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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부천 제2회 전국시낭송대회 본선지정시 원문]
순번 | 시 인 | 제 목 | 순번 | 시 인 | 제 목 |
1 | 강 수 경 | 눈물이 필요한 이유 | 26 | 우 형 숙 | 일출 |
2 | 고 경 숙 | 길, 낭만에 대하여 | 27 | 유 국 환 | 가리비 껍데기 |
3 | 곽 동 희 | 봄 얼굴 | 28 | 유 미 애 | 견습공 |
4 | 곽 욱 열 | 산수유 | 29 | 유 승 우 | 어둠의 새끼들 |
5 | 구 유 현 | 내 고향 | 30 | 윤 석 금 | 밸도 없고 속도 없다 |
6 | 권 정 선 | 그리움의 끝은 언제나 | 31 | 윤 윤 근 | 오월의 잡초처럼 |
7 | 김 경 식 | 아지랑이 필 무렵 | 32 | 이 가 은 | 하늘과 땅이 안개 속에서만 포옹하는 |
8 | 김 명 숙 | 혼자가 아닌 여럿은 | 33 | 이 건 선 | 금줄 |
9 | 김 성 배 | 가파도의 노래 | 34 | 이 남 철 | 별이 빛나는 유리창에 |
10 | 김 승 동 | 카테리나행 기차 | 35 | 이 봉 영 | 상월초등학교 |
11 | 김 옥 순 | 동지 팥죽 | 36 | 이 오 장 | 상여소리69 |
12 | 김 원 준 | 그 놈 없었으면 | 37 | 이 재 학 | 엄마가 치매야 |
13 | 김 은 혜 | 나라는 이름의 상자놀이4 | 38 | 이 종 헌 | 대장동 들판에 서서 |
14 | 김 종 순 | 그런 친구로 살자 | 39 | 이 창 원 | 모악산 비나리 |
15 | 김 철 기 | 숲에 사는 소리 | 40 | 이 천 명 | 눈 먼 사랑 |
16 | 김 해 빈 | 무의도 도꼬마리 | 41 | 임 내 영 | 눈물의 농도 |
17 | 문 신 진 | 그립고 그립다 | 42 | 임 숙 희 | 당신과 함께하는 아침 |
18 | 박 미 현 | 중년이 되어 | 43 | 정 령 | 고추 |
19 | 박 수 호 | 엽서 | 44 | 정 무 현 | 잉태 |
20 | 박 영 녀 | 노가리 천 원 | 45 | 정 재 령 | 불면 |
21 | 박 용 섭 | 젖은 편지 | 46 | 주 응 규 | 신촌의 아침 풍경 |
22 | 박 희 주 | 범부의 노래 | 47 | 허 윤 설 | 유모차가 불안하다 |
23 | 서 금 숙 | 시풍 당당 | 48 | 홍 명 근 | 꿈의 퍼즐 |
24 | 안 선 희 | 인연 | 49 | 홍 순 실 | 억겁의 길목에서 |
25 | 양 성 수 | 서럽고 서럽고 서러운이야기 | 50 | 홍 영 수 | 되리 |
1.눈물이 필요한 이유 / 강수경
명자나무 잎이 무성합니다
꽃은 언제 폈다 졌을까요?
어떤 향기가 났을까요?
길을 걷다 언뜻
본 것도 같습니다
떨기마다 우거진 잎에는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빛바랜 일상들이 줄기를 붙들고
축 처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마음에
먼지가 쌓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걸음을 멈춰
지친 어깨의 먼지를 미리미리
털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오늘, 명자나무 잎이
유난히 반짝이며 맑게 웃는 것은
어제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2.길, 낭만에 대하여 / 고경숙
우시장(牛市場)에서 극장까지 가는 길은
영화처럼 슬펐어요
새벽이면 안개 덜 걷힌 길을
고삐 잡힌 소들 걸어와
입 꾹 다물고 외지로 나갈 트럭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길,
영물이라 제 운명을 안다더니만
철 든 녀석들이 흘린 통방울 같은 눈알들
톡톡 발에 채이는 신작로엔
그래서 늘 자갈투성이었죠
용각산 같은 먼지가 노을에 묻힐 무렵
극장 간판엔 십자성 반짝이고
선술집에서 소변보러 나온 술꾼들이
휘청이며 어둠 속으로 들어설 때면
애수에 젖은 문희가 오늘은 또 누구를 기다리는지,
산다는 것은 잠깐이어서
철없이 자갈길 걸으며 걷어찬 적도 많고
문희처럼 사랑하고 실연도 하지만
그래요, 유행가 가사처럼
이제와 새삼 낭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재개발로 곧 없어진다는 우시장
그 길 한켠에
아주 가끔씩 올려지는 추억의 명화가
지금 상영 중이거든요.
호호 여주인공요? 문희는 아니에요.
3.봄 얼굴 / 곽동희
봉인(封印)된 지 삼 년 만에
오지 않을 손님처럼
벚꽃 잎이 찾아 들어오고
흰나비 날아들고
사람들의 사랑이 들려오고
겨우내 꽁꽁 싸맨 쥐똥나무
쥐똥나무엔 쥐똥 냄새 아니 나고
봄 향기 난다
이파리 청청한 초록 향기 내뿜고
봄아, 봄아
발걸음 가벼운 얼굴로 걸어 들어오라고
아기손바닥 같이 천천히 나풀나풀
자목련 살포시 내려앉는다 하여도
나는 춤 출 테야
가쁜 숨 헉헉, 계단 앞에 와있는 얼굴
물오른 버들잎 입에 물고
붉으락푸르락 휘저어
연둣빛 풍경 안으로 걸어오라고
걸어 들어오라고
화사한 웃음 실어
자주 보마,
새 살 돋듯
햇살 그윽한
봄아, 봄아
정겨운 봄아!
4.산수유 / 곽욱열
아직 바람 끝이 매운데
하얀 눈서리를 이고서
산까치가 흔들어 놓고 간 가지마다
이슬 머금은 샛노란 꽃망울을 틔우는 것은
천연한 사랑의 표상이요
가장 먼저 꽃을 피워 화신을 마중하는
봄바람의 향기요, 순정의 그리움입니다
한여름 찌는 듯한 삼복의 무더위를 인내하고
긴 장마 천둥을 이겨낸 꿋꿋한 기상은
역경을 헤쳐나간 청춘의 기백이요
푸르고 맑은 슬기였습니다
소슬바람에 가랑잎 떠나보내고
먼 하늘 우러러 별을 헤며
외로운 가슴 안고, 빨갛게 익어가는 것은
모진 세파를 헤쳐 낸 의연한 고절(孤節)이요
내 시혼(詩魂)을 불태우는 거룩한 승화입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무상한 세월
깊어가는 주름, 백발도 서러우나
황혼에 타는 비 더 붉어지고
낙목공산(落木空山)에 산수유처럼
오래 오래 열매를 지키며
이내 인생 알알이 영글어 가리라
*화신(花神) : 꽃을 맡은 신, 꽃의 정신이나 정기.
