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 길어요.
한편의 소설책을 읽는것처럼, 읽어보세요.
아무래도 서태지,또는 서태지와 아이들 자서전이라해도 좋을듯 싶어요^^
저도 다른 카페에서 글 읽다가 넘 감동적이라서 퍼왔어요...
[박진우에세이] 서태지와의 인터뷰 저자:박진우 출처:에세이 (94/1)
[박진우에세이] 서태지와의 인터뷰(94/1) ----------------------------------------------------------------------- 처음에는 밤 열두시 약속이었다. 그때밖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빠듯한 스케줄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내 생전 그런 오밤중에 약속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태지는 천재야." 함께 동행하기로 한 MBC 쇼 프로 작가 김영희씨가 말했다. 밤 열두시라는 말에 남편이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을때 나 역시 그 말을 그 말을 주워섬겼다. "천재래" 약속 당일에야 인터뷰 시간은 겨우 아홉시 반으로 떨어졌고 나는 천재에 대 해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 중국 청나라 말기의 왕후 서태후를 연상케 하는 이름 서태지 -그러나 표독스 럽고 한없이 탐욕스러웠던 서태후와는 달리 서태지는 준수한 용모를 지닌 미 소년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정신빠진 녀석들 -'이라고 욕을 해야 할지, 아니면 '신세대의 기수'라고 칭 찬을 해야할지 감이 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섣부른 단정은 대개 의 경우, 자기보호에 불과하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할 뿐인 고집스러움. 사전에는 천재에 대한 설명이 몇 가지 나와 있었다. 천재(天才):태어날 때부터 갖춘 뛰어난 재주, 혹은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 천재(天災):자연현상으로 일어난 재난. 천재(淺才):얕은 재주나 꾀. 혹은 자기의 재능을 겸양하여 이르는 말. 서태지를 일컫는 천재라는 말은 그 중 어느 것에 속하는 것일까?
서태지와 아이들의 스튜디오가 있는 홍익대학교 근처로 가자 주택가의 어느 집 대문 앞에 십대 소녀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때 비틀즈가 폭발 적인 인기를 누렸을 때 그들이 밟고 지나간 풀을 움켜잡고 대성통곡을 하는 노랑머리 십대 소녀들의 사진을 라이프지에서 본바 있지만 우리나라의 십대 소녀팬들은 아직도 유순한 편이다. 음악과 공연장, 라이브 무대에 감전되었 을때만 스타에 대한 애정이 공공연하게 드러날 뿐, 늦은 시각 스타의 집 대 문 앞까지 찾아와 기다리는 열성팬들의 경우도 그저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하는 동양적인 기다림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에도 그들은 우리를 밀치고 들어오는 대신에 발만 동동 굴렀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말했다. "좋겠다아-" 서태지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 그곳이 십대들에겐 좋은 집이다. 그러나 그 좋은 집 안에는 그럴듯한 가구나 모양을 갖춘 대기실같은 것은 찾 아볼 수가 없었다. 연습실을 겸한 큰 방에서 서태지와 이주노, 양현석 그리 고 몇몇 사람들이 녹화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연한 쇼 프로를 수도 없이 돌려서 보고 또 보고 그들은 투덜댔다. "카메라가 카메라가 아니네." 서태지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말쑥하고 깨끗한 인상이었다. 만 약 그에게 조선시대의 땋은머리 가발을 씌운다면 영락없이 고운 규수처럼 보 일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었다. "성공하는 남자에게는 반드시 여성적인 요소가 있다." 남자만 그러하랴. 조화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여성적인 면과 남성적인 면의 적절한 배합을 말하 는 것이지만 '여성다운 것'과 '남성다운 것'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기초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뭐든 크고 배포있고 강인한 것은 남성적인 것이며 자잘하고 작은 것에도 쉽 게 넘어가지 못하고 꼼꼼한 면은 여성적인 것이라는...... 겉으로 보여지는 서태지의 여성스러움이 어디에 기초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완벽에 대한 그의 지나친 집착에 그 중 한가닥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카메라가 자신들의 포즈를 제대로 잡지 못한 점이 두고두고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잘 안 되면 늘 속이 쓰려요. 그래서 항상 위탈이 나고-" 위장병을 앓고 있는 오늘의 스타. 젊은 그에게 지금의 성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1972년 2월 21일생. 서태지에게는 정현철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현철이네 집은 상당히 엄한 편이었는데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불호령이 날아오는 식이었다. 음악에 관한 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어머니가 노래를 썩 잘 부르시고 아버 지 쪽으로 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정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성실함과 자기 일에 대한 집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발명에 재능이 뛰어나신 분이신데 뭔가를 개발할 때면 제대로 자지 도 먹지도 않은 채 일에 골몰하셨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먼저 눈물이 떠오른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말이다. 그는 아버지가 모아둔 수많은 레코드를 뒤적이며 둥글고 검은 판에서 흘러나 오는 신기한 소리들을 들었고 그 속에 '자신을 울게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발견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음악을 들으며 '감동을 받는다'는 생각은 미처 하시지 못했다. 레코드판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거나 하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갖고 노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그런 반응은 이후 서태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의 나이만으로 그의 '음악'을 짐작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맞서야 했 다. 음악에 대한 애정만 가득하고 재능은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다면 그는 사 람들의 편견 앞에서 박살이 났겠지만 요행히 그에게는 '재능'도 있었다. 한 가지 요소를 더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놀랄만 큼 달라진다.
