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인 불교와 기독교의 파아나두라 (Sri Lanka) 대논쟁
송광섭
미주현대불교
http://cafe.daum.net/mobuddhis
2015.04.10
토론의 개요
스리랑카에서1865년부터 1873년에 걸쳐, 불교와 기독교 교단간의 합의에 의하여 종교적 합리성과 본질에 대하여 대규모의 토론이 군중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다섯 번 거행되었다. 스리랑카의 종교적 도시 다섯 곳에서 이루어진 토론은, 민주적이며 비폭력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들 일련의 논쟁을 “판차 마하 와다야”, 즉 5대 논쟁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는 1865년 2월 스리랑카 남부 밧데가마 (Baddegama)에서 벌어진 논쟁, 두 번째는 같은 해 8월, 스리랑카의 옛 수도였던 콜롬보 근교인 와라고오다 (Waragoda) 논쟁, 세 번째는 1866년 2월 중부 지방인 우단비타 (Udanvita) 논쟁, 네 번째는 1871년 6월 같은 중부 지방인 감폴라(Gampola) 에서 논쟁이 있었다. 이 같은 네 번에 걸친 논쟁을 총결산하는 형태로서 다섯 번째의 대론은 콜롬보에서 가까운 해안의 어촌 파아나두라 (Panadura)에서 열렸다.
계속된 논쟁 중에서, 다섯 번째 대론, 즉 1873년 8월26일과 8월28일 양일간에 걸쳐 파아나두라에서 행해진 파아나두라 논쟁은 논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 토론의 결과로서 스리랑카내의 불교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중흥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역사적인 이틀간의 논쟁에는, 불교 측에서 모호티와테 구나아난다 (Mohottiwatte Gunananda) 비구가 참가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첫째 날에는 데이비드 데 실바( David De Silva) 목사, 둘째 날에는 시리만나(Sirimanna) 전도사가 토론자로서 참가했다. 청중은 첫날 5천 명, 두 번째 날은 1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 앞에서 행해진 종교적 논쟁은 타 종교와 융화(融和)와 공생(共生)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인 대화가 아니고,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의 우위와 정당성을 주장하며, 승부를 가리려고 치열하게 다툰 논쟁이었다. 그러므로 양 진영에서는 대론자 외에도 양측 종교를 대표하는 장로와 유력자들이 배석했다. 불교 측에서는 스리랑카 불교의 대지도자인 스망갈라 (Sumangala) 장로를 비롯해서 구나라타나(Gunaratana) 장로 등 4명이 임석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런던(London) 목사를 비롯한 세 명의 목사와 의사, 변호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 인사들이 임석했다. 그들은 이 토론에서 감시위원인 동시에 목격자 역할을 했다.
이 대론의 성격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전체 진행 규정을 엄밀하게 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엄숙하게 양 종교 교리의 우열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논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교 간 대화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도, 또 오늘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첫번째 토론의 요약
1873년 8월 26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에 걸쳐 실바 목사가 지적한 불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한 구나난다 스님과 실바 목사 간에 있었던 논쟁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대론에 나선 실바 목사는 이 토론의 규정에 따라 먼저 불교의 허위성을 폭로하고자 불교 교리에서는 영혼이 존재치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 도덕이 성립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불교 측의 구나난다 스님은 만약 기독교가 설하는 것과 같이 영원 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살인을 범했다 해도 별문제가 없다는 데에 귀결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해도 영혼은 불멸하기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에게 불멸의 생명 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거꾸로 윤리 도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라고 되받아 쳤다. 영혼 불멸 론이 도덕 성립을 위해서 절대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는 실바 목사의 잘못된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또한 구나아난다 스님은 <개신교 계통의 성서(聖書)에서 성서 본래의 가르침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 있다>, 또는 <저희 멋대로 변형 시켰던가, 혹은 삭제해 버렸다고 지적하며 구약성서 《레위기》 17장의 기술이 삭제된 부분을 지적했다. 기독교인들이 이같이 자의적으로 성경을 멋대로 고친 태도를 비난했다. 그러고 나서 기독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서 역시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20장 5절의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 God)이므로> 를 인용해, 기독교의 하나님은 질투심이라는 중대한 결점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고, 구제의 하나님도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 절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성경이 각 지역에서 신앙하고 있는 신들의 이름을 빌려 임기응변식으로 번역되어 하나님의 유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틀간의 논쟁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이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1873.8.26/오전 09시 부터10시까지 계속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의 이론에 대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을 석오진 스님의 저서의 기록에서 인용한다.
