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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여관에서 인증샷을 하고
휴게소 가게에서 전 세계를 일주하는 오토바이 여행객인 우리나라 사람을 만났다. 그의 말은 2017년 6월에 동해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배를 타고 러시아로 가서 36일 동안 오토바이를 타고 유럽으로 갔고, 동유럽, 북유럽을 다닌 후 영국으로 건너가 여행 중 신사의 나라에서 오토바이를 도난당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중고 오토바이를 사서 도버 해협을 건너, 다시 서유럽 여행 중, 서유럽 남단인 스페인에 왔다고 한다. 하루에 경비가 얼마나 드느냐고 물으니 3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잠은 텐트에서 자고 식사는 손수 해 먹으니 3만원은 휘발유 값 정도인 것 같다.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각국의 물건 값도 훤히 알면서 스페인은 물가가 싼 편이라고 말한다.
커피 한 잔 후 다시 버스를 타고 3시간이 소요되는 꼬르도바로 향했다. 이번에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올리브 밭이고 올리브 야산이다. 저 많은 올리브를 누가 수확할까? 촌락도 없고, 농가도 없다. 스페인에서는 농지가 국유지이고 농부가 농지세를 내고 경작한단다. 올리브는 심은 후 40년이 되어야 열매가 달린단다. 그래서 올리브 심는 집으로 시집가려 한다고 한다. 후손들이 부유하게 살 수 있으니까. 우리나라는 왜 올리브 나무를 심지 않을까? 하기야 40년이 흘러야 열매를 맺는다 하니 빨리빨리 하는 국민이니 장기간 투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산이 없으니 개울이 없고 물도 없다. 비가 오면 그대로 땅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간혹 가다 작은 강이 있기는 한데 녹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녹조 현상이 심하다. 그러니 물고기가 살 리가 없다.
2시쯤에 꼬르도바에 도착했다.
꼬르도바는 카르타고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짐작되며 성서에 나오는 다시시 시(市)라는 주장도 있다.
로마 제국 하에서 번성했으나 서고트족의 지배시절인 6~8세기 초에 쇠퇴했다. 711년 이슬람교도들에게 점령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후 이슬람교 부족들간의 분쟁으로 복구가 지체되다가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스페인 이슬람교 세력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756년 이 도시를 수도로 삼은 후 회복되기 시작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이 도시에 세운 대사원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확장되다가 아부 아미르 알 만수르에 의해 완공되었다. 가끔씩 일어나는 반란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이 도시는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 하에서 급속히 성장해갔다.
11세기초 내전이 발생하여 칼리프 통치구역이 해체되자 스페인 이슬람교도들의 군소왕국들은 이 도시를 두고 힘을 겨루었다. 1236년 카스티야의 왕 페르난도 3세에게 정복되어 그리스도교 국가인 스페인에 합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의 교두보인 그라나다와의 전선에서 군사기지가 되었다가 1492년 그라나다가 함락된 후에는 교회, 수도원,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조용한 도시가 되었다.
꼬르도바에서 막 버스에 내리니 10월 25일인데도 뜨겁고 찬란한 햇빛이 견디기 힘들만큼 내리쬐었다. 여행 준비물로 썬그라스와 썬크림, 모자와 양산을 준비하라는 가이드의 부탁이 왜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여름에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고 한다.
처음 간 곳이 유대인들이 산다는 곳이었다. 여행 예정지로 이곳을 간다기에 많은 호기심을 가졌다. 집시로 시작해서 이집트인들에게 수천년을 노예로 살았고, 모세에 의해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왕국을 세웠지만 다시 나라를 잃고, 스스로 신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지만 2차 대전 때 히틀러에게 600만명이 학살되는 대참사를 당했고, 기원후 2000년 동안 세계 문화의 조류는 기독교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도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
정말 그들은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고, 미국의 부호 대부분이 유대인이라는데 신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인가?
유럽의 동서남북 20여개국을 여행했지만 모두가 기독교 문화의 흔적이고, 현재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가 뿌리는 여호와 신이지만 싸우며 죽이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 인류는 종교로 인해서 반목하며 살아야 하는가?
신에게 구원을 받고자 신을 믿는데 그 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며 죽는 아이러니를 겪어왔다.
신이 인간에게 준 이로움과 해로움은 어느 것이 비중이 큰 것인가 ?
이 모두가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가?
