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락·우리감각의 세계화를 꿈꾼다
상병이었던 음대 3년 후배는 군악대장에게 각종 콩쿨에서 수상한 박재천의
음악재능을 알렸다. 때마침 방영된 KBS 연예가 중계에서 “박재천이 대학시절 작곡했던 희귀한 프로그래시브 가요가 영화<영웅연가>의 주제가로 채택되었다”고 소개되자 훈련소 최대 화재로 떠올랐다.
곧바로 군악대장과 면담이 성사되며 공수부대와 한바탕 전쟁까지 치뤄가며 박재천은 지휘 및 편곡담당으로 특채 됐다. 군악대장은 유능한 아티스트가 육군 군악대에 있다는 홍보를 위해 장기간 휴가까지 내주며 미완성음반의 완성을 명령했다.
1980년대 후반은 온통 발라드천국. 우리 가요로 프로그레시브록을 만들어 천편일률적인 풍토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절친했던 음악 친구 김종찬의 누나가 운영했던 방배동의 라이브 카페 에드립은 아지트였다.
당시 이곳은 한영애, 조덕배, 전인권 등이 노래를 부르던 무대. 주제가로 선정된 <영웅연가>는 원래 전인권이 노래하기로 했지만 록그룹 들국화 리더로 빠지면서 무산되었다.
또한 한영애와 조덕배에게도 노래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지만 음악 색깔이 다른 인기 가수들을 독집도 아닌 무명 작곡가의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시키기에는 힘이 부쳤다.
대안으로 김종찬, 김정욱,정건택 등 음악 친구들과 앨범제작에 들어갔다. 히트곡<슬픈노래는 싫어요>로 유명했던 제작자 유승엽은 <해지는 바다> 등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수록곡들을 들으며 “여자 귀신이 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타이틀을 DEVIL MUSIC으로 정했다.
이렇게 군악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발표된 첫 앨범은 <박재천의 DEVIL MUSIC-서라벌,OSR~002.87년>. 그러나 음반사는 가수왕으로 떠오른 김종찬의 새 앨범으로 음반을 변조하여 재판을 발행했다. 제대 후 이 사실을 알고 격분, 음반을 전량 회수했다.
89년 울적한 마음도 식히고 국악공부에 더욱 정진하러 전남 구례로 훌쩍 내려갔다.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 강도근 선생의 제자 임윤명에게 판소리를 구례 민속 농악단 상쇠인 유순자에게 장구와 꽹과리를 익혔다.
또한 토속적인 무속음악을 익히기 위해 진도 무당인 정보살 일행에 북잡이 노릇을 하며 음악순례를 했다. 새로운 대중가요가락을 빚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섭외한 가수들은 “웬 판소리, 민요냐”는 비아냥 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직접 노래도 했다. 사물놀이와 대금의 토속가락에 신디사이저와 첨단의 컴퓨터음향으로 무장한 <박재천 사주팔자-서울음반, SPDR-261,91년6월>. 박재천은 “타이틀의 사주팔자는 개똥이다. 나는 anti 사주팔자를 말하고 싶었다. 원초적인 사주팔자에서 더 큰 신 예수님으로 가는 과정을 컨셉으로 음악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무겁고 진지했던 그의 음악은 동시대의 영웅 <서태지와 아이들>의 신드롬에 휘말려 침몰했다. 주류 물결이던 발라드를 단숨에 밀쳐낸 재능 있고 통통 튀는 최초의 3인조 남성 랩 댄스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에 온 나라의 눈과 귀는 봉쇄당했다.
일부 팬들은 <사주팔자>의 비범함을 눈치챘지만 서태지 열풍은 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거센 물결이었다. 세상은 두 명의 영웅을 동시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악 PD 김진성도 “나는 제2의 한대수가 탄생한 줄로만 알았다.
서태지 뿐 만 아니라 박재천도 우리 대중 가요판을 뒤집으리라 생각했다. 이 음악을 대중가요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며 아쉬움을 지우지 못한다. 설상가상 박재천은 MBC로부터 7주간이나 가요차트 1위를 고수하던 김국환의 <타타타> 백음악으로 <사주팔자>의 판소리와 연주를 해달라는 굴욕적인 제안을 받자 미련없이 가요판을 떠났다.
이후 <사주팔자>그룹과 함께 민단,조총련, 일본의 음악아티스트들이 동참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한 일본 오사카의 ONE KOREA FESTIVAL 음악축제에 참여했다. 93년엔 음대 출신 뮤지션들과 <몰이모리>라는 퓨전 재즈 록밴드를 결성, 전통 장단에 클래식,재즈, 록을 버무리는 실험을 거듭했다.
대전 EXPO 개회식때는 한라산 꼭대기에 아이젠을 싣고 올라가 대북 연주를 하는 모습이 전세계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95년엔 멕시코, 미국의 연주인들과 다국적 펴큐션밴드 를 결성, 미국투어에 나섰다.
세계인이 공감하는 현대적 감각의 한국음악을 꿈꾸는 작업이었다. 영적인 소리탐구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재즈의 대중화에 불을 지피는 작은 호응도 얻어냈다.
몇 년 전부터는 평생의 반려자인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미연과 함께 러시아, 미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전세계의 유명 음악 페스티발과 각종 국내무대에서 장소를 가리지않고 자유로운 우리 가락의 프리 재즈 선율을 함께 펼치며 행복해 하는 박채천.
최근 일본측으로부터 한일 월드컵 축가의 작곡과 연주를 의뢰 받았을 만큼 일본의 월드 뮤직팬들은 박재천의 한국가락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불혹의 나이로 접어들 때까지 음악속에서 살아오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곡을 정성스럽게 완성했다.
사도신경을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으로 녹여 타악기로 표현하여 이란 타이틀로 다섯 번째 음반을 발표했다.
“타악기로 가능한 영역의 모든 것을 하려한다. 각 나라엔 고유한 리듬과 정서가 있듯 예술에도 국경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가요의 근본인 판소리를 알아야 모든 걸 응용하고 발전 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판소리의 맛을 이해하는 가수가 있다면 언제라도 대중 가요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대중가요에 변치 않는 애정을 표출한다. 국적 없고 자극성 강한 미국식 인스턴트 음악에 중독된 국내 대중가요계에 박재천이 빚어대는 우리 가락과 고품격 월드 뮤직의 접목은 요원한 것일까?
박재천이 꿈꾸는 세계인이 공감하는 완성된 현대적 감각의 한국 가락의 만개한 꽃망울은 어떤 빛깔일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