*고절(孤節) ; 고고한 절개, 홀로 세속에 초연한 고상한 절개.
5.내 고향 / 구유현
대숲 대나무 마디마디가 나이테같이
탑을 쌓은 듯하다
보름 달빛에 벼가 서걱서걱 부딪치며
노랗게 익어간다
들길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면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나만 남겨 놓는다
아침이슬에 채일 것 같은 고향 길에
앙금 같은 소문이 북새통을 이룬다
고향마을은 새떼가 허수아비에 놀아나며
소리 소문조차 풍성하게 익어 간다
기약 없이 애먼 사람 피눈물 나게 하는
탄식도 가득하다
허구한 날 이죽거리며 히죽거리고
낯 뜨거운 민낯으로 실망도 한다
아쉽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고 산 것이 죄라면 죄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듯
유혹적인 말이 세월의 문으로 넘나든다
자식이 이 담에 황금 팔찌 해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가상하다
우리야 이렇게 산다지만 애들이 집 떠나
도회지에서 보통 고생이 아니겠지
콩, 깨, 팥, 수수, 조, 감자를
실한 걸로 잘 두었다가
애가 내려오면 챙겨 보내야겠다
힘들어도 고향마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나
6.그리움의 끝은 언제나 / 권정선
나는 또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마음들을 부르튼 혀로
꾹꾹 누르니 피맺힌 단어 하나 툭 튀어나가
이제 막 잠 깨어나는
매화나무에 아프게 꽂혀
빠알간 꽃잎이 되었다
넌 늘 떠나는 이유도
돌아오는 이유도
너를 위한 사치스러운 변명이었기에
내 맘 따위는 처음부터
염두에도 없었다
어둠이 내린 저녁
흐린 듯 맑은 하늘에
눈썹달 하나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고
가슴속 하고 싶은 말들은
후우-
내뱉은 한숨소리 타고 날아올라
하늘에 박혀
니가 그 별을 볼 때쯤
어느 땐가 별똥별 되어
너를 찾아가리라
내 그리움의 끝은
언제나 너였으니까
7.아지랑이 필 무렵 / 김경식
새로 큰길이 나서 고향길이 한결 수월해졌지만
굳이 옛길을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목적지보다 한 구간 먼저 문의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대정 호수를 굽이굽이 휘돌면
저만큼, 물 밑으로 가라앉은 초등학교와 면사무소가 얼비치고 우체국 앞 국밥집 자리 위로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피어오른다
거기서 한 마장쯤 늘그미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더듬다
지천으로 피었던 진달래 눈에 밟힐 때
문둥이 조심스런 숨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흔들리는
꽃잎들 사이로
산밭에 홀로 두곤 온
어린 누이의 새파란 입술도 언뜻 떠올랐다 사라진다
큰집 제사는 아주 잊어버린 듯이
갖은 해찰을 부리며 찬찬히
산허리 호수 길을 따라 도는 것은
바야흐로 옛날처럼
봄이 다시 오는 까닭이다
8.혼자가 아닌 여럿은 / 김명숙
대부도 바다에 갔다
여럿이 가니
혼자가 아니어서 좋고
조개구이에 함께 소주를 마셔 좋고
막걸리에 타령조를 섞어 마셔서 좋았다
문득, 건너편 의자에
등 돌리고 혼자 대작하는 남자
그 남자의 등덜미가 늦가을 저물녘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손짓해 불러 동석시키고 싶었지만
그 남자의 외로움을 방해하는 듯싶어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그도 혼자만은 아니었다
간간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소주 한 병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 인생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어야만 살맛이 나는 것!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지지고 볶고 북적거려도
그 안에 행복과 불행이 함께 공존하는 것.
그러기에 인생은
달콤하고 쌉싸름하고 지리고 떫은 것
우리가 맛보는 음식의 식감처럼……
9.가파도의 노래 / 김성배
갚아도 갚아도 못 다 갚는다
바다에 빚을 지고 사는 섬사람들
아방 잡아먹은 파랑주의보가
낳은 새끼는 테왁에 올망졸망
물질로 건져 올린 할망의
숨비소리에 숨어 고맙게 자랐는가
가장 낮아져서 멀리 바라보는
성게 향 배인 가파도는 가오리처럼 누워있다
지랄 같은 바람에 몸을 뉜
너울 치는 청보릿대 푸른 날숨소리 아득하다
저승에서 돈 벌어 이승에서 탈 없이 커왔는가
뭍으로 내보낸 강생이들
요렇게 잘 커서 고렇게 멀어져
가슴으로 가까운가
자리는 좋이 잡았는지
요수바리*의 본적지에 하멜의 게파트가 다녀가고
파도가 빚은 섬 속의 섬 한 채로 늙어간다
시푸른 앞마당을 절로 바람이 쓸고 간다
노을이 짭짤해질 무렵
괭이갈매기 울음을 짜금거린다
등대의 퀭한 눈알엔 동백이 피고
남쪽 바닷가 고냉이 돌처럼
허기진 그리움은
하얀 고봉밥으로 쌓인다
*요수바리 : 자리잡이 어선을 일컫는 말.
