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 님은 비단 가톨릭신자들 뿐만 아니라, 대구 시민 전체가 그분의 업적을 잘 알고 기리어야 할 것인데 우리 시민들이 조금은 소홀한것 같아 여기에도 올립니다. 1900년대 초반부터 반세기 이상의 세월 동안, 대구가 서울 평양 다음으로 경제와 문화와 교육의 도시로서 자리 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상돈님의 공로가 컸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다른 도시들보다도 많이 뒤떨어졌지만~~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1) 내 영혼의 지도 - 1912년 대구대교구 첫 사제 피정 후 신자들과 함께했을 때의 서상돈. 뒷줄 왼쪽 흰 두루마리에 수염을 기른 이가 서상돈이다.
우리 영혼의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누구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하느님의 아름다운 말씀을 듣기도 한다. 그 순간 우리 영혼에 저절로 지도가 각인된다.
영혼의 지도.
서상돈에게는 그의 나이 16세 때 이 영혼의 지도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돈은 겨우 9살이었다. 그 나이에 무엇을 알겠는가? 그때 그는 죽음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저 뛰어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그들 형제에게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상돈의 곁에는 큰아버지와 숙부들이 존재했다. 아버지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든든한 형제들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조카를 아끼고 사랑했다. 제삿날이면 아버지는 어린 동생을 업고 또 한 손으로 상돈의 손을 잡고 큰아버지네 집으로 갔다. 한티에 산다는 두 숙부도 먼 길을 등짐을 한 가지씩 지고 왔다. 집안이 북적거렸다. 그래서 제삿날은 잔칫날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의 그 끔찍했던 기간에 세 분이 다 순교하셨다. 큰아버지 서인순이 경산에서 잡혀 대구 감옥에서 돌아가셨고, 작은아버지 서익순이 칠곡 한티에서 체포되어 서울 절두산에서 처형되었고, 막냇삼촌 서태순이 문경 한실에서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큰아버지가 대구 감옥에 갇혀 돌아가실 때까지 상돈은 옥바라지를 했다. 당시 그들 가족은 여우목(현 문경시 문경읍 증평리 소재)에서 나와 대구에 살 때였다. 상돈은 이마에 막 여드름이 돋기 시작한 16세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과 싸워야 했던 소년은 일찍 철들어 있었다.
감옥에서 만난 큰아버지는 수차례 형벌을 받아 온몸이 으깨지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용이었다. 그런데도 큰아버지는 “나를 놓아준다 하여도 다시 천주님을 섬길 것”이라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도대체 신앙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도 내던질 정도란 말인가?
그러나 상돈은 큰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큰아버지 서인순과 조카인 서상돈은 감옥의 창살을 사이에 두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큰아버지!”
“상돈아!”
두 사람은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른다.
상돈은 굶주림에 지친 큰아버지가 피고름이 엉긴 멍석을 뜯어 먹는 것을 목격했고 소죽을 먹는 것도 보았다. 큰아버지에게 뜨끈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 넣어줄 돈이 상돈에게는 없었다. 그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가난이 한이 되었다.
큰아버지는 제정신이 돌아오면 상돈에게 당부했다.
“절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선 안 된다.”
그 말을 상돈에게 남기고 큰아버지는 순교했다.
얼마나 많은 천주교인이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고통스럽게 죽어갔는가? 그때 불린 노래가 우리에게 당시의 슬픔을 말해준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으리. 바람처럼 그렇게 잊히지만 않으면 살아서 부를 이름이야 내 가지지 않아도 좋으리. 내가 살아 부르던 그 이름을 내가 죽어 부르던 그 이름을 바람처럼 그렇게 잊히지만 않으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나는 좋으리.
그들은 이름 없이 죽어가면서도 기꺼이 하느님을 위해서 순교를 택했다. 하느님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망나니의 칼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천주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당시 사회적,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있던 하층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또한, 사후 세계를 중시하는 천주교의 내세 사상은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교회법에 따라 축첩을 반대하고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억혼을 금지하는 것, 재혼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 등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된 것은 이승훈(1756~1801)이 사신의 수행원인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북경의 성당을 방문해 세례를 받고 교리서와 십자가, 성패 등을 받아 조선에 돌아옴으로써였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을 이벽과 함께 연구한 다음 주변 지인들에게 전교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빠르게 전파되어 경기, 충청,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도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양반층뿐 아니라 중인이나 하층민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갑자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순조가 겨우 11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면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정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노론 벽파(派)에 속한 정순왕후는 정조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도세자를 동정한 시파(時派)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등용했다. 그리고 정권 탄압의 빌미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들을 역적으로 다스리고,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철저하게 색출해 처벌하라는 박해령을 내렸다. 무시무시한 신유박해의 서막이었다.
그 후로도 박해는 크고 작게 계속 이어지다가 1866년 병인년에 권력은 천주교에 어마어마한 철퇴를 내려친다.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은 거센 폭우 직전이었다. 이 비극적인 나라는 문호 개방을 요구당하고 있었다. 조선은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1864년(고종 1년)에 러시아가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 요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교도들이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습니다.”
대원군은 귀가 솔깃했지만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에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 이하 정부 대관들이 천주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상돈의 삶도 세 분의 순교로 대전환을 맞이했다.
그때의 기억이 그의 삶에 하나의 꽃을 피웠다. 순교의 꽃! 그 꽃은 단 한 순간에 피었다가 스러졌지만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찬란하게 부활한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진의 그는 이미 늙은이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아직 그때의 소년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비장한 비극의 주인공. 「오레스테이아」(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의 주인공 오레스테스처럼 그는 다짐했다. 아무리 돈을 번다 해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기로.
그처럼 강렬한 기억이 또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집약되어 그의 삶을 위대하게 재탄생시켰다. 그는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지만 흰 쌀밥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막내 삼촌 서태순의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지게에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한티 마을로 옮기면서 상돈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골고타 언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 만일 어려움에 있거든 말하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거든 그리스도 오늘도 제대 위에서 희생함을 기억하라. 이해하기엔 너무 큰 사랑으로 바쳐진 고통….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천상의 음악이었다. 삼촌의 주검 앞에 바쳐지는 마지막 영가였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소년 서상돈은 큰아버지가 굶주림에 지쳐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는 것을 보았을 때, 막냇삼촌의 시신을 한티로 옮길 때 자신을 갑옷으로 무장했다. 그것은 아무나 입을 수 없는 금빛 갑옷이었다. 불구덩이를 맨발로 건넨 자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작가의 말
서상돈이 16세가 되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백부 서인순, 숙부 서익순, 서태순이 순교했다. 서상돈은 백부의 옥바라지를 하던 중 백부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는 것을 목격했다. 막냇삼촌인 서태순이 감옥에서 순교하자 피눈물을 삼키며 서태순의 시신을 옮기며 결심한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이 땅에 성전을 짓기로. 그리고 아무리 돈을 벌더라도 절대로 쌀밥은 먹지 않겠다고. 그 후 서상돈은 보부상으로 독하게 돈을 벌었다. 그는 전 재산을 희사해 성전을 건축했고 근대 교육에도 앞장섰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이 글은 그의 궤적을 좇으면서 모든 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섭리를 조명하고자 한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5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2) 나 어릴 때 좋은 친구 되어주신 예수님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은 죽어서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며는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천주교 가문에서 태어난 소년
어머니가 새벽마다 읊는 기도다. 아마 서상돈이 태어나기 이전 뱃속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기도일 것이다. 이벽의 ‘천주공경가’다.
서상돈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천주교 신자였다. 큰아버지와 두 숙부는 상돈을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는 천주교 집안의 후손이니 항상 신앙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느니라.” “성경 속에 모든 진리가 들어 있느니라.”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서상돈의 가문에서는 선택할 수 없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의 가문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가족 구성원에게 그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진리였다. 특히 집안 어른들은 달성 서씨 집안인 것도 중요하지만, 천주교 입교자이며 신앙 가문으로 이끈 광수 할아버지의 후손인 것을 더 더욱이나 강조했다.
서상돈의 선조가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4대조 서광수 때였다. 서광수는 용안 현감을 지낸 서명함의 장남이다.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달성 서씨의 명문대가였다. 특별히 그의 집안 친척 중 5촌 당숙인 서명응은 정조 때 홍문관 대제학 등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으로 북학파인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중국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서 실사구시의 실학을 연구한 학자였다.
