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동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멸치잡이 노래 ‘후리소리’
부산 다대포를 배경으로 전승되는 부산광역시 시도무형문화재 ‘후리소리’. ‘후리’는 바닷가 근처로 몰려든 물고기를 그물로 휘몰아서 잡는 방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멸치잡이를 ‘후리질’, 이때 사용했던 그물을 ‘후릿그물’, 멸치를 잡으며 부르던 노래를 ‘후리소리’라고 하지요.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다대포 마을 사람들은 후리질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멸치 떼가 몰려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물을 내린 다음, 그물의 양끝을 바닷가에서 당겨 멸치를 잡는 방식으로 무척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후리소리’를 부르며 힘든 노동을 이겨내고 흥을 돋운 거지요.
지금은 사라진 어업 방식이고 낯선 가락이지만, 그럼에도 후리소리는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원시적인 노동이 우리가 본래 삶을 일구었던 방식임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 정정아는 한 개인이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다시금 멸치잡이 현장으로 달려나가게 되는 치유의 서사를 전통적인 멸치잡이 과정 속에 잘 녹여냈습니다. 판타지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후리소리 가락에 빠져들게 이끕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환상적인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삼촌을 기다리는 순지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해 나가는 삼촌의 심리가 후리 가락과 어우러져 독자들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전통적인 멸치잡이 마을이 보여주는 치유의 힘
-순지 이야기
순지네 마을은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방식으로 멸치를 잡으며 살아왔습니다. 멸치 철인 봄, 여름, 초가을이면 마을 전체가 분주해집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아주머니들에게 말을 걸고 뭐라도 거들었을 순지가 어쩐지 조용합니다. 순지와 늘 함께였던 삼촌이 전쟁에 나갔기 때문입니다.
삼촌이 전쟁에 나간 뒤 순지는 매일 바닷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오릅니다. 이 언덕에서 삼촌은 멸치 떼가 들어오나 살피고, 멸치 떼가 들어오면 징을 쳐서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곤 했거든요. 순지는 맨발로 바닷가를 뛰어다니던 삼촌이 눈에 선합니다. 어쩌다 발을 다쳐도 “순지야, 발은 다칠수록 단단해지는 거야.”라며 빙긋 웃던 삼촌이 그립습니다. 삼촌이 치던 크고 우렁찬 징소리가 귓가에 맴돕니다. 삼촌이 없는 멸치 철은 허전하기만 합니다.
-삼촌 이야기
전쟁에 나간 순지의 삼촌은 하루도 고향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징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두렵고 끔찍하기만 했지요.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가라는 해산 명령에 다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삼촌. 하지만 반갑게 맞아주는 마을 사람들과 가족의 품 안에서도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직 전쟁 속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매일 밤이면 괴로웠던 전쟁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삼촌을 찾아옵니다. 한 가족처럼 지냈던 마을 사람들의 격려에도 선뜻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습니다. 다친 다리는 상처가 아물어 가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겁이 납니다.
언제나처럼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어 몸서리치던 어느 날, 가을바람이 방문 틈새로 들어옵니다. 가을 멸치 철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삼촌 입에서 저도 모르게 멸치를 잡을 때 부르던 ‘후리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자기도 모르게 읊조린 가락에, 삼촌은 그제야 진짜 집에 돌아온 것만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며칠 뒤 멸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징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침 방문 너머로 순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연이어 “삼촌아, 기다린데이!” 하고 외치는 순지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징 손잡이를 꽉 움켜쥐어 봅니다. 곧 멸치잡이를 시작한다는 듯이 징소리가 빠르고 높게 울려 퍼집니다. 바로 지금 나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덜컹!’ 삼촌이 힘차게 방문을 열어젖힙니다.
‘후리소리’가 불러일으키는 노동 공동체의 기억
“용왕님의 은덕으로 / 메러치 풍년이 되었구나 / 어-넝청 가래로다”
순지와 삼촌이 함께 달려간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후리소리 가락에 맞춰 그물을 힘껏 당기기 시작합니다. 제자리를 찾은 듯 삼촌도 마을 사람들 속으로 달려가 그물을 잡습니다. 발에 닿는 차가운 바닷물과 꽉 움켜쥔 거친 그물의 촉감에 예전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삼촌을 발견한 이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삼촌을 반깁니다. 멸치 그물을 당기고 터는 고된 노동에 몸은 온통 땀범벅이지만, 모두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한층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 부릅니다. 후리소리가 온 바닷가에 울려 퍼집니다.
그물에서 멸치를 어느 정도 턴 다음에는 팔팔 끓는 가마솥에 멸치를 삶을 차례입니다. 순지 엄마를 비롯한 아주머니들이 능숙하게 멸치를 삶아 소쿠리에 펴서 바닷바람에 말립니다. 순지도 익숙한 듯 멸치 소쿠리를 집어 들고 나릅니다. 삼촌이 잡은 멸치라 생각하니 순지의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이렇게 멸치잡이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준비한 음식을 먹고 서로 고생했다며 다독이고 잡은 멸치를 나눕니다. 밤이 깊어가면서 마을 사람들의 눈빛도 한결 깊어집니다. 멸치도 달빛을 받아 한결 환하게 빛이 납니다.
달빛을 받으며 삼촌이 다가와 순지 옆에 앉습니다. 누구보다 삼촌을 걱정했을 순지의 마음을 삼촌도 아는 거지요. 순지가 삼촌 발을 지그시 바라보며 묻습니다. 이제 안 아프냐고, 괜찮으냐고요. 삼촌이 양말을 벗고 울퉁불퉁 붉어진 발을 만지며 되묻습니다. “이제 발이 더 단단해질 것 같제?”라고요. 순지를 바라보는 삼촌 눈빛이 예전처럼 반짝입니다.
이 책에서 삼촌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방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한 힘은 아마도 후리질 특유의 생명력과 마을 사람들이 하나되는 노동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더 편하고 더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굳건한 공동체의 힘. 100년 넘게 이어졌던 따뜻한 노동 공동체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는 그림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