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는 남도의 ‘곳간’이다.
영산강은 곡창지대 나주평야를 적시며 350리 굽이굽이 흘러 호남인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고, 마한과 백제의 역사가 번성했으며 문화의 꽃도 피웠다.
그 힘의 바탕은 비옥한 옥토에서 나오는 경제력이었을 것.
고려 2대왕 성종은 983년 목(牧)이라는 행정 구역을 편제하고, 전국에 12목을 두었다.
12목 중 하나인 나주는 조선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낼 정도로 번영을 누린다.
조선 후기 목이 폐지될 때까지 천년고도 목사골에는 300여 명의 목사(牧使)가 있었고, 명실상부한 호남의 경제, 문화, 군사, 행정 중심지였다.
나주 객사 ‘금성관(錦城館,보물 제2037호)’은 조선시대 객사 중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한다.
나주를 ‘소경(小京)’, 즉 ‘작은 한양’이라 불릴 정도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했다.
북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 남쪽으론 영산강이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다.
금성산이란 이름은 나주의 옛 지명인 ‘금성(錦城)’에서 유래한다.
평야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은 금성산은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있고 물길과 맞닿아 있어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다.
군사적 요충지로 지금도 정상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금성산은 오를 수가 없고 우회해야 한다.
산행은 상대적으로 오르기 쉬운 반시계 방향으로 잡았다.
낙타봉(장원봉)~뚜꺼비봉~뚜껑봉~월정봉을 오르내려야 하기에 체력소모가 큰 편이지만 탈출로가 여럿있어 단체산행하기에 딱 좋다.
약수터, 오두재, 떡재는 한수제로 곧장 내려가는 탈출로다.
낙타봉(장원봉) 팔각정(금영정)에서는 영산강의 유유한 S라인 물줄기와 나주평야, 무등산이 한눈에 보인다.
산 아래엔 김천일 의병장을 모신 경렬사, 동쪽으론 나주읍성의 4대문인 동점문, 영금문(서성문), 남고문, 북망문도 볼 수 있다.
영금문은 1894년 전봉준과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이 담판하던 역사적인 장소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고을을 모두 함락시켰지만 유일하게 나주성은 접수하지 못했다.
나주역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장소.
1929년 광주에서 출발한 호남선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자 열차에서 내린 일본 학생들이 두 명의 한국 여학생의 댕기를 당기며 희롱했다.
이를 목격한 한 여학생의 사촌동생인 박준채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다.
산행코스: 한수제 주차장-금성산-낙타봉-뚜꺼비봉-약수터(탈출)-오두재(B탈출)-뚜껑봉-떡재-월정봉-주차장(4.5h)
※ 나주 객사 ‘금성관(錦城館 보물 제2037호)’ 탐방.
궤적.
약 9km를 4시간 20여분 걸렸다.
고도표.
<산길샘>
<월간 산>의 코스를 그대로 따랐다.
<참고>. 금성산 우회길.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보물 제2037호)을 먼저 답사했다.
2층 누각인 망화루(望華樓)는 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외삼문이자 정문으로 2003년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의병장의 출병식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학생운동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망화루 앞에서 일어났다.
외삼문을 들어서자 맞배지붕 중삼문 뒤로 금성관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다.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며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 망궐례: 대궐을 바라보며 예를 올림.
망화루를 들어서자 좌측으로 일군의 비석들이 2열로 도열해 있다.
우측에 유달리 키가 큰 비석이 있어 들여다 보았더니...
식별 불가한 글자들이 빽빽하다.
안내판을 확인하니 '금성토평비'다.
동학농민운동 때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세운 것.
그 옆의 키작은 비석은 '사마비(駟馬碑)'다.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이 쳐들어오자 왕은 수도 개경을 떠나 이곳 나주에서 10여일 머무르는 일이 있었다.
왕이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그 때부터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고을 현감이 이 다리를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이 비를 세워 놓았다.
한 민가 담 옆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68년 이곳으로 옮겼다.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렀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비의 위쪽에는 '사마교비'라는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앞뒷면에 걸쳐 비문이 새겨져 있지만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사마교비 안내판.
중삼문을 지나면 비로소 금성관의 위용이 제대로 보인다.
중앙의 팔작지붕 건물이 객사의 정청 금성관(錦城館)이며 좌우 건물은 날개의 뜻을 가진 익헌(翼軒)이라고 하는데 각각 동익헌, 서익헌으로 나누어 부른다.
정청 앞쪽으로 내삼문 흔적이 남아 있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복원하였다.
금성관 편액의 힘찬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금성관(錦城館)의 현판은 광산 김씨 문정공 태현(台鉉:15世)의 후손 낭옹공(浪翁公) 현(晛:26世)이 7세(1612년)에 쓴 글씨라고 '광산 김씨 대종중'에서 소개하고 있다.
금성관 안내판.
그 옆 우측(동쪽)의 익헌인 벽오헌(碧梧軒).
뒤뜰을 돌았더니 은행나무 두 그루.수령이 650년 된 은행나무(보호수)가 하늘을 가릴 듯 위엄있는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일정이 바빠 망화루를 서둘러 벗어나니 다시 2층 누각 정수루(正綏樓)가 시야를 가로 막는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이 지은 것으로, 나주의 관아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1층 양 옆은 벽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개방하였다.
'나주관찰부(羅州觀察府)'라고 씌어 있으며, 2층에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북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한수제 주차장을 입력하였지만 버스는 더 위로 올라왔다.
앱을 연 뒤 들머리를 찾아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예전에는 주차장 뒤가 곧장 들머리였지만 지금은 사유지로 통제되고 있어 화살표 방향의 능선으로 접근한다.
작은 능선에 올라서자 체육공원.
