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주권의 선구자
안용복의 애국적인 기인(奇人) 행적을 찾아
김 민 구
멀리 있는 사촌보다 이웃이 낫다는 말도 있으나 국제간에는 통하지 않는 말인지라,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이웃이 있으니 가깝고도 먼 이웃이 중국과 일본인 것 같다. 요즘의 찌는 듯한 삼복더위보다 더 짜증스러운 것은, 시시 때때로 들려오는 중국의 영토 음모 계략을 획책하고 있는 소위 동북공정이란 역겨운 소식들과, 걸핏하면 독도를 탐하는 저 간악한 일본인들 때문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혈압이 올라가게 만들고 있다.
일본은 툭하면, 다케시마[죽도(竹島)-독도]가 어떻고, 마쓰시마[송도(松島)]가 어떻고 하는 헛소리를 하면서, 심심할 때마다 일본 극우파들은 교과서 왜곡문제까지 들고 나와 한국 국민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시켜 오더니, 급기야 최근에 와서는 독도를 자기네들의 땅이라며, 시마네현 의회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노골적인 침탈 야욕을 드러내고 있어, 우리 국민의 감정을 들끓게 하는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생각할수록 간악․교활한 일본인들과 음흉한 중국인들의 몰상식과 몰염치에 절로 치가 떨리면서, 중․일 양국의 엉큼한 속셈을 드러낼 때마다 분단의 서러움과 약소국의 울분을 떨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특히 일본은 역사적으로 수 없는 해적과 노략질은 물론,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도 어떠한 반성이나 사죄를 하기는커녕, 아직도 그들은 제국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던 그 책임을 통감하고 조선인에 대한 속죄의 뜻으로, 우리 영토였던 간도의 영토 회복에 자진하여 앞장서 협력해야만 할 것이지만, 저들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독도를 넘보면서, 동시에 이웃인 러시아(사할린 등)와 중국(센가쿠 열도)과도 영토 분쟁을 일으키면서 패권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이 같이 엄연한 우리 영토인 독도를 넘보는 망동과 망언을 지켜보는 한국 국민의 심정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착잡하기만 할뿐이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과 강제노동을 비롯한 위안부 차출과 공출(供出) 그리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죽이고 고문했던 만행과 원폭피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무수한 문화재 약탈과 국토 유린에 관한 배상과 사과를 외면한 채, 반성은커녕 미안한 감정마저 가질 줄 모르는 파렴치한 나라를 어찌 우리는 이웃이라 할 수 있으랴!
이러한 불행한 이웃을 둔 우리로서는 독도의 소중함과 우리 영토 보전의 차원에서 독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는 물론, 우리 영토로서의 역사적 유래와 함께 독도의 오늘이 있기까지 영토보존에 크게 이바지한, 안용복의 숨은 공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애국적 기행(奇行)의 일화를 되돌아보면서, 독도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그의 숭고한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토 수호 의지를 다져 보고자 한다.
독도는 북태평양의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동해에 뜨는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여 배달겨레에게 밝은 빛을 전하는 섬으로서, 온 국민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소중한 우리 땅인 바, 독도는 비록 작은 바위섬이지만, 독도로 인해 우리 나라 영토와 영공(領空)이 크게 확보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동해상의 요지에 자리한 독도는 해상자원과 해저 광물자원 등 자원의 보고이며, 동해상의 유일한 해상 기지로서 국방상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어선들의 어로 활동을 보호하는 한편, 다른 나라 어선들의 경계 수역 침범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우리 국토 중의 보배로운 곳으로서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꾸어 나가야할 우리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인 것이다.
그리고 독도 주변의 바다에는 고래, 명태, 꽁치, 문어, 상어, 오징어, 새우, 소라, 전복, 해삼 등 다양한 어패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남조류 5종, 홍조류 67종, 갈조류 19종, 녹조류 7종 등 102종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다시마, 미역, 김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 바다의 보고(寶庫)이다.
