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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기 - 바라밀과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
< 질문 >
- 전략 -
일상에서 알아차림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법사님 말씀대로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걷는 동작, 앉는 동작, 밥먹는 동작, 눕는 동작 등등 가급적 천천히 하면서 그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가려고 하지만, 어느 정도 되는 듯 싶다가도 저도 모르게 마음과 동작이 한 순간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뒷북치는 격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마음을 새로 냅니다. 몸은 자꾸 원심력처럼 치고 나가려고 하고 마음은 그 속도를 늦추면서 의도와 느낌들을 잡아 구심력으로 끌어드리려고 하는 그런 상태가 매일 매일 지속되는 듯 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알아차림을 나름대로 하면서 '내가 왜 이 수행을 하는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지만, 제 마음속에서 분명한 외침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보단 나아지고 싶다는 것, 변하고 싶다는 것, 예전처럼 살진 않겠다는 것, 그것도 탐심이겠지만, 이 정도는 수행을 계속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수행을 하면서 믿음을 쌓아가고 더 좋은 동기들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합니다. 게을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두서 없이 쓰다보니 장황해졌습니다. 선생님의 자비로운 글에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하거나 혹은 잘못 생각하는 내용이 있으면 바로잡아주십시오. 앞으로도 자주 질문 드리겠습니다.
< 답변 1 >
일상의 알아차림은 좌선과 경행을 해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때 일상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려고 하면 힘이 들어서 알아차림이 지속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효과적으로 의도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보는 수행을 경험한 뒤라야 실행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으로 마음을 선택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마음에 고정시켜 놓고 하는 수행입니다. 마음이 하나하나 동작에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숙달되기만 하면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집중력이 성숙된 뒤에야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많습니다. 아무리 좋은 방법으로 수행을 한다고 해도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어떤 알아차림이냐에 따라 수행이 달라집니다. 먼저 대상의 모양이나 성품 중에 알아차리기 쉬운 것을 선택해야 하며, 너무 자세하게 보려고 하지말고 가볍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많이 알아차리려고 하지말고 단순한 것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적절하게 충족되었을 때 알아차림이 지속되어 집중력이 생깁니다. 이것들은 모두 노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이 얼마나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되었는가 하는 것도 관계가 있습니다. 아울러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고 있는가도 한몫을 합니다. 계율이 전제되지 않으면 수행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먼저 계청정이 있으면 심청정이 되고 다시 혜청정이 일어나 수행이 발전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단계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수행이 차츰 발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릴 대상도 거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서 알아차리고 집중하는 힘이 배양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단순한 알아차림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특히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지계의 청정과 마음의 청정이 되어있어야 상승효과를 얻습니다. 특히 남을 위해서 보시를 한다던가 또는 봉사를 한다던가 하는 바라밀 공덕의 또 다른 힘까지 작용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수행자라는 것은 모든 것에 모범적이고 한 인간으로서도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므로 수행방법도 전 방위적이어야 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무엇 하나만 잘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십 여년전에 미얀마 마하시 선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하시 선원에 갈 때마다 전기 사정이 나빠 초를 켜고 명상을 하곤 했습니다. 명상홀에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초를 켜고 명상을 하다 보면 불이 꺼진 상태로 명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때 제가 한국에서 가지고 간 크고 둥그런 초를 제 방에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 초를 명상홀에 갖다 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제 방에서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며칠을 갈등하다가 어느 날 명상홀에 이 초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명상을 했는데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 무렵 수행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가 되면 호흡이 사라지는 현상이 있었는데 미얀마에 도착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년 정도는 쓰려고 생각했던 초를 명상홀에 내 놓고 명상을 하니 한 순간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초 한 자루를 보시한 마음이 스스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예상하지 못한 정신적인 단계를 뛰어넘게 한 것에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선업의 마음과 보시가 얼마나 수행에 도움이 되는 가를 새삼 깊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선업이라는 행은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데 이것은 어떤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즉석에서 자신의 마음이 가져다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이 발전적인 삶을 가져오듯이 모든 것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자신이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을 바라고 하는 보시나, 대외적 과시용의 보시나, 자기 우월감의 성취를 위해서 하는 보시는 그만큼 순도가 떨어져서 과보도 적을 것입니다.