아들은 듣는 음악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소리를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국민학교 때는 스피커를 한 대 사다가 창호지를 붙여서 큰북 비슷한 소리가 나는지를 실험해 보기도 하고 선풍기들 가져다 드럼대신 처보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전자기타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룹 사운드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아버지는 전자기타를 사줌으로써 음악에 대한 아들의 열정이 어지간 히 충족되기를 바라셨겠지만 아들은 아니었다. 발이 땅에 닿기만 하면 점점 더 힘이 세어지는 선화 속의 인물처럼 음악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갈수록 그 는 점점 더 음악 하나에만 빠져들어갔다. 중학교 2학년 때 '하늘벽'이라는 그룹 사운드를 조직했다. 그가 베이스를 맡 은 6인조 그룹 사운드였다. 한 시간에 오천 원을 줘야하는 연습실에 들어가 락 음악을 두들겨 대었고 일 년쯤 후에는 메탈 쪽으로 성향이 바뀌어갔다. 음악 속에는 보다 많은 눈물이 있었다. 서태지는 자신이 '잘 울지 않는 편'이라 했지만 음악의 나라에서는 아니었다 슬픈 노래만이 그를 울리는 게 아니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노래, 숨이 멈 출 정도로 조화를 이룬 음악,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의 강력한 사운드- 그 모 든 것이 그에게로 와서 감동이 되었다.
재동 중학교를 거쳐 북서울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였다. M-TV에서 그룹 활 화산의 '베이스 모집' 광고를 보았다. 냉큼 달려가 오디션을 받았는데 고등 학 교 일 학년짜리 베이스 지망생을 보고 한심해하던 사람들이 그의 연주를 듣고 나서는 '다음날부터 나와라'고 말했다. "그날 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요." 활화산은 당시 신대철씨가 낀 메탈 그룹이었는데 대철형과 같이 활동을 한다 니-. 그 사실만으로도 감격했고 한동안은 신대철씨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흘끔거리며 훔쳐볼 정도였다. 활화산 멤버가 되고난 후 비로소 마음을 정했다. 음악을 해야겠다. 세상의 다른 어떤 일도 아니고 꼭 하나, 음악을 해야겠다. 그는 오래 생각하고 망설이며 실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일단 결심이 서면 즉각 실천에 옮기는 타입이다. 바로 그점 때문에 때로 그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러했다. 부모님이 이유를 물었을 때 아들은 말했었다. "메탈을 할려면 머리를 길러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못 갑니다." 머리를 길러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못 간다니 - 그것은 정현철, 아니 서태지 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머리문제만 아니었다면 학교를 갔겠는가 ? 그는 그랬을 것라고 대답했다. 까짓 머리쯤이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아니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는 음악에 관한 한 아주 작 은 일에서까지 지독하게 철저해지는 습벽을 지녔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 속에 자신의 전부를 털어넣는다. 음악은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마음의 탈출 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변명이 필요없는 그의 유일한 출구였다. "그 길로 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꿈은 멀찍이 둔 채 엉거주춤 오늘을 살아내는 일, 자신의 소망은 다
른 곳에 찔러둔 채 세월을 소모하며 사는 일 그것은 서태지에게 '사는 일'이 아니다. 그는 단지 음악이 좋아서 그 길로 간 것이 아니라 그리로 가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십대의 나이에는 종종 객기와 용기가 혼동되기 마련이지만 그의 재능이 한때 의 객기로 전락할 수도 있는 그의 결정을 용기로 만들어 준 건지도 모른다. 아들은 '학교포기' 선언을 한 후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그 사이의 변화라면 자르지 않은 채 길어져가는 머리카락뿐이었다. 아들을 타이르고 을러보고 야 단치는 그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몇 달 후 부모님은 손을 드셨다. "니 맘대로 해라." 항간에서는 서태지가 거기서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학교측에서는 음악에 미친 장발 학생에게 등 교를 허락했고 아침이면 그는 여자만큼이나 긴 머리를 빗고 교복을 입고 학 교로 갔다. 종종 빼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얼마 후 그룹 '시나위'가 결성되었을 때 존경해마지 않는 대철이 형으로부터 '베이스 주자로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다. 시나위 멤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이 시작되었다. 전자기타 3대가 박살이 날 정도로 연습에 빠져 들었는데 시나위가 앨범을 내 면서 그에게도 계약금조로 7백만 원의 거금이 쥐어졌다. 7백만 원이라니... 그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 때였다. 그가 7백만 원을 내밀었을 때 아버지는 그와는 다른 기쁨을 표시하셨다. "너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집으로부터 인정