유대인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를 보면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사는 골목에 들어섰다.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벽들이 모두 흰색이다. 이 지방은 햇빛이 따가와 복사열을 차단하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그런지 10월말인데도 햇빛아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자외선이 내리 쬐었다.
유대인들의 집 테라스에는 갖가지 꽃들이나 종려나무의 잎이 꽂혀 있었다. 그들의 전통 문화란다.
그림 <유대인의 거리>
유대인이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이슬람족이 사는 곳으로 가니 정사각형의 정원이 있고, 그 정원에는 먹을 수는 없지만 향이 짙은 오랜지 나무가 있고, 그늘에는 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정원을 중심으로는 여러 세대들이 집을 짓고 살며, 정원을 공동으로 이용하면서 이웃끼리 친교를 유지한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처럼 십일조를 내지 않고 정원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병원, 식당, 갖가지 상점들이 이윤의 얼마씩을 내면서 사원의 경비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림 메스키따 사원
꼬르도바에 있는 메스키따 사원은 25,000명을 수용하여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본래 이슬람교 사원이었으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후 더욱 확장하였고 현재는 카톨릭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 문화와 카톨릭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785년 아라비아 왕족 압둘라만 1세가 건축을 명했고, 1236부터는 기독교 교회로 사용했으며 1523년에는 사원의 안 중앙에 성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넓고 웅장한 지붕을 받치기 위해서 수많은 2단 아치형 기둥이 서 있고, 성당 안에는 많은 성화와 조각상들이 있다.
이곳에서 홀로페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란 성화를 보았다. 한 손에는 잘려진 목을, 한 손에는 종려나무 잎(도상 : 그림과 관계되는 상징물)을 들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이 여인이 사람 목을 든 그림은 요한 쟁반과 이 그림뿐이라고 말한다. ‘요한 쟁반’ 배경 이야기는 마태복음 14장에 잘 기록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목을 든 유니트’의 배경 설화만 써 보겠다.
그림 <홀로페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이 그림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가 그린 그림으로 17세기 피렌체의 자랑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는 구약 외경에 나오는 유니트의 설화를 그린 그림이다.
아득히 먼 옛날, 잔인한 아시리아 군대가 평화롭던 유대의 산악 도시인 베툴리아를 침략했다. 군대를 이끌고 온 장수 홀로페르네스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고, 재산은 약탈하는 등 도시 전체를 유린했다. 이를 보다 못한 귀족 출신의 과부 유디트는 아름답게 치장한 후 하녀를 데리고 적군의 막사에 몰래 기어들어가 자신이 쫓기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를 만나기 위해, 몇 가지 기밀을 말해 주겠다고 했다. 홀로페르네스는 젊은 유디트의 모습에 압도되어 그녀를 만찬에 초대해 놓고 욕구를 채운 후 만취하여 잠자리에 쓰러졌다. 이때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검을 빼내어 그의 목을 잘랐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보자기에 싸서 하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툴리아 도성벽에 매달았다. 다음날 대장의 목을 본 아시리아 군대는 서둘러 도성을 떠났다. 베툴리아는 그로 인해 해방될 수 있었다. 누구도 유디트가 순결을 버린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 애국심은 임란 때 논개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림 < 요한 쟁반>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그림을 절대로 촬영할 수 없다. 하여 ‘요한의 쟁반’의 그림을 촬영 못하고 아쉬움에 다른 곳에서 구한 이 그림으로 대체한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요한의 쟁반’ 미술품은 살로메의 젖가슴이 창녀처럼 튀어 나왔고 요녀처럼 그려졌는데 이 그림은 목을 든 살로메가 너무 미녀며 애잔한 모습이다.
메스키따 사원 관람 후 거리를 나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저 사람은 유대인인가? 무슬림인가? 기독교인가?
길거리에서 어머니와 뛰노는 유아를 만났다. 콧날이 날카롭고 쑥 들어간 파란 눈이 매우 귀여웠다.
저녁 식사 후 스페인 전통춤인 플라멩고를 관람 후 호텔에 들어갔다. 여행 중 호텔이나 식사가 모두 훌륭했고 옵션도 무리하지 않고 관광객의 의견을 존중하여 진행했다. 모두투어가 이렇게 훌륭한지 몰랐다.