경전에서 보면 수행을 위해 바라밀 공덕을 쌓을 것을 말합니다. 바라밀 공덕에 대해서 가장 효과를 보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은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부처가 되셨습니다. 부처는 모든 생명체 중에 가장 수승한 바라밀을 쌓아서 그 과보로 부처가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가장 수승한 바리밀을 쌓은 분이 가장 수승한 지혜를 얻은 것이란 의미로 오직 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은 오직 남을 위해 그 지혜를 활용하여 인류 각자가 스스로 번뇌를 해결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에 하는 일이 수행보다는 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불사르듯이, 운동선수가 메달을 위해 온갖 노력과 불굴의 사투를 거듭하듯이 수행자도 닙바나에 들어 도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를 가지고 불굴의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어찌 이러한 노력보다 뒤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과를 얻기 위한 노력은 단지 단순한 노력에 그치지 않고 가능한 모든 방법과 수단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라밀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반의 힘과 스승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바라밀[parami]은 저쪽 피안으로 건너갔다는 말인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말은 수행의 완성을 말하며 완전함, 도피안(度披岸)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밀은 수행을 위한 열 가지 덕목을 말합니다.
열 가지 바라밀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보시(普施) ② 지계(持戒) ③ 출가(出家) ④ 지혜(智慧) ⑤ 정진(精進)
⑥ 인내(忍耐) ⑦ 진실(眞實) ⑧ 발원(發願) ⑨ 자비(慈悲) ⑩ 평정(平正)
여기서 말하는 출가는 비구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재가자는 선원에 가서 수행을 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밀을 쌓는 사람을 보디사타(bodhisatta)라고 합니다. 보디사타를 우리말로는 보살(菩薩)이라고 하는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중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또는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고도 합니다.
보디사타의 유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지성적인 보살이 있습니다. 이 보살의 성향은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보살로 명상을 선호합니다.
둘째, 헌신적인 보살이 있습니다. 이 보살은 믿음과 신앙심이 깊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기복으로 믿지 않습니다.
셋째, 활동적인 보살이 있습니다. 이 보살은 남을 위해 활동적으로 봉사를 합니다. 봉사나 보시를 해서 얻은 기쁨을 행복으로 알고 노력을 합니다. 특별하게 명예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칭찬과 비난에 개의치 않고 노력합니다.
결과적으로 바라밀의 초석 없이는 수행을 하는데 한계가 있고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수행을 역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에서 이기적이기 쉬운 마음을 바라밀로 따뜻하게 해야하며 자비로움으로 초석을 다져야 할 것입니다.
< 답변 2 >
수행의 특성이란 처음에는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섯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행은 전혀 새로운 의식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평소에 가지고 있는 탐진치의 습관으로부터 관용, 자애, 지혜의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과정이라서 당연하게 잘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만심은 하루 이틀에 생긴 불선업의 성향이 아닙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축적되어온 아만심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새로 시작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의 효과는 사실 신비할 정도로 빠른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의 효과는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나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좋아지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은 고요함을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대상의 성품을 알아 지혜를 얻는 과정인데 지혜의 성숙과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혜의 성숙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체계화 되어있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스승의 도움을 받으면 지혜가 빠르게 성숙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승의 가르침을 얼마나 확실하게 따르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다른 수행에 비해서 완벽할 정도로 체계화되어 있어서 수행자들에게는 더 없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수행을 시작하여 어려움을 겪는 이런 현상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입니다. 이런 과정의 배경에는 유신견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수행은 나라고 하는 아만심(我慢心)을 없애는 것이 목표 중의 하나인데 수행을 시작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된다면 아만심이 가만히 있질 않습니다. 오래 동안 주인노릇을 해왔던 아만심이 쉽게 자리를 내줄리가 없습니다.
누구나 수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이 조금만 잘 되어도 기분이 좋고 큰 것을 얻은 것같은 성취감을 느낍니다. 바로 이것이 아만심을 강화하게 하는 처사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아만심 때문에라도 처음부터 수행이 잘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생을 하다가 코가 좀 납작해졌을 때 조금씩 진전이 되어야 제대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무수히 겪으면서 나라고 하는 아상(我想)이 마모되어 갑니다.