데이비드데실바 목사의 이론에 대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
[1873.8.26/오전 09시 부터10시까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발표한 불교의 비판은 처음부터 인정될 수 없는 반론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중들이 그의 반론을 듣고 진정으로 이해를 했는지는 저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반론으로 제기한 불교 경전의 인용문에 대해서 큰 착오가 있었음을 미리 밝혀 두며 인용한 문장의 의미, 혹 사상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한 예를 든다면,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부분은 사람이 죽을 때 그 움직임을 중지하게 되며, 그 때문에 죽은 후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하고 여러분들 중에 몇 분께서는 벌써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도 똑같은 생각이며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서 반론하고자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금세 (今世)와 내세 (來世)에 오온으로부터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오고 가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의 오온으로 부터, 죽는 사람과 함께 내세에 아무 것도 가지 않지만, 죽은 자 대신에 저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죽은 자 그 자신인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가르침은 대단히 난해하며 그것은 파알리(Pali)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는 파알리어를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파알리어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파알리어에 대한 그의 무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저서인 <그란타세카라 (Grantha-sekara)>라고 하는 책을 보기로 합시다. 이 책에서 신약성서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4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파알리어의 문장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단어를 단 4개밖에 사용하지 않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틀린 문법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문장은 <티와나모 파칫토호투(tava namo pachitto hotu)>라는 문장으로서, 파칫토(pachitto)라고 하는 팔리어의 단어는 없습니다. 그것은 파윗토 (pavitto)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와나모(tava namo)라고 남성명사를 사용한 것도 틀린 것입니다. 그러한 짧고 단순한 문장도 정확히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어느 정도로 팔리어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문법에 틀림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하시더라도 여기에 배석하시고 계신 유명한 파알리어 학자이신 스님들은 이미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파알리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온에 대한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가소로운 일아 아닐까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온(色蘊, Rupaskandha, 육체), 수온(受蘊, Vedanaskanda, 감각, 지각), 상온(想蘊, Sanna-skandha, 인식, 견식), 행온(行蘊, Sankharaskanda, 식별력), 그리고 식온(識 , vinnanaskandha, 외면적 자각)을 말하며, 색온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이는 육신이라는 의미이며, 수온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 육체적인 형체는 남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묘지까지 가지고 가서 묘를 만드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즉 수(受)는 다시 말해서 고(苦)와 락(樂)을 의식하는 동작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저 세상에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대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남이 아닌 그 자신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혼(魂)이 육신에서 빠져나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가 인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안에 있는 혼은 인간의 영(靈)이라고 우리들은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해 천국으로 간다면 천국에 거주하는 영은 반드시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계신 목사님이 이 장소를 떠나서 웰라왓타에 간다고 합시다. 그는 그곳에 간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웰라왓타에서도 그는 그곳에서 알려져 있는 똑같은 이름으로써 불리워 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이 만약 육체를 이탈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이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는 또 하나의 증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 손에 들고 있는 성경책은 모세(Moses)와 그 외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께서 보시는 이 손에 든 성경책은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본래의 성경책으로부터 전혀 다른 책으로 변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변형된 성경으로부터 수많은 변형과 변형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내용에 관해서는 크게 변함이 없으리라 봅니다만 이 성경책 본래의 글자나 페이지 수 등은 변형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대로이나 그 이외의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죽은 후 이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부분 혹은 몸의 어느 일부분이 저 세상으로 가지 않아도 죽은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있으니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고 가는, 즉 윤회(transmigrate)하는 인간은 동일한 인물인가, 그렇지 않은가? 동일한 영혼(identical soul)이 어떤 것은 인간으로 윤회하고 혹은 신으로 또는 천신과 다른 존재로 윤회하는가?
만약 동일한 인간이 이 세상에 죽어 저 세상으로 윤회한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죽음도 없는 것이며 살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살생을 해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는가.(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이 세상에서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는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그와 동일한 사람 혹은 생명체의 존재 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임.)
