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뿌리 찾아나선 길, 동래부민의 눈물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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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가을날 조해훈 시인이 부산 동래구 복천박물관에서 동아대 대학원생 김현섭 씨, 학부생 이유정(경제학과) 진원경(문예창작학과) 씨(왼쪽부터)에게 동래의 역사와 그 속에 스민 옛사람의 숨결을 설명하고 있다. 백한기 선임기자 |
- 3~7세기 금관가야 지배세력
- 묻힌 곳이 복천동고분군
- 임진왜란 땐 참혹한 전투지
- 도시철도 수안역 공사 중
- 당시 죽은 부민 유골 대거 발견
- 일제강점기 만세운동 유적지도
학생들과 함께 복천동고분군과 동래부 관아, 동래시장, 도시철도 수안역 동래읍성임진왜란 역사관 등을 찾은 날,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하다.
진원경(동아대 문예창작학과4) 학생이
"이렇게 햇살 좋은 날 걷다 보면 절망이 저의 전부인 양 여기던
어두운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요"라며 운을 떼는 걸 보니 나들이가 흡족한 모양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
가을볕이 좋은 오늘, 나를 거닐게 한 나의 뿌리는 함안 조 씨이듯이,
아니 그 이전 어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을 수도 있을 그 근원을 생각하는 일은 아득하다.
이렇듯 역사는 '꿈을 꾸게 하는' 낡은 악기처럼 서정적이다.
부산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함께 부대끼고 뒹굴며 사는 우리, 다들 하루하루 감당하기 힘든 나날인데,
언제 부산의 역사와 뿌리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가 있을까.
청명한 가을에 학생들과 길을 나선 까닭은 부산의 정신과 역사를 한번 더듬어보기 위해서다.
"동래지역이 바로 부산의 뿌리다."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는 이 사실은 부산의 근원지를 간단명료하게 알려준다.
1969~1972년 처음으로 복천동고분군을 발굴하였던 심봉근 전 동아대 총장(전 동아대 박물관장)의 말에 따르면 "복천동고분군은 동래지역 중심가 북쪽에 있고 3세기대에서 7세기대까지 조영돼 있는데
중심 연대는 4, 5세기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더불어
금관가야의 또 다른 축으로 작동한 세력이 묻힌 곳으로, 그들은 당대 부산의 중심이자 거점 지배세력"이었다. 동래는 가야시기부터 부산의 뿌리지역이었다.
■ 타임캡슐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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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구 수안동 동래부동헌에는 옛 동헌의 모습을 축소한 모형이 전시돼 있다. |
"그러면 부산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나요?"
동행한 김유정(동아대 경제학과4) 학생이 묻는다.
해운대 신시가지를 조성하기 전 부산박물관이 문화재 조사를 할 때
구석기 유적지를 발굴했던 하인수 복천박물관장의 말을 빌려
설명해 주었다.
"부산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고,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영도 동삼동 패총지역 같은 해안가에서
어로활동을 하면서 생활했어. 청동기시대가 되면 내륙으로 들어오는데
이후 온천천 위쪽인 지금의 동래지역이 주요 거주지가 됐지."
그 사람들이 수민·복산·명륜·안락동을 중심으로 한
동래지역에 대를 이어 살면서 복천동고분군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라는 지명은 언제 생긴 건가요?"
김현섭(동아대 교육대학원) 씨의 질문이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부터 유래했지. 임진왜란 때 행정·군사의 중심지로 부산을 대표하는 지명이지."(최효식 논문 '임란초기 동래성의 항전에 대하여' 참조)
가야시기에 동래지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부산지역의 생활근거지 역할을 해오다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시점이 바로 임진왜란 때이다.
최근 부산에 전국 최대 도심광장인 송상현 광장이 열렸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 동래부사를 기억하고,
그의 정신을 기념하는 장소이다.
그는 255명의 동래부사 가운데 38번째 부임한 부사(재임 1591년 8월~1592년 4월)이다.
"동래성 전투 당일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대화가 이어졌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왜군이 일시에 안으로 다투어 들어오니 사람들로 가득해
움직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지."
당시 동래성의 상황을 묘사한 자료를 인용해 설명했다.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 한동안 아비규환의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지. 군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백성도 함께 싸웠어. 무기를 갖지 못한 성민들은 혹은 맨손으로 적에 부딪치고,…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거두어 적을 치기도 하였지."(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사회동태에 관한 연구')
■ 유골이 말해주는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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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에 있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
이렇게 왜군과 싸우다 죽은 동래 부민의 모습이
400년 만에 참혹하게 나타났다.
2005년 6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 중
수많은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유골을 분석한 동아대 김재현(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전란의 상황을 설명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은 과거 동래성 남문 근처로 방어를 위한 해자가 있던 자리다.
아래턱이 창에 날카롭게 잘려나간 남자 유골, 앉혀진 채로 위에서
칼을 세 차례나 맞아 살해당한 20대 여성의 유골, 조총이 뒤에서
뚫고 나간 흔적을 보여주는 5세 이하 아이의 부서진 두개골 …."(김재현, '인골이 말해 주는 동래읍성').
도시철도 수안역 로비에서 동래부 화원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 사본을 본 유정 씨가
"그날 동래성 전투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네"라며 혼잣말을 하였다.
동래성 전투가 마무리 된 지 10년이 지나 당대 유명한 문사인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와 임란 후 핍진한 상황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학생들에게 그의 '4월 15일'이란 시를 읽어주었다.
"날이 밝자 집집마다 우는 소리/…/ 놀라서 늙은 아전에게 묻기를/'통곡소리 어찌 저리 참혹한가?'
하니/임진년 왜구가 이르렀을 때/…/경내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몸을 바쳐 주검을 쌓았으니/
천 명 중에 한두 명만 살았지요/이 때문에 이날은/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요'/얼마나 많은 데요, 퍼런 칼날 아래/온 가족 다 죽어 곡할 이조차 없는 이가."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때 희생된 영혼의 울음이 귀를 울리는 것 같이 서럽고 안타깝다.
■ 뿌리를 돌아보며 사랑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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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시장의 만세거리 표지석 앞에 선 일행. 1919년 동래고보(현 동래고) 학생들이 주축이 돼 3월 13일 여기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
"동래지역이 한 번 더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하던데요?"원
경 씨의 물음이다.
"일제강점기 동래시장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 때문이라고 답했다. 1919년 당시 동래고보(현 동래고) 학생들이 주축이 돼 3월 13일
동래장날 장꾼 및 부녀자들과 합세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구포장터 만세운동 등 부산 경남 만세운동의 불씨가 된다.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했던 민족문학의 파수꾼 소설가 김정한 선생이
동래고보 출신이라고 말하고 보니, 동래를 뿌리로 둔 작가의 저항정신이 새삼스러웠다.
"오늘 오후 내내 뿌리라는 단어를 붙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원경 씨는 문학적 의미가 궁금했던 것 같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이명준의 죽음에 대한
의미의 변화를 짚으면서, '…그 죽음은 자신이 몸을 던져 뿌리를 내려야 할 우주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더군."
고달픈 삶에 쫓겨 잊고 사는 뿌리라는 어휘,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방황한 이명준의 죽음을 해석한 그 단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뿌리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