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韓國의 옛날 詩중에서
서동요(薯童謠) -著者: 薯童(百濟 武王) -時期: 6世紀末
善花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남몰래 사랑해 두고.
薯童房乙(서동방을)/맛둥[薯童]도련님을
夜矣夗乙抱遺去如(야의원을포유거여)/밤에 몰래 안고 간다.
(*薯: 감자 서 *謠: 노래 요 *隱: 숨을 운 *只: 다만 지 *嫁: 시집갈 가
*夗: 누워 뒹굴 원 *矣: 어조사 의 *抱: 안을 포 *遺: 남길 유)
*薯童: 百濟 제30代王인 ‘武王(在位 600∼641)’의 다른 이름.
<三國遺事> 說話에 武王은 寡婦인 어머니와 연못의 龍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
生計를 유지해 ‘薯童’이라고 불렸다. 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 善花公主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新羅의 都邑 徐羅伐에 가서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모르게 薯童과 어울리고 있다는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그리고 善花公主가 宮闕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자 그녀를 데리고
百濟로 와서 결혼했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면서 발견해 모아두었던 黃金으로 인심을 얻어
百濟의 王位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大同江(대동강) -南湖 鄭知常 -高麗時代 詩人·文臣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비 갠 둑에 풀빛이 짙어 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님 보내는 남포에서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마르려나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이별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 지네.
(*歇: 쉴 헐 *淚: 눈물 루)
*高麗時代의 詩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開京에 留學하기前 平壤에 살 때 지은 작품이며,
送別詩로 당시부터 널리 읽혀 왔다. 첫句는 離別하는 장소의 景物描寫, 2句에서는
슬픈 노래가 '움직인다(動)'는 표현에서 詩語使用에 공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詩의 妙味는 3, 4句인데, 奇拔한 着想으로 離別의 情이 極限에 이르렀음을 잘 표현해
많은 사람이 愛誦했다. 大同江은 많은 사람들이 離別하는 장소로 自身의 感情을
확산시키고 있다. (*誦: 외울 송)
*鄭知常(?~1135) -高麗때 詩人·文臣 -出生地 西京(平壤) -本貫 西 京) -號 南湖
高麗 睿宗 9년(1114) 文科에 及第, 仁宗 5년(1127) 左正言으로서 拓俊京이 大闕을 범한 罪를 彈劾,
그와 同調者들을 流配케 했으며, 1129년 左司諫으로 尹彥頤등과 함께 時政의 得失을 논하는 疏를
올렸다. 妙淸ㆍ白壽翰의 陰陽秘術을 깊이 믿어 한때 妙淸ㆍ白壽翰과 함께 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首都를 西京으로 옮길 것과 북쪽의 金나라를 征伐하고 高麗王도 皇帝로 칭할 것을
주장했다. 1130년 知制誥로서 王命으로 郭輿를 위해 <山齋記>를 지었으며, 그 후 起居郎이 되었다.
仁宗 13년(1135) ‘妙淸의 亂’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혐의로 金安등과 함께 金富軾에게 斬殺되었다.
詩에 뛰어나 高麗 12詩人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易學과 佛典에 정통하고, 그림ㆍ글씨에 능했으며,
老莊哲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拓: 넓힐 척 *疏: 소통할 소 *誥: 고할 고 *輿: 수레 여 *斬: 벨 참)
시조
武人의 氣像 -金宗瑞
長白山에 旗를 꽂고 豆滿江에 말을 싯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히냐
어떻다 麟閣畵像을 누가 먼저 하리오.
*長白山: 白頭山
*麟閣(麒麟閣): 漢나라 宣帝가 지은 樓閣으로, 功臣 11名의 像을 그려 이 閣上에 걸었다고 한다.
*金宗瑞(1383~1453) -本貫; 順天 -字; 國卿 -號; 節齋 -諡號; 忠 翼
忠 義 歌 -成三問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蓬萊山 第一峯의 落落長松 되었다가
白雪이 滿乾坤할 제 獨也靑靑하리라.
*蓬萊山: 東海 가운데 있는 神仙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山.
*第一峯: 가장 높은 봉우리. *落落長松: 가지가 축 늘어지고 키가 높은 소나무.
*滿乾坤: 天地에 가득함. *獨也: 나 홀로.
*成三問(1418~1456) -本貫 昌寧 -字 謹甫 -號 梅竹軒 -諡號 忠文
成三問이 端宗의 復位를 꾀하다가 失敗하고 죽음에 直面해 忠節을 지키고 不義를 배척하려는
자신의 氣槪를 落落長松에 비유했다.
警戒의 노래/比喩詩(비유시) -李稷 -高麗末~朝鮮初의 文臣.