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기쁜 것은 그 자신이 음악을 통해 쓸모있는 존재라는 확인을 받아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 순간이 '서태지 와 아이들을 통해 인기를 얻었을 때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 만으로 열여덟 살이 되는 날, 2월 21일에 면허시험장으로 가서 운전 면허를 땄다. 합격 도장을 찍어주며 주행시험관이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이미 자신의 차 '르망'도 뽑아 놓은 상태였다. 그는 그날로 오너드라이버 대 열에 끼게 되었지만 그것이 성급한 과시욕은 아니었다. 무면허 상태에서도 차를 운전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시나위 멤버였기 때문이다. 차를 사고 운전면허를 딴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나위 멤 버였기 때문이다. "나는 시나위 멤버인데 버스를 타고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대중에게 너무 가까이 있으면 신비감이 떨어지고......" 시나위 멤버기 때문에 비싼 옷을 입고 시나위 멤버기 때문에 우쭐하고- 그런 식의 단순한 코세우기 작업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음악은 신과 같이 절 대적인 존재이고 그 속에 낀 시나위 멤버도 나름대로 갖취야 할 격이있는 훌 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서태지식의 환상일 수도 있고 서태지 식의 사랑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점이 없었더라면? 그는 서태지에게까지 이르지 못하고 정현철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나이에 비해 일찍 돈을 벌고 부모의 규율보다는 그룹 활동의 규칙에 매어 있 던 그 시절. 그가 옆으로 어긋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바 로 그점에서 서태지는 김종서 형에게 참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종서 형이 내 마음 안에 규칙들을 많이 세워줬어요. 예를 들면 음악하는 사 람들은 마약에 빠지기가 쉬운데 마약을 통해 얻는 음악은 허상이라고 말했어 요." 보다 구체적으로 김종서씨는 '잡혀 들어가는 날이면-' 이라고 말했고 그것이 야말로 현실적이고 오점을 남기기 싫어하는 이 젊은이에게 알맞은 충고였다. 시나위 2년은 금세 지나갔다. 시나우이라는 이름으로 콘서트도 수십 번 열렸고 대중적인 호평도 누렸다. 그러나 그는 무대를 내려올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은 다른 곳에 있는 거 같아......" 처음에는 메탈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고 진보적인 트래시 메탈에 매료되었고 다음으로는 랩 음악에 기울어갔다. 그가 랩을 듣고 있으면 팀의 선배들은 너 나없이 말했었다. "야, 그건 구공탄들이나 하는 음악이야. 듣지마." 그러나 흑인들이나 한다는 구공탄 음악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정현철이라니..... 현철과 벌떼들도 있는데..... 거기다 너무 평범하고 순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랩을 할려면 이름도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혼자 작명을 했다. 어느 날(김종서 쪽에서 보자면 느닷없이) 종서 형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 나는 태지야. 서태지. 앞으로 날 그렇게 불러줘." 그는 서태지가 되었다. 서태지라는 이름 역시 음악이 없었다면 가지지 못했을 이름이지만 그것은 자 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 아니라 랩 음악이라는 장르에 맞춘 이름이었다. 만약 그가 발라드나 뽕짝 쪽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의 이름도 다른 것이 되었을 것 이다. 서태봉도 좋고, 마천루도 좋고...... 그것이 그의 사랑법이다. 어떤 사람에게나 한 가지쯤의 재능은 있게 마련이고 타고난 재능의 적고 많 음은 간발의 차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을 관리하고 키 워가는 방식에는 그 작은 차이가 천양지차로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전면적으로 자신을 투자하는 속에서 길러진 재능. 그 재능이 어느날 불쑥 대 중 앞에 돌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마음 안에서 길러져 온 '세월'은 보지 못하고 눈 앞에 드러난 부분만을 보고 소리친다. "서태지는 천재야."
첫날의 인터뷰는 거기서 마감되었다. 레코드 회사 쪽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급히 찾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 가는 차 안에서 쇼 작가 김영희씨가 내게 물었다. "태지 어땠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태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 았다. 다만, 이 인터뷰가 너무 이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음악 속에서 좌절하거나 실패를 겪지 않은 듯이 보였고 스물 두 살이라는 나이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할만한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거기다 그런 상황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모든 일들이 원 만하게 잘 풀려갈 때는 한 사람이 가진 수많은 면모들이 속속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아니, 서태지 자신은 스스로에 대해 얼 마나 알고 있는 걸까? 김영희씨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들려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처음부터 달랐다. 무엇보다 그들은 당당했다. 앨범을 낸 가수들이 처음 방송국에 오면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몰라 당황해하거나 잘 모여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하거나 자기답지 못한 모습을 연출 하기 마련인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 기가 죽어하는 낌새가 조금도 없었 다."