독도가 우리 영토란 역사적 사실은 서기 512년 6월, 신라 지증왕 13년에 당시 하슬라주(何瑟羅州 : 강릉)의 군주로 있던 이사부(異斯夫) 장군으로 하여금 신라 영토로 귀속 시킨 이래,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이 섬에 대해 우리영토로서의내력을『삼국사기』와『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1432),『동국여지승람』(1481),『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을 비롯한 문헌은 말할 것도 없고,후대에와서도『동국지도(東國地圖)』(18세기초),『해좌전도(海左全圖)』(1882)와『조선팔도고금총람도(朝鮮八道古今總覽圖)』(1822),『대한지지』(1899)등이 있으며, 이후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수만 종의 지도에는 반드시 울릉도와 독도가 표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제작한,『팔도총도(八道總圖)』와,『은주시청합기(隱州視廳合記)』(1667)및 17세기 말 이후 일본의 관찬 및 준관찬 고지도(울릉도와 독도를 그린 것)와, 그리고 하야시시헤이(林子平 : 1738~1793)가 제작한『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의 부속 지도인「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1785),『만기요람 군정편』(1808) 등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한 위치에 그려 놓고, 각각 ‘다케시마(竹島)’와 ‘미쓰시마(松島)’로 표기하여 조선의 영토임을 뚜렷하게 표시해 놓았다.
1870년 메이지 정부에서 작성한『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가 일본 외무성이 1930년에 편찬한『일본외교문서(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독도와 울릉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공인하고 있다. 1876년 일본 외무성이 근대적 일본 지도를 작성할 때,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은 내무성의 질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877년 3월 20일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품위한 취지의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심득(心得)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내려 보냈으며, 내무성은 1877년 4월 9일자 태정관의 이 결정 훈령을 시마네현에 보내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서 제외시키라고 훈령하였다.
그리고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조선동해안도』와 일본해군의 보고서인『군함신고행동일지』(1904)를 비롯하여, 1905년 동경 박물관에서 펴낸『일본전쟁실기』와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지도구역일람도』등의 자료에서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밝히고 있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일본의 정부 기관이나 민간인이 제작한 대다수의 지도에서 독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명백히 표기해 놓았다. 이 같은 자료들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 677호의 군령을 발표하여 제주도, 울릉도, 독도를 일본의 주권에서 제외시켜 한국에 반환하였고, 이어서 1946년 6월 22일 SCAPIN 제 1033호를 발표하여, 일본 어부들이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접근하는 것을 엄금하여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주한미군정으로부터 영토를 인수하여,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그 영토와 주권을 국제적으로 공인 받았다.
서양의 고지도를 보더라도 그리고 지리와 지도 분야의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지리학회(National Geographic)가 펴낸 표준세계지도에 독도는 한국식 영문 표기인 “Tok Do'로 명기되어 있는 것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의 여러 나라 지도에서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밝혀 놓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로 독도가 일본 자기네들의 땅이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지켜온 우리 땅인 독도는, 우리 국토의 동쪽 끝에 있는 보물과도 같은 바위섬으로서 천연기념물 제 336호로 지정된 섬인 것이다.
독도란 호칭은 1906년 당시 울릉 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서와, 순국지사 황현(黃玹)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해 독도란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울릉도 주민들은 ‘돌(石)’을 ‘독’이라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 하였다. 울릉도 주민들이 우산도를 ‘독도(돌섬)’라고부르고있음을보고받은대한제국의조정은‘독섬’을의역하여 ‘석도(石島)’로 표기하여 ‘돌섬’ 또는 ‘독도’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이 섬에 대해 우리 영토로서의 내력을『삼국사기』와『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등과 같은 귀중한 문헌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 바, 그에 관한 것은 지면상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 잠깐 해양 주권의 선구자였던 안용복과 박어둔에 관한 숨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안용복은 동래 출신으로 일찍이 편모슬하에서 자라나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평범한 어부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부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수군(水軍)에 복무하고 있었다. 안용복이 살던 조선시대의 병역제도는 지금과는 달리 16세 이상이면 60세가 되기까지 군역을 져야했으니,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병역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육군은 1년에 3개월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만 했고, 수군은 2개조로 나뉘어 한 달씩 교대로 1년에 6개월을 복무해야만 했다. 안용복은 수군에 소속된 노군[櫓軍 : 일명 능노군(能櫓軍)]이었으니 노 젓기 담당 군인이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안용복은 동래 수군의 노군 총관. 즉 노군의 지휘자였다고 한다.