학문 집안에서 자라난 서광수가 실학을 연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벼슬길을 탐하지는 않았다. 서광수가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을 때였다.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사건 때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파적당해 5남(유홍有弘, 유덕有德, 유오有五, 유도有道, 유만有萬) 2녀를 둔 서광수의 가정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3남 서유오(徐有五, 1760~1807)의 가정이 충청도 장원을 거쳐 와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들 서치보(徐致輔, 1791~1840년)와 손자(인순隣淳, 명순明淳, 철순哲淳, 익순翼淳, 태순泰淳)들이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 들어와 살았다.
- 상돈이 어린 시절을 보낸 여우목 교우촌에 조성된 여우목성지.
박해를 피해 여우목으로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검고 푸른 눈썹’이라는 뜻의 대미산(黛眉山)이었으나 퇴계 선생이 대미산(大美山)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문경새재로 향하던 길목이었는데 그 모양이 여우 목덜미와 비슷해서 또는 여우가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해 여우목이라 전해진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에 있는 여우목은 천주교 성지로 옛 교우촌이다.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충청도 홍주 출신인 이윤일 요한의 가족과 경상도 초대 신자인 서광수의 후손 치보가 이곳으로 피난 오면서부터 교우촌이 됐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윤일과 그 가족, 신자 3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1867년 1월 21일에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되었다. 다른 지역으로 피난 가 있던 서치보의 아들 인순과 익순도 병인박해 때 잡혀 순교하였다. 성지 안에 서치보와 그의 아들 서인순의 묘가 있다.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물이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할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47장의 말씀처럼 대미산 자락에서 솟아난 믿음의 옹달샘 하나가 흐르고 흘러 훗날 큰 강물을 이루게 된다. 박해를 피해 도망친 신자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햇빛이 들지 않는 산기슭에 거적을 쳐 추위를 피하고 산짐승을 막았다. 그리고 칡뿌리를 캐 먹고 산의 열매로 굶주림을 달랬다. 하지만 병에 걸렸을 때가 문제였다. 몇몇 교우촌의 회장들이 의료 활동을 한 기록에서 당시의 열악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의지하며 교우촌을 유지해 갔다. 특히 교우촌의 회장들은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 중심이 되어주었다. 이를 본 프랑스 선교사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마치 내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하다.”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사랑을 직접 실천했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부모 잃은 어린이를 힘써 돌보았고, 죽을 위험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대세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원했다. 더불어 교우촌 신자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했다. 신자들이 사는 신앙 공동체 안에는 양반이나 천민의 구별이 없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이 동등했으며 남편과 아내가 상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다. 이는 당시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상돈은 1850년 10월 17일(음) 부친 서철순(徐哲淳)과 모친 김 아가타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른들은 성경 속에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성경에 바탕을 두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선조들은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순교할 수 있었다. 후손들이 순교자의 신앙을 이어 내려온 것도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 전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 한티에는 상돈의 두 숙부를 비롯해 40여 명이 성사를 받고 모여 사는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 사진은 십자가의 길 9처 전경으로 병인박해를 전후해 순교한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는 한티성지. 한티성지 제공
산중생활 예수님을 벗 삼아
서상돈은 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이을 수 없도록 가난했지만 그곳에는 사랑과 기쁨이 있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움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움막들만큼이나 많은 설움과 신념이 얽혀 있다. 고향을 떠난 설움과 신앙에 대한 신념. 나라의 길과 신앙의 길이 달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틀린 것은 없었고 다만 다를 뿐이었음에도 다름은 박해를 낳았다. 관아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생활에서 어린 소년은 친구를 만들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산뿐이었고 친구라고는 오직 동생 상정과 예수님뿐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께 말하고 예수님의 답변을 듣는 것이 체질화되었다.
“예수님. 어디 계세요?” “나는 네 곁에 항상 있단다. 네가 힘이 들고 외로울 때는 내가 널 업어주마.”
예수님은 외로운 소년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 한티성지에 있는 서상돈의 막냇삼촌 서태순의 묘.
한티에서 온 숙부들
고조 서광수의 제삿날이면 한티에서 두 숙부가 와 가난한 집은 잔칫날이었다. 어머니는 숙부들에게 숙모들의 안부부터 묻곤 했다. “기도 생활 잘하고 있지요?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서방님이 잘 도와주시지요?” “형수님, 한 가지씩 차례대로 물으세요. 숨넘어가겠어요.”
집안이 북적거렸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사가 끝나면 동네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었다. 달빛 아래 음식을 갖고 걷는 길을 그가 얼마나 사랑했던가! 가슴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옥토끼가 산다는 그곳에 조상님들과 예수님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출 것 같았다.
다음날 두 숙부는 한티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숙모들 가져다주라며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한 타래버선도 두 켤레나 선물했다. 새로 태어난 막냇삼촌네 아기 마리아에게 줄 선물이었다. 상돈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한티는 어떤 곳일까?
한티 마을은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한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신나무골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한티 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을 형성했다.
1862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당시 순교자로는 배정모(손아)의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 외 배도령, 서익순과 서태순, 조가를로 등이 있으며, 병인박해를 전후해 순교한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2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3) 억척 꼬마 심부름꾼 서철순은 1859년 처가가 있는 대구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이사했다. 정착한 곳은 대구성 남문 밖 뽕나무골 부근이었다. 남문 밖 앞밖거리(현재 계산동)라는 상설시장을 끼고 있으며 5일마다 성시되는 큰 장(현재 동산동 일대) 입구로 각처의 상인 출입이 빈번한 장소였다. 앞밖거리는 동네 사람 대부분이 봇짐장수 등짐장수를 해서 먹고 사는 동네였다.
서상돈은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뼈가 굵었다. 그는 쫄래쫄래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장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면서 자랐다.
고난을 딛고 점포 심부름꾼으로
상돈에게 첫 번째 불행이 찾아들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형제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1859년 서상돈은 그의 나이 9세 때 소년가장이 된 것이다.
대구는 조선 후기 이래 낙동강을 배경으로 경상도 내륙 지방의 상업 중심지 성격이 강했다. 이런 배경에서 대 상인층의 형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부잣집의 빨래며 찬모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손등은 거북이처럼 굳었고 싯누런 쇠못이 박혀 있었다.
여자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상돈은 언제까지나 어머니께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어서 돈을 벌어 고생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다. 상돈은 불과 13세에 외할아버지 김후상의 도움으로 한 가게에 취직했다. 일이 다 결정된 후
상돈은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어머니. 이제부터는 제가 돈을 벌어 올 테니 어머니는 그저 편하게 사세요.”
“상돈아. 아직은 에미가 일 할 수 있느니라.”
“아니어요. 이미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취직한 걸요.”
“취직? 네가?”
“네. 어떤 점포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어요.”
어머니는 상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실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년은 앞밖거리의 한 점포에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 그는 성실하고 진실한 심부름꾼이었다. 점포 주인들은 상돈을 “억척 꼬마 심부름꾼”이라 부르며 대견해 했다.
주인은 무척이나 그를 신뢰했으나 그곳에서 잔뼈가 굵은 최동철은 늘 그를 시기했다. 사사건건 상돈을 눈엣가시처럼 미워하던 최동철은 기회를 보아 상돈을 모함했다.
“일전에 수금한 돈을 슬쩍 빼돌리는 것 같아 요.” “동생에게 과자를 사주는 것을 보았어요.”
처음에 주인은 최동철의 거짓말에 반신반의했으나 모함이 계속되자 상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늘 보세요. 그놈은 틀림없이 수금을 떼먹고 도망갈 거예요”
끝내 상돈의 정직함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는 마음 깊이 상처를 입었다. 세상이 무서웠으나 어머니는 최동철을 용서하라고 그에게 일렀다.
“네게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너의 스승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느냐?”
그는 이때부터 행상을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남의 심부름만을 해주면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해도 그에게는 밑천이 없었다. 하지만 상돈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밑천이 없는 그는 동생 상정을 대신 가게에 맡겼다.
“상정아. 형아 믿지? 형아가 후딱 이것들 팔고 우리 상정이 데리러 올게.”
