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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동지>(23회) 질투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리던 날, 오후 수련을 마친 동지는 현서를 저녁 수련에 참석시키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함박눈을 맞으며 현서와 함께 안국역으로 들어온 용학은 ‘함박눈’과 ‘모처럼’을 핑계로 현서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현서로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데다, 그녀 역시 눈 내리는 날의 ‘모처럼’이 싫지 않아 선뜻 동의했다. 둘은 홍대입구역 인근에 있는 참치 전문집 2층의 작은 별실에 마주 앉았다. 바닥 가운데를 무릎 깊이로 낮추고 그 안에 테이블을 설치하여 방바닥을 의자처럼 걸터앉도록 꾸민 방이었다. 창밖은 그때까지도 눈이 내렸다. 두 동갑내기 남녀가 방 안의 따스함을 즐기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사이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 용학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테이블 가운데 참치회와 사케가 놓이고 그 밖의 -222- |
공간에 많지 않은 그릇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놓인 깔끔한 상차림이었다. 복주머니같이 배가 볼록한 백색 도자기에 담긴 사케는 겉모습만으로도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용학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개의 작은 백자 술잔에 술을 따라서 하나를 현서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런 다음 부위별로 담아놓은 참치회 중에서 분홍빛이 나는 회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현서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이 건 참치 뱃살인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 부위지. ‘오도로’라고 하는데 맛있어. 마블링이 꼭 꽃등심 같거든. 대개는 간장에 와사비를 풀어서 찍어 먹지만, 마니아들은 그냥 회에다 와사비를 발라서 먹어. 한 번 먹어 볼래?”하며 젓가락으로 겨자를 조금 찍어서 올려놓은 회에 발라주었다. “맵지 않을까?” “그 맛으로 먹는 거지! 얘는 아마 현서가 맵다 그럴걸?” “싱겁기는!” “하하, 농담!” 용학이 술잔을 들고 앞으로 내밀고 현서도 잔을 들어 용학의 잔에 살짝 갖다 댔다. 용학은 단숨에 첫 잔을 비운 뒤 다시 따랐다. “이거 한 번 먹어봐. 이건 뽈살인데, 머리 부위에서 발라낸 거야. 그리고 이건 아가미 뒷부분 살, 가마육이라고 해.”라며 진한 붉은색을 띤 살점 두 개를 집어서 현서 앞에 갖다 놓았다. -223- |
“살을 발라내고 뼈는 구이로 먹으면 최고지. 이 뽈살과 가마육도 맛있어.” “많이 먹어. 난 내가 알아서 먹을게.” “오케이 자 한잔해!” 용학이 잔을 들어 현서 앞에 놓인 잔에 자기의 잔을 살짝 부딪쳤다. “술 못 먹는 거 알면서? 이거 한잔으로 난 끝!” ‘끝’하며 현서는 손바닥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건 술도 아니야. 아주 낮은 거야!” 함께 식사할 때면 현서가 자주 듣는 말이었지만 용학은 번번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현서가 두 손으로 술병을 들어 용학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 한 잔만 따라줄 테니까 나머지는 자급자족하셔!” “아, 이건 담아 가서 냉동 보관해야겠는데!” “그러시든지.” 하며 현서도 잔을 들어 조금 마셨다. 둘의 얘깃거리는 늘 선수 시절로부터 시작하여 동지를 만난 이후의 무극권 수련 얘기로 이어져서 인사동에서 보는 사람들 사이를 맴돌았다. 용학이 자기와 현서 둘 사이의 문제를 슬쩍 끄집어내 보기도 하지만, 어느 한쪽이 적극성을 띠지 않는 한 대화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 사실 꽤 괜찮은 커플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야.” “·····” “그렇지 않아?” -224- |
“용학씨,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 “물론 멋있는 사람이기도 해!” 둘 사이는 가끔 대화가 단절되기도 했다. 연인 사이라면 대화의 소재가 마를 틈이 없어야 하고, 말을 잠시 쉬더라도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밀한 정서적 터치나 서로에 대한 지지를 무언중에 교감하는, 마치 노래 사이에 끼워진 허밍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용학과 현서는 대화 중에 가끔 어색한 단절의 순간이 껴들었다. 한때 둘은 서로 묘한 기류를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 기류가 더 발전하지 못하고 틈이 생긴 시기는, 용학이 생각하기에, 그가 여자 아이돌 가수를 정리하고 돌아와 현서와의 관계를 개선해 보려고 시도한 때거나, 또는 현서가 무극권에 매료되어 깊이 빠져든 때부터였다. “남자로서의 사범님은 어떤 분일까?” 갑자기 용학이 동지에 대해 말을 꺼냈다. “사범님에 대해 그런 식의 얘기는 하지 말자. 함부로 평가할 분이 아니잖아!” 현서가 대답했다. 침묵이 오래갔다. ‘이건 거의 숭배 수준이잖아.’ 용학은 속엣말로 생각했다. 물론 용학도 스승을 존경했지만, 남자로서 마저 그와 비교해 무시되는 건 기분이 나빴다. 더구나 그가 마음을 준 현서로부 -225- |