안용복의 고향인 동래에는 일본인들의 내왕이 많았으며 왜관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일본어를 배워 일본말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대마도에 팔려갔기 때문에, 그 여인을 구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어를 익혔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안용복은 이웃 동네의 유유(柳柳)란 아가씨와 서로 좋아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집안 사정에 의해 다대포로 이사 간 이후, 어머니마저 병들어 드러눕게 되고 집안 형편이 더욱 더 어렵게 되자, 어찌하여 대마도로 팔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안용복은 사랑하는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대마도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께서 극구 만류하여 못 가게 되자, 이에 낙망하게 된 나머지 상사병(相思病)으로 드러눕게 되었다고 한다.
외아들이 상사병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드러눕게 되자,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하여 바람도 쐴 겸 울산에 살고 있는 안용복의 이모 댁에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안용복이 울산으로 가던 중 어떤 산적을 만나게 되었다. 용력이 출중하고 검술에 빼어난 안용복은 산적 일당을 제압하고 모조리 체포하였는데, 이 산적들의 본거지가 마침 대마도란 사실을 알아내고는 유유와 교환하는데 성공하여 마침내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안용복은 평범한 어부요 말단 수군의 노군 지휘자였지만, 그는 용력이 출중하고 배포가 큰 담대한 이인(異人)이었음에 틀림없는 인물이다. 지면관계로 간단히 그에 관한 일화를 통해 그의 인물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생략)…『장생죽도기』에서는, 이국인(異國人)을 모아 술을 대접하고 만취한 틈을 타 안용복과 박어둔을 연행했으나, 이것을 눈치 챈 한 패들이 쫓아와 대포를 서로 쏘는 등 흡사 전쟁을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생략)…「“거듭 말하거니와, 이 죽도는 오오따니․무라까와 가(家)에서 일본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섬이기 때문에, 양해도 없이 해마다 도해하는 것은 안 된다.”」며, 본선에 돌아오자 자기편을 얻은 오오따니․무라까와 양가의 선장이 강하게 나왔다.
이에 안용복은「“응, 그러냐! 왜놈들은 이 섬을 죽도라 하나, 우리들은 울릉도라고 부르는 조선 영토로 알고 있다. 이 섬은 신라 시대에 우산국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귀속된 이래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는 바뀌었어도 태고 때부터 버젓한 우리 국토다. 지금은 울진현에 속하고 있는 이 섬을 너희들이 점거한다는 것은 이웃 나라와의 친분을 없애는 해적 행위다.”」고 하니,
「“아무튼 우리 나라 장군님의 위세를 겁내지 않는 큰소리이다. 저 선박의 표지를 보나, 장군으로부터 배수한 물건을 보나, 이 섬은 우리들이 장군으로부터 배령한 것, 이것을 잘 보고 난 뒤 말하라.”」며, 선장 헤이베에(平兵衛)는 몸에 늘 지니고 있는 상어 가죽 통을 품속에서 꺼내고는 정중하게 절하고 나서, 무엇인지 서류 같은 것을 끄집어내 보였으나, 안용복은 외면하고 보지도 않은 채 물러서지 않고 또 말하기를,