“알았어. 형. 걱정하지 마.”
점포 주인들은 억척 심부름꾼이던 서상돈에게 기꺼이 물건을 내주었다. 그는 동생 상정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물건을 팔았다. 그렇게 해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장사할 밑천도 벌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도 보부상으로서 클 기회가 왔다. 1868년경 그의 나이 18세쯤이었다. 이는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의 지원,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후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취급 품목은 소금·건어물·일용잡화 등으로 아직은 재래시장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봇짐장수와 등짐장수
조선 시대 상인이라 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보부상을 빼놓을 수 없다. 보부상은 장돌뱅이, 장도림, 장꾼, 항아장수, 봇짐장수, 등짐장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바빴다. 직업의 특성상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병들거나 죽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때문에 이들은 일찍부터 임방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힘을 합쳤고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의 상단을 형성했다. 이제는 버려진 말처럼 된 ‘동무’라는 말도 원래는 보부상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보상은 정교하고 비교적 값이 비싼 잡화 등속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혹은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시장 혹은 농촌 가옥 마루에 보자기를 끌러놓고 판매하였으므로 일명 ‘봇짐장수’라고도 하였다. 이에 비해 부상은 주로 조잡한 일용품을 취급하였는데, 재래의 농업 생산을 주로 하는 사회에서의 유치한 가내수공업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녔으므로 속칭 ‘등짐장수’라고 불렀다.
질을 걷네 질을 걷네/ 등금장사가 질을 걷네/ 날이 났네 날이 났네 등금등금 날이 났네/ 밭을 매네 밭을 매네/처녀 다섯이 밭을 매네/ 날난신을 다지나 팔아/ 처녀 다섯을 사가지고/ 삼으리라 삼으리라
예수님이 앞장서고 상돈이 뒤따르니
위 노래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서 밭을 맬 때 부르는 노동요의 일부다. 1994년 창원군에서 발행한 「창원군지」 1669~1670쪽에 실려 있는데, 최재남이 1994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에서 박경님(여, 85)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혜상공국서」에 의하면 세상 안에 지극히 미천하고 누추하여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자가 보부상이다. 오죽하면 밭매는 사람이 종놈으로 삼겠다고 할까. 보부상이 되는 사람들은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자들이다. 보부상이 되는 계층은 먼저 농민 중 생활고로 토지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상돈이 등짐장사를 하면서 걸었던 그 길들. 그 길 어디에나 예수님이 앞서 걸으셨다.
봉놋방에서 눈을 뜨면 서상돈은 가장 먼저 어머니를 생각했다. 새벽이면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 모습은 그의 뇌리에 각인되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상돈은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이면 항상 성경을 읽으셨다. 상돈은 어머니가 어디쯤을 읽는지 잘 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상돈은 어렴풋이 어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를 새 소리와 함께 들으며 뒤척거렸다. 곧 뒤이어 어머니가 그들 형제를 잠에서 깨우신다. 아침기도 시간이었다. 상정은 투덜거리면서도 부엌으로 나가 “엇! 추워! 엇! 추워!” 하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기도하기 위해 앉곤 했다.
아버지는 벌써 큰 집에 가서 할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신다.
상돈은 온 가족이 둘러앉는 아침의 이 기도 시간을 사랑했다. 매일 아침의 기도 시간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기도를 마치고 나면 가슴이 무언가로 충만해지곤 했다. 예수님이 그의 길을 인도해주시리라는 것, 그 믿음은 평생 그를 지켜준 힘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26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4) 낙동강의 소금장수 - 거상이 된 서상돈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낙동강의 개포나루터. 경북 고령군 개진면에 있으며, 개경포라고도 부른다. 고령군 제공
푸른 강이 서상돈 앞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배는 커다란 짐승처럼 강한 숨을 내뿜으며 파도를 넘어 굼실굼실 앞으로 나아갔다. 서상돈은 갑판에 서서 그 푸른 강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왔는가?
그가 걸은 그 무수한 길들.
길, 길.
그 길 어느 곳에나 큰아버지와 두 숙부가 존재했다.
그리고 앞에서 항상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셨다. 예수님이 계셨기에 그는 어떠한 슬픔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오랜 기도.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주십시오”(1역대 4,10).
어머니의 기도는 그의 영혼에 등불이었다. 그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신앙의 체험이 결실을 이루는 순간이 왔다. 하느님께서 어머니의 그 오랜 기도에 응답했다. 상돈에게 언젠가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리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랜 믿음이었다.
서상돈이 28세 되던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부산항이 열리고 일본에서 담배ㆍ손거울ㆍ성냥 등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산항 개항으로 당시 부산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고령에 모여 낙동강을 타고 내륙으로 갔다.
낙동강 뱃길 따라
낙동강은 영남 지방의 내륙 수로 교통의 동맥이었다. 낙동강은 「동국여지승람」에 낙수(洛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되어 있다. 영남 지방의 거의 전역을 휘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 년간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영남인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 왔다. 강기슭에 발달한 하단ㆍ구포ㆍ삼랑진ㆍ수산ㆍ남지ㆍ율지ㆍ현풍ㆍ왜관ㆍ낙동ㆍ풍산ㆍ안동 등지는 과거의 나루터 마을이거나 선착장들이다.
서상돈은 낙동강 배편을 이용해 쌀ㆍ소금ㆍ창호지ㆍ기름 등을 장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 거상(巨商)이던 김종학은 장사 수완이 있고 성실한 서상돈을 눈여겨보았다. 1880년 30세에 서상돈은 김종학의 눈에 들어 수안 김씨와 혼인도 하였고 이후 병옥(丙玉), 병조(丙朝), 병주(丙柱), 병민(丙敏) 등 네 자녀를 두게 되었다. 서상돈은 근면과 성실을 밑천 삼아 사업을 점차 확장하여 나갔다. 활동 영역도 점점 넓어져 낙동강을 무대로 부산에서 안동까지 무려 800리 뱃길을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다.
어염미두 무역으로 거상 반열에 오르니
대구는 조선 후기 이래 경상도 내륙 지방의 상업 중심지이다. 경북에서 생산되는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 면화ㆍ대마 등의 의류, 인삼ㆍ지황 등의 약재류, 감ㆍ밤 등의 과실류, 연초 등의 상품작물들의 집산지라 할 수 있다. 상업적 농업의 발전은 낙동강을 통한 무역을 기반으로 이뤄졌고,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대구는 경상감영이 설치된 곳이라 행정 중심지의 기능이 상업 발전을 더욱 진흥시켰다.
낙동강 800리 뱃길이 그의 상권이었다. 서상돈은 낙동강의 배편을 이용해 장사 무대를 점점 확장해 나갔다. 취급품과 물량도 쌀ㆍ소금ㆍ베ㆍ기름ㆍ창호지ㆍ건어물·성냥 등으로 많이 늘어났다. 원격 무역은 엄청난 이익 확대로 이어졌다. 특히, 온갖 종이와 포목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품목으로 여겨졌고, 쌀과 소금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무역 형태인 어염미두(魚鹽米豆) 무역이었다. 서상돈은 부산 쪽의 물고기와 소금을 배로 싣고 와 내륙의 쌀과 콩을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을 통해 많은 자산을 불렸고 부호 반열에 올랐다. 1885년 36세에 서상돈은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인으로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령 개포(開浦)는 사실상 서상돈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개포나루는 인근 다산의 사문진과 함께 낙동강 물류에 큰 획을 그은 곳이다. 개경포 주변에 객주만도 30여 개에 달해 장구 소리와 노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장한 서상돈은 기생을 절대 가까이하지 않았다. 기생도 그의 관점에서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대부호들이 소실을 대여섯씩 두는 것이 흉이 아닌 당시의 전통 사회에서 서상돈은 유별난 존재였다. 오죽하면 그의 부인은 며느리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서씨 가문 남자들은 절대 여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도적 떼들은 개경포를 최고의 사냥터로 지목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도적들도 서상돈의 배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이미 서상돈의 명망은 주변에 널리 알려졌었다.