10.카테리나행 기차 / 김승동
기차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떠났다
썰렁한 광장엔 찬바람만 쏘다니고
술병이 넘어진 불 꺼진 포장마차 앞
외로운 가로등 하나 역무원처럼 서있다
기적소리도 힘겨워 산맥을 넘지 못하는지
날마다 같은 간격을 두고
적막한 밤하늘을 되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별빛이 쏟아졌고
내 가슴속에 눈물도 쏟아졌다
술병이 술을 담아두지 못하고
사랑이 겨울을 담아두지 못 하는구나
차가운 나무벤치에 앉은 그날의 언약
지워지지 않는 검은 눈동자
기차는 오늘도 떠났고
카테리나로 떠난 레지스탕스처럼
뜨거운 비밀만 밤새 가슴을 저미고 있다
11.동지 팥죽 / 김옥순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날
어린 시절을 느껴보려
재미로 팥죽을 끓였다
나름 신경 써 끓였는데
함께 사는 사람이
새알을 안 넣어 맛이 없단다
나는 대번에
배가 불렀다고 면박을 줬다
그렇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시래기국밥도 입에 달았는데
하물며 팥물에 찹쌀로 죽을 끓였는데도
맛없다고 하니 말이다
아들은 이따 먹는다고 하지만
먹어보나마나 맛없다 할 것이다
라면 맛보다 먼 죽 맛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엄마 한 그릇 나 한 그릇 맛있게 먹은 것은
어린 시절 가마솥에 소죽만큼이나 끓여
한 양푼 퍼 두었다가
동지섣달 긴긴 밤
며칠을 두고 먹어도 맛도 안 변했던
그 식은 죽 맛 한 번 느껴보려고
하지만 이 죽은
내일 저녁이면 맛이 갈 것이다
그 시절 식은 죽이 아니니까
12.그 놈 없었으면 -구두 뒤축도 못 꿰는 놈 / 김원준
바른잡이 왼손 같은 놈
칫솔질 할 때나 면도를 할 때나
그렇다고 수저를 잡을 때나
글을 쓸 때나 문을 열 때나
물건을 뜰 때는 어떻고
꽃삽을 쥘 때나 거름을 뿌릴 때나
소용에 닿지 아니하는 놈
기껏해야 건드렁거리고 걸을 때나
흔들거리고 몸에 좋잖다는 담배를
피울 때나 깜냥껏 폼을 잡을려는 놈
무료히 앉았을 때 콧구멍 속이나 찾아다니는 놈
그러구서도 똑같이 나누어 먹는 놈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한 생각 들이밀고 보면
그놈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왼잡이 오른손 같은 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듯 보이는 놈
옥심이 덕지덕지 아귀같이 많은 놈
외양은 멀쩡하여 남 볼 때 제 놈이
모든 일 다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도 하는 일 없이 허투루 사는 놈
시기와 질투가 똘똘 뭉쳐
반가운 친구가 손 내밀 때
제일 먼저 나가 생색내는 놈
여인네 흘러내린 귀밑머리나
쓸어 올리려는 놈
오죽 어줍잖으면
구두 뒤축도 제대로 못 꿰는 놈
본심으론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놈
그래도 한 발짝 살짝 물리고 보면
그놈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3.나라는 이름의 상자놀이4 / 김은혜
상자 속에 앉아 오늘도 하루 종일 술을 마신다
술 속에 여러 얼굴이 담겨져 있다
찬찬히 살피니 낯익은 얼굴들이다
술을 삼키니 술은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삼킨다, 나는 쓰러져 잠들었다
자고나니 텅 빈 상자 속에 여전히
그냥 혼자인 채 갇혀있었다
시간이, 견뎌내야 할 고통의 시간이
다행이 얼마간 내 마음에서
잘려져 나간 걸 알고 한숨을 몰아쉰다
알코올중독자가 된 건가 아닌가를
따진 여지도 겨를도 없이 상자 속의
나는 구부리고 앉아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속으로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주의 모든 고통의
시간들을 다 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술을 마시던 상자 속의 내가 어느 순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걸
나는 보았다, 나는 차마 쳐다보지 못 한다
14.그런 친구로 살자 / 김종순
친구야!
예쁜 자식도 어릴 때가 더 좋고
마누라도 아랫동네가 즐거울 때요,
형제간도 어릴 때가 더 정겹고
친구도 형편이 비슷할 때가
진정한 벗이 아니던가!
돈만 알아 요망지게 살아도
세월은 가고
조금 모자란 듯 살아도
손해 볼 것 없는 인생사,
속기도 하고 져주면서도 살자
친구야! 큰집이 열 칸이라도
누워 잠 잘 때는 여덟 자뿐이고
좋은 밭이 만 평이라도
하루 보리쌀 두 되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지니
친구야!
주안상 하나 놓고
묵은 지에 소주 한 잔 걸쳐가며
지나온 질곡의 세월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다가올
우리네 삶을 노래하자꾸나!
먼 곳에 있어 볼 수는 없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
소식이 궁금하고 보고파지는 그런 친구,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정겨우며
아무 말이 없어도 같은 것을 느끼고
서로의 단점을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친구
설령 내게 잘못을 저질러도 밉지 않는 그런 친구,
만나면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친구
자네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
정녕 그런 친구로 살자!
15.숲에 사는 소리 / 김철기
늘 시선 닿는 아파트 담 밖 울창한 숲 가운데
지난해 새로 조성된 솔안말 공원에 들었더니
밤꽃 흐드러진 밤나무 겹겹이 그늘 더 깊고
바람 흐르는 소리부터가 어린 날 향촌을 닮았어라
몇몇 종류의 꽃과 나무 돌과 물웅덩이
귓가에 퍽 가까운 숲새들 지저귐 리듬 타는데
풀벌레 낮은 소리 사이로
들어본 지 오랜 개구리 울음소리 도드라지다
누군가의 푸릇한 연인이었던 어느 때
숲길 걷다 개구리 떼로 울라치면
비 올까 봐 지레 호들갑 떤 발걸음소리가
담장 하나 돌아왔을 뿐인 숲
하찮게 만나는 바스락거림에도 스미었다
해질녘 구름 느릿한 하늘빛 속으로
층층이 감성 실린 음폭으로 퍼져 올라
혼을 깨워 들먹이는 영감
오늘을 살아 숨 쉼이 확연한 소리 되느니
높낮이 다른 생명력 솟는 소리
시차 오가는 추억 어린 소리
숲에 사는 소리, 소리들이여!