「“자고로 이 울릉도는, 산해진미가 풍요로운 섬이지만, 우리 본토로부터는 멀고 거친 바다 속의 외딴 섬이기 때문에, 그것을 약점으로 왜의 해적들이 휩쓰는 곳이 되고, 우리 조정에서는 여기에 백성을 이주시키면, 끌고 가서 노비, 첩 따위로 팔아버리는 등, 무도한 짓을 당해 왔기 때문에, 태종 때부터 섬을 비워 두었던 것이다. 왜구의 못된 짓은 물론, 그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조선을 약취하려고 침략했을 때, 이 섬에 숨어 있던 우리 본토의 유민을 위협함으로 군선을 보낸 일도 있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이 섬을 비워 두고는 있었으나, 앞으로는 어떤 수탈 행위도 그냥 두지 않겠다. 오랫동안 약탈을 일삼아 온 왜놈들이야말로 사과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지 않는가?”」라고 하니,
「“말을 함부로 하는 이 난폭한 놈!”」……하면서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었으나, 21명의 선원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안용복과 박어둔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논쟁하면서 밤은 깊어만 갔다. …(생략)… 여하튼, 안용복과 박어둔은 체포․연행 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일본에까지 동행해 와서 일본 관부에 흑백을 따지려고 한 애국의 지성을 알 수 있다.…(생략)…기록에 의하면, 에도(江戶)에 7일 걸리는 파발꾼을 보내 변고를 급보한 5월 11일, 안용복은 상당히 난폭하게 굴며 폭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놈들아, 기분전환을 위한 외출을 좀 하자.”」니까, 그들은「“아무리 그래도, 에도(江戶)에서 기별이 있을 때까지는 외출이 안 됩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어로일기(御櫓日記)』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안빙사(안용복)는 기분전환을 위해 외출을 하려고 하며, 여러 가지 불평을 했더라.」고 하였다. 이에 외출이 허락되지 않은 안용복은 술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한 되를 주니 날름 마셔버리고, 다시 두 되, 서 되를 마시는 등 밤낮없이 마시면서 떠들어댔다. 이 때문에 술은 ‘하루에 서 되 이상은 안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대주가로 그 호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막부는 안용복의 소청을 물리치지 않고 나가사끼(長崎)로 보내게 결단했다. 에도 시대에는 외국과의 교섭은 나가사끼봉행(長崎奉行)이 하며,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는 대마번의 소오(宗)씨가 맡고 있었다. …(생략)…이 안용복이 던진 파문은 격심한 영토분쟁으로 발전하고, 대마도의 소오씨를 사이에 두고 동래부와 격렬한 논쟁의 응수가 있었다.
소오씨의 서간에 대한 조선의 답신은『숙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국에서는 바다에 도해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으며, 바닷가의 어민을 단속하고 외양에 나가는 것을 못하게 하고 있다. 본국의 영역인 울릉도라 할지라도 역시 멀기 때문에 임의로 내왕을 허락하지 않는다. 항차 그 외의 곳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어선이 감히 귀국의 영역인 죽도에 가서 어지럽게 하였다니 그 깨우침을 멀리 서찰을 보내 전하고, 이웃나라의 우의를 기뻐하는 바임. 어민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영위하니 때로는 바람을 만나 표류하는 화근이 없을 수 없으나, 그렇다고 월경하여 깊이 들어가 번연히 어로를 한다는 것은 법의 징계를 받는다. 지금 어김없이 범인들은 법에 의해 죄를 과할 것임.」이라고 얼빠진 답신을 했던 것이다.
『타계심마잡지(他計甚摩雜誌)』에 의하면, 1695년 5월 20일 조선의 배가 한척오끼도(隱岐島)의아까사끼(赤崎)에왔다.『장생죽도기(長生竹島記)』에서는 …(생략)… 찾아온 사람은 안용복과 예의 박어둔․괴승․뢰헌(雷憲)을 포함한 11인이었다.