다음날 밤. 스튜디오 앞에는 전날과 같은 한 무리의 소녀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좋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좋은 집의 젊은 주인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어요?" 수물두 살의 성공한 이 젊은이는 너스레를 떠는 타입이 아니다. 그는 만약 음악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아버지처럼 창의적인 발 명가가 되었거나, 꼼꼼하게 연구하고 같은 실험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공학 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것인 감수성이 그를 음악으로 이끌었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질은 음악을 '연구하게'만들었다. 서태지는 어린시절부터 엔지니어인 아버 지 옆에서 고장난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수리하고 조립하는 일을 즐겨했었다. 악기가 없었을 때는 만들어서 썼고 제대로 된 악기가 생겨난 후에는 그걸 뜯 거나 새로 조립해가며 어떤 소리가 나는지를 실험해 보았다. 그덕에 지금은 웬만한 악기, 녹음기계등을 그가 터득한 방식으로 독특하게 다룰 줄은 안다. 일본에서 녹음을 할 때는 그곳의 엔지니어들조차 젊은 서태지에게 물었었다. "어디서 그런 방법을 배웠냐?" 시간과 열정, 스스로를 온전히 음악에다 쏟아부어온 것으로 거기에 대한 대 답이 될 수 있을까? 시나위가 해체되고 난 후에도 그 즉시로 한 일은 벌어두었던 돈을 전부 털어 서 알기와 장비를 구입한 것이었다. 6백만 원짜리 녹음기와 백만 원짜리 콘 솔이 그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었으므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난 알아요'였다. 노래가 준비되자 멤버를 모으기 시작했다. M-TV에다 광고를 내기도 하고 오 디션을 실시하기도 했다. 심사위원은 물론 서태지 한 사람이었다. 육개월 동 안 그는 기타리스트 수십 명, 드럼주자 수십명을 만나보았고 전부 퇴짜를 놓 았다. 그는 제대로 된 멤버가 없어서 음악을 못 하는 일을 '서럽다'고 했다. "세상에 그런 설움이 없어요." 그 후 김민기씨로부터 양현석씨를 소개받았다. "춤을 기막히게 잘 추는 친구가 있는데....." 그 말에 귀가 번쩍해서 만나보았지만 첫눈에 양현석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 다'고 했다. 춤솜씨 좀 구경하자고 해도 '보면 아나?' 딴소리를 하는 사람이 었다. 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해 호락호락하지 않듯이 양현석씨 역시 자신의 춤에 대해 함부로 내보여주지 않는 면이 있지만 그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 다.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 양현석씨 쪽에 물어왔다. "댄서는 구했어요?" 아니라고 하자, 약 올리는 소리만 골라서 했다. "댄서 구하기가 힘들 걸. 구해도 이상한 애들만 구할 걸." 그 말에 서태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이상하지만 같이 해볼까?' 이번에는 그가 먼저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배짱 좋은 댄서 양현 석씨는 일 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하며 조건을 내걸었다. "같이 일하게 되면
댄서로서만이 아니라 노래도 함께 하자." "O.K." 그때부터 두 사람이 멤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오디션하기 시작했다. "난 연습을 게을리 하는 인간은 싫어." 한쪽에서 말하면 다른 쪽에서 대꾸했다. "난 엄벙덤벙한 놈은 질색이야." 깐깐한 두 사람이 오디션을 보았으니 사람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다 어느 날 양현석씨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내가 아는 형이 있는데 일에 대한 집념이 굉장해. 거기다 그 형은 랩을 해 봤어." 그래서 만난 사람이 이상우씨다. '난 알아요'테이프를 틀어주자 무뚝뚝한 이 상우씨의 입에서 '좋은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세 사람은 한 멤버가 되었다. 세 사람 모두 자기의 분야에서는 프로 였고 일에 대한 고집스러움도 비슷했다. 그 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적어도 그 흔한 잔소리- '야, 연습 좀 해라'를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대중적인 면에서 보자면 세사람 다 무명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 스로가 CIA요원이나 몸을 숨겨야 할 인기 스타라도 되는 듯이 비밀리에 연습 을 했다. 극비문서의 제목을 달듯이 그룹의 이름도 지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연습이 끝난 후 그들은 제작자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그 들의 음악과 율동을 보고는 '다음에 오라'했다. '시시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은 너무 이르다'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렵게 매니저를 소개받고 앨 범계약을 하루 앞둔 날 밤. 서태지는 꿈을 꾸었다. 노을이 지는 낚시터에서 그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낚시줄에 뭔가 묵 직한 것이 걸리는가 - 싶더니 커다란 송어 한 마리가 물을 차고 하늘로 솟구 쳐 올랐다. 햇살에 빛나는 송어는 하늘 위에서 펄쩍대다가 그의 가슴으로 덥 석 안겨들었다. 다음 날 앨범 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을 하고 나오며 그들 세 사람은 중얼거렸다. "딱 오만 장만 나갔으면 좋겠다." "앨범 순위 이십오위 안에만 들면 스타 아니냐."