16.무의도 도꼬마리 / 김혜빈
어머니
실미도의 소문은 참으로 조용하지요
파도에 떠밀려온 밀어들이 회귀의 본능을 잊어버린 채
이념과 사상을 송두리째 뒤섞어버린
그 바닷길에 금기의 바람을 만져보셨나요
게릴라가 되어 다가온 자유는 아주 잠시 경계를 허물었지요
썰물이 내어준 울퉁불퉁한 모세길
오늘은 실미도에 짙은 발자국 남기기로 했어요
발걸음이 해를 비워내며 정서진 바닷길을 가르는 중이라고
갈매기가 그 길 위에 노란 웃음을 토해 놓지만
지나온 길을 지우지 못하고
전설의 이름들을 나지막이 하나씩 부르기만 했어요
물거품이 토해놓은 언어들의 슬픈 기록이
발자국에 자꾸 새겨졌어요
매직테이프처럼 내 다리에 붙어버린 684부대의 간절한
울부짖음을 들어보셨나요
타임머신을 되돌릴 새도 없이 화들짝 달려오는 밀물에
삼십육계 줄행랑치는 우리를
바위틈에 붙어있던 보말이 짓궂게 웃네요
어머니의 빛바랜 무명치마에 매달려있던 도꼬마리가
오늘은 내 옆구리에 붙어
실미도 갯벌에 번져오는 밀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앙상한 바람가시 키우네요
17.그립고 그립다 / 문신진
문득
소담스레 피어난 하얀 찔레꽃이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벌써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니다
칼바람이 들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에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그리운 것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등걸 지핀 사랑방 굴뚝에 오르던
봄 안개 같은 풋풋한 나무 냄새의 연기가 그립다
수탉의 울음소리에 새벽이 열리면
맑은 영혼을 부르던 교회의 푸른 종소리도 그립다
김을 뿜어내며 솥뚜껑을 들썩이던 밥 냄새가 그립다
무명 저고리 흰 수건 두루신
어머니가 아랫목에 차려주신 밥상이 눈물이 나도록 그리워진다
그리운 것이 어디 이것뿐이랴
까까머리 친구들
빨간 손 호호 불며 땅거미 질 때까지
구슬치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타기, 딱지치기, 쥐불놀이에 바지 태우고
살얼음에 발 빠져 서럽게 울던 그때가 그립다
배고프고 가난해도 마음 넉넉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내려앉은 함박눈이 찔레꽃이다
춤추며 다가오는 찔레꽃 너머로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두 발을 가지런히 들어 올리는 계집애들 단발머리 위로
빨랫줄이 휘파람을 부른다
18.중년이 되어 / 박미현
가난과 젊음이 전부였다
아이 들쳐 업고 기저귀 가방 메고 버스를 기다리며
집회에 나가고 토론을 하고
집집과 술집을 드나들며
끊임없는 의혹과 질문 속에서
밤은 늘 짧았으며 헤어지기가 싫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갈등과 반론은 하나의 건강한 의식이었고
자기 고백과 절박한 구호
가야 할 방향이 있었으며
우리의 연대와 투쟁이
우릴 변화시킬 거라 믿었다
이제 우리는 집과 자동차가 있고
아이들이 어느 대학을 가고 어디에 취직을 하고
누군가는 도시를 떠나 귀촌을 하고
무슨 무슨 회사, 단체에서 중견이 되고
또 누구는 정치로 가고
애경사에서 만나는 중년이 되어
짐짓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다투어 세상을 욕하고 배운 티를 내고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과
남의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험담이 자랑으로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다행과
질투와 이해타산을 느끼고
산다는 것에 대해 나름 치열했던 우리는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하고
불행하지 않은데 행복하지 않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기득권이 되어
방황도 없이 절망도 없이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반갑게 헤어졌다
19.엽서 / 박수호
뒤돌아보는 눈길처럼 세월은
말을 걸어올 듯 말 듯 지나갔습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바람과
바람 따라 휘어지는 풀잎,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며
허리 꼿꼿하게 세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벚꽃잎이 휘날리는 모습을
담벼락에 기대어
눈에 담아두기도 하였습니다
그 풍경은 오랫동안 선연하였으며
우리를 고개 끄덕이게 하는 것은
작고 하찮은 것일 수 있다는 말을
입안에 굴리며 서 있게 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나도 자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생각 속에는 되도록 간결한 이야기를
담아두는 것이 좋다는 말에 귀가 솔깃합니다
이제는 결 따라 흔들리는 일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20.노가리 천 원 / 박영녀
베레모 사내 노가리 천 원 술집에 앉아
노가리 천 원보다 조금 비싼 촉촉한 노가리 깐다
큰 키만큼 기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가시를 빼며
조용조용 노가리 깐다
소주 한잔 넘기고 세간에 돌고 있는 미투에 관한
변방에서 태어나 변방에 묻힐 사실이 아닌 사실 이야기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처음처럼 처음이 반복되는 말
핏대 선 목울대 노가리 깐다
오늘 술잔에 담겨 있는 이름 꺼내지 말라 하면
대답 대신 입에서 튀어나오는 파편 같은 노가리
누구누구랑 술 먹은 내일이며 금방 소문날 이야기
애써 모른 체하고 노가리 깐다
면접에서 덜어진 속내를 모자 속에 감추지만
삐죽거리며 나온 흰머리처럼
노가리는 꾸리꾸리 냄새를 풍기고
밤은 깊어 가는데
하품은 노가리 꼬리를 물고 노가리 깐다
21.젖은 편지 / 박용섭
물안개 수평선 너머에 흐릿한, 글씨
바람 소리에도 고향 소식이 묻어오네요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노모께 드리는 안부 몇 자 꼬옥 쥐어 보냅니다.
수문을 열어도 거친 물결이 문턱 넘어 기도를 막고
해송 바늘 가슴 후비며 되돌아오네요,
아들 딸 각진 마음들
파도에 씻겨 동글동글 산촌 앞바다 모여들 것입니다
건 불로 따스했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아랫목보다
군불 지피지 않아도 가슴이 따뜻한 골방
생솔 잎 연기 눈물 글썽이던 어머니
광목 치마폭이 그립습니다
빛이 추녀 끝 고드름 녹이면
“새끼들 밥이나 먹었나”
질긴 불면이 대나무 뿌리에 새겨진 채
새싹을 틔울 겁니다.
포구에 그물 깊던 투박한 손으로 길쌈을 하여
졸음에 눈 비비며 북을 밀어 베를 짜는 소리가
둥둥 크게 울리는 밤입니다
어느새 가을이 저만치 오네요.