이 인용은 파알리 삼장(三藏) 중 논장(論藏)의 하나인 <아비담마 피타카 (Abhidhamma pitaka)> 카타왓투 (Ka-thavatthu, 論事)에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인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만약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천국에 체재하는 것은 우리들 인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에 반해서 만약 천국에 있는 자들이 모두 신(God)이라 하면 인간이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틀린 논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보아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에는 하나님과 같은 영혼이 존재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만약에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 즉시 직접 천국에 가는 불멸(不滅)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살인 범죄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에게 불멸(不滅)의 생명 혹은 그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 순간 죽어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히 죽는 죽음입니다. 마음속의 모든 사고방식은 순간적으로 생(生)하고 또한 순간적으로 멸(滅)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일어난 생각이 사라진 뒤에 일어나는 생각은 결코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생각이 일어나며 또한 소멸되는 것을 순간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육신은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생하며 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서른 두 가지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일주일에 반 인치 정도 자라는 머리카락이며, 머리카락은 자라면서 흩어져 없어지기도 하고 뽑히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빠르게 자라는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고 혹은 자연히 빠지고 하는 것이 없이 오직 자라기만 하고 빠지지 않는다고 하면 1년에 자라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상당히 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머리에 있는 머리카락은 결코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있던 그 머리카락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전체의 다른 부분도 생(生)하고 자라며 또한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색온에 포함되는 부분 혹은 물질적인 육신은 순간적인 죽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늙은 후 혹은 육체의 모든 감각 기관이 힘을 전부 써 버린 후에 일어나는 현상을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죽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옛날의 심식(心識)은 다 없어지고 또 다른 새로운 심식이 생기게 되는데,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식은 쇠사슬의 고리(link)와 같이 중간에 끊이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영혼을 갖는다고 하면, 그리고 이 영혼이 천국으로 모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영혼일까요? 그것은 자른 통나무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과일과 같은 것일까요? 혹은 계란과 같은 것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우리 기독교의 목사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자체가 저 세상을 가는 영혼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목사님은 인간이 이 육체에서 떠나서 천국으로 가는 불멸의 보배, 혹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말씀하신 영혼이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다른 곳과 함께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정지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저는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죽어 가는 사람을 금속으로 만든 용기에 넣어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통조림통과 같이 한다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은 그 용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곳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는 다른 좋은 방도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영혼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간다고 한다면,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죽은 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영혼은 없다는 것이 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불타께서는 <자기 자신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인용에 의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죽어 가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변화되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죽어간 사람 그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착한 행위 혹은 나쁜 행위의 결과를 저 세상에서 보은(報恩) 혹은 벌(罰)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 더 많은 증거로서 증명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금후 다시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상은 데이비드 목사가 불교에 반대해서 말한 질문에 대답했고, 이하는 구나난다 스님이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시작함. 불교를 반대 공격하기 위해서 목사님께서 이 앞에 한 시간 동안 예를 들며 말씀하신 질문들은 제가 대답한 것으로 인하여 모두 논파되어 버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아직도 말하고 싶은 것은 태산과 같이 많습니다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아직도 저의 시간이 남아 있게 때문에 지금부터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기독교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진정한 민중 구제의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제일 간단명료하게 납득시킬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20장의 왜냐하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의 질투하는 하나님>에서 '질투하는', 즉 젤러스(jealous)라는 말이 싱할라어로 즈와리타 데비요(Jwalita Deviyo)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찬란한 신>입니다. 이 번역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젤러스라는 것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젤러스라는 것은 ‘질투가 심하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두 가지의 말을 정확하게 싱할라어로 번역한다면 그들이(기독교 목사) 일반 민중들을 속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서 사람들을 옳지 못한 길로 유도하는 것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을 번뇌에서 구제하기보다는 이미 신앙하고 있는 종교에서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改宗)시키려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갖게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증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인도 켈커타의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신(神), 즉 하나님을 이슈와라(Iswara)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힌두교도들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신이 이슈와라였기 때문에 기독교도들도 그들의 하나님을 이슈와라라고 이름하여 