92년 3월. 첫번째 앨범이 시장에 나오기도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특종 TV연예'에 출 연했다. 그들 세 사람 모두 거금을 들여 맞춰 입은 양복을 입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당당했다'고 말했지만 그들 자신은 아니었다. "뒤에서 벌벌 떨었어요." 사람들이나 방송국이 가진 위풍당당함에 기가 죽지는 않았다. 데뷔를 하고 자신들의 음악과 춤을 대중 앞에 처음으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그들은 흥분했 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방송에 세 번 출연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좋기야 하겠어? 그치?" 네 번째 방송출연은 뮤직비디오였다. 그 비디오가 나가고 난 다음부터, 정확 하게 2시간 이전과 이후가 엄청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길을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첫째 변화였다. 레코드판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해적판까지 등장했다. 쇼 프로들은 마치 물난리라 도 난 듯이 다급하게 서태지와 아이들을 불러댔다. 방송에 처음 얼굴을 내민 지 4주 만에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라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요청을 받았 다. 세 사람 중 누군가가 흥분해서 말했다. "야, 혹시 이십오위권 안에 든 거 아니냐?" 그들은 신이 나서 방송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통산 신인가수들이나 등수가 낮은 노래의 경우 프로그램의 앞 부분이나 늦어 도 중간쯤에서는 등장하기 마련인데 대기실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의 이 름은 불리
지 않았다. "신곡 코너에 넣어줄래나?" 갑자기 사회자가 '서태지와 아이들'을 호명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그 들은 무대 위로 달려나갔고 그리고 '정말 놀랬어요.' '난 알아요'가 1위 후보곡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상대편 가수는 인기절정이 던 신승훈씨였다. 후보자리가 그렇게 기쁜 것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런데 그날 그들은 후보에서 한 등급 더 올라가 일등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금주 일위." 일위라는 말이 떨어지고 나면 순위 프로그램에서는 언제나 약속이나 한 듯이 비쳐지던 눈물. 때로 감동적이고 때로는 끝이 빤한 멜로드라마처럼 진부하게 느껴지던 눈물- 그러나 서태지는 울지 않았다. 그가 거쳐온 일들도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 지 '고생'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같은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을 바 라볼 때 그의 가슴에 맺히는 '한'같은 것은 없었을까? "없어요. 각자 제 길을 가는 건데요. 뭐."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고 못다 이룬 꿈에 대한 '한' 이 70년대의 경제발전과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이뤄냈 다고 생각하지만 신세대는 기성세대가 가진 '한'과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역사의 거대한 조류에 밀려 자신의 인생자체에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우 리의 기성세대들. 거기에 반해 신세대는 자신의 인생에 보다 능동적이며, 다 양해진 사회구조는 '한'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를 대폭 줄여주었다.
또 하나 '한'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들의 나이가 지나치게 이른 점도 꼽을 수 있을 것 이다. 서태지의 경우, 음악에 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지만 바로 그 '주었다' 는 이유로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대단히 독립적인 사람이고 그것이 서 태지라는 인물 특유의 장점이자 그를 냉정하게 보이게 하는 원인인 듯했다. 또 그점이 방송국이나 언론매체에 맞서 나름대로 항거할 수 있게 만든 힘인 지도 모른다. "제 경우에는 방송국과 마찰이 많았어요." ?시키면 나갈 수가 없다." 적어도 뮤지션이라면,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놈이라면 그런 정도의 고집은 있어야 한다는 게 서태지의 생각이고 그런의견이 존중되는 곳이기를 바랬다. 방송국에서 부르는 족족 나가는 것은 스스로를 '소모하는 일'이 아닌가. 그 런 식으로 싸돌다가는 제대로 된 2집을 내는게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방송 횟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일 주일 동안 텔레비젼 프로에 여섯 번이 나가고 라디오 프로에는 하루 세 번씩 그들이 출연한 적도 있었다. 엿새 동안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 CF 를 찍고 마지막으로 라디오 공개방송 무대에 섰을 때였다. 무대 위의 서태지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로가 쌓이다 못해 몸을 약간만 뒤로 기울여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한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죽었다가 소생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서태지는 자신들의 2집 앨범을 내기 위해서는 '잠적'할 필요가 있 다고 결정했다. 그 후에 일어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방송 중단은 즉흥적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래 생각했어요." 오래 생각한 일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들이 NHK의 아사히 투나잇 쇼에 출연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을 때였다. 방 송국 앞에 당도하자 입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누구냐고 묻자 '오늘 출연하기로 한 쇼의 담당 프로듀서'라고 했다. 프로듀서는 정중하게 자신의 프로에 출연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일본이 나 한국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시간에 쫓기는 분주한 일임에 틀 림없는데 어째서 일본은 '서로를 대접할만한 이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 방송국의 경우는 어떤가. 방송국은 가수를 '불러주는' 입장이고 방 송국이 부르면 출연자는 '감읍해'달려온다고 생각한다. 그점이 바로 우리 방 송의 발전을 더디게 하고 정체를 가져오는 '권위주의적인' 요소지만 어쩌랴. 그게 오늘날 우리 방송의 현실인 것을. 그 속에서 매니저의 역할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매니저들은 가수나 배
우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일을 한다. 프로그램 출연 요청은 가수 를 위해서가 아니라 '말 잘 듣고 협조적인 매니저'로 보이기 위해서라도 거 절을 하지 못한다. 가수 혹은 배우와는 언제든 갈라설 수 있고 인기가 없어 지면 내일이라도 그만이지만 방송국 안의 사람들과 잘 사귀어 놓으면 다음에 어떤 가수, 배우를 만나든지 '유능한 매니저'평가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부에 시청자들은 한번 인기가 올랐다 하면 같은 가수의 얼굴을 이곳저 곳에서 겹치기로 보아야 한다. 지겹도록. 매스컴 덕분에 전국이 다 알도록 그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도 순식간이고 매 스컴의 이기심 때문에 뒤로 밀려 나서 '식상한 인물'이 되는 것도 역시 한순 간이다. 서태지는 그점을 방송국만의 책임이 아니라 연예인 스스로가 자신의 '신비감을 확보하지 못한 때문'도 많다고 해석했다. 스타에게 꼭 신비감이 필요한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태지는 자신이 존경하는 '마이클 잭슨'의 예를 들었다. 그는 마이클 잭슨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고 했다. 마이클 잭슨이 화장실에 간다고도, 보통사람들처럼 밥을 먹는다고도 생각되지 않고 그의 은둔생활은 그의 재능과 더불어 시들지 않는 인기를 유 지해가는 비결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 신비주의 역시 또 하나의 헛 된 권위일 수 있지 않을까?