22.범부의 노래 / 박희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세상이 그립습니다
어린 아들아, 누굴 탓하랴
지금까지의 지난한 세월 모두가 허방뿐이구나
이제야 어쩌겠니 버틸 만한 신명이 나지도 않고
누가 나를 도울 아량도 없으니
돌아가야겠다, 울지 말아다오
소갈머리 없이 산다는 게 비굴하고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악종만 가득
바라는 이들에게 눈물만 안겨
후생을 기대하기도 벅차다
슬퍼하지 마라, 아비가 귀족이 아님을
인연 만들기는 내 소관이 아니란다
서둘러 돌아가려는 건
시대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시대를 버렸으니
이렇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
금단의 고통은 깊고도 질기다
내 정신의 저울추가 기울었다
이제 무얼 더 바랄 수 있으랴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조차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
말 많이 하지 마라 그런 화상일수록
머리가 텅- 비지 않은 이 없으니
불이 환할수록 귀가 밝을수록
낙원만은 아니란다 잠잠 하라, 제발
바늘귀가 커질 대로 커진 이 시대에
아직도 사막을 누비는 낙타는 당당하다
23.시풍 당당 / 서금숙
청룡사 안으로 들어가니
해체된 암막새 수막새 대들보 누워 있다
세월 따라 흠이 났던 모양대로
비틀어진 그의 마음은 수없이 들락날락
중심을 잡고 버티려면
소나무의 어느 면을 크게 키우란 말인지
기둥은 기둥대로 성한 것이 뭔지
조목조목 죽은 내색하지 않게
헤쳐 모여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저절로 생긴 시어는 보물이다
썩고 문드러져 있는 뼈에 새살을 붙여주니
고르게 숨을 쉰다
구부러진 나무의 원 모습 그대로 쓴 기둥
깊은 아우름 속 푸른 용이 승천할 기세다
돌이키기를 오백 번 그를 이끌던
절간 같던 시
물가에 내 논 물고기처럼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새로 꾸미고 살겠다고 용을 쓴다
처마 끝 휘어진 풍경 꼬리를 흔든다
24.인연 / 안선희
짧은 만남으로 내 곁에 머물렀기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이 작은 세상 어디서든
다시 만날 인연인 줄 알았어요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언제부턴가
당신이 생각나면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만났지만
인사도 나누지 못 하였어요
상심한 내 가슴은 빗장을 열고
당신을 멀리멀리 날려 보냈지요
사막 같은 세상 힘들어
그리움도 잊고 살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로 등 뒤에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사랑의 인사를 건네는 당신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자
행복의 빛깔이
내 삶을 물들입니다
좋은 사람
당신이 또다시
나를 울게 합니다
25.서럽고 서럽고 서러운 이야기 / 양성수
모니카, 모니카
여섯 살 장녀 모니카
눈 설고 말 설고 반찬까지 설은
이상한 동화 속 아빠의 나라
엄마, 엄마
스물여덟에 세 아이 엄마
눈 설고 반찬까지 설은
이상한 동화 속 남편의 나라
아빠, 아빠
쉰 하고도 여섯에
한 살 세 살 여섯 살배기 아빠에
서른도 안 돼 이방인의 남편
안고, 붙들고
걸려가며 봄나들이 흥겨운 노랫소리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즐거움 한켠 콧등 시림이
아이 셋과 엄마는 진달래꽃 봄이건만
아빠는 찬서리 머리 얹은 마른풀 쑥대머리 웬 말인가
땀내 절은 모자
고달픈 삶의 현장
부서져라
부서져라
오늘을 위해 작은 몸뚱이 내 던져 보지만
가는 세월 누구인들 붙잡을쏜가
모니카! 모니카!
여섯 살 장녀 모니카
26.일출 / 우형숙
만월이 소리 없이
토해낸 이슬 밟고
풀냄새 졸고 있는 새벽길 헤쳐간다
숨 가쁜 달팽이 걸음,
축복으로 달래며
산골짝 바람 소리
온몸을 감는 순간
검붉게 하늘 뚫고 도도히 솟는 얼굴
천지간 손가락 걸고
복된 나날 맡긴다
쿵더쿵 가슴 달래
화살기도 날리면서
간절한 긍정의 힘, 온 세포 혼을 모아
겹겹산 인연의 굴레,
저 혼불에 기댄다
27.가리비 껍데기 / 유국환
비어있는 줄 알았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음을 해 질 무렵에야 알았다. 파도가 사자 갈기로 몸뚱이를 쳐 휘감고 나갈 때 시퍼런 꿈이 하얀 물거품으로 풀려나는 소리임을 가리비는 그제야 알았다.
해 질 무렵 견고했던 패각에 숭숭 구멍이 나서 촉수가 뜯기고 속살이 짓이겨질 때 금빛 자개는 이미 모래가 되었다. 빛나던 껍데기가 황혼에 젖었을 때 알았어야 했다.
밤이 되면 어느 누구도 붉게 타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비어있는 줄 알았던 생각이 부질없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어둠별이 뜨고서야 알게 되었다.
처얼썩 쏴
낯선 별들이 모래알처럼 빛나자 물소리가 커졌다.
28.견습공 / 유미애
벤치에 앉아있던 공씨가 일어선다
자투리 천으로 엮은 풍선을 타고
시간의 난간을 건너간다
염료 냄비를 가득 채운 은유와 상징들
고작 몇 가닥, 하찮은 손금을 가진 그였지만
느린 손으로 짠 옷감은 사물 너머의 어떤 것
그의 손끝에서 사과의 뺨이 붉어지고
꽃의 열망이 꿈틀거리고
나비들은 소녀의 치마 위를 날아다녔지만
세상은 블랙 혹은 화이트로 압축되고
한해살이풀은 금방 시들어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날마다 또 다른 공씨들이 공원으로 쏟아져 나오고
그들이 날리는 비행기와 풍선들로 도시가 흔들린다
과일 봉지와 견고한 희망 한 필을 들고
해바라기가 피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싶었던 건데
밥그릇이 놓인 아랫목에 손을 넣어
자신의 이름과 온기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하루 만에 풍선은 늙어버리고
종이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가 생으로부터 퇴출되던 날
습작기의 봄과 겨울이 교차하며 무늬를 새긴다
평생을 견습공으로 살아왔던 그의 작품은
이제 막 시작 되었다
29.어둠의 새끼들 / 유승우
어둠은 그 속에 우주를 배고 있는 어머니입니다 배고 있는 것은 다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낳은 첫 새끼가 빛입니다 이 첫 새끼가 캄캄한 제 어미로 하여금 환한 소망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아가도 눈을 뜨고, 아버지로부터 ‘큰 빛(해-태양)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아무리 큰 빛이라도 빛을 받을 짝이 없으면 외롭습니다 어둠은 첫 아들을 위해 별들을 낳아 하늘에 뿌려 놓았습니다 태양은 별들에게 눈길을 주고, 별들은 그 사랑으로 눈이 열립니다 서로 주고받는 그들의 사랑이 반짝 반짝 빛납니다
30.밸도 없고 속도 없다 / 윤석금
속없어 보이는 이웃집 여자
푸푸 꺼지는 말풍선에서
헤헤 헤 벌레가 기어 나온다
그녀와 사이
두꺼운 벽 안쪽에 실금을 긋고
헛웃음으로 메꾼다
문단속 없이 사는 잇속
이 틀어져 열린 문
바람 잘 날 없다
허풍선이 질투쟁이 머물다간다
헛기침 물고 허허실실
물컹거리는 웃음소리 받아내는
옆구리 터진 구두 코
별 반짝 잠든다
별똥으로 시 뽑고
소주잔에 달 받는 여자
속 가늠하는 시적어귀
땡감 나무에서 끌끌대는 매미
높은 음 목소리로
속없다 밸도 없다
소리 내는 법 배우는 여자
배꼽에 뜬 종생이별 찾는다
31.오월의 잡초처럼 / 윤윤근
모든 풀들을 보면
누구나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
꽃처럼 얼굴 내밀지 않아도
황무한 땅에서
죽을 힘 다해 일으켜 세운
푸른 기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잡스러워 보이는 풀
모진 세월 홀로 견디어 갈 때
세상은 각자 외롭다 말하며
이들을 돌볼 마음조차 없어도
풀들의 팔뚝마다
절망의 세상에 수혈할 푸른 피가
돌기 때문이다
스스로 잡초라 말하는 풀은 없다
화려한 꽃들을 저들도 메어달고
자기를 보아 줄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꽃 같은 자랑 반드시 떨어질 것 알아
차라리 마음껏 푸르게 퍼져
지는 꽃들 가슴에 앉을 그냥 그는 풀이다
오월의 꽃들에게 말하노니
이름 없는 모든 풀들에게 너희는 고개 숙여라
저들도 꽃이면 너희는 꽃처럼 빛나지 않으리.
