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孤舟)의 고백
김기수
호주에서 귀국한 얼마 뒤, 대학 동창 단톡방에서 안부 문자가 오갔다. 작년 12월 중순에 만나고 오랜만에 연락이 온 것이다. 이렇게 오간 연락으로 약속이 이루어졌다. 재회의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대학 시절 옛 추억의 뒤안길을 더듬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무애(无涯) 양주동, 미당(未堂) 서정주, 석제(石濟) 조연현, 석전(石田) 이병주 등 당대에 유명한 교수님들이 포진한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60년대 말 입학했다. 정식으로 입학한 재학생 25명, 그중 여학생은 4, 5명이었다. 그런데 첫날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부르는 출석 명단은 50여 명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복학생 5, 6명 나머지는 청강생이었다. 그 당시엔 청강생 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인원이었던 국문과는 3, 4개월이 지나더니 조선 시대에 있었던 당파처럼 서울 출신, 시골 출신 재학생, 복학생, 여학생, 청강생으로 구분되어 지내고, 학구파 당구파 주당파 연애파 나홀로파 등 유유상종의 모임으로 갈리는 분위기였다. 나는 서울 출신에 재학생 나홀로파로서 별다른 모임 없이 지낸 상황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랄까 군중 속의 고독 같은 느낌이랄까 강물 위에 홀로 떠가는 고주(孤舟)였다. 재수하고 입학했지만, 교수님들 강의를 경청하고 강의 노트도 제법 꼼꼼히 작성하면서 나름대로 노트 말미 부분에 강평도 쓰고 내 의견도 정리한 기억이 생생하다.
탐색기를 지나고 1학기 말 고사 일정이 발표되었다. 고사 2, 3일 전에 여학생 둘이 나에게 다가와 강의 노트를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어불성설(語不成說)!’ 한마디로 잘랐다. 실은 이 두 여학생은 예쁘기도 하고 당시 최신 유행의 패션을 그대로 따라 할 정도의 세련된 학생들이었다. 학교 강의는 가끔 나오는 학생들이고 청강생이어서 공부하고는 거리가 좀 먼 학생들이었다. 다음날 내게 다시 요청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럼, 일요일에 도서관으로 나와 노트 정리하게끔 해 줄게.” 이들은 열심히 내 노트를 베끼기에 여념이 없었고 난 책을 읽고 있었다. 무료하고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너 시간이 지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이들이 하는 말 “기수야, 네가 이번 시험에 우리를 도와주면 시험 끝나고 우리가 크게 한턱낼게.”였다.
에구, 이 순수하고 순진한 서울 토박이가 한턱에 빠져 수락을 한 것이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을 부르짖었던 사나이 마음에 발동이 일어나 출제될 만한 주제 답안을 요약해 주는 것과 시험 보는 날 내 옆과 뒤에 앉게 하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다. 커닝의 동조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음식 먹고 싶은 것, 술, 안주 모두 사주는 대가로 말이다. 시험 보는 며칠간 이들이 그럭저럭 만족해하는 즐거움에 괜스레 나도 으쓱해지는 기분은 ‘왜?’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지막 날 영어 시험. 이 과목은 내 것을 보고 쓰라고 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한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과목이었는데 어려운 문제가 의외로 많아 끙끙대며 시험지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뒤에 앉아 있던 ㅇㅇ이가 갑자기 내 시험지를 낚아채고 자기 것을 내 책상에 내려놓고 시험지를 제출하며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 멍때리는 나를 뒤에 두고.
아니 이런, 시험지에는 내 이름이 쓰였고 답안 빈칸은 허연 것이 아닌가! 나도 어렵게 답을 채워 나간 와중에 갑작스러운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아뿔싸. 맙소사! 자포자기할 수밖에. 이렇게 시험은 끝났다. 끝남의 해방감은 나를 무척이나 홀가분하게 만들고 또 다른 기대감은 나를 달리게 했다. 학교 앞 청요릿집으로. 두 여학생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수야, 수고했어. 이제 네가 원하는 모든 것 다 사줄 테니 맘껏 먹어. 돈은 별로 없지만, 금반지 금목걸이가 있으니까 염려 말고.” 나는 이 소리에 순진한 마음과 기사도 정신이 꿈틀대며 “에이, 뭐 다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거지 너희들이 그렇게 어려워했던 시험을 조금 도와줬을 뿐인데 뭘. 그런데 ㅇㅇ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던 때에 시험지를 바꾸면 난 어떻게 하라고. 에라이 못된 계집애!” ㅇㅇ이 왈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용서해라.” 이것이 전부였다.
그날 나는 고주망태 인사불성 개떡이 되었고 인생은 ‘오블라디 오블라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성적 발표가 나왔다. 유일한 F 학점이 보였다. 여름방학에 재수강의 처절한 땀을 흘리며 영어 서머스쿨을 맛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문이 꼬리를 물었고 나는 ‘터(基)에서 빼어난(秀) 고주(孤舟)’가 ‘高酒’님이 되었다. 이렇게 나의 주력은 날로 성장하면서 술 좀 한다는 애들과 새로운 결성을 이뤘다. 이름하여 ‘금막회(금요일마다 막걸리 먹는 모임).’
국문학과 남학생 4명, 여학생 2명(ㅇㅇ, ∆∆)이 멤버였다. 그 당시 수도권에 이름나고 새로 생겨난 곳이면 찾아가며 주유천하를 누렸다. 낭만을 누리며 즐거웠던 시절은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여학생들은 졸업 후 결혼해서 외국으로 갔다는 소문만 무성.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아마 손주들과 함께 노년을 살아가는 할머니가 됐겠지. 동문 모임을 할 때마다 추억에 젖어 즐거운 분위기다. 술술술 술이 저절로 목구멍을 넘나든다. 만남 뒤에 귀가하는 마음이야말로 늘그막 인생살이 중 제일이다. 요즘 들어 만날 약속이 뜸해 아쉽다. 낙엽 밟는 소리에 허무를 느끼고 병약해지는 늙음의 자괴 때문인가?
- 2024년 01월 한국산문.
- 서울 출생
- ≪한국산문≫ 등단
-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 2ksch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