이번에는 사로잡힌 몸이 아니고 안용복은 울릉․우산도의 감시 장군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뢰헌 이하 모두 조선의 고관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는 돗도리번(鳥取藩)에서는 또 무슨 난제가 야기되었는가 하고 놀라 당황하며, 먼저 관의 선원 야마사끼(山崎主馬)를 파견하니, 때마침 해상에서 안용복의 배를 발견하고 수척으로 예인하여 오끼도(隱岐島)의 청옥(靑屋)에 끌고 가 경비를 하고, 유자와 쯔지(辻權之丞)를 파견한 바, 한 사람을 전념사(專念寺)에 초청하여 필담을 하였지만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오끼대관 고도(陰岐代官 後藤角右衛門)는 안용복을 만나 내항한 목적을 물으니, 왜인이 우리 울릉도에 다수 와서 영토를 침범하는 것은 괘씸하기 짝이 없어, 백기(伯耆)의 태수 이께다(池田光政)에 소송하러 왔다고 어깨를 우쭐대며 말했다. …(생략)…「“특히 죽도까지는 눈에 띄는 큰 도해 선으로는 물건의 조달 없이는 힘들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당국에서는 도해 선이 육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하고 안용복의 말을 의심하였다. 오오따니․무라까와(大谷, 村川) 선이 요내꼬(米子)에서 죽도에 밀항을 기도하였다면 출항 전에 알려졌으리라. 이 일건은 에도막부(江戶幕府)에 즉시 빠른 말로서 보고되었다.
소식이 있을 때까지는 조선의 고관으로서 안용복 일행은 동선사(東善寺)를 그 밤의 숙박지로 하여 보청봉행(普請奉行)의 기다무라(北村八郞)가 그 시중을 들고, 다음날 21일에는 도다(戶田市右衛門)․마끼노(牧野市郞右衛門)․오까사끼(岡崎藤兵衛)를 위시하여, 도사․무사가 호위하여 일행을 돗도리성(鳥取城) 밑의 동사무실로 옮겼다. 그때의 안용복 일행은 성주라도 된 기분이었으리라.
말 아홉 필에 나누어 타고 전후에 쌍칼 잡이 무사에 호위된 일행은 외국인의 높은 사자(使者)인 양, 연도에 인산으로 모인 구경꾼들도 앞을 지나갈 때에는 허리를 굽혀 바라보는 등, “어험”하고 헛기침 한 번쯤은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보인 광경을『죽도장생기』는 분석하여 재미있게 전하고 있다. 안용복 일행은 요내꼬성(米子城)에 파견된 중신 조사역의 우하라(羽原傳五兵衛)의 접대로 체류 중 요리사는 물론, 잡인에 이르기까지 숙소에 대기 근무하며 조선 고관이라고 믿고 대접했다.
안용복 일행이 관직을 사칭하기는 했으나, 이 일로 인하여 두 번 다시 왜구가 영토를 침범하지 않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거짓과 방편으로 국위를 크게 선양했다고 볼 수 있다. …(생략)… 안용복 일행은 8월 29일에 강원도 양양현 항구에 돌아오니, 그 동안 20일이 경과되었다.…(생략)…「…왜선이 또 많이 몰려와 머물고 있어 뱃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을 때, 두목(안용복을 지칭하는 조선의 표현)이 말하되, 울릉도는 원래 우리 국토이다. 왜인이 어째서 월경하여 침범하는가? 너희들을 모두 결박할 것이라 하니, 이에 두목에게 다가가 대갈하며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원래 송도에 살면서 때로 어업 채취로 여기에 온다. 지금 원래의 곳에 돌아간다. 송도의 우산도 이것은 또한 우리 나라의 국토이다. 너희들 감히 여기에 살 것인가 하면서, 다음날 새벽에 배를 이끌고 우산도에 들어갔던 왜인들이 솥을 걸고 생선, 조개 등을 삶고 있었다.