가마귀 검다 하고 白鷺야 웃지마라 (*鷺: 해오라기 로)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高麗가 亡하자 高麗 儒生들은 새 王朝에 가담하는 者와 節義를 지키며 草野에 묻혀 사는 자들로
나눠 지면서 相對를 까마귀와 白鷺에 빗대어 읊은 比喩詩이다. (*喩: 깨우칠 유)
*李稷(1362~1431) -本貫 星州. 字 虞庭. 號 亨齋. 諡號 文景
高麗 禑王 3년(1377) 16세에 文科에 及第, 慶順府注簿에 補職, 1386년 密直司右副代言을 거쳐
恭讓王때 藝文館提學을 지냈다. 1392년 李成桂를 도와 朝鮮開國에 貢獻, 星山君에 봉해지고
太祖 2년(1393)) 都承旨·中樞院學士로서 謝恩使가 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 大司憲,
定宗 1년91399) 中樞院使 兼 西北面 都巡問察理使로 倭寇의 침입을 막아 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三司左使·議政府知事를 지냈다. 1400년 제2차 王子의亂에 芳遠을 도와 佐命功臣 四等이 되고,
大提學을 거쳐 1403년 司平府判事로 鑄字所를 설치해 銅活字인 ‘癸未字’를 만들었다.
1405년 吏曹判書, 그후 永興府尹, 星山府院君, 1414년 右議政에 올라 進賀使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 黃喜와 忠寧大君(世宗)의 世子冊封을 반대하여 星州에 안치되고, 세종 4년(1422) 풀려나와
1424년 領議政, 1427년 辭職했다. 星州의 安峰書院에 配享되었으며, 文集 <亨齋詩集>이 있다. (*稷: 피 직)
豪氣歌 -南怡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백두산(白頭山)에 올라보니
대명(大明) 천지(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겨세라
언제나 남북(南北) 풍진(風塵)을 헤쳐볼꼬 하노라
*南怡(1441~1468) -本貫; 宜寧 -諡號; 忠武 -활동분야; 軍事
太宗의 外孫으로 世祖 3년 武科에 壯元及第, 27세에 兵曹判書, 李施愛의 亂을 평정했으나 睿宗 1년(1468)
兵曹參知 柳子光의 告變으로 逆謀嫌疑를 받고, 卞永壽등과 함께 저자에서 車裂刑으로 處刑되었다.
純祖 18년(1818) 赦免되어 官爵이 복구되었으며, 純宗 3년(1910) '忠武'의 諡號가 追贈되었다.
京畿道 華城市 飛鳳面 南田里에 남이의 묘소로 전해지는 南怡將軍墓가 있고, 江原道 春川市 南山面의
南怡섬에도 그의 假墓와 追慕碑가 있다.
*車裂刑: 罪人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刑罰.
憂國衷情 -李舜臣(1545~1597) -本貫 德水 -字 汝諧 -諡號 忠武公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나의 애를 끊나니.
*壬辰倭亂때 陣中에서 지은 것으로 國家存亡의 책임진 將軍의 憂 國衷情을 노래했다.
黨爭의 悲劇 -張晩 - 朝鮮中期 文臣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沙工) 배 파라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후(後)란 배도 말도 말고 밧갈기만 하리라.
*張晩이 文官에서 武官으로 옮겨 功을 세었으나 黨爭의 餘派로 流刑되었다. 은퇴한 뒤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시조로 諷刺했다.
*張晩(1566~1629) -本貫 仁同 -字 好古 -號 洛西 -諡號 忠定
宣祖 22년(1589) 生員·進士 兩試에 합격, 1591년 別試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成均館·
承文院의 벼슬을 거쳐 檢閱·典牲寺 주부를 역임했다. 이어 刑曹·禮曹의 佐郞·持平이 되었으며,
1599년 鳳山郡守가 되었다. 1601년 都承旨, 이듬해 王后의 誥命奏請부사로,
이어 세자책봉 奏請副使로 두 차례 明나라에 다녀왔다.
修養의 노래 -金天澤 -朝鮮後期의 시조作家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부디 긎지 말고 寸陰을 아껴써라
가다가 中止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끊임없이 努力해야만 所期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음을 가르친 修養의 노래이다.
*金天澤(肅宗~英祖) –字 伯涵 -號 南波
平民出身으로 肅宗때 捕校를 지냈다. 唱에 뛰어났으며 시조도 잘 지어 <海東歌謠>에 57首를
남기고, 英祖 4년(1728) 詩歌集 <靑丘永言>을 編纂, 國文學史上 귀중한 資料이다.
같은 平民出身 老歌齋 金壽長과 함께 ‘敬亭山歌壇’에 同人을 결집, 시조에 新風을 불어넣었다.
그때까지 時調界의 主流를 이루었던 學者·文人의 시조가 閑情을 卽興的으로 노래한 道學的·
觀念的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조는 題材를 日常生活속에서 찾았고,
그 묘사가 寫實的이었으며 諧謔이 풍부했다. 後進養成과 시조의 整理·發展에 많이 貢獻했다.
- 韓國의 都城·山城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