터는 더욱 아니었다. 재희가 사고를 당한 후 현서는 스승을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 거기다 현서가 저녁 수련에까지 동참하고부터 용학은 걷잡을 수 없는 질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범님도 의외로 평범한 남성일 수 있어!” 용학은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봤으며 좋겠어.” ‘무슨 뜻이지?’ 용학의 눈앞에 의문부호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마치 고속 촬영한 꽃잎처럼. 용학은 그 의문부호를 찬찬히 노려보다가 연거푸 두 잔의 술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뒤에 화장실을 다녀왔다. 남은 술과 회를 비우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더 흘렀다. 술병도 비었고 회 접시도 거의 비었을 때 현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제 그만 가자’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머릿속이 핑 돌았다. 이층 계단을 내려올 때 현기증이 나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현서는 휘청하며 앞서 내려가는 용학의 어깨를 짚었고, 용학이 그녀를 부축하여 난간을 내려왔다. 식당 앞 길가에 나와 주위를 돌아보는데 늘 보던 도회의 밤 풍경과 묘하게 달랐다. 도심의 불빛들이 그녀의 주위를 긴 꼬리를 만들며 빙글빙글 돌아가는가 하면, 강렬한 태양 아래 무방비로 서 있는 것처럼 눈이 부셔서 주변 물체들의 윤곽을 구별하기조차 힘들었다. 의식이 빨랫줄에 널어놓은 흰색 천같이 급속도로 말라서 도무지 뭘 -226- |
생각하기가 힘에 부쳤다. 용학이 현서의 왼쪽 팔을 자기 목에 두르고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현서는 용학에게 몸을 실은 채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이러면 안 돼. 뿌리치고 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의 근육이 흐물거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졸음이 밀려들고, 마음마저 오히려 포근한 이불 속에 눕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 뒤에 식당에서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님에 대한 얘기 끝에, 용학은 연거푸 몇 잔의 술을 입속으로 털어 넣고는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라며 일어섰다. 화장실을 다녀오며 캔콜라 하나와 유리컵을 들고온 용학은 ‘술 대신 콜라라도 마시지?’라고 말하며 캔 콜라를 따서 유리컵에 따랐다. 그는 기포가 톡톡 튀어 오르는 컵을 현서 앞에 놓은 뒤에 자기의 사케 잔을 들어 유리컵에 갖다 댔다. 현서가 유리컵을 손으로 잡자, 용학은 술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마포도서관 앞을 지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용학의오피스텔에 도착하여 용학의 침대에 쓰러져 누웠을 때 몸이 편안했다. 희미한 의식이 남아 가까스로 잠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화장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고 조금 후 어려풋이 물소리가 들렸다. 잠들지 않으려고 기를 끌어모아 보려 했지만 졸음을 쫒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27 |
용학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곁에 누웠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듯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있었다. ‘그래 이렇게 자자. 그러면 돼. 넌 아주 싸구려는 아니잖아. 이대로 자고 내일 아침에 조용히 헤어지자.’ 생각했다. 천장을 향해 누웠던 용학이 상체를 반쯤 일으켜 현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깊이 생각하여 작정한 듯 조심스럽고 침착한 동작으로 현서의 목 아래로 한쪽 팔을 넣어서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그녀의 가슴 위에 가만히 얹었다. ‘얘가 왜 이래. 야, 이러지 마! ····너 죽을 줄 알아!’ 소리가 없는 입술만의 중얼거림이었고, 손을 휘저어 보려 해도 마음 같지 않았다. ‘너, 이런 인간이었어? 