좌측 능선으로 곧장 올라선다.
입구의 안내도.
들머리 계단 입구의 반대편에서도 올라올 수 있다.
잘 정비된 등산로.
벤치가 구비되어 있고...
정자와 체육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희망의 문을 지나고...
돌탑이 있는 작은 봉우리가 작은 '△금성산(244.9m)'이다.
준비해간 표지기를 걸었다.
작은금성산 5분 거리에 2층팔각정자 금영정(錦榮亭)이 세워져 있다.
금성산과 영산강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란다.
지형도를 확인하니 낙타봉(255.1m)인데, 장원봉(壯元峰)으로도 불리는 모양.
나주 향교 교생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올려다 보는 봉우리라서 생긴 이름인 듯.
그러거나말거나 준비해간 낙타봉 표지기를 걸었다.
금영정 2층누각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으로 나주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워낙 시야가 넓어 스펙타클 시네마스코프 화면이다.
끝간데 없는 나주벌.
멀리 무등산 방향. 산 아래에 사찰인 듯 여러채의 당우들이 모여있어...
당겨 보았더니 '나주북문외삼층석탑(보물 제50호)'이 있는 '심향사'다.
나주시 전경 안내판을 참고하였다.
반대쪽으로 돌아 환종주 끝자락을 파노라마로 둘러 보았다. 좌측 봉우리가 환종주 마지막 봉우리인 월정봉.
안내판을 참고하였다.
이장수 부회장과 매실주를 곁들인 느긋한 식사를 끝내고 쉬엄쉬엄 가자고 하였다.
정자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약수터이고, 이정표의 낙타봉은 지형도의 뚜꺼비봉을 지칭하는 듯.
뚜꺼비봉을 오르기 위해 곧장 올랐더니 임도. 다시 크로스하여...
정자쉼터를 들여다 보았더니 우리 C팀들이 식당을 차리고 앉아있다.
뚜꺼비봉(안내판과 이정표엔 낙타봉)을 가기위해선 임도.
얼마 지나지 않은 지점에...
정수리만 살짝 남은 봉우리가 있어...
올랐더니 열혈산꾼 '이강일'님의 시그널이 반긴다.
뚜꺼비봉에서 되내려와 임도를 따르면...
곡각지점에 약수터가 보인다.
약수터 20여m 아래 정자방향(화살표)으로 금성산 사면길이 이어진다.
사면길 입구의...
이정표.
장수 부회장을 기다렸다가 사면길을 에두른다.
금성산을 오르지 않고 옆으로 둘러가니 수월할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건 커다란 착각.
정비된 길이지만 거듭된 업다운과 고온다습한 기온으로 체력소모가 심하게 났다.
너덜지대에도 철망과 지뢰매설지역.
과거 지뢰매설지역임을 경고하는 안내판.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지뢰가 있으므로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 우측으론 온통 철조망과 경고판이 길을 안내하고 있다.
능선에서도 경고판 .
오두재로 내려가는 길은 고속도로 수준.
임도가 가로지르는 곳이 오두재(五頭峙).
이정표의 '뚜꺼비봉'은 '뚜껑봉'을 말하는 것.
함께한 장수 부회장을 오두재에서 탈출시키고 나는 뚜껑봉으로 바쁜 걸음을 친다.
입구의 이정표엔 월정봉이 2시간 걸린다고 해서 겁부터 집어 먹었으나 실제론 1시간 10여분 걸렸다.
그런 중에서도 길가의 새하얀 버섯과 눈맞춤을 한다.
이정표의 '뚜꺼비봉'은...
지형도 상 '뚜껑봉'.
떡재로 내려서면서 시야가 열린다. 우측으로 보이는 저수지는 보산동 보산제.
떡재에 내려서서...
안내판의 금성산을 확대해 본다.
바쁜 걸음을 치다보니 그제서야 앞 사람의 꽁무니를 물었다.
참호시설.
월정봉 직전의 이정표.
월정봉은 헬기장.
준비한 표지기를 건 뒤 인증.
다소 급한 산길을 내려가다 종점인 한수제를 내려다 본다.
이제 얼추 내려온 듯.
한수제에 도착이다.
배롱나무와 아치형 목교가 운치있는 한수제.
벤치에 배낭을 벗어놓고...
금성산 임도 안내판을 살펴보니 금성산은 유달리 임도가 많이 발달한 산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배산임수의 산세가 한양과 닮아 옛적부터 이름난 벼슬집안이 많다'라고 기록되었다 한다.
'한수제 경현길'은 떡재에서 구불구불 임도를 따르는 길로 최상열 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이 내려온 길이다.
산책로에 수도시설이 있어 꼭지를 틀어보았더니 콸콸~, 나도 머리를 쳐박았다.
그런 뒤 웃통을 벗어제낀 뒤 물에 살을 섞었다. 젖은 셔츠를 입은 채 버스로 회귀해 환복한 건 최선의 선택.
한수제를 따라 263m가 '금성산 맨발길'. 그렇다면 머리를 쳐박고 씻은 수도시설은 세족장이었던 것.
한수제(堤)를 따라 회귀하다...
한수지(池)를 올려다 보았다.
한수제 제일 아래에 위치한 '한수제 주차장'.
주소창에 '나주시 경현동 806'을 입력하라 했는데, 우리 버스는 한참 위에서 대기중이었다.
알고보니 이 번지는 여러군데 걸쳐 있었다.
데이비드 실즈가 지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인생은 모두 같다.
10세에는 사탕에 휘둘리고, 20세에는 이성에, 30세에는 쾌락에, 40세에는 야망에, 50세에는 탐욕에 휘둘린다.
그 후에는 달리 남은 것이 없으니 지혜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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