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의연혁]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이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 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 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郡)이 되었고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하였다.
[가문의유래]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시조(始祖)는 해주(海州)의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또한 문명(文名)이 높았고 뒤에 판이부사(判異副詞)를 역임한 최 온(崔 溫)이다. 선조(先祖)들이 일찍이 대령군(大寧郡) 수양산(首陽山) 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해주(海州)로 삼고 문호(門戶)를 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황해도 대령군에서 시골 향리인 온(溫)의 아들로 태어난 동방유학(東方儒學)의 비조이며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일컬어지는 충(沖)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1005년(목종 8) 20세의 나이로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를 거쳐 1013년(현종 4)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太祖)에서 목종(穆宗)까지의 실록편찬(實錄編纂)에 참여하였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형부상서(刑部尙書)?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침으로서 고려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농번기(農繁期)의 공역 금지와 국가재정 낭비를 금하도록 상소하여 이를 실행케 했다. 그 후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하여 그 국방경계의 강격책을 쓰도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워 1053년(문종 7) 궤장(?杖)을 하사받았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謨同德治理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치사(上注國致仕)가 되었다. 1055년(문종 9) 내사령(內査令)으로 치사(致仕)한 뒤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문헌공고(文獻公道)라 불리웠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되었으며 그가 개경 송악산 기슭에 문을연 구재학당(救災學堂)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났고 굳건한 성품의 소유자인 충은 태어나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4대의 왕조에 걸쳐 50여 년간 권력과 유학(儒學)의 중심인물로서 나라의 큰 일에는 모두 자문하여 고려의 국정(國政)을 좌우했다. 1068년(문종 22) 9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태의감(太醫監) 이 염(李 鹽)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게하여 조위(弔慰)하고 시호(諡號)를 문헌(文獻)으로 내려주어 정종(正宗)의 묘정에 배양케 하였다. 뒤에 선종(禪宗)의 묘정에 배향하여 해주(海州)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재향하였다.
저서에는「최문헌공유교(崔文憲公遺稿)」가 있고 필적으로는 개성(開城) 귀법사 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문(圓空國師勝妙塔碑文), 직산(稷山) 흥경사개창비문(弘慶寺開創婢文) 등이 있다. 해동공자(海東孔子) 충(沖)의 아들 유선(惟善)과 유길(惟吉)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아버지가 유훈(遊訓)으로 남긴 계이자시(戒二子詩)를 받들어 명문(名文)의 전통을 이었고 이 유훈(遊訓)은 지금까지 해주최씨(海州崔氏)들이 정신적 규범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명문 유학자(儒學者)의 가문에서 태어난 유선(惟善)은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030년(현종 2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1047년(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또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을 때는 공부시랑(工夫豺狼) 이득로(利得路)와 함께 조상회장사(弔喪會葬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061년(문종 15)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어 추충잔화 강정수레공신의 호를 받은 후 여러관직을 거쳐 문하시랑(門下豺狼)에 이르렀다. 수태위(守太慰)?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유선(惟善)의 동생 유길(惟吉)은 호부상서(戶部尙書)? 태자빈객(太子貧客)? 상서우복야(常書右僕野)를 거쳐 1077년(문종 31) 수사공(守司空) 섭상서령(攝尙書令)에 올랐다. 사제(思齊)는 충(沖)의 손자이고 유선(惟善)의 아들로 1054년(문종 8) 문과에 급제하고 1081년(문종 35)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중추원사(中樞院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 1090년(선종 7) 수사공(守司空)? 판리부사?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다.
유길(惟吉)의 아들 사량(思量)은 18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부 시랑(工夫豺狼)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오고 1084년(선종 1) 동지충추원사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1086년(선종 3)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여러 관직에 올랐고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유길(惟吉)의 둘째 아들인 사추(思諏)는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 내시(內侍)가 되고 전중소감(殿中少監)? 지상서호부사를 거쳐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를 역임하고 1094년 (현종즉위) 동지충추원사?좌산기상시를 비롯한 여러 관직에 종사하다 문하시중(門下市中)에 승진하여 보정공신(補正功臣)이 되었고, 예종(睿宗) 때 중서령(中書令)으로 치사(致仕)하였으며 뒤에 추성봉국공신(推誠奉國功臣)에 대령군개국후(大寧郡開國侯)가 되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가지기에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행동함이 없이 예법(禮法)을 지켰고, 그는 내외 관직을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을 많이 남겼다. 1115년(예종 10) 그가 죽으니 왕이 연등회에 나가 풍악을 보다가 부고를 듣고는 슬퍼하며 부의 (賻儀)를 보냈다. 사제(思齊)의 아들 약(?)은 1116년(예종 11) 지제고(知制?)로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대동강(大洞江)에서 연유만 즐기는 예종에게 간 하여 중지케하였으나, 후에 이일로 무고를 받아 춘주부사(春州腐사)로 좌천되었다가 예부 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사추(思諏)의 아들 원(源)은 고려 때 우복야를 지냈다.