수행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과의 승부입니다. 그러므로 불선업의 마음이 그냥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고,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적절한 수행방법과 인내입니다. 이것이 알아차림과 노력입니다. 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아는 마음과 지속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알아차림과 노력을 해서 얻는 집중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께서 대상을 모르고 지나치다 나중에 뒷북을 치듯이 안다고 했는데 이것도 처음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아예 뒷북조차 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늦게라도 북을 친 것이 가장 빨리 친 것입니다. 이렇게 치다 보면 나중에는 숙달이 되어서 엇박자가 생기지 않고 제 박에 장단을 칠 수 있게 됩니다. 처음부터 북을 잘 치는 명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고수가 주위에 시선을 판다거나 소리꾼의 소리에 넋을 잃고 귀가 팔리지 않으면 됩니다. 고수는 항상 눈을 창자의 입에 고정합니다. 그래서 소리와 함께 장단을 쳐서 함께 판을 진행해 나갑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다른 곳에 정신을 판다거나 아니면 소리가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취하여 그만 귀가 팔리면 박자를 놓치게 되고 맙니다. 판소리에서 소리가 좋아서 소리에 빠지는 것을 귀 팔렸다고 하는데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귀 팔리면 박이 삐는데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고수가 북가락 장단을 자랑하려고 요란하게 앞서서 북을 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소리를 방해하게 됩니다. 고수는 다만 보조자로서 상황의 흐름을 타고 함께 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에서는 억지로 만들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수가 소리를 방해하지 않고 북을 치듯이 수행자가 일어나고 있는 대상에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개입을 하면 알아차림을 놓치고 탐진치가 붙게 되어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없게 됩니다.
수행에서 소리는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이고 고수의 북은 대상을 겨냥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소리와 수행이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고수가 화려한 북 가락을 뽐내는 것은 수행자가 의도적으로 호흡을 만들어서 한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역할은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보고 대상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가 나는 길입니다. 일고수 이명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소리에서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행에서는 이와 같이 대상을 겨냥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심력은 습성이고 구심력은 알아차림입니다. 누구나 알아차림보다는 습성이 강하게 마련입니다. 습성은 밖으로 나가 이것저것 시비를 가리며 탐진치를 일으키는 것인데 알아차림은 현재를 알고 내면의 본질을 아는 선업이라서 쉽지가 않습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사실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습관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고정관념입니다. 그리고 업의 과보로 살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과연 깨어있는 자기 의지로 사는 삶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볼만한 일입니다. 누구나 거의가 탐진치와 망상의 연속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제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마음은 부단히 밖으로 향해 끊임없이 욕망과 성냄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삶의 방법, 새로운 수행방법을 익히게 되었으므로 한 장, 한 장씩 벽돌을 쌓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벽돌이 성글게 쌓이지만 차츰 조밀해 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① 마음의 청정 ② 슬픔과 근심의 극복 ③ 비탄의 극복 ④ 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⑤ 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⑥ 네 가지 도과(道果)의 성취 ⑦ 열반의 성취
그리고 사념처 수행을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에까야나(ekaayan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의 길, 유일한 길, 또는 일승도(一乘道), 하나의 목표로 통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라는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여기서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에까야나(ekaayana)의 여러 가지 뜻을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① 단 하나의 길 - 샛길이 없기 때문에 수행자는 확신을 갖고 처음부터 자유롭게 될 때까지 이 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②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는 길 - 어차피 혼자 태어나서 혼자 성장하다가 혼자 죽는 것인데 깨달음에서 누구도 자신의 집중이나 지혜를 남에게 주거나 받을 수 없고 오직 혼자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 한 분의 길 - 한 분의 길이란 사념처 수행은 부처님께서 보살로서 선업을 쌓으신 공덕의 과보로 찾아내신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오직 한 분이신 부처만이 알아내신 길임을 의미합니다.
④ 유일한 길 - 이 길만이 오직 닙바나에 인도하는 유일한 길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길이 아닌 사념처 수행의 길에 들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⑤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 - 사념처 수행의 길에 들어서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여 열반에 이르게 되고 고통을 해결하고 마음의 번뇌를 소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을 의미합니다.
이상은 위빠사나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가장 극명한 경전의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확신에 찬 믿음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여 도과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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