10월 26일 관광 3일째다.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우의를 준비하고 대 성당으로 향했다. 스페인은 아침이 늦다. 그들은 간식을 합해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다는데 밤 10시쯤 저녁을 먹으니 늦게 일어나고 아침도 10시 쯤 자신단다. 그래서 우리도 관광지가 가까우면 9시쯤 호텔에서 출발한다. 먼저 여행 중 가장 하이라이트라는 스페인 광장을 가려 했다. 비가 내릴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있는지 경찰이 막아서고 있다. 아랍인들 테러 첩보라도 받았는지. 우리는 할 수 없이 세비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세비아 대성당은 비잔틴 시국의 성베드로 성당, 영국의 세인트 폴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란다.
세비아란 ‘시장이 열리는 곳’이란다. 지정학적인 요충지라 로마 시대엔 조공들이 드나들었고, 이슬람 시대엔 두 번째 수도였으며 대항해 시대에는 황금의 도시였다. 그래서일까? 세비야는 여유롭고 넓은 느낌이다. 거리의 오렌지 가로수도 그 여유로움에 일조를 더 한다.
그림 < 세비아의 거리>
세비아 거리는 최신식인데 마차도 달린다. 그런데 마차를 끄는 말똥이 보이지 않고 깨끗하다. 이유가 뭘까? 하고 살펴봤더니 말 엉덩이에 무얼 매달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똥받이를 매달고 다닌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용도의 넓적한 것을 엉덩이에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완전히 현대와 과거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도시 세비아다.
세비야 성당 안에서 제일 흥미로운 것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 무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 해 콜럼버스가 들어 있는 관이다. 그 관이 4명의 소국의 왕에 의해 공중에 떠받치고 있다. 4명의 왕은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비라가다.
독특한 사실은 콜럼버스의 주검(유골)은 땅에 묻히어져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콜럼버스는 그 당시 스페인 정부에 섭섭함이 있어 죽어도 ‘시체를 스페인 땅에 묻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는데, 관으로 메고 있으니 유언대로 묻지 않은 편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기록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글을 맺겠다.
그림 < 땅위에 떠 있는 콜럼버스의 관>
성당에서 거리로 나와 과달키비르강가에 있는 세비아 황금의 탑이 있는 쪽으로 갔다.
세비아 황금의 탑은 1220년 이슬람교도가 건설한 탑으로 당시에는 탑 위가 황금색의 타일로 덥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강 맞은편에는 8각형의 은 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황금의 탑과 강 건너편에 있던 은탑 사이에 쇠줄을 메어놓고 통행하는 배를 검문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떠났다는 인연으로 현재에는 해양박물관이 되었다.
이 탑은 세비아에 있는 Almohade 시대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림 < 황금 탑 앞에서>
점심 식사 후 2시간 30분간 버스를 타고 론다로 이동했다. 2시간 30분 동안 가는 길도 끝없는 벌판이며 다복솔 같은 올리브 나무가 열병식 하듯 서 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느 벌판에 이르자 이 곳이 로마의 황제였던 줄리어스 시저의 땅이었다고 한다. 가이드와 나는 지식 경쟁이라도 하듯 시저에 얽힌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며, 삼두 정치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론다에 가까워지자 야산 같은 산이 보이며 주로 검은 소떼들이 보인다.
론다는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이자 근대 투우의 발상지란다. 투우는 1년에 2,3차례 하지만 경기 중 인명 사고가 나기 때문에 정부에서 지양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림 <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투우장 >
투우는 야생한 700kg 이상의 소만 사용한다고 한다. 투우사는 17세 ∼ 25세로 민첩하고 담대한 사람이란다. 나이가 많고 결혼한 사람은 부양가족으로 인해서 담력이 적고 민첩성이 적기 때문이란다. 짐승과의 싸움이지만 정정당당한 규칙이 있다고 한다. 소가 투우장에 들어오기 전 캄캄한 울안에 가두어 두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오면 스페인의 찬란한 햇빛에 광기를 내고 사람에게 대든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투우장 밖에서 인증샷을 하고, 투우를 좋아 하여 투우장 주변에서 살았다는 헤밍웨이 집 부근으로 갔다.
첫댓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올리브밭과 야산이라니~. 우리 곰나루21 중국 장춘과 길림 갔을 때, 가도가도 끝이 없는 옥수수밭이 생각납니다. 벌써 15년전의 일이라니 우리만의 세월이 이렇게나 빨리 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