일본에서 돌아오고 나서 그들은 매니저와 담판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이쪽 저쪽에 문의 해보니 매니저와 불화를 일으킨 가수가 먼저 결별을 선언할 경 우 '가수만 떡이 된다'고 충고했다. 세 사람은 '혹시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 각한 것이 아니라 '망하는 건 기정사실로 보고' 그래도 부딪쳐 보기로 했다. 스타의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은 대단히 솔직담백하게 얘 기를 하는 편이었고 세 사람 모두 그릇된 일에 가서는 '깨지더라도 한번 해 보자'는 뱃심이 상당히 맞아 보였다. 그들은 매니저와 결별했다.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신인, 떠오르자마자 돌풍을 일으키다시피한 그들에게 견제의 눈길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좋은 미끼를 던져준 셈이었다. 그주음 신문, 잡지 등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잡음을 일으키는 그룹쯤으로 해석하기도 했고 '인기를 얻고 돈 좀 벌었다고 날뛰는 아이들'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점에서도 서태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매니저가 없는 상태에서 어느 날 아침 방송국에 오기 위해 차를 탔던 이주노 씨는 그 길로 곧장 병원에 실려갔다. 급성맹장염이었다. 그로 인해 라디오 공개방송이 펑크가 났고 전 매니저가 잡아놓은 스케줄들이 어마어마 했지만 그들은 어떤 약속인지를 다 알지 못했다. 스케줄표를 전 매니저가 갖고 있었 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들이 전화를 걸어오고 서태지는 현석이 형 과 의논을 했다.
"주노 형도 아픈데 둘이 나가 춤추고 까불지 말자." 그러한 의리마저도 신비주의에 한몫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단순히 그들 의 나이가 가져온 순진함이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방송국에서도 알 아주겠거니 했다. 그러나 뒤이어 들여온 소식은 '방송 출연금지'였다. 서태지는 그제서야 자신 이 진짜 프로가 되려면 좀더 철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못한 거죠. 미리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그 인기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해적판은 물론이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얼굴이 들어간 목걸이, 사진, 엽서 등등이 정신 없이 팔려나갔다. 그들은 거기서 얻어지는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런 시으로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므로 변호사를 고용했다. 스타맥스 비디오와 계약, 자신들의 뮤직비디오를 찍기로 했을 때였다. 일주 일을 꼬박 써가며 뮤직비디오를 찍었는데 그 비디오가 편집 작업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모 방송국에서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드디어 나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그것은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여태까지 그 방송국에 출연한 필름들을 모아 짜 집기 해놓은 것에 불과했다. 팬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치고 그들은 분노했다. 방송국 쪽에 항의를 하자 '사내에서만 파는 비디온데....' 어물쩡 대답할 뿐 이었다. 변호사에게 달려갔더니 '100% 방송국 쪽의 잘못이다. 반드시 승소한 다'장담을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열의를 보이던 변호사가 차츰차츰 공무니를 빼 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승소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 사실 을 호소했지만 웬일인지 제대로 기사화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같은 언 론사들 간의 '서로의 치마 속은 들추지 않는다'는 묵계 같은 것이 있었던 걸 까? 얼마 후 이번에는 또 다른 방송사의 프로덕션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비디오 미공개'라는 걸 찍어냈다. 계약한 사실조차 없었으므로 가처분 신청을 내고 재판에 들어
갔다. 유능하다는 새 변호사를 구했고 그 변호사 역시 큰소리를 쳤다. "아니, 처음 사건도 결코 질 사건이 아닌데. 이번에는 분명 이깁니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어이없는 패배였다. 그 일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고소장이 날아들었다. 처음에 그들과 비디오 계약을 했던 스타맥스 쪽에서 제작비 4억 원을 물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즈음 언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 목들이 찍혀나오기 시작했다. '기고만장한 서태지와 아이들' 주변에서는 충고했다. "이런 식으로 언론에 잘못 보이면 오래 못 간다. 연예인은 이미지를 먹고 사 는 거야."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현대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넒어져 가고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갖자의 내면은 묻혀진 채 한 줌의 얄팍한 이미지만이 남는다. 거리 위를 걸어가는 것은 서로의 이미지일 뿐 누구도 섣 부르게 상대편의 가슴 안 쪽을 상상해보려 하지 않는다. 정보와 광고의 홍수시대라는 이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미지'만을 중시했다면, 그 래서 단지 마찰없이 '살아 남는 일'에만 골몰했더라면 나는 이 글을 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보여지는 그들은 크고 실제의 그들은 자기보호에만 연연한 '그만그만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방송이나 언론 매체에 비한다면 가수나 배우 개개인은 소년 다윗이다. 세 사 람의 소년은