이건 아니잖아. 저리 비켜!’ 몸을 비틀어 보려 해도 마치 꿈속처럼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 틈에 근육질 다리 하나가 하반신을 묵직하게 누렀다. ‘용서해줘.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입술과 입술이 겹쳤다. 이미 갈망으로 뜨거워진 그는 그녀의 바다에서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했다. 호흡은 거칠었지만, 그의 손길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매우 신중하고 정성스러웠다. 현서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의식은 빙산의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가듯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고, 몸은 깊은 수렁 속을 허우적거렸다. 주변의 색깔이 무채색으로 탈색된 듯 흐릿하고 -228- |
멀어 보였다. 그나마 잠들지 않고 버티는 건 그동안의 수련 때문일 터였다. ‘남사친’일 뿐이라며 선을 긋고 지내오는 동안에도 그에게 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한때는 그녀가 먼저 좋아했었고, 힘들었던 선수촌 생활 중에도 썸이란 걸 타기도 했다. 그때는 다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흉곽이 화르르 떨리고 설렜었다. 그가 아이돌 가수에게 빠져버린 뒤부터 그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 그 후 지금까지 그가 보내온 뜨거운 시선을 무관심을 가장하며 방치했었지만, 솔직히 말해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용학의 손길은 상대를 존중하여 무례하지 않으려 애썼다. 현서의 마음에서 불쾌감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무례한 행동을 스스로 변명하며 용서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옷들이 하나씩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몸에 붙었던 마지막 하나의 천 조각마저 떨어져 나간 뒤 그녀는 바람이 적당히 부는 여름밤에 요트 위에 누운 것 같은 안락함을 느꼈다. 차츰 몸이 반응하려 했다. 그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고 포기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는 뱃머리를 넘어온 거친 파도 같았다. 용학의 넓은 가슴이 천장을 가리고 그의 입술이 목과 가슴을 더듬어 왔을 때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실리는 걸 -229- |
느끼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 들렸다. 통증을 동반한 강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위아래로 순식간에 뻗어나갔다. 한숨 같은 짧은 신음을 흘렸으나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현서는 그 뒤로 얼마간 더 잠들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커튼 밖의 빛깔은 해가 뜬 후였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창문이 덜컹거렸다. 용학은 그때까지도 곤히 잠에 빠져있었다. 현서는 가만히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왠지 그가 밉거나 화나기보다는 허탈한 기분이 앞섰다. 하지만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야, 일어나!” 용학이 실눈을 떴다. “옷 입고 거실로 나와!” 용학이 반바지에 티셔츠만 걸치고 거실로 나오자 곧바로 현서의 니킥이 그의 명치에 꽂히고, 용학은 서너 걸음 앞의 소파까지 걷지도 못한 채 소파 아래에 머리를 박고 꼬꾸라졌다. 이어서 발길질이 옆구리와 허벅지와 엉덩이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태권도 세계 챔피언의 발길질은 단 한 차례도 헛발질 없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용학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팔을 양 옆구리에 밀착하여 가장 작은 면적만이 노출되도록 몸을 웅크렸다. 머리는 최대한 소파 밑으로 밀어 넣었다. 맞더라도 뼈가 부러지거나 어디가 찢어지는 것만은 피하자는 의도가 엿보였다. -230- |