역병 공포에 떠는 민중들
부산항 개항으로 신식 문물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1821년(순조 21년) 정체불명의 역병이 조선을 습격했다. 평안도에서 처음으로 콜레라가 발생했는데 마땅한 명칭이 없어 괴질(怪疾)이라 불렀다. 이 역병은 “살아서 앓지 않으면 죽어 무덤 속에서라도 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병인 콜레라였다. 질병사가들은 이 콜레라의 공포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질병으로 페스트를 꼽는다. 한 고을 전체가 가족을 잃었던 그 고통의 깊이는 우리의 상상 이상일 터다. 오죽했으면 괴질이라는 말 대신에 ‘호역(虎疫)’이라는 용어를 썼을까. ‘호환(虎患)’과 비슷한 호역은 ‘호랑이한테 찢어발겨 죽게 될’ 정도의 고통이 수반되는 질병이었다.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해 온몸이 비틀어지고, 설사가 끊이지 않는 이 병에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옛 조선 사람들은 괴질을 하늘이 노해 인간에게 벌을 내린 것으로 여겼다. 임금은 괴질을 천견(天譴) 즉 하늘의 꾸짖음으로 보고, 하늘을 달래기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죄수를 풀어줬으며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또 민간에서는 귀신이 무서워한다는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가 하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영력이 있다는 복숭아 가지를 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역병을 쫓는 여제(勵祭)가 열리고 왕이 직접 제문을 짓기도 했다.
먹는 것이 부실하고 식수가 좋지 않은 민중들에게 전염병은 하늘이 내린 재앙이었다. 보릿고개에 호열자라도 돌면 수십 명씩 죽어 나갈 때도 있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 신호가 오게 되면 누구나 호열자가 아닌가 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뜬소문에도 불구하고 역질이 돌 때마다 감초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소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쌀밥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거부
낙동강 소금장수는 단단히 한 몫을 보게 되었다. 서상돈의 재산이 눈덩이처럼 쌓인 것은 물론이다. 지금 서상돈은 낙동강의 푸르른 물살을 보면서 그 강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삼키고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대구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대 실업가가 되어 있다. 40대에 서상돈은 대구 상권의 중심인물로, 거느리는 보부상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이에 서상돈은 안동·군위 김천ㆍ칠곡ㆍ달성 등지에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밥상에 하얀 쌀밥이 오른 것을 보면 눈시울을 붉혔다. 저 16세 때의 처절한 기억. 서상돈의 삶에서 그때의 기억은 자꾸만 재생된다. 소죽을 퍼먹던 큰아버지, 피고름이 엉긴 멍석을 뜯어먹던 큰아버지. 그는 살아있는 한, 아니 죽어서라도 절대 쌀밥을 먹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와 두 숙부는 그의 피 속에 늘 들어 있었다. 큰아버지가 여우목에서 어린 그를 무동 태우며 들려주던 시편의 한 구절은 그의 영혼에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답니다. 당신의 규정으로 제가 현명하게 되어 거짓된 모든 길을 제가 미워합니다(시편 119). [평화신문, 2015년 8월 2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5) 하느님께로 향하는 징검다리 - 신나무골성지 사제관 전경.
초기 조선 교회는 편지를 쓸 사람도, 더구나 북경의 주교와 만나기 위한 여행 비용도 마련하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신자들은 애절한 기도를 통해 이 일을 감행, 두 통의 편지가 중국 주교와 로마 교황청에 전달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성경의 부재(박해로 성경 압수, 훼손 및 분실). 2) 성전의 부재(성직자 부재로 교회 가르침 공백 지속). 3) 성사 생활 부재(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그리고 기타 성사 생활의 불가로 영적 성장이 멈춘 상태 고백). 4)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성직자 파견을 간곡히 요청합니다.
긴 박해의 터널을 지나
선교사들은 편지 2통을 포르투갈 언어로 번역하여 모두 로마로 보냈다. 교황은 편지를 받고 너무나 기뻐하며 선교사 파견을 서두르고 조선 교회를 중국 교회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렇게 해서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를 맡겼다. 그 당시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사 파견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한국에 선교사 파견을 결정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4대 박해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겨우 여명(黎明)이 보이기 시작한다. 1886년 한불조약에 이어 1899년 교민조약 그리고 1904년 선교조약을 통해 교회에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
1831년 조선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샤스탕 신부 순교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후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지고 나서는 다시 다블뤼 신부가 신나무골 지역을 맡았다.
- 신나무골성지 사제관 내부.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 충청ㆍ경기 지방에서 박해를 피해 내려온 교우들이 산중에 삶의 터전을 일구면서 생겨난 교우촌이다. 그러던 중 대규모 박해가 일어났다. 바로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대원군에 의해 자행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병인박해다.
잔인했던 신유박해(1801년)는 막을 내렸으나 천주교를 나라의 원수로 규정함으로써 복음 전파는 커다란 장애물을 만났다. 무엇보다 먼저 신유박해로 조선의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유 파치피코 신부가 1834년 입국할 때까지 한국 교회는 목자 없는 교회의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지도층 신자들이 거의 순교하거나 유배되었고 교회 서적들도 대부분 압수됨에 따라 한국교회는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어 계속 복음을 전했다. 또한 순교자들의 용기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신앙의 불모지였던 전라도 남부와 남쪽의 도서 지방, 그리고 경상도를 벗어나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 등 궁벽한 구석까지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대목구장 장 마리 귀스타브 블랑(백규삼) 주교가 대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 본당 주임으로 프랑스의 아킬레 바오로 로베르(김보록) 신부를 임명했다. 1882년 경상도 지역 전담 신부로 임명받은 김보록 신부는 먼저 대구 시내로 진출하려 했으나 당시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과 신자들에 대한 위협 때문에 경상도 신나무골 교우촌에 거처를 마련한다.
김보록 신부는 당시 블랑 주교에게 보낸 사목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경상도 신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순회)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고는 다시 떠나가기 때문에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또 ‘1886년 4월에는 마침내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두었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에 쓴 사제관이 바로 신나무골 성지의 사제관이다.
서상돈과 김보록 신부의 만남
1885년 서상돈의 나이 35세에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의 교우촌으로 옮겨 오면서 서태순의 딸인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함께 교회 일을 하기 시작했다.
- 김보록 신부 흉상.
우리 삶에서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만남을 내 인생 공부의 총량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상돈에게 김보록 신부와의 만남은 또 하나의 기적이고 신비이다. 서상돈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김보록 신부는 그를 구원해주었다. 김보록 신부는 하느님이 보내 준 수많은 그의 조력자 중 한사람이었다.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로 옮겨 3년간 은신하여 전교하였다.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다가 5년 뒤 대구시로 거처를 옮겼다.
연화리에 있어 연화서당이라 불리기도 하는 신나무골 학당은 1920년 신동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던 배움과 복음전파의 전당이었다. 큰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김보록 신부가 1883년 설립했다. 1855년에 충북 제천에 세워진 배론 신학교를 제외한다면,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교육 기관이었다.
이후 김보록 신부의 거처가 주민에게 알려졌고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갖고 구경을 왔다.
“눈이 파래.” “저 머리 좀 봐. 사람이 아니야.” “야손가 뭔가 하는 사람의 살을 매일 먹는대.” “피도 매일 마신다네.”
그들 가운데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불량배들이 신부의 거처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했다.
“양놈. 죽여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야소가 무슨 귀신이냐?” “확 불을 싸질러 버려야 정신을 차리겠냐?” “불 지르자!” “내쫓아!”