불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도의 어떤 시의 한 구절인 "이슈와라이카 수테 크루스테 (Kswaraika sute kruste)"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싱할라 민족도 데비요 (Deviyo, 神)들에 대해서 대단히 존경하며 숭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나라(스리랑카)에서는 여호와(Jehovah)를 데비요 (Deviyo)라고 이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기독교 전도 집회에서 사실과 전혀 다른 잘못된 해석의 설교를 하는 것이 극히 일반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깨끗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여 포교를 하는 것은 자기들의 종교에 다른 종교도들이 많이 개종할 것을 기대하는 속셈이 있어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전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 본래 내용의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증명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증거도 있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제17장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마귀들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인용은 1840년에 싱할라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발행한 성경에서는 똑같은 문장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네들이 성경에서 삭제한 것은 어쩌면 이 문장에 의해서 기독교도들이 마귀들에게 제사를 행했을 것이라고 믿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변형·삭제 시키는 것은 기독교도들 속에서 늘 행해졌던 사실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저는 로마의 가톨릭교도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문장을 그렇게 변형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기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6장 제6절에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을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여호와가 걱정거리가 생기게 된 것은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장래의 걱정거리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일체의 지자(知者)이시며 또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장래의 걱정거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보아도 여호와는 미래를 보는 성스러운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한 어떠한 일로 후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전지전능한 자로서, 그리고 우주의 창조자로서 믿고 의지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가 옳지 못한 종교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께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12장 23절과 24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안방과 좌우 기둥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는 무엇인가 어떤 표적이 없으면 이집트 사람의 집을 분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님이 길을 걷기 위해서 어떠한 안내자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도 집안에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그것을 증명할 만한 표시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런 극히 일반적인 지혜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을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믿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인용에 대해서 우리의 친구인 목사님께서 그것을 기독교의 죽음의 표시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하고서 그대로 넘겨 회피하려 하지만 저는 결코 그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로서,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4장 제9절에 <만약에 그들이 이 두 기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여호와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의심이 없었다면 <만약 처음의 표시를 믿지 않았다면 후의 표시를 믿을 것이다.>(출애급기 제4장 제8절)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아도 여호와는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서 여호와는 자기의 신성한 지혜에 결점을 더한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사사기(士師記) 제1장 제19절을 잘 들어주십시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撤兵車)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유다와 같이 있던 여호와는 그들이 철로 만든 병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전지전능한 자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신앙이 얼마나 유치한 것입니까!
철(鐵)을 무서워하는 것은 스리랑카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하나의 습관인 것입니다. 만약 어두운 밤에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라든가, 혹은 음식을 가지고 갈 때는 음식과 함께 철로 만들어진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는데, 그것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스리랑카 민족의 관습인 것입니다.
또 한약처럼 달이는 약일 때에는 그 달이는 용기의 겉 부분에 어떤 철물을 실로 묶어 놓고 약을 달이곤 했는데, 그것은 악령(惡靈)들의 악행의 침해를 막기 위해서 행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만약에 여호와가 철제품을 무서워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명확한 해답을 얻으셨으리라 믿기 때문에 저는 이곳에서 누누이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어떠한 자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예를 기독교 성경에서 인용하겠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4장 제24절과 25절에는 <여호와께서 어떤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시어 그를 죽이려 하는지라, 그것을 보고 있던 십보라(모세의 부인)가 예리한 차돌을 가지고 그 아들의 표피(남자 성기의 겉 표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의 남편이로다.’ 하오니 그를 놓아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볼 것 같으면 여호와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으로 선정된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부인 십보라는 자신의 아들 표피를 잘라서 자기의 남편인 모세를 구했던 것입니다.
저는 청중이신 여러분들께서 할례제(Circumcision)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지금의 저로서는 그것이 간단치 못한 것이 극히 유감입니다. 그 의례(儀禮)는 마호메트교(이슬람교)도들 가운데에서 어린애가 처음으로 마호메트교에 입문할 때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십보라로 부터 그 아들의 표피를 받은 후 모세를 놓아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스리랑카 민족의 관습 하나를 보면, 만약에 어떤 사람 누군가가 악령(惡靈)에 걸려 있다 하면 그 악령에게 닭을 헌납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때 그 닭 전체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 닭의 숱만을 잘라서 악령에게 헌납하며, 양을 헌납할 때도 그 양을 통째로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 양의 귀한 부분을 잘라서 악령에게 헌납하여 제사를 지내서 악령에 걸려 있는 자를 구하곤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십보라가 자신의 아들 표피를 잘라서 여호와께 헌납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신앙하고 있는 그 특색을 아는 것은 우리들로서는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