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막 10: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막 10: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막 10: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막 10: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막 10: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막 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인간관계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정말 변화되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벽에 부딪혀 하는 질문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배우자와 사이가 안 좋아서 기도와 말씀으로 생각을 변화시키려 노력했는데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더 상대방을 잘 섬길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인데요, 이런 질문은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질문입니다.
실제 제가 겪은 일인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유학 중에 만난 젊은 부부 후배였는데 부인이 자꾸 바람을 피우는데 어떻게 하면 아내를 잘 섬길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형제의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여자니까 더 잘 알 거라면서 저에게 물어왔는데 이 형제는 좋은 직업, 좋은 가문, 많은 재산, 출중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고 여자는 모든 면에서 별 볼 일 없었으나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경우였습니다. 완전 호세아와 고멜이죠. 그 자매도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놀라운 것은 자기는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는 겁니다! (바람이 났으니까요) 사실 그 부부가 왜 미혼인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의아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 언젠간 자기 나라를 떠날 외국인인 저에게 물어봤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형제에게 그런 여자랑은 당장 이혼하고 더 좋은 자매를 만나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 여자는 너를 남편으로 가질 자격이 없고, 너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자격이 된다고...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요. 제가 해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뭐라고 해줄 말은 없지만 너희 부부를 위해 기도하겠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그 형제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관계가 회복되어 지금은 애도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 이후 이유 없이 저를 피해 다녔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린 뒤 제 페북에 와서 감사하단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가 뭐에 홀려서 너무나 정신없이 살았고 지금은 정신 차리고 가정을 지키고 있다고요.
그 형제의 질문은 답을 알고자 했던 진정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그 반대입니다. 평범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상대방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진짜 하고자 하는 말 = 나는 정말 문제가 없는데 상대가 문제에요. 어떻게 하면 상대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가진 사람들이 상담하기를 좋아하는데, 사실 이미 자기 안에 상대가 문제라 상대가 변해야 한다는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지만, 자신이 듣기 원하는 답을 전문가에게 들으려고 상담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자기 마음에 자기만의 답을 정해놨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성경적인 조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를 마음이 완악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완악하다는 말이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인 데다가 성경 원어를 그대로 번역한 말은 아니라 모호합니다. 원어를 보면 마음이 돌 같다,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니까 ‘자기 뜻을 이미 정해 굳혔고 바꾸지 않을 것이다, 즉 고집부린다’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는 '답정너')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 굳어져서 절대로 돌아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신 것을 허락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서 언급된 이혼, 일부다처제, 그리고 노예제도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두 번, 세 번 결혼하려 해서 이혼을 허락하셔야 했고,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살기 원하고 어떤 여자는 유부남의 여자가 되려고 하니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구약시대). 어떤 사람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타인을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노예근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허락하시게 된 것입니다(이것도 구약시대 때 얘기로 억지로 노예 삼은 것은 제외).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신 것이지 하나님은 이혼, 일부다처제(성경의 인물들이 여러 아내를 둔 일), 노예제도를 만드신 장본인이 아니십니다.
이 완악함의 문제를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어떤 것은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인생이 한결 수월해집니다. 하나님조차도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의도하지 않으셨던 것을 허락해야 할 정도인데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고집부리는 상대 인간을 꺾겠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 고집스런 상대를 또 꺾어 보겠다는 더 고집 센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은 하지 않지만 "어떻게 하면 상대의 고집을 꺾어 내가 편한 환경을 만들지 묻는 것"이 이들이 상담을 원하는 이유입니다.(모든 상담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최선은, 남편은 아내를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예수님을 존중하듯 존중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실천하는 부부는 없겠지만 이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설교할 때마다 좋은 반응을 본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쪽 배우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할 생각이 전혀 없거나 또는 더 나아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마음에 이미 결정하여 완악해졌다면 그 사람을 변화시킬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어떻게 못 하시는데, 그 사람이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대상인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없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그런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계속적인 중보기도로 변화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지만 결정은 당사자가 합니다)
여러분의 배우자가 만일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려는 노력,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 그 사람을 고쳐서 써 보려는 노력,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달려가시고 가능하다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되라는 배우자가 되십시오. 그렇다고 '지성이면 감천이라 그 사람도 변화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부푼 희망을 터뜨려 죄송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고 본인이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갈구했던 사랑은 영원히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나를 묶고 있던 속박은 끊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자유함으로 더욱 하나님께 달려나가 온전하신 그분의 사랑으로 나의 그 빈 공간이 채워지면, 애초에 내가 원했던 것은 그 사람의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