아전과 포졸, 군중은 돌을 던지고 구타하는 등 이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김보록 신부는 판관과 감사를 찾아가 건의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일행을 대구 밖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김보록 신부는 대구의 아전 2명이 신자들을 투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 중 허 골룸바라는 여성 신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투옥돼 옥살이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김보록 신부는 즉시 서울과 프랑스에 알려 이들을 석방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허 콜롬바(골룸바) 투옥 사건’이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김보록 신부는 조선교구장 뮈텔에게 사건의 전말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받은 뮈텔 주교는 프랑스 공사 플랑시를 통해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대구 감사의 파면과 보상 등 6개 항을 요구했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감사 파면 외 5개 항에 대한 요구를 수락하고 프랑스 공사에 공식 사과문을 보냈다. 협상이 타결되자 대구로 거처를 옮긴 김보록 신부는 이후 30년 동안 대구 지방의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서상돈은 김보록 신부를 통해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김보록 신부는 조선에 대한 사랑이 유별하여 바쁜 사목 중에도 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이들에게 배움을 길을 열어 놓았다. 1899년을 전후하여 대구읍내 새방골·대어빌·영천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서상돈은 정규옥(鄭圭鈺) 등 교회 내 신자들과 재정 지원 및 학교 운영을 도왔다. 계산동본당 부속인 한문서당 해성재(海星齋)도 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날로 발전을 거듭하던 해성재는 1908년 4월 1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로 탈바꿈했다. 이 학교는 2년 뒤 부속으로 야간부인 성립여학교를 설치하는 등 여성 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서상돈은 또한 1905년 달서여학교 설립에 이일우(李一雨) 등과 함께 적극 관여하였다. 달서여학교는 1909년 학부대신(대한제국 때에 학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 관청)으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합리적인 가정생활을 위한 부인 야학회를 운영하는 등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여학교로 발전을 거듭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9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6) 서 시찰네 논 부치러 왔습니다 -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51에 있는 서상돈 고택 전경. 복음을 몸으로 실천한 그의 집에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제도적 변화는 갑오개혁이라 할 수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조선은 밖으로는 청일 양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침투로 말미암아 자주독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일본은 내란 발생을 예방하기 위한 구실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부르는 내정 개혁을 추진했다.
갑오개혁으로 세제도 공물제(貢物制)에서 금납제(金納制)로 개혁됐다. 원래 조세 징수는 담당 지방관이 했으나 화폐 유통 및 순환의 문제점 그리고 국고 체계의 미비로 조세 수입이 지금처럼 바로 국고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외획’(外劃)이었다. 외획이란 국고의 채권자, 경비 지출이 필요한 지방 관청, 국고에 선납한 상인 등에게 지방 각 군의 조세를 국고에 수납하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지출하는 재정 운영 방식을 말한다.
시찰관이 된 상돈, 어머니 앞에 무릎 꿇다
지방관을 규찰하기 위해 내부 산하에 소속한 관직으로 시찰관 제도가 생겼다. 시찰관은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서로 하려고 줄을 대기도 했다. 때문에 명망 있는 민간 대지주를 지방 관찰사가 추천했다. 당시 경상관찰사 조병호(趙秉鎬)는 이 중책을 서상돈이 맡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하지만 서상돈은 덕이 없다는 이유로 극구 사양했다.
“소인은 지극히 미천한 자입니다. 그런 중임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서상돈은 진심으로 사양했으나 조병호는 진심으로 권했다.
“내 그대의 명망을 익히 들었소이다. 사양 말고 맡으시지요.”
조병호는 무엇보다 서상돈의 인품을 알아보았다. 절대 그는 돈에 연연하거나 거짓 술수를 쓸 사람이 아니었다. 조병호의 거듭된 설득으로 마침내 서상돈은 시찰관이라는 민간 최고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그는 1894년 45세부터 약 10년간 탁지부 시찰관에 임명되어 경상도 세정을 총괄했다.
서상돈은 그 날 집에 돌아와 어머니 앞에 부복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서상돈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머니도 눈시울을 적셨다.
“모든 것이 좋으신 주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은총이니라.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더욱 겸손하거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거라.”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 방을 나온 서상돈은 부인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마치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여보! 부인!”
서상돈의 가슴에 어린 시절 그 끔찍했던 가난이 떠올랐다.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던 선대로부터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피해 다니며 겪었던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 그리고 병인박해 때의 큰아버지와 두 숙부의 순교.
서상돈은 하느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소명이 있었다. 그는 사람은 믿음 만으로가 아니라 실천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 서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51에 있는 서상돈 고택 내부.
과거를 용서하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다
1891년 41세에 서상돈은 새집을 건축하고 한 해 3만 석을 수확하는 대구 제일의 갑부가 되었다. 집을 지을 때 서상돈은 사랑채에 큰 방을 더 들였다. 그의 집에는 그와 안면도 없는 식객들이 늘 상주했다. 그의 집은 드나드는 많은 식객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는 안식처로 제공됐다. 당대 3만 석 지기의 영남(嶺南) 갑부 서상돈. 그는 그러나 토호로서의 명망보다는 달리 숭앙된 인물이었다.
어느 날 행색이 몹시도 남루한 자가 찾아와 서상돈을 꼭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그를 만난 서상돈은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그는 어린 날 상돈을 몹시도 괴롭히고 모함했던 최동철이었기 때문이다.
“서 시찰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서상돈의 머리에는 그로 인해 겪었던 온갖 고 초가 떠올랐다. 그때 상돈은 어린 나이였고 너무도 가난했고 아무 힘도 없었다. 너무도 착하기만 한 그를 형뻘의 최동철은 얼마나 많은 모함과 시기로 괴롭혔던가?
그의 남루한 행색을 보니 별로 좋은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서상돈은 “네 형제가 7번씩 70번을 잘못해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서상돈은 최동철을 후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두둑하게 돈 보따리까지 주머니에 찔러주었음은 물론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890년대 어느 날 서상돈의 집에 곽모가 찾아왔다. 그는 장사 밑천으로 빌린 1000냥을 갚을 길 없어 죽음 직전에 대구의 서상돈을 찾아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염치를 무릅쓰고 왔다고 했다.
곽모는 서상돈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 돈만 융통해 주면 어떻게 해서든 장사로 재기하겠습니다.”
서상돈은 장사할 밑천이 없어 동생 상정을 맡기고 물건을 받아 와 장사를 하러 다니던 때를 생각했다. 그는 곽모의 눈빛을 유심히 보았다. 맑고 선량한 눈빛이었다. 결코 두 마음을 쓸 위인은 아니었다.
서상돈은 그에게 선뜻 1000냥을 내주었다.
“열심히 일해 빚도 갚고 잘 사시오.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는 거외다.”
곽모가 눈물을 훔쳐내며 방안을 나갔다. 서상돈은 하인을 시켜 곽모가 대문을 나서기 전 그를 다시 불렀다.
서상돈은 금고에서 다시 천 냥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곽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감님!”
“그 돈 1000냥으로 이미 진 빚을 갚고 나면 내 돈 1000냥 때문에 마음이 쓰일 것이 아니오? 내 다시 1000냥을 줄 터이니 이 돈으로 내게 진 빚을 갚으시오!”
그 소문은 대구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를 사람들은 “대구 호랑이”라고 불렀다.
소문을 듣고 돈이 급한 어떤 사람이 서상돈을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며 보증으로 귀한 광석이라며 돌을 내어 놓았다.
“이 돌 속에는 귀한 보석이 들어 있으나 제가 아직 힘이 없어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을 맡길 테니 돈을 빌려주십시오.”
서상돈은 기꺼이 그에게 돈을 내주었다. 시일이 흘러 그 사람은 빌려 간 돈을 가지고 찾아왔다. 서상돈은 그가 보증으로 맡긴 돌을 꺼내놓았다. 그제야 그 사람은 실토했다.
“그 돌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네.”
그는 엎드려 통곡했다. 서상돈은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었다.
1903년 12월 28일 경부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대구성 북문 밖에 1000여 명의 일본인 기술자 인부가 몰려들었다. 야끼 마쓰다로라는 일본인이 서상돈을 찾아와 제안했다.
“지금 일본에는 새로운 재배법을 도입한 고등소채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대구에서도 고등소채 재배를 한다면 크게 인기를 끌 것 같습니다.”
서상돈은 토마토ㆍ오이ㆍ양배추ㆍ일본 무 등 새로운 소채가 조선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1만 원을 야끼 마쓰다로에게 지원하고 남산동 주교당 일대 땅을 재배지로 비워줬다. 대구 최초의 부식원(富植園)이라는 신식 농장이 생겨난 것이다.
또 이종국이라는 청년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잠업 기술을 국민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큰돈을 쾌척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자리 창출이다. 서상돈은 경대(慶大) 사대부중 부근 600여 평의 부지에 초가잠실 5동을 짓고 주변에 뽕나무를 심어 대구 최초의 대구 잠업 전습소를 개설했다.