골리앗에게 싸워보자고 덤벼들었고 코가 깨지고 가슴팍에 정통 으로 한두 방을 얻어 맞은 다음에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은 앞뒤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기고만장'같은 제목을 달고 왜곡돼서 보도 되었다. 그들은 남의 것을 가져오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몫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그 당연한 것이 튀어보이는 세상. 덩치 큰 신문사에서 그 휘하 잡지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가짜 영상집 을 발매하고는 (대개의 경우 가수들은 그런 일에 침묵해준다) 대문짝만하게 선전을 하기 시작했을 때 서태지가 느낀 배신감은 컸다. "가수 안 하고 가서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러나 서태지한테 맞아서 쓰러질 신문사, 방송국, 잡지사가 있던가? 이십대의 젊은 그들은 세상에 나와 이름을 얻고 또 그 이름만큼이나 질시와 오해, 미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깨우쳐간다. 요즈음 그들이 체결하는 계약소는 치밀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CF계약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몇 개의 컷에 나가는지 포스터는 몇 장이나 찍을 것인지를 하나하나 확인한다. 그들과 계약을 하려면 보통 일 주 일에서 보름 정도의 검토 시간을 줘야 하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계약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쪽에서 보아 '99% 완벽한 것' 이라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연예인들이 CF계약을 했지만 그 경우 'CF 하겠습니다. 방송일자는 몇 월부터 몇 월까지 도장 꽝!'이 전부였다. 나중에 상대방이 계약을 어기거나 해도 항
의를 할만한 근거가 없기 일쑤였다. 서태지는 그점에 대해 '계약서는 생명이 다'고 말했지만 그 반대편의 말들이 무성한 줄도 짐작하고 있다. "너무나 지들 위주고 일방적이고 어린 녀석들이 계산적이라 하겠지요."
93년 1월 1일. 그들은 또다시 서태지와 아이들다운 일을 실행했다. 방송에서 얼굴을 감춘 채 잠적해버린 것이다. 2집 앨범을 내기 위한 작업이 었다. 연말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6개월간은 안 나올 것'이라 말해 두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들이 잠적해 있는 동안 별별 소문들이 다 돌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됐다더라." "일본에 귀화했다더라." "군대에 입대한다더라." 마지막에는 '야쿠샤한테 죽었다더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인기 절정의 가수가 6개월씩이나 잠적을 하는 것은 아마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선배들조차 그들에게 말했다. "6개월이면 팬들은 너희들을 다 잊어버린다." 서태지도 그점이 두려웠다. 보이지 않는 가수를 6개월씩이나 손꼽아 기다려 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 한편으로 마음먹었다. "그래, 다 잊어버려라. 우리는 신인으로 새출발한다." 그런 배짱과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신감일까? 2집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서태지가 매일마다 확인한 것은 자신없음이었다. 처음 3,4개월 동안 그의 머리에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는 매일마다 멤버들을 만나 '나온게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해야 했다. 동료들과 헤어져 돌아올 때면 그는 입 안으로 되뇌었다. "나는 끝났구나." 가슴은 터질 듯했고 밤이면 방 한쪽 구속에 기대고 앉아 생각했다. "1집의 성공은 정말 우연이었구나. 나는 쓸모없는 놈이구나."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내몰리는 느낌'이었다. 아무 도 그를 들볶은 사람은 없다. 주노 형도 현석 형도 말없이 기다려 주었을 뿐 이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매일 밤 서태지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 를 빌며 악기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면 다시 자신이 빈깡통처럼 느껴져 허무했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로운 노래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약속한 육 개월을 한 달쯤 남겨 두고서야 간신히 2집에 수록될 노래들은 완 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하여가'였다. '하여가'를 처음 들은 주노 형과 현석 형의 표정에서는 난감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도대체 이 노래에 안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들은 이 곡이 음악적인 완성도가 가장 높다는 서태지의 주장을 들 어주었다. "해보자." 두 사람은 밤을 새워가며 '하여가'에 맞는 안무를 개발해 내었고 새로운 노 래에 맞는 새 모습을 보이기 위해 레게 파마를 했다. 처음으로 '하여가'를 선보일 프로그램은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는 특종 TV 연예로 결정했다. 그 프로그램에 나가기 위해 대기실로 가자 수많은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었다. 항간에는 '서태지는 갔다'는 말들이 돌았지만 그들은 향해 몰려든 기자들을 보며 6개월 간의 공백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첫 방송 이 나간 후 팬레터가 오기 시작했다. 모든 편지들은 꼼꼼하게 읽혀졌다. 처음의 반응은 그리
신통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 모양이 이상했어요.""거지 같았어요." "이상한 노래를 부르더니 이상한 춤만 추고 들어갔어요." 등골이 서늘했지만 '하여가'에 대한 애착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쯤 방송국에서 마주치는 다른가수의 매니저들은 그야말로 '회심의 미소' 를 지었다. 망해가는 적을 바라보는 즐겁고 여유만만한 미소였다. '하여가'는 쉬운 노래가 아니었고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하다고 할 정도로 가 사가 길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무대에 올랐을 때였다. '하여가'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그들이 마이크를 입 가까이 끌어당기 는 순간 객석의 관객들 틈에서 하여가의 가사가 흘러나왔다. 그때까지만 해 도 2집의 레코드나 테이프가 판매되기 전이었다. 그 순간 서태지는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팬들이 우리 노래를 외워준 거예요."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팬들만이 줄 수 있는 위로고 격려였다. 오랫동안 가 수왕으로 인기를 누렸던 한 가수는 '인기절정일 때에는 솔직히 팬들이라는 존재가 귀찮았다'고 고백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인기가 수그러든 후에 야 비로소 팬들이 '고마워지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 잠적을 하고 새로이 무대에 오르고 헤어졌 던 팬들과 재회하는 과정을 거쳤다. 헤어짐과 재회, 잊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 그 속에서 젊은 그들은 다른 가 수들보다 진하게 팬들이나는, 두렵고도 고마운 존재에 대해 깨쳐가고 있는지 도 모른다.