이에 두목(안용복)은 몽둥이를 들고 큰소리로 이들을 꾸짖자, 왜인들은 수습하여 배에 싣고 돌아갔다. 왜인들을 뒤쫓아 가다가 돌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옥기도(玉岐島)에 닿았다. 도주가 와서 온 연유를 문의한 바, 이에 두목은 말하기를 “근년에 나는 여기에 왔었다. 울릉, 우산 등을 조선의 땅으로 경계를 정함에 있어 관백(막부의 수령)의 서류가 있다. 그런데 본국(일본을 지칭)에는 없는가. 지금 다시 이 섬의 경계를 침범했다. 말하거니와 틀림없이 백기(伯耆)주가 범하였다는 보고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두목이 분노를 참고 원망하며 백주로 승선을 하다. 감시의 장은 바로 사람을 파견하여 도주에게 통고하고 사람과 말을 보내 이들을 맞이하다…」
…(생략)… 대마번이 관백의 서계를 도중에 비법으로 범하고 있다. 나는 관백에게 이 계략을 호소하겠다고 울러대니, 결국 영토문제는 가히 낙착된 문제이므로 안용복은 2개월 동안 극진한 접대로 일본의 뒷면을 구경하고서 돌아왔으니, 안용복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마 도주는 이듬해인 1697년 1월에 형부대보평성 상을 조선에 보내어 관백의 결정을 알리고, 1699년에는 최종 외교문서의 교환으로 일본 측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는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려던 일본 측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양국 간에 거듭 확인되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오로지 안용복의 탁월한 숨은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인을 쫓아내고,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명을 받아내었으며, 1696년에 다시 일본에 가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재확인시키고 돌아왔다. 그러나 울릉우도 감시장 사칭 과 허락 없이 국경을 넘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할 뻔했으나, 남구만, 윤지완 등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이름 없는 무인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안용복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안용복은 매우 훌륭했다. 천한 신분으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에 항거하여 동해의 영토를 지켜낸 훌륭한 민간 외교관의 이인(異人)이었다. 나라에서도 외교적 충돌을 우려하여 조정에서 보낸 서찰에서「……우리 어선이 감히 귀국(일본)의 영역인 죽도(독도)에 가서 어지럽게 하였다니……」라고 하면서, 우리 영토를 포기하는 듯하며 한심하게도 일본의 비위나 맞추어 주는 어리석음의 멍청함을 보여주고 있을 때, 안용복이란 기인(奇人)이 나타나 일본에까지 가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쐐기를 박고 돌아온 이 애국자에게 나라에서 큰상을 내리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죄로 다스렸으니 이 어찌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니겠는가?
독도의 영토가 위험할 때, 안용복이 지켜낸 우리 땅 독도를 두고 요사이에 와서 더욱 더 열심히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취지는 좋으련만, 그런데 우리는 이 노래를 계속해서 불러야만 할 것인가? 아니다. 이 노래는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으니,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따져본 적이 있는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의심해 적이 있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노래를 불러야만 우리 땅이 된다고 여긴다면, 서울은 우리 땅! 부산도 우리 땅이라고 해야만 우리 땅인가 말이다.
이는 착각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되는 더 큰 이유가 또 있다.「…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 최근에는 또다시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이란 이 노래는 당장 걷어치워야만 한다.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인데 왜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리 입으로 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가 말이다. 정히 노래를 부르겠다면, 만주는 우리 땅!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노래해야지. 우리 땅이었던 대마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해 주는 이런 못난 노래를 왜 우리 스스로가 불러야만 하는 것인가? 안용복의 영령 앞에 민망하여 고개를 어찌 들것인가 말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부르기 전에, 동해의 주권을 지켜낸 안용복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어 받는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 국토수호 의지를 다져 나가기로 하자. 독도는 영구불변의 우리 땅이다. 일본은 더 이상 독도를 탐하기 전에, 원래 우리 땅인 대마도부터 반환하라! 남의 영토를 탐하려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알고, 안용복과의 약속을 기억하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경고하노니, 남의 영토를 넘보는 것은 국제적인 범죄행위란 것도 명심하라! 우리는 결코 당신네의 어떠한 영토도 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