봄과 가을에는 창고 문을 열어 배고픈 이들에게 곡식 수백 석을 나눠 주는 등 구휼사업에 힘썼다. 마침내 “성전의 물이 흘러넘쳐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라는 에제키엘서 47장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난한 소작인들이 천주교 교리를 받기 위해 와서 한다는 대답이 걸작이었다.
“서 시찰네 논 부치러 왔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16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7) 하느님의 집은 하느님이 지으십니다 서상돈은 다른 시찰관과는 달리 세금을 대납하고 세금 징수 후 남은 수만금의 이익금도 모두 나라에 바쳤다.
“결전(結錢)은 나라만이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라에서 손이 모자라 시찰관에게 맡기고 이익금을 시찰관에게 넘긴다고 했으나 그 이익금은 나라의 돈이다. 근자 나라 재정이 곤핍하다는데 어찌 나랏일을 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겠느냐?”
부정부패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아전들은 서상돈으로 인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없었다. 자연히 아전들에게 서상돈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아전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열악해 조선 초기에는 그나마 수조지(收租地)로 호장 이하의 향리에게 인리위전(人吏位田)이라 하여 5결(結)의 토지를 지급했으나 세종 때 혁파되고 아예 녹봉 자체가 없었다. 결국 아전들은 전세ㆍ공물ㆍ병역ㆍ소송 등 직무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착취의 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관아의 비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걷은 창고의 곡식과 문서를 다르게 작성하거나 혹은 봄의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양곡을 나누어주지 않고 나누어준 것처럼 허위 문서를 만들고 남은 곡식을 사또와 결탁한 토호가 수레로 빼돌려 경강상인에게 팔고 이익의 절반씩 착복했다. 이러한 부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전이 중간에 끼어야 한다.
가장 큰 비리는 방납인이었다. 각 지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왕실에 특산물을 진상하는데 관아에서는 매년 그 지방의 특산물을 진상한다. 이를 산지에서 구입해 바치는 사람이 방납인인데 이들은 항용 시가(市價)보다 비싼 값을 관아로부터 받아냈다. 가장 높이 시세를 부를 때는 인삼 한 근 값으로 면포 16필, 표범 가죽 한 장 값으로 무명 70필, 호피 깔개 한 장 값으로 무명 200필, 송이버섯 세 사발 값으로 무명 40필, 은행 한 말 값으로 쌀 80말이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매겼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익의 절반을 사또에게 바쳤기 때문에 방납인의 비리는 항상 묵인되어 왔다. 오죽하면 정약용은 ‘용산 마을 아전’이라는 시까지 지었겠는가. 그중 일부를 옮겨본다.
아전들 용산 마을 들이쳐 소 끌어내 관가로 넘기누나. 소 몰고 멀리멀리 사라지는걸 집집이 문밖에 서서 멍하니 바라만 보네. 사또님 노여움 풀어 드리기 급급한데 백성의 아픔이야 누가 아랑곳하랴.
관아에서 파직된 아전들이 서 시찰을 모함하는 투서를 올렸다. 그때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김보록 신부는 이러한 고발과 투서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등 서상돈을 옹호했다.
“만약 서상돈이 진실되지 않다면 조선 사람 전체가 다 진실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양인 신부는 언제나 서상돈을 믿었고, 그의 호소는 절실함을 지니고 있었다. 서상돈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구의 수많은 걸인이 상여 행렬을 따라가며 통곡을 했다.
- 1905년 성당 증축 전 계산성당(맨위쪽)과 1910년 경 찍은 증축 후의 계산성당(위쪽). 두 사진 속 성전 종탑 부분의 높이가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사진출처=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누리집
어렵사리 봉헌한 성전이 잿더미로
수많은 적이 다윗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다윗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다 물리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마음 놓고 살게 되었다. 향백나무 궁을 짓고 다윗은 하루하루를 편하게 지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각한다.
“하느님은 아직 천막 속에 계시는구나. 하느님의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
다윗이 하느님을 모실 성전을 지으려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하느님은 왕궁 건축을 비롯해 이제껏 다윗이 이룬 업적 모두가 당신께서 하신 일임을 일깨우신다. 하느님의 집은 인간의 힘이나 재물이 아닌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며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을 지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주신다.
하느님의 약속은 복음에서 실현됐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고 알리자 놀란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한다.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지어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다는 말씀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과정이다.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엄청난 사건이 우주적 변모나 정치 사회적 대변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한 시골 처녀의 순박한 받아들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서상돈은 마침내 하느님의 집을 지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신부님. 성당을 지읍시다.”
“아우구스티노,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우리 힘을 모아봅시다.”
한국 이름을 김보록이라 한 이 벽안의 신부는 세 분 순교 선조를 둔 서상돈을 지극히 사랑했다. 1891년 새방골에서 읍내로 들어온 김보록 신부는 현재의 계산동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했다.
계산동에 정착한 김보록 신부는 3년 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식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신부 사랑채와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 건물 등을 건축했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성당은 순수한 한식으로 동양 건축이었다. 1899년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성모성당이라 하였다.
그러나 십자형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에 원인 모를 불에 모두 타버렸다. 그때의 화재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한 김보록 신부의 서한 중 일부를 옮겨본다.
“한국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트르담의 루르드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화하였다. … 그래서 나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엔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그라 들었다.”
시련을 은총으로 받아들여
성당이 전소했지만 김보록 신부만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 신부는 화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난 1900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신앙 공동체 속에서 성장하고 또 성경을 읽은 서상돈에게 삶의 고빗사위마다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예수님을 대신해 신ㆍ구약 저자들이 기록한 말씀이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삶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성전 건축은 삶이 어렵고 힘겨운 신자들에게 구원의 우물가나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성체조배라도 마음 놓고 할 공간이 필요했다. 빛이신 주님 품에 안겨 따스한 온기와 밝은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성당 건축이 시급했다. 그것은 또한 서상돈에게는 순교한 세 분께 한 약속이기도 했다.
서상돈은 정규옥, 김종학 등 신자들과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2개의 종탑을 가진 고딕식 벽돌 성당인 새 성전을 건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계산성당은 1902년 11월 완공된 후 1911년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했고,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100년을 훌쩍 넘긴 성당이다.
서상돈은 9000냥을 헌금하여 1906년 12월 8일 성전 건축으로 진 모든 빚을 청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두 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23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8) 국채보상운동 청일전쟁 이후 일제는 청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한국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제는 한반도를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이란 이름으로 침략을 시도했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했다. 일제에 대항하는 교회의 침략 반대 운동은 이 기도회를 계기로 촉진되었다. 조국의 주권 수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시 한국 천주교회 신자의 일반적 정서였다.
독립신문은 이미 1897년 7월 31일자 사설에서 당시 조선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관련, “지금 조선은 생사가 촌각에 달려 있는 매우 위태한 병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아들과 딸들과 친구들이 병시중 들 생각은 않고 남의 일 보듯이 보고만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부모보다 더 중한 나라가 병이 든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질타했다.
서상돈 또한 울분을 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했다. 만민공동회란 독립협회가 주관한 자주독립 수호를 위한 민중대회 혹은 민중운동이라 할 수 있다. 서상돈은 재무부 과장·부장을 맡아 빼앗긴 이권을 되찾고 민권 보호를 위해 맹렬하게 투쟁에 앞장섰다.
일제 경제 침략의 시작
일제의 야욕은 갈수록 노골화됐다. 대한제국을 빚으로 옭아매 경제권을 빼앗는다는 철저한 계산 아래 대한제국 정부가 원치는 않는 빚을 억지로 쓰게 했다. 일제의 한국 침략 정책으로 1907년도 예산 1370만 환 가운데 1300만 환(원금 1150만 환, 이자 150만 환)이 일본의 차관으로 채워졌고 일본은 1할의 고금리 이자를 갚게 했다. 빈약한 국고로는 도저히 이 거액의 국채를 상환할 수 없다는 게 당시의 국론이었다. 보다 못해 민간 차원에서 “나랏빚을 갚아 주권을 사수하고 민족경제를 이어나 가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제가 1905년에 시작해 1909년에 끝낸 ‘화폐정리사업’은 백동화 등 조선 화폐를 없애고 일본 화폐만 쓰게 함으로써 조선의 화폐 금융 체계를 일본 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켰다. 많은 조선인이 재산을 잃었고 그만큼의 재산이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한국 상인 중 재산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적 토양은 을사늑약 이후 크게 일기 시작한 애국 계몽사상이었다. 사회의 여론과 민중의 심리를 대변하여 제일 처음 대구 지방의 애국지사들이 나섰다. 대구에도 자강(自强) 사상이 보급되어 있었는데 1906년 1월에 대구광문회가 조직되었다.