관(灌)은 1129년 (인종 7) 병부낭중(兵簿郎中)으로 금(金)나라에 다녀와 1141년(인종 19)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愿使)가 되었고, 1145년(인종 23) 추밀원사(樞密寃使). 판삼사사(判三司事)? 상서우복야(尙書右僕?)를 거쳐 의종(毅宗) 초에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주(?奏)는 1137년(인종 15) 좌산기상시(左散騎尙侍)?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태자빈객(太子賓客)? 병부상서? 지추밀원사?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후 1140년(인종 18) 판형부사(判刑部事)로 있으며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時幣)의 시정책을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평장사(平章事)?태자태부를 거쳐 1145년(인종 23)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윤의(允儀)는 충(沖)의 5세손이고 약(?)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났고 문장에 능했으며, 1128년(인종6) 문과에 급제, 1133년(인종 11) 정중내급사? 태학박사(太學博士)를 거쳐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가 되었고, 1136년(의종 16)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그의 저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은 고종 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윤의(允儀)의 손자이며 약(?)의 증손 자(滋)는 강종(康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을 거쳐 학유(學諭)로 있을 때 이규보(李奎報)에게 문재(文才)가 인정되어 그의 추천으로 문한(文翰)을 맡았다.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로 민첩 근면하게 일을 하여 집정사 최 우(崔 瑀)의 인정을 받았으며, 고종(高宗) 때 정언(正言)을 거쳐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전중소감? 보문각대제학이 되었다.
1256년(고종 43) 중서 평장사(中書平章事)를 역임하고 1259년(고종 46)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당대에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저서(著書)로는「최문충공가집」?「보한집」?「삼도척」등이 있다. 사추(思諏)의 손자 홍윤(洪胤)은 고려의 이름있는 정치가로 희종(熙宗) 초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1210년(희종 6) 전선(銓選)을 관장한 후 1212년(강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고종 때에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고려 조에 공헌한 해주최씨(海州崔氏) 일가를 더욱 빛낸 인물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자(滋)의 세째 아들로 출생한 유엄(有?)이다.
그는 성품이 담박하고 겸손하여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벼슬을 하면서도 10년 동안이나 지위를 옮기지 않으니 당신의 여론은 오히려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충렬왕이 그 명성을 일찍부터 들었다가 1274년에 즉위하자 감찰잡단(監察雜端)을 제수하였으며, 이로부터 4대(四代)의 왕조에 걸쳐 벼슬하여 국가의 원로가 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개정하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여 중지시킨 공(功)으로 공신에 책록되었고, 심양왕(瀋陽王)이 충숙왕(忠肅王)의 폐위를 책동하다 실패한 뒤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內地)로 편입시키도록 책동하자 85세의 노령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이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왔다.
그 외에 해주최씨(海州崔氏) 가문을 빛낸 후손들 중에서 춘명(椿命)과 황(滉)을 빼놓을 수 없다. 춘명(椿命)은 1231년(고종 18) 자부주사(慈州副使)로서 몽고군에 포위된 성(城)을 고수하며 용감하게 싸웠고 후에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발탁되었으며, 황(滉)은 1579년(선조 12)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의 기한(饑寒) 구제대책 8조를 상소했으며 좌찬성(左贊成)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고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에 뛰어난 인물은 세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석된 만리(萬里)를 꼽을 수 있다. 당시에 바른 말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어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했다.
1437년(세종 19) 집현전 직세학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4년(세종 26)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며, 환관(宦官)의 사모(紗帽) 착용이 고제(古制)에 어긋남을 지적하여 시정토록 하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해주 최씨는 조선에 와서도 명문의 대(代)를 이어 경회(慶會)가 1567년(선조 즉위)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올라 영해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금산(錦山)? 무주(茂朱)? 창원(昌原)? 성주(星州)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한 후 진주성(晋州) 싸움에 참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등과 함께 밤낮 9일 동안 싸우다가 전사한 명장이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어 가문을 빛냈다.
경창(慶昌)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동도찰방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시(詩)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피리를 잘 불어 영암(靈巖)해변에 살 때 왜구(倭寇)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자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갔으므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문장과 학문에 능해 이 이(李理), 송익필(宋翼弼)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고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白光勳)? 이 달(李 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웠다. 규서(奎瑞)는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699년(숙종 25)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형조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1721년(경종 1) 소론(小論)의 영수(領袖)로서 우의정이 되었고 1723년(경종 3) 영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左)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서울로 올라와 고변(告變)하므로 난을 토평케 하여 왕으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서찰을 받았으며 영조(英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민족의 진정한 역군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족국독립을 위하여 몸바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인(麟)은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철(明哲)하여 1896년 19세로 함남감찰부 집사(執事)가 되었고 25세에 활빈당(活貧黨)과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했다. 1919년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胤) 등과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할 지도자선출을 밀의하고 초안을 작성, 최남선으로 하여금 완성케 하였으며 후에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대한 독립(大韓獨立)을 선언하였던 해주최씨의 자랑스런 인물(人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