아무리 세계 챔피언이지만 용학 역시 아이스하키 국가대표였다. 맞지 않으려면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은 맞아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오 분은 족히 맞았을 때쯤 현서도 지쳤는지, 빈틈이 생길 때마다 생각난 듯 발길질을 했다. 십 분쯤 지난 뒤에야 일방적인 린치를 멈췄다. 현서는 식탁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용학이 의도한 대로 찢어지거나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다. 얻어맞은 팔다리와 등과 엉덩이가 아팠고, 밖으로 드러난 팔과 허벅지는 거뭇거뭇한 피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끝이야. 내가 달라질 줄 알았다면 넌 계산을 잘못한 거야! 나쁜 자식!” “난 네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게 싫었어.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구!” 용학은 머리를 들지 않은 채 작은 소리였지만 부르짖듯 말했다. 현서를 뒤따라 엘리베이터를 탄 용학은 현서가 누른 1층을 지우고 지하 1층을 눌렀다. “싫겠지만 집까지 태워다 줄게.” “미친!” 현서는 다시 1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서자 밖으로 나왔다. 홍대입구역 쪽으로 걸어가던 중에 지나가는 빈 택시를 세웠다. “한마디만 듣고 가!” 택시가 멈춰서자 용학이 현서의 팔을 잡았다. 현서는 팔을 뿌리치며 용학을 노려봤다. -231- |
“내가 현서 사랑하는 건 기억해 줘!” ‘나쁜 자식!’ 한 마디를 던지고 현서는 택시의 문을 열었다. -232- |
꿈 잠에서 깬 희경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등과 목뒤가 땀에 흥건히 젖었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손에 닿은 침대 시트에서도 눅눅한 습기가 전해졌다. 꿈을 꾸었지만, 꿈속에서는 땀이 날 만한 일은 없었다. 긴장하거나 무섭거나 고통스러운 마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몸은 달리 반응했다. 재희가 남동생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햇빛이 강렬해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곳이었다. 공간적으로는, 아이들은 고립된 투명한 방 안에 있고 자신은 밖에서 구경하는 구도였다. 무엇 때문인지 희경은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다. 어린 두 아이는 말없이 서서 웃고 있었다. 꿈속에서 희경의 의식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뒤섞여 있었다. 마음에 고요한 슬픔이 배어들었지만, 그것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었지 특별히 고통스럽지는 -233- |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특이했다. 자신이 꿈을 꾸는 중인 걸 알고 나서 조금 더 꿈속에 있다가 잠에서 깼다. 그 후부터 가끔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늘 재희는 다섯 살이었고 동생은 세 살이었다. 동생은 세 살 나이로 전 생애를 살아버렸기에 더 이상 나이를 먹지 못하지만, 재희가 나이를 먹지 않는 건 이상했다. 꿈속에서 재희는 늘 동생의 손을 잡거나 업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가 세 살인 동생을 업기란 현실로는 어려울 테지만 꿈속에서의 재희는 천연덕스럽게 동생을 업고 있었다. 남매는 늘 웃는 모습이었는데, 햇볕을 등지고 서서 웃는 모습은 햇살처럼 하얗게 바래서 눈이 부셨다. 희경은 여전히 꿈속에서 아이들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다시 꿈을 꾼다면 꼭 아들을 안아보리라 다짐하였으나 그 후로도 꿈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자랐던 삼 년 동안 재희는 동생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늘 끼고돌았다. 일부러 동생을 야단치는 시늉이라도 하면 ‘엄마, 땡이는 어리잖아. 쪼그만 게 뭘 안다고 야단을 쳐?’라며 아주 정색하고 엄마를 나무랐다. 아이가 땡글땡글 예뻐서 가끔 땡이라고 불렀더니 재희도 땡이라고 불렀다. 다섯 살짜리 누나가 세 살 동생을 역성드는 모습이 신기하고 귀여워서 자주 ‘야단치기 놀이’를 하며 놀았다. 슬픈 추억이었다. 꿈속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고요한 슬픔이었지만, 더 큰 고통은 잠에서 깬 뒤에 찾아왔다. 그것은 가슴속의 어느 한 부위를 -234- |
뭉툭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희경은 바이러스성 유행병으로 일찍 죽은 아이의 죽음을 자기의 책임이라 믿었다. 아이를 잃은 후 이 년쯤 지난 때에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희경은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시점이 아이를 잃은 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혼서류를 준비해 망설임도 미련도 없이 도장을 찍었다. 아이들이 꿈에 나타나던 그 무렵에 병원에서 재희의 장기기증 의사를 타진해 왔다. 2015년의 마지막 날, 동지는 오후 수련에 이어서 석 달에 한 번 제자들의 수련 성취도를 점검했다. 동해가 먼저 다트판의 투척 선에 섰다. 중학교 일 학년이 된 동해는 곁에 선 현서보다 키가 높았다. 핀은 다트판 표적을 살짝 벗어난 곳에 꽂혔다. 현서도 비슷했다. 용학이 던진 핀은 다트판에서 튕겨 나왔다. 육 년 전 처음 다트판에 핀을 던졌던 때는 제자들 중 누구도 핀을 다트판에 맞추기조차 못한 채 벽체 어딘가를 때린 뒤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육년 후에는 두 제자가 핀을 표적 가까이에 꽂았다. 동지가 던진 핀은 0.5cm 표적의 중앙을 정확히 뚫었으나 다트판을 뒤집어 보니 뒷면 벽에 핀의 자국을 -235- |