대구에 내려온 서상돈은 1906년 1월 김광제와 함께 대구 ‘광문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김광제는 사장, 서상돈은 부사장에 취임해 외국의 신학문을 도입하고 실학자들의 저술을 번역 편찬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양시키는 사업을 했다. 나아가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서상돈은 김광제와 더불어 1906년 3월 남문 밖의 관덕당을 보수하고 사범학교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김광제와 서상돈은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구이사청(大邱理事廳)을 만들자 백성이 의지할 수 있는 기반 구축 작업으로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설립을 추진한다. 1906년 발족된 대구민의소의 설립 취지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을 보급하며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황무지 개간에 진력한다”는 것이었다.
대구 광문사와 대구민의소 조직은 근대 교육 보급과 민지계발(民智啓發)의 일환이었다. 2월 경북관찰사 신태휴는 관내를 순회하면서 대구 광문사 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관찰사는 각 군에 학교 설립과 서적 구입 등에 관한 일체를 대구 광문사에 문의하도록 지시했다. 서상돈은 김윤란 정규옥 서병오 등과 함께 500환의 기금을 출연하는 등 재정적인 기반 확충에 진력했다.
- 서상돈과(왼쪽) 김광제(1866~1920). 김광제는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을 지내면서 서상돈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다.
서상돈과 김광제의 만남, 국채보상운동의 시작
1907년 1월, 서상돈은 대구 북성로 광문사(현재 수창초등학교 정문 옆)로 갔다. 사장실로 들어서자 김광제 사장이 서상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상돈이 15년 연상이었으나 김광제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김광제는 특별회의의 안건에 대해서 서상돈의 의견을 구했다.
“광문사라는 이름에 대동(大同)이라는 말을 붙여 대동광문사(大同廣文社)로 개칭하자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선진 학문과 근대 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 의식을 고취하여 우리 민족을 계몽해 보자는 취지로 설립한 우리 광문사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출판인쇄사로 보이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서상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김광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서상돈은 막강한 재력과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했던 경륜과 애국심으로 대구의 여론을 선도하고 있었다. 또 그는 광문사에 제일 많은 금액을 투자한 실질적인 사주였기 때문에 김광제도 광문사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는 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서상돈은 광문사의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을사늑약 때 동래경무관을 사직하고 올린 김광제의 상소문으로 서상돈은 김광제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시국이 워낙 어수선하니 힘에 부칩니다. 일본이 우리 조정에 억지로 차관을 들여오고 국채를 발행하게 하여 그 돈으로 일본인 거류민들을 지원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할 조직을 키우는 데 쓰고 있다니 큰일입니다. 나랏빚이 벌써 1천300만 환이라는데 매년 재정적자가 77만 환이라 하니 언제 나랏빚을 다 갚겠습니까? 외교권까지 뺏긴 마당에 빚까지 갚지 못하면 나라를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저 앞이 캄캄할 따름입니다.”
서상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김광제는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 하루 전의 풍경이다.
이튿날 서상돈의 집엔 김광제 등 광문사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구광문사 문회(文會)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였다. 회의를 마친 자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격 발의하였다.
“국채 1300만 환을 갚지 못한다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하므로 지금 국고금으로 갚을 수 없는 국채를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십시다. 저 부터 800환을 내겠습니다.”
서상돈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울컥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2000만 동포 한 사람이 60전씩 거두기는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한 달 담뱃값만도 20전은 됩니다. 석 달 동안만 담배를 끊으면 60전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서상돈의 발의에 참석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서상돈은 이 제의를 하면서 자신부터 앞장서겠다고 800환을 내어놓았다.
그 당시 신문 구독료가 한 달 30전, 쌀 한 말값이 1환 80전임을 감안하면 서상돈의 의연금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서상돈의 제의가 결코 즉흥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광제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담뱃대, 담배쌈지를 없애고 석 달간의 담뱃값 60전과 따로 돈 10환을 더 내자, 많은 사람이 모두 회장의 결심에 찬성하여 모인 사람들은 장죽을 꺾었다. 나라 전체가 우국상정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했던 단연회(斷煙會)를 통한 국채보상운동이 잉태하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은 2000여 환을 갹출하면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 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국채 1300만 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 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 모금한다는 것이었다.
서상돈의 국채보상 발의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 승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30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9)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을 위해 1906년 2월 21일에는 김광제, 서상돈, 대동광문회장 박혜령 등이 중심이 되어 대구민의소를 설립하고 창립 총회를 열었다. 또 그날 대구민의소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회하고 여기에서 김광제, 서상돈의 명의로 국채보상취지서가 낭독되었다. 서상돈은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
애국에 남녀의 차이도 귀천의 차이도 없었다
특히 이 취지서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우리나라의 침략자 일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포용적 안목” 때문이며 “그 절박한 국망의 위기를 단지 3개월간 단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아주 간편하고 간단한 방법의 제시”에 있었다.
이 군민대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뿌리며 담뱃대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 당장에 수백 원을 모금하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이만한 일도 못 하고 있었는가 하는 자괴심을 국민들로 하여금 저절로 불러일으킬 수 있게 했다.
한편, 2월 말에 애국단연회 관계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경북이 어느 도보다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도내 41개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도 서상돈이 홍무장을 맡아 실무를 지휘한 사실은 주목할 일이었다. 또 그 후 4월에는 대구단연회에 서상돈은 1000환(원)을 의연했다.
- 대구 동인동(국채보상로)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내부의 국채보상운동 행렬도. 국채보상운동에는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을 넘어 온 민족이 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이 운동은 이처럼 대구에서 발단한 초부터 열기를 더해갔을 뿐만 아니라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기생 앵무는 지화 100환(현재 가치 1억 원)을 가지고 찾아왔고 전국적으로 기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전 국민운동으로 진전된 국채보상운동은 의연금 관리 등 보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통합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07년 4월에는 이를 지도·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도 각각 조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민의소가 북후정에서 개최한 국민대회에 즉각 호응하여 이틀 후인 2월 23일 대구의 여성들은 ‘남일동 부인 7명 은패물 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그날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를 선언하고 「경고(警告), 아부인동포(我婦人同胞)라」라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우리가 일개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도(三從之道)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 여자의 소처로 일신소존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이들은 자신의 소유인 은지환ㆍ은장도ㆍ은가지ㆍ은연화 등 총 13냥 8돈쭝의 패물을 의연했다. 대구 여성들의 참여는 전국 여성들의 이 운동 참가의 효시가 되었다. 상류층 양반집의 부인들도 이 운동에 참여해 3월 초에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를 결성하여 국채보상부인회취지서를 전국 부인들에게 보내 여성 각자가 스스로 의무를 느껴 자발적인 의연을 하도록 호소하였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가락지·은장도 등을 의연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일본 유학생들과 멀리 미주와 노령(러시아 시베리아 일대)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고관이나 양반·부유층은 물론 하층민에 속하는 서울 양반집의 상노, 노동자들, 인력거꾼 등이 담뱃값을 다투어 거두는가 하면, 의연금을 모아 가지고 기성회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노인도 노병을 무릅쓰고 짚신을 삼아서 처와 함께 비지를 사서 연명하고 있으면서도 국채보상에 감격하여 신화 2환을 기성회에 바쳤으며, 또한 철없는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받은 세뱃돈, 고아원 학도들의 심부름값 등 용돈을 의연금으로 바쳤던 것이다.