32.하늘과 땅이 안개 속에서만 포옹하는 / 이가은
민둥산 끝자락 호젓한 곳에
꿈속에서도 그리는 옛 마을이 있다.
가던 길 아무데서나
손 흔들면 승강장이 되고
지금은 마을버스 종점이 된 그 곳-
사철 마르지 않는 개울물 굽이마다
돌부리 튼실한 물메기*도 있다
젊을 때 많이 먹고
좋은 일 앞서 하라시던
동네 어르신들의 넉넉한 가르침
해 갈수록 그리워지는 당산나무 지나면
산이 사람을 품어주는 탑골이 있다
눈 감으면
더 뚜렷이 보이는 목 없는 돌부처-
옳고도 지는 이의 침묵처럼
돌탑 둘이 마주하고 있다
저녁연기 메케한 두레상 앞에
아이들 살가운 웃음소리
환청처럼 들리는 그곳에 가면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어야 하는
무명 빛 젖은 어머니의
애절한 기도가 있다
*물메기 : 개울의 큰 물꼬
33.금줄 / 이건선
자유의 다리 금줄을 울고 가는 바람은 아는가
이 절절한 말씀을 햇빛마저 튀기고 가는
임진강물은 알면서 흐르는가
이 슬프고 아린 가슴 찢기고 찢겨
갈갈이 펄럭이는 천조각은 우는가
자유의 다리 어디쯤 건넜을 즈음 기어이
가로 막고야 마는 울긋불긋 희끗희끗한
천조각 조각마다 피 터져 뿌려진
영혼의 울부짖음의 흔적 금줄이 되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성역인가
성역인가 아려와서 슬퍼와서
아파와서 피멍을 폭발하듯 하늘로
꽂이려다 천조각에 떨어져 새겨지는
글씨 이름하여 낙서落書라 하자
성황당 아닌 DMZ 자유의 다리
성황당 금줄 셔터에 담는
손끝 바르르 떨게 하는 낙서
낙서의 파장 자유의 다리 아래 수련 잎들
영혼의 징검다리인가 파르르르
떨고 있는 것을
34.별이 빛나는 유리창에 / 이남철
어둠의 밤하늘에 별빛이 영롱하다
간밤의 어둠과 별빛, 꿈속의 등잔이
여름밤의 밀어를 생각하며 창가에 드리운다
태고의 밤라늘을 아직도 간직한 어린 가슴에 묻고
긴긴밤 유리창에 머물러 도란도란거리는
별들의 이야기와 은하수의 전설을 듣는다
석양의 긴 그림자 밟으며 안식처로 향하는 귀가본능
땅거미가 몰려와 어둠의 궁전으로 초대 받아
하늘 아래 모든 이들이 잠들어 꿈속의 나래를 편다
무수한 별빛이
하나의 별이 되어 가가호호 유리창 넘어
꿈속을 어루만지며
한낮의 서러운 눈물을 씻겨주고
해맑은 아기의 눈빛처럼 영혼이 빛난다
35.상월초등학교 / 이봉영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
마을 한 가운데
상월초등학교가 있었다
꿈을 구워내는 꿈 터
녹황색 굴뚝위로 하얀 연기 피어오르면
꿈은 날마다 노릿하게 익어
6년 후 보물 되어 나오던 그곳
산 따라
물 따라
모인 아이들
다 함께 친구 되고 어른 되던 그곳
맑은 공기
맑은 물
내 살 되고
내 피 되었네!
그때 그 아이들 다 떠나가고
이제 굼 터로 변해버린 그곳
아직도 굴뚝 위로 연기는 피어오르는데
가마 안에서 고열을 견뎌 내고
소원 하나로 태어나는 화려한 저 청자들처럼
기도하고 염원하면
그 보물들 다시 날 수 있을까?
그 친구들 다시 볼 수 있을까?
*상월초등학교는 취학아동 감소로 폐교되었고, 그 자리에는 현재 도자기 연구소가 들어 와 있다
36.상여소리 69 / 이오장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시간은 잊은 자의 것이다
가면서 오는 것에 젖지 않는다면
제자리에 머무는데
어차피 붙잡지 못할 것에
의연하지 못 하는가
몸이 기억하는 건
훌훌 털어내어 알몸 되고
정신이 기억하는 건
몸으로 부딪쳐 잊어라
산 하나를 옮기는 것과
호수 물 퍼내는 것에 힘을 쓴다면
자신을 잊고 시간도 잊는다
산다는 건
과거를 보내고 현실을 맞이하는 것
가버린 어제를 잊는다면
시간은 분명 내 것이다
어-노 어- 노
어나리 넘자 어-노
내가 있어 남이 행복하다면
바랄 게 뭐가 있고
내가 굶어 남이 밥 먹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삶은 그게 아니지
내가 행복해야 남이 행복하고
내가 먹어야 남 위해 일하는 것
사람은 자기를 세워
남의 지렛대가 되는 거다
무분별하게 위험에 뛰어들고
아무나 손잡아준다면
너도 없고 나도 없어진다
살아가는 기준을
봉사와 헌신에 두었다면
우선 자신의 몸을 바로 세워라
37.엄마가 치매야 / 이재학
치매로
토막말만 하시는 엄마
먼 길 떠나시며 제게
무슨 말 하고 싶었을까요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 잘 모셔라
아니면 빨리 장가가라
하셨을까요
엄마가 한을 품고
가시지 않았나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집니다
엄마가 좋아지면
시골 우리 동네 가자던
엄마와의 약속
엄마의 먼 길 노제로 대신합니다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엄마가 떠나시고
아버지 뒷모습에 쓸쓸한
그림자 하나 생겼습니다
슬쩍 돌아보니
아버지의 그림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보고픈 엄마였습니다
엄마가 떠나시고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용서해달라는 말도
한낮 부질없는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38.대장동 들판에 서서 / 이종헌
대장동 들판에 서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의 황금물결과
그 물결 너머로 불끈 솟아오른
북한산 연봉(連峯)들을 보지 않으셨다면
아직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눈 덮인 대장동 들판에 서서
무리지어 나는 새들의 화려한 군무(群舞)와
그 새들의 우렁찬 울음소리
들어보지 않으셨다면
아직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 마을 어름의 허름한 목로주점에 앉아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아기장수(將帥)와 말 무덤에 관한 얘기
들어보지 않으셨다면
아직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렇더라도, 대장동 들길을 걸으며
멀리 계양산 너머로 스러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지 않으셨다면
그 해를 바라보며 뜻 모를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으셨다면
아직은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39.모악산 비나리 / 이창원
모악산 달빛 아래
고개 숙인 여인아
어이해 이 한밤 잠 못 이루나,
하얀 눈살, 불 밝히고
만 년 향기 꿈꾸는지
천지 사방 신령님께
두 손을 모은다
두~두웅실 뭉게구름
산머리에 오르니
나도 따라 하늘 올라
삼성각 꽃불이 된다
금산사 종소리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천일암 구이못 선녀폭포엔
별빛사랑 쏟아진다.