남기지는 못했다. 2cm 두께의 다트판 중간 어디쯤에서 핀이 멈춘 것이다. 그날 저녁에 기다리던 시간여행 기회가 찾아왔다. 열한 번째 맞는 기회였다. 재희가 슬픈 얼굴로 이층 계단을 내려갈 때 동지는 그녀를 따라가려고 문 앞까지 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칠 년 전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괴로웠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볼 때 그저 자기 마음 아픈 것만 아는 이기주의자의 얼굴에 불과했다. 동지는 벌컥 고함을 질렀다. ‘이 미련한 녀석아, 생각이 어째서 그 모양이냐? 상상력을 좀 발휘했어야지! 지난 이십오 년을 생각해 봐. 그동안 재희가 네게 어떻게 했는지 돌이켜 보란 말이야!’ 동지는 재희 뒤를 따라가는 대신 칠 년 전 자신의 육신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막막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으나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훌쩍 몸을 던져 그의 몸으로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꼭 껴안아 보기도 했지만 안되었다. 머리를 맞대고 마구 비벼봐도 소용없었다. 11시가 되자 그가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혹시 잠든 후라면 정신이 깨어 있을 때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칠 년 전의 그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간 시간도 잠든 뒤였다. 하지만 동지는 쉽게 잠들지 -236- |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자리에 눕자마자 잠들었을 테지만 그날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만 했다. 시간은 11시 1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과거의 몸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더라도 시간이 문제였다. 재희가 사고를 당한 시간은 11시 35분에서 45분 사이로 추정되기 때문에, 사고 현장까지 달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늦어도 11시 30분 이전에 과거의 몸에 들어가야 했다. 11시 15분이 막 지난 때에 그는 잠잠한 수면 호흡을 쉬기 시작했다. 동지는 다시 영육의 합체를 시도했다. 침대로 몸을 날려 뛰어들기도 하고, 잠든 그와 이마를 맞대고 가만히 기다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1시 20분을 넘기자 동지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광화문광장을 향해 뛰었다. 세종대왕 동상 가까이 다다랐을 때 재희가 보였다. 재희는 지하 시설에서 막 올라와 사고 현장인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창수는 길 건너 인도의 나무 그늘에 기대서서 집요하게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지가 ‘재희야!’ 하고 부르며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데 그 빌어먹을 징조를 감지했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휘청 흔들리던 마지막 순간에 동상 뒷계단에서 올라오는 라운드 챙의 등산모를 보았다. 이어서 모든 존재가 사라졌다. 오슬오슬한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수련실 한쪽에 동해와 -237- |
현서가 반가부좌로 앉아있었다. 실패였다. 동지는 두 주먹을 말아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시간여행의 지속시간을 따져보았다. 이상했다. 이번에는 단막극의 시간이 조금도 늘지 않았다. -238- |
첫댓글 아슬아슬한 순간 터치가 좋습니다....
아! 배드 신, 어찔 어질 ㅡ
오늘은 부주인공들이 주인공의 역할을 하는군요. 그리고 주인공들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요. 기수련을 한다고 하여 일거에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재미가 없겠지요.기미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보렵니다.
때로는 조연의 활약이 눈부시지요. 용학과 서현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 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