전국으로 퍼진 국채보상운동의 물결
이에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민족언론기관들은 이 운동을 자주자강의 구국운동으로 파악하고 앞을 다투어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907년 2월 25일 ‘단연보국채’라는 논설에 이렇게 썼다.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이 하늘에서 온 복음을 외쳐 전하도다.… 이 소식이 다른 소식이 아니라 곧 대구 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의 단연동맹한 좋은 소식이로다. … 전국 3백여 고을에 반드시 대구에서만 이런 남자들이 나올 것이 아니요 동포 2천만 명에 반드시 서씨 등 몇 사람만이 이런 뜻과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감히 믿는다. 이 기운이 한번 움직임에 따라 온 나라가 향응하여 장차 5종의 민족으로 모두들 우리 대한인을 숭배하여 20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명예 성가가 온 지구 상에 환하게 비치게 될 것이다. 장하다, 이 소식이여. 기특하다, 이 소식이여. 손 모아 빌고 머리 숙여 절하여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고 땅을 굽어보며 춤추노니, 곧 후일 대한 독립사 첫머리 제1장에 대서특필하여 해와 별처럼 높이 받들 것이니 단연 동맹회의 서상돈 등이 아니겠는가?”
- 대구 동인동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어느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4환을 의연하였고, 평남 영유군 이화학교의 일본인 교사 정유호빈(正柳好彬)도 2환을 의연하는 등 외국인 동참도 증가를 거듭했다.
특히 2월 26일 고종황제의 칙어(勅語: 임금이 몸소 이름)와 함께 단연보상 참여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친히 담배를 끊고 영친왕의 가례도 연기함으로 국민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민적 의거로서 공인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초기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정부 대신들도 이 소식을 접한 이후 금연 결심과 함께 참여하였다.
특히 단천군 국채보상소 발기인 이병덕(李炳德)·김인화(金仁化) 등은 “국채보상가”를 지어 널리 보급하였다.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대구 서공 상돈일세. 1천 3백만 환(원) 국채 갚자고/보상동맹 단연회 설립했다네. 면실하는 마음 발앙하니/대한 국민 분명하도다. 지금 우리 국가 간난한데/누가 이런 열성 가질 건가? 경상도 대구의 서공 등/사람마다 찬미하도다. 복주관 아래 우리 동포여/대구 땅만 나라 땅이냐? 대한 2천만 민중에/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한국 백성 아닐런가?
일제의 방해에 빛을 바라다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은 전개방법이나 열성 면에서 단연 앞섰다. 거국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이 운동은 일인과 친일 세력의 거센 반발과 방해공작에도 진행됐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미완성이긴 했으나 국민과 힘과 충정을 만천하에 과시한 민중의 교향곡이었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고, 이후에도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이에 일제는 이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여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끈질긴 방해공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과 대구인의 저력을 만방에 보여준 역사에 길이 빛날 일대 사건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환란 시기에 ‘금 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되어 세계인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서상돈은 사업 활동에 전념하여 실업 진흥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에 힘썼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윤지강 작가(젬마)]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10) 하느님 나라 그 곳에 나 가리라 1911년 교황 성 비오 10세는 이 나라에 하나밖에 없던 교구를 하나 더 증설키로 했다.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전주교구로 나뉘고, 서울교구는 충청도 이북을 경상 전라는 전주교구가 관할토록 할 계획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상돈은 서울로 가 무작정 뮈텔(Mutel) 주교를 찾아갔다.
“내 나이 갑년입니다. 평생을 교회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생전 꿈이 있다면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성모를 모신 마사비엘 동굴과 꼭 같은 성모당을 주교당 앞에 짓고 싶습니다. 부디 새 교구를 대구에 설립하도록 해 주십시오.”
- 대구 성모당은 서상돈이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과 같은 모양으로 건립에 이바지한 곳으로 교회에 대한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큰아버지 품에 안긴 상돈
서상돈의 진심 어린 간청에 감복한 뮈텔 주교는 쾌히 승낙했다.
이후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드망즈(안세희) 주교가 대구에 부임해 오자 서상돈은 남산동 일대에서 직접 경영하던 종묘원(일명 남산화원) 부지 1만여 평을(현 대구교구청 소재지) 교회에 헌납했다.
서상돈은 자신의 집 사랑채에 모인 식객들을 수시로 만나 복음을 전하는 등 간접적인 전교 활동에도 나섰다. 이처럼 대구 제일의 갑부였던 서상돈은 대구 중구 계산동에 집을 지어 많은 식객에게 편의와 안식처를 제공하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전교 활동에도 힘썼고, 이에 많은 사람이 감화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평상시 서상돈은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나의 전 재산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것이다. 내가 모은 재산을 성당에 바치려 한다. 세 분 조상들의 순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서상돈은 자신이 바치는 재산은 세 분 순교자 대신 바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마사비엘 동굴과 주교당 건립 작업이 시작됐다. 건립에 10년 세월을 작정한 서상돈은 매일 공사장에 나갔다. 3년이 지날 무렵 건강은 악화됐다. 그는 아들 병조를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남산고개 성모당을 꼭 이룩해야 한다. 내 뜻이 아니라 성모님의 뜻이다. 내 재산도 성모님의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성서 읽기는 어려서부터 길든 일이었다. 김씨 부인이 아픈 환자가 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읽어 주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1- 23) .
그는 부인이 읽는 성서 소리를 들으며 잠 들었다.
저만치서 큰아버지가 빛으로 둘러싸여 그에게 손짓했다.
“상돈아. 이리 오려무나!”
큰아버지는 흰옷을 입고 꽃밭에 서 있었다. 포졸에게 맞아 피 터지고 살갗이 찢어진 처참한 모습이 아니었다. 피부가 아기 피부처럼 보얗고 몸에 걸친 옷은 비단이었다.
저만치 그토록 그리웠던 두 숙부도 계셨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리운 아버지도 계셨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서상돈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들을 불렀다. 어디선가 장미향이 풍기고 천사들이 그에게 복음을 들려주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서상돈은 평생 그 빛을 따라 걸었다. 그 빛은 점점 환해졌다.
눈이 부셔 더 이상 서상돈은 더 이상 그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1913년 6월 30일, 새벽 2시 서상돈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2014년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자주 세상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다음에 이 세상의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온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를 기리며 순교한 순교자들 기리며 기억해야 한다.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일하도록 영감을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 수호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 연대미상의 서상돈 후손 가족 사진.
서상돈의 유지를 이어받은 사람들
서상돈 회장의 뜻을 이어받은 직계 후손으로는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대구대교구 고(故) 서인석 신부,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서준석 수녀가 있다.
서공석 신부에게 서상돈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묻자, 서 신부는 “할아버지께서 나라와 대구대교구를 위해 하신 일은 후손이 기억하고 기념할 일은 아니다”면서 “대구대교구를 위해 하신 일은 대구대교구가, 국가를 위해 하신 일은 국가가 기억할 일”이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이어 그는 “후손들은 다른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있으며 후손 중에는 신앙인으로 잘사는 사람도 있고, 잘 못사는 사람도 있다”며 “그분께서 하신 일을 후손이 언론매체를 통해 거론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서상돈은 일찍 죽은 장남과 병조, 병주, 병민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또 대구대교구 류흥모 신부의 동생인 류흥민을 데릴사위로 삼았다. 아들 병조는 아버지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아 교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병조는 주교좌 계산본당 총회장을 지냈으며, 경영난으로 폐교 위기에 직면한 교남학원(嶠南學院) 재단을 인수해 대봉(大峯)교육재단을 설립하고 1942년 학교명을 대륜(大倫)중학으로 등기해 오늘날 대구의 사학 명문인 대륜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되게 했다. 데릴사위 류흥민은 독립운동이 한창이었던 1910년대 말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서상돈을 뭇사람들은 “한말 대구 경제를 이끌었던 거목이요 국채보상 운동을 주창한 애국자며 남의 가난을 내 것과 같이 아파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천주교 대구교구를 융기시킨 독실한 신자”로 받들였다.
정부에서는 서상돈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서상돈의 국채보상운동의 선각적 발단과 주도를 기리기 위해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매일신문사가 공동으로 서상돈기념상을 제정했다. 이 기념상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대구에서 제정되었다. 이 지역의 경제계 선각자인 서상돈이 운동을 처음 발의하였고 운동에 앞장서 주도했다. 서상돈기념상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보여준 민족과 국가의 자주 경제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고자 하는 취지를 최대한 살려 번영된 경제 주권을 누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데 있다.
교구 설정 100주년이 넘은 대구대교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서상돈’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가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정신과 미덕임에 틀림없다. <끝>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윤지강 작가(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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