40.눈 먼 사랑 / 이천명
백일의 해맑은 눈동자
허공을 맴돌다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쿵,
첫 사랑이었다
웃는 모습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
웃음소리
귓가에 맴돌지만
함께해서 더 황홀했던 순간도
세월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슴 아픈 짝사랑이었나
밤을 새워도
한 줄의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
첫사랑은
눈 먼 사랑으로 자라나
세월 담은
기다림만 가득하다
41.눈물의 농도 / 임내영
엄마 생일은 음력이라서
어느 해는 다음 해로 넘어간다
자식들 다 모여 축하를 하지만
때론 김장하러 간 김에 당겨서 한다
고등학생이 된 조카가 처음으로 생일편지를 썼다
맨날 먹여주고 입혀주는데 편지 한 번 제대로
쓴 적이 없다고 썼다
맨날 화내듯이 말했는데 다 할머니 잘 들으라고 그랬고
어렸을 때 엄마 아빠 늦게 올 때
듬직한 사람이 할머니였다고 썼다
지금도 할머니 없으면 심심할 거 같고
항상 맛있는 밥 챙겨주고 옷 빨아주고
늘 생각해 주어 고맙다고 썼다
선물 안 사서 용돈 드리는 것이니
꼭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또 썼다
엄마는 한 시간 동안 읽고 또 읽다가 눈물이 난다며 운다
눈물은 전염성이라 나도 따라 운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 살배기
고모라 부르며 불이 나도록 달려와 안겼을 때
꽃 한 다발 안았던 기억
유학 간 아들한테 전화 받자마자
저절로 나오는 눈물
눈물은 눈에 다시 넣어도 짜지 않다
42.당신과 함께하는 아침 / 임숙희
투명한 유리창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 아래 살며시 눈을 감고
고운 햇살을 마십니다
손 내밀면 닿을 듯
아른거리는 햇살 같은 마음 따뜻한 사람
가슴에 살며시 내려와 포근히 감싸줍니다
바라만 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사람
바라만 봐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사람
바라보고 있으면 때로는 가슴 아파지는 사람
힘겨울 때 함께 슬퍼하고
삶의 무게로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
끝나지 않은 험난한 인생 여정
그 사람과 함께이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기에
날마다 마주하는 이 아침이
내겐 너무나 소중한 행복입니다.
43.고추 / 정 령
실한 그놈 만져보려다 면박 들은 날,
주제에 아들탐은 되든감.
자고로 밭이 좋아야 한다잖여.
저렇게 밭이 약해 어쩌려구.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대못을 박는다.
밭만 좋으면 단 줄 아냐.
씨만 튼실하니 좋아봐.
뭐든 조응께 심어만 줘보드라고.
밭만 조으믄 뭐 하것냐.
씨가 없으믄 아무짝에도 못쓰고 헛것인디.
씨만 있음 뭣 하겄어.
밭뙈기가 없음 썩어문드러지기밖에 도리 없당게.
숱한 씨 얘기 듣던 순이어매가 고추를 넌다. 굵직한 놈은 따로 실에 꿰어 양지 바른 담벼락에 매단다. 손 귀한 집 장손 어루만지듯 볕 따라 누여가며 뒤집는다. 고추, 그놈 만지려고 순이어매는 반평생 배불뚝이였다. 네깟것이 도대체 뭐길래.
볼우물이 들어간 여자아이가 제 손보다 큰 그 놈을 순이어매 따라 가지런하게 놓으며 햇살처럼 웃는다. 양지 바른 담벼락에 그놈들 빨간 코를 맞대고 살가운 바람에 고추를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44.잉태 / 정무현
그냥 잠자는 거지, 고된 계절은
왕년의 삶은 내려놓을 줄 알지
덮고 다 덮어도
지나간 사연은 소리 없이 돌아오지
돌아온 사연은 또 사연으로 시작되지
달래보지도 못한 사연
보여주지 못한 속내가 이리도 아파 다 드리려는데
부끄러운 얼굴 분홍으로 아름다워 발길 움직이지 못하는데
풋풋한 당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맵자한 모습인데
쑥쑥 자라 쑥대밭이 되어
기어이 눈물샘 반짝이고
자신의 몸을 데워 아린 숨을 쉬고
사연은 사연으로 다시 시작되지
달래, 냉이, 진달래, 개나리, 쑥, 씀바귀, 복수초,
툭툭 털고 나오지
땅 속 사연은 묵직하여 건져 올릴 수 없고
묵은 사연은 그냥 묻히지
그저 택한 길을 따라 상기된 얼굴 삐죽 내밀지
천지가 분만하는 햇살에
바람 포대를 살살 감아 나르고
향기에 취하지
45.불면 / 정재령
기다림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물결치지 않는 강물과 같고
흔들리지 않는 바람 같으니
진공과 같은 공기를 이겨내지 못하여
터벅터벅 걸으며 몸부림을 치는구나
아아 공기여
너는 왜 한시도 내 주변을 떠나지 아니하고
내 피부 내 살갗을 짓누르는가
나는 우주를 향해 발사하는
미사일 속의 원숭이처럼
납작 엎드려 피가 터진다
모내기 한철 논에서
농부의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는 거머리 빨판을
어쩔 줄 몰라 소리소리 지르다
돌멩이로 꾸욱 눌러 짓이겨버린
자그마한 소녀의 공포에 질린 하얀 손처럼
공기여, 너는 나를 숨 막히게 한다
물결을 헤엄쳐 앞으로 나아가듯
묵직한 저항을 선사하는 너는 가끔
머리털 쭈뼛하게 서는 경험 또한 울먹인다
입술로 내뱉는 날카로운 말들
너를 통해 내게로 와 관통하고
살갗을 베어 피로 물들인다
내가 입은 빨간 옷
그대여, 너는 나를 해방시켜라
공기 없는 곳으로 날 보내어 짓누르는 압력 없이
그 반대로 폭발하게 하라
머릿속에서 폭발을 경험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얼굴로
자상한 미소를 뛰운 채 오늘을 마감한다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는 헤아린다
날 둘러싸고 있던 공기의 입자들을
안녕 안녕, 잘 가
너희들도 이젠 잘 시간
기다림이 없는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기다린다
46.산촌의 아침 풍경 / 주응규
밤하늘 어둠 속에 창백히 묻힌
무수한 전설이 별빛 이슬로
밭이랑 잎사귀를 타고 흐르면
희붐히 먼동이 틉니다
산등성이 휘감은 구름안개에
갓난 신선한 바람이
들꽃에 스치는 옹알이가
산기슭 외딴집에 건들어지면
낭창한 하루가 걸립니다
먼 산자락 자락을 감아 돌아
물밀 듯이 점령한 햇발은
고즈넉한 산촌을 차지하고는
늘어지게 드러눕습니다
늙은 촌부(村夫)의 눈 속에 들어온
산야(山野)는 짙푸른 물결로
분주히 풀빛 잉크를 풀며
하얀 하루의 원고지 빈칸을
채워갑니다.
