영주역을 출발하여 춘양까지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 논 위로 가을 햇살이 눈부신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었고 간간히 나타나는 기와집 고택들이 잠들 수 없게 하는데 들러리는 쿨쿨 잠만 잔다.
임기역을 지나면서 강옆으로 기차길이 지나고 수려한 낙동강 상류의 풍경 속에 가을이 스며들고 있다.
분천역에 잠시 멈추었을 때 몇년 전 겨울의 기찻길과 낙동강이 함께하는 오지 트레킹이 생각났다.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들, 요즘은 거의 뵙지도 못하고 사는데 다들 잘 계신지...
무인역이지만 사람이 타고 내리는 양원역을 지나자 기차는 협곡 사이로 달린다.
강을 건너는 동화같은 다리를 건너는 동안 거울처럼 맑은 강물위로 햇살이 반짝인다.
협곡 양편의 절벽에 서 있는 나무 위로 내리는 단풍이 눈을 즐겁게 한다.
미시건주립대를 다니다 토크 영어선생으로 와있는 스티븐에게 이 기차를 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치를 보면서 스티븐에게 설명할 말을 속으로 되뇌어보는 사이 승부역에 다다랐다.
경부선처럼 기차가 자주 다니면 여기서 내려서 한시간 쯤 후에 출발하는 다음 열차를 타고 싶지만 하루 딱 세번이니 창밖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태백 근처에 이르자 전에 없던 커다란 역이 생겼다. 동백산역.
어제 통리역을 검색했을 때 해당열차가 없다고 나오더니 통리재를 통과하는 터널이 개통되었나 보다.
동백산역에서 제법 많은 사람이 내리고 타고 출발하자 곧 터널로 접어든다.
솔안터널이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니 연결이 안된다.
십분이 훨씬 넘는 긴 시간을 암흑 속에서 보내고 터널 밖으로 나오니 곧바로 도계역이다.
재차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개통된지 겨우 일주일 밖에 안되었고 이 터널로 영주-강릉행이 15분 정도 단축 되었다 하는데 길이가 무려 16.2킬로미터, 양쪽의 고도 차이로 터널을 직선으로 낼 수가 없어 나선형으로 하다보니 길이가 더 길어졌고 세계에서 12번째다.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통리역을 지나면서 보던 통리협곡과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스위치백을 볼 수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약간 아쉬움....
환선굴이 있는 신기역에서 교행 때문에 좀 오래 섰다가 곧 출발,,, 이윽고 오른쪽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묵호역에서 강릉역까지는 정동진 인근 잠시를 빼곤 거의 바다와 나란히 달리는 길이다.
정동진에 내릴까 잠시 고민하다가 네시간 보내기에 정동진은 심심할 것 같아 강릉까지 갔다.
12시 20분 쯤 강릉역에 도착, 택시를 타고 중앙시장으로 갔다.
지난 겨울 친구들과 갔던 속초여행에서 맛본 닭강정이 여기도 주루룩 늘어서 있다. 반마리만 포장하여 사고(8000원, 맛은 별로 권할 만 하지가 않다.)시장을 구경하다 보니 유난히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소머리국밥집이 있어 들어갔다.
국밥 한그릇과 수육 한접시 소주 한잔,
1박2일 팀이 다녀간 집이라고 곳곳에 현수막을 내건 튀김집, 떡집, 등등...
사람으로 꽉찬 국밥집 건너편에 단 한사람도 안보이는 다른 국밥집이 있었고
소신있게 장사하는 사람에게 매스컴은 어쩌면 흉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경포대 근처로 가서 초당두부전골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별로 맛있지 않은 수육에 소주 한잔하고 나니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시내 거리를 구경하며 걸어서 역으로 오니 4시에 출발하는 영주행 기차 전에 청량리 가는 열차가 한시간쯤 먼저 있길래 그걸 타고 정동진에서 내렸다.
강릉역에도 기차 안에도 모습은 한국사람인데 낯선 말을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 들어보니 중국인들이었다.
십만명이 추석 연휴에 한국으로 몰려 온다더니 그들인가 보았다.
시끄럽고 세련되지 못하고 캐나다에서 보았던 중국 사람들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도 20년 전에는 저런 모습으로 남들 눈쌀을 찌푸리게 했었다니 뭐.
정동진 바다는 유난히 파랗고 파도는 알맞게 셌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모래밭을 걷기도 하고
고현정 소나무 아래서 사진도 한장 찍고
멀리 해변의 남쪽 끝자락 언덕위에 있는 배모양 썬크루즈 리조트 아래로 바닷가 가까운 곳에 배모양의 건물이 또 하나 생겼는데 거기까지 가보기엔 한시간은 너무 짧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닷가에서 한가한 한 시간.
그리고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오후 네시가 약간 지난 시각이었다.
명절 연휴 마지막날 이어서인지 역마다 사람들이 탔고 동해역쯤에서는 거의 만석이 되었다.
이 기차에서 이런 풍경은 처음 본다.
한반도의 서쪽이나 남쪽을 달리는 열차는 지금쯤은 입석도 꽉 찼을테지만...
태백을 지나자 창밖은 거의 어두워져 승부역 인근 협곡을 지날 때는 창밖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나는 이 기차를 타는 것이 참 좋다.
세시간쯤 기차를 타고 가서 네시간쯤 놀다 다시 세시간쯤 기차를 타면 하루가 꽉차는 이 코스.
처음엔 들판을 달리다 산악지대를 거쳐 바닷가까지 달리는 거의 환상적인 코스다.
다음엔 동해역에 내려서 삼척으로 가 삼척 시티투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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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인님, 가을여인이 되셨남???? 우째 세월을 거꾸로 잡수신듯 더 젊어지셨네~~~
아주 좋습니다, 나는 혼자가도 좋던데 같이 갔으니 더욱 좋았겠지요
10월 하순 쯤 소백산 주변도 둘러볼 겸 풍기 한번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