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빙하기
권기선
그날 지구에는 밀가루처럼 눈이 내렸다. 나쁜 마음을 먹기도 해야 하는 일일까. 쌓이는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다 이렇게 살아,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말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었다. 목적지 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
심호흡하고 나면 하늘의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사람에 상처받아 일을 그만둔 나는 빙하기 같았다. 세상 모든 일을 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굴다
미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되지는 말아라,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혼자 술잔을 이어간 날
내 방에도 밀가루처럼 눈이 내렸다. 사람을 탓했고 사람들을 원망했다.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내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고 사람과 대화를 나눈 계절은 끝나 빙하기가 시작된 것 같은,
지구가 얼어붙고 이제 건조한 영화가 시작된 것 같은,
사랑하는 일을 말하고 기억하는 것의 온도가 깨진,
사람과 멀어지는 계절과 사람이 싫어지는 계절만 있는 나라
따뜻한 사람이고자 했던 내가 약해지는 모습으로 점점 추락하고 마는 시간이었던,
차가운 눈이 내리는 방
내 방에서 가장 슬픈 눈물이 뭉치고 있다.
아름다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닌
마음의 빙하기
그날 지구는 폭포수 같은 눈을 계속해서 내렸다. 나쁜 행성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애지 2023년 가을호에서
우리 세대, 즉, 농경민의 세대인 우리들에게는 하얀 눈이 쌀가루처럼 내린다고 생각했지만, 서양식 음식문화에 익숙한 요즈음 젊은이들에게는 하얀 눈이 밀가루처럼 생각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얀 눈이 쌀가루처럼 내리거나, 또는 밀가루처럼 내리거나 그것은 가난과 관련이 있고, 그 옛날의 농경사회나 요즈음의 산업사회나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은 부유함과 가난이라는 양극화 구조 속에 가난한 사람들일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풍요롭게 보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더없이 서럽고 슬프게만 보인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좁디 좁고 할 일도 없다.
권기선 시인의 [if 빙하기]는 “아름다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닌/ 마음의 빙하기”이며, “사람에 상처받아 일을 그만둔” 자기 자신의 처지와 그 마음을 ‘빙하기’로 표현한 매우 아름답고 슬픈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람은 다 이렇게 살아,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말”과 “세상 모든 일을 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굴다/ 미친 사람들이 있다” 사이의 갈등과 고민도 있고, “내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사람과 멀어지는 계절과 사람이 싫어지는 계절만 있는 나라”에서 “따뜻한 사람이고자 했던 내가 약해지는 모습으로 점점 추락하고 마는 시간”도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먼지처럼 왔다가 먼지처럼 떠돌다가 우리는 기어코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흙수저와 금수저, 명문학교와 비명문학교, 고위공직자와 하급관리, 회장과 사원, 실업자와 대통령 등----. 하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같이 먼지처럼 왔다가 먼지처럼 사라져간다면 이 모든 것은 뜬구름 속의 소꿉장난과도 같은 것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평범하게 살 수도 없고, 이 세상의 모든 짊을 다 짊어지고 영웅호걸처럼 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평범과 비범, 가난과 부유함, 취업과 실직 사이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권기선 시인의 고민은 깊어지고, 그 어떤 출구도 없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if 빙하기]로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삶의 의지는 꿈이고, 꿈은 그 어떤 병도 다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꿈이 있으면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길을 가고, 꿈이 있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거나 벼락거지가 되었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모든 의지는 꿈이고, 모든 병은 꿈을 잃어버린 마음의 병이다. 권기선 시인의 [if 빙하기]는 꿈을 상실한 자로서의 마음의 병의 산물이며, 아직 젊고 건강하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로서 암중모색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빙하기는 모든 것이 다 얼어붙고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시기이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꿈을 찾는다면 반드시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이 좋아지고 사람과 가까워지는 마음의 해빙기, 이 해빙기에서 무한한 성실성을 연주하며 “따뜻한 사람이고자 했던” 권기선 시인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우리 한국어의 영광 속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시인의 둥지를 틀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구상의 가장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밀가루 같은 눈이 쏟아지고, 어서 빨리 “나쁜 행성이 되어가는” 지구의 질병이 퇴치되고, 모두가 다같이 밝고 명랑하고 행복하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