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야 울지마라
- 추억의 젓가락 장단
사랑을 팔고~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울지마라/박재홍)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홍도야 울지마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1936년 07월
동양극장(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처음
공연하였다 일제(日帝) 강점기에 큰 인
기를 모은 신파극(新派劇)이다
흔히 홍도야 울지마라(1939)로도 불린다
이 작품으로 폐결핵 투병 중이던 작가 임
선규는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고, 주인
공 남매역을 맡은 황철(홍도 오빠役)과
차홍녀(홍도役)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우리 나라 최초
의 연극 전용 상설 극장이었던 동양 극장
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으며, 광복(光復)
이전 우리 연극사(演劇史)에서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했던 작품이다.
동양 극장 앞은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
로 많은 인파가 몰려왔으며 서대문 경찰서
에서 동원된 경관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특히, 공연 기간 내내 서울 시내의 기생
(妓生)들이 떼로 몰려왔는데 홍도와 자신
을 동일시 한 기생(妓生)들의 눈물로 동양
극장은 연일 울음 바다가 됐다.
장안의 기생들을 구경하려 극장을찾은 한
량들도 많았다. 이 연극을 본 어느 기생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이 너무 비관이 되어
마침내 한강에 투신 자살을 했는데,
이 사연이 신문에 보도되어 연극과 노래
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1936년 07월
연극으로 3년간 성공하였지만, 1939년
3월 영화는 실패하였고 대신 노래가 성
공하였다.
리갈(Legal) 레코드사에서 남일연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를 주제곡
으로 선정하였고,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마라(1939)를
부(副)주제곡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
랫말이 큰 인기를 끌게 되자 부랴부랴
주제곡을 홍도야 울지마라(1939)로 바
꿨다.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라는 이서구
작사의 노랫말은 전국 방방곡곡 울려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95년 경기도 시흥 방산리에 '홍도야
울지마라' 가요비가 세워졌는데, 이것
은 이 고장 출신 문화인 이서구의 업적
을 기리기 위한 뜻으로 만들어졌다
홍도야 울지마라 노래는 1939년 김영춘
1950년대 박재홍 1960년대 오기택 가수
가 다시 취입하여 크게 히트시켰다
<편집 : 송운 사랑방>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줄거리
일제(日帝)시대 홍도는 오빠를 출세시켜 주기
위해 스스로 자청하여 기생(妓生)이 되었다
화류계(花柳界) 생활에서 갖은 고생으로 학비
를 모아 오빠를 졸업시켰다. 여동생의 도움으
로 학업을 마친 오빠는 순사(巡使)가 되었다
한편 홍도는 오빠의 친구인 영호와 사랑에빠
진다 영호는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홍도와
결혼하지만 곧 외국 유학을 떠나고, 홍도의
과거를 알게된 시어머니는 결국 홍도를 집에
서 쫓아낸다
유학에서 돌아온 영호는 부모의 뜻에 따라
부잣집 딸과 약혼을 하고, 이를 알게 된 홍도
는 약혼식장에서 약혼녀를 칼로 찌른다
현장에 달려온 경찰관은 다름 아닌 홍도의
오빠였지만, 그는 준엄한 법에 따라 홍도를
체포해야만 했다
오!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으리오
통곡하는 홍도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
고 쓰러질 때 오빠는 홍도를 위로하며 노래
한곡을 부른다
그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울지마라(1939)였
는데 이 장면에서 관중석은 온통 눈물 바다
가 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신 나날 되세요
감사합니다
백솔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