47.유모차가 불안하다 / 허윤설
그믐달처럼 휜 등이 밀고 가는
텅 빈 유모차
골목을 돌아 노인정까지
마음으로 가는 시속 90킬로
산마루 눈 덮인 모습으로
빠르다, 빠르다며 온몸으로 가는 길
삐걱거리는 날 있어도
젓가락 맞추듯 살아왔지만
조금씩 벌어진 몸과 마음이 어긋나고 말아
놓친 버스처럼 지나간 젊음을 바라본다
한곳으로 모여드는 유모차들
새로운 것도 없는 일상이
스쳐 지나는 바람처럼
돌아서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아
선명하게 남은 오래전 기억만 들먹이며
풀잎 위 이슬방울 떨어지는 속도를 읽는다
달음박질치는 시간이 남기고 간 자국
얼굴에 점점 깊게 패이고
마음은 그대로인데 따라주지 않는 몸
십 원짜리 고스톱 화투 한 장에도 시간이 걸린다
마음의 속도는 가속이 붙어도
점점 멀어지는 경로당
불안, 불안한 유모차를 밀고 가는
어머니 어머니들
48.꿈의 퍼즐 / 홍명근
살다보니
열망과 갈등의 순간 위에 오래 머물고
머물러보니
기다림은 시계바늘을 흔든다.
초침 따라 달려가던 시절에는
별 하나 꽃 한 송이조차 두근거렸다
이제는
꽃이 피어도 별이 반짝여도
설레임 희미하지만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겹쳐 만난 인연은
실타래처럼 길다.
실매듭을 풀어
나무가 기둥처럼 자라는
언덕에 둥지를 틀고
학이 되어 바라보는 길 끝에
담쟁이 넝쿨 한 겹 더 두른 너는
또 하나의 울타리.
살아가는 것이 순간이 쌓여 가는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깊어져 가면 길이 되는 것일까
별 모양의 담쟁이 잎 넝쿨 너머
꽃 같은 저 무지개는
열정을 향해 여전히 손짓하고 있다.
49.억겁의 길목에서 / 홍순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쉴지
뚜렷하지 않다
어느새 억겁이 가고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허허롭게 누웠다
그토록 움켜줬던 집착
시간에 잎을 세우고 꽃을 피우며
힘없이 길에 서 있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가을
바람이 햇살을 맞고
눈시울 붉히며 세월에 묻혀간다
계절에 나와 잎이 되고
꽃이 되었는데
이야기 수북이 한 줌 한 줌
내 삶을 곧추세우고 있다
나이를 먹어간다
나이를 먹어간다
낯선 길 위 물끄러미
끌림에 마음 길 열고
만발한 만추에 몸을 맡긴다
생명이 손짓하기에
후회 없기를 바라며
깊은 세월 속으로 향한다
50.되리 / 홍영수
고향이 되리
그리움에 데인 한 움큼의 상처 보듬으며
황톳길 따라 걷다가
돌부리에 부딪히는 검정 고무 신발이 되리.
들녘의 논밭이 긴 팔 벌려 안아주는 곳
구불구불 흙먼지 길 동구 밖 돌아서며
내 안을 걸어가는 길이 되리, 친구가 되리.
바람 불어 찢어진 비닐우산 낮게 쓰고
어깻죽지에 책보를 가로 메고 뛰어가며
정든 동무들의 동무로 안기고 싶은 곳
학교가 되리, 공부가 되리.
나였던 나는 어디 갔을까
너였던 너는 어디 갔을까
담쟁이는 돌담에서 여전히 꿈을 꾸고
초가지붕은 지금도 하얀 박꽃을 기다리는 곳
돌담을 스치는 바람의 꿈이 되리.
박꽃에 물들어 반짝이는 은하수가 되리.
온몸에 사리로 박힌 향수(鄕愁)가
먼발치 굴뚝에서 눈물로 피어오르는 곳
헛간에 드러누운 녹슨 농기구들이
논고랑 밭이랑의 숨소리를 기억하는 곳
워낭소리가 되리. 농부의 발걸음 소리가 되리.
비의 숨결과 바람의 손결이 스며든 마루판이
홀로 된 할머니의 말투보다 더 느리게 표정 짓는 곳
닳고 닳은 빗자루가 되리
담고 담은 티바지가 되리
눈설레 칠 때 문풍지 소리에 이불을 잡아당기며
손에 잡힌 그리움으로 드러눕고 싶은 곳
먼발치에 신발 벗고 안방으로 뛰어가는
구들장이 되리
온돌방이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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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태근 선생님 본선지정시 1번. 못한 게 -- 못해 미안합니다 ----이렇게 수정부탁합니다
1.눈물이 필요한 이유 / 강수경
명자나무 잎이 무성합니다
꽃은 언제 폈다 졌을까요?
어떤 향기가 났을까요?
길을 걷다 언뜻
본 것도 같습니다
떨기마다 우거진 잎에는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빛바랜 일상들이 줄기를 붙들고
축 처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마음에
먼지가 쌓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걸음을 멈춰
지친 어깨의 먼지를 미리미리
털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오늘, 명자나무 잎이
유난히 반짝이며 맑게 웃는 것은
어제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