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준아! 오늘은 공휴일이라 훈련 없이 휴식하고 있겠구나.
훈련소에 입소한지 벌써 14일이 지났네.
네 편지 잘 받았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고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먼저 똥이 잘 안 나온다니 좀 그렇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잘 먹고 잘 싸야 하는데, 먹기는 잘 먹는 것 같아 보여
다행이다만, 배설이 잘 안 된다니 신경 쓰이겠구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사람이 환경이 바뀌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
구멍이 막히지 않은 이상 나올 때가 되면 다 나오게 마련이니라.
네가 생활하고 있는 훈련소는 아빠가 30년 전 입소하여 훈련받던 바로 그곳이다.
그때는 나라 살림 형편도 어려웠고 사회의 의식수준도 지금보다는
덜 자유롭고 인권이 존중되지 않던 시절이라,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너희들을 훈련시키고 병영생활을 선도하는 장교와
조교들의 의식수준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들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그러하니 훈련과 내무생활 중 상사의 처사에 적잖게 불만이 있더라도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이니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되기보다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획일성이 필요한 집단이지.
아빠가 말 안 해도 세준이가 이미 잘 알고 현명하게 처신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집에서 지낼 때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컴퓨터로 게임질 하고
쉬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빠져 자고, 샤워 한 번 하는데 20분씩 온수
틀어놓고 호사를 누리던 녀석이 며칠 동안 샤워도 못하고 어물전에 늘어놓은
고등어처럼 동료들과 줄맞춰 잠자는 네 모습을 생각하니 안스러운 마음에 앞서
고소하고 쌤통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요놈아! ㅎㅎ
지금이야 너와 처지가 같은 훈련병끼리 지내니 그나마 나은 거다.
자대 배치 받게 되면 네가 젤루 쫄따구가 될 터이니 그땐 지금보다 더 애로가
많을 거야. 다 그런 과정을 거쳐 고참이 되고 어른이 되는 거야.
아빠가 그동안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느꼈던 점을 잠깐 얘기할게.
중학생들부터 대학생 성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무언가에 몰두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난 우리 세준이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었다.
대학 2학년이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결정하고도 남을 나이인데, 아빠 눈에 비친 세준이의 모습은 늘 그렇지 못하게 보였어.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다 보니 너와 함께 자식의 인생과 진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시간도 없었고, 너도 알다시피 아빠도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는 처지여서,
그저 엄마 아빠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식들도 본받아서
바르게 자라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내왔었다.
그러다가 네가 입대를 하게 되었고, 집에서 같이 생활할 때 너에게 진작 했어야 할
이야기들을 이제야 하게 되는구나.
나는 네가 입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랑하는 자식과 떨어져 지내야하는
아쉬움보다는 이제야 네가 진짜 어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너는 지금의 처지에서 일분일초가 더디 가겠지만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머지않아 휴가 나오고 제대할 날이 오고, 복학과 취업,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고,
자식 낳아 기르기 등 빠르면 10년 사이에 너에게 다가올 일들이다.
그 수많은 일들 중에 지금 너에게 당면한 일이 바로 군복무다.
그동안 학교에서 학문을 배웠지만 군대에서는 생존하는 기술을 배우게 될 거야.
초등학교부터 대학 2학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학교 친구들과 처지가 똑같은
수평적 관계를 맺어왔지만, 이제부터는 동료 보다는 상사와 부하간의 수직적
관계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겠지. 수평적 인간관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자기를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 바로 바로 수직적 사회 즉, 계급사회다.
계급사회에 원만하게 적응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고, 양보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마음자세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다보면 상사에게는 신뢰를 얻게 되고,
머지않아 생길 후임병들에게는 존경 받는 선임병이 될 거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냉혹하여 실수와 잘못된 판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실수와 잘못된 판단은 곧 그 사람의 명예와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고 금전적 손실이
뒤따르게 마련이지. 다행히 지금 네가 몸담고 있는 군대는 치명적으로 큰 실수가
아닌 한 나라에서 다 포용해 주는 곳이다.
입을 것, 먹을 것, 잠잘 곳을 다 해결해주고 신체 건강하게 단련시켜주고
정신무장과, 앞으로 살아갈 지혜와, 가족과 집의 소중함도 깨우쳐주니 이 얼마나 좋은곳이냐?
것두 꼬박꼬박 월급 받아가면서. ㅎㅎ
편지가 좀 길었다.
인터넷으로 보내는 병영편지라 800자 이내로 써야 된단다.
나누어 보낼건데 하루에 못 보내게 되면 이틀에 나누어 보낼테니 그리 알어.
겨울이라 꽤 춥지? 사람은말이다 제 살길은 자기가 스스로 찾아야 하느니.
체면 차리지 말고 요령껏 껴입을 거 있으면 다 껴입거라. 동상 걸리면 안 되니까.
어머니도 잘 지내고 계신다. 어머니가 세준이 모습 보고 싶어 훈련받는 사진
인터넷에 올라왔냐고 자꾸 물으시는데, 사진이 아직 안 올라왔구나.
사진 찍게 되면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포즈 취하거라 알았지?
형도 방학해서 집에 와있다. 내일부터 영어학원에 다닌다는구나.
그리고, 1월 15일이 수료식 예정이라 했는데...
아빠 직장에서 중요한 행사가 하필 그날이라 수료식이 15일이면
아빤 우리 세준이를 볼 수가 없겠구나. 대신 어머니와 형은 면회
가도록 할께. 수료식이 16일이었음 좋겠다.
그럼 만날 때 까지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고 있어야 한다.
우리 막내 사랑해^^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