2집 앨범을 낸 후 그들의 헤어스타일은 말썽이 되기 시작했다. 레게 파마를 풀지 않을 경우 '방송 출연금지'라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 모양 때문에 방송 출연금지라니, 거기다 우리는 개성있게 보여야 할 연 예인이 아닌가- 그러나 흑인머리를 연상시키는 레게 파마가 청소년들에게 미칠 파급효과를 생각해 보라는 얘기를 들은 후 그들은 레게 파마를 풀어버렸다. 그것은 양보 할 수 있는 수준의 작은 문제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만한 옳고, 그리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한발 뒤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언론에서 그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한 국일보와 조선일보 등 몇몇 신문에서도 가수로서의 그들의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출연금지를 운운하던 방송국에서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출연금지는 무슨. 내일 모레 우리프로에 출연 하지." 처음의 방송 출연금지는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오리발 쪽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 프로의 출연을 거절했고 결국 그런 저런 이유로 고십센 그들을 '고깝게' 보는 사람도 늘어만 간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굉장히 영악하다고들 한다. 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쪽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젊은 나이에 비해 너무 계산이 빠르고 돈 문제에 민감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노련한 사 람들이었다면 또 정말로 영약해빠지기만 한 인물들이었다면 방송국이나 다른
언론 매체에 맞서는 호기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 웃고, 속으로 제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결코 적지 않다. 사회생활에서 적을 많이 만들어가는 것은 유익한 행동은 아니지만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도 없다. 그 스스로의 가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경계 할만한 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다. 언제나 다수의 편에 기대어 서서 안전할 경우에만 자신의 호불호를 드러 낸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드러내놓고 항의하고 싸우고 팔을 걷어부치고 '정당한 내 몫을 달라'고 소리친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몰아칠 수 있을까? 밖으로는 '그럴 거 뭐 있어.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좋게 좋게 하자구'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은 원만한 행동일까? 웃기는 일이지만 세상은 종종 그런 식의 '원만한' 속임수에 넘어간다. 몇 년 전 처세술에 대한 온갖 책자가 쏟아져나온 후로 '원만함'에 대한 환상 은 더더욱 견고해진 것 같다. 인간관계가 좋은 것과 인간성이 좋은 것은 별 개의 문제지만 그 둘이 거의 동일시되고 타협을 잘하는 것이 성격이 좋은 것 으로 받아 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젊은이가 없 는 사회. 기존의 낡은 틀에 코를 싸매는 젊은이가 없는 조직. 그 조직의 앞 날에 어떤 비젼이 있을까? 흔히들 서태지를 향해 '무서운 아이'라고 한다. 무섭다는 말에는 동감이지만 서태지가 무서운 것은 그의 재능 때문만이 아니
라 그 놀라운 결단력 때문이 아닐까.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그는 차선책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고집했을 때도 음악이 제대로 안되면 어떻게 할 거라는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았다. '음악이 안 되면 죽는 거다' 매니저와의 결별을 선언했을 때도 눈앞에 보이는 손실 때문에 호주머니에 손 을 찔러넣고 서 있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망하는 거다' 2집 앨범을 위해 잠적했을 때에도 그는 두려웠었다. 잊혀질까봐.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좋은 곡을 못내는 가수는 어차피 잊혀지고야 만다.' 언론사와의 계속되는 싸움에서도 그와 양현석, 이주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잊혀지는 것도 망하는 것이고 인기를 잃는 것도 망하는 것이지만 잘못된 일을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도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몫을 멀쩡하게 뺏기는 것도 바보같은 일이지만 가수가 옛날의 인기에 매달려 서 음악적인 면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바보같은 일이다. "랩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요. 3집에서는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죠." 그들은 3집 앨범을 내기 위해서 다시 잠적할 시기도 정해 놓았으며 팬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마르고 닳도록 그들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이아니라 발 전해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나이에 어색해질 때쯤 되면 그 때 그들은 작별을 고할 생각이다.
가을 밤 별이 뜬 하늘은 맑고 공기는 싸늘했다. 보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지금의 서태지와 이주노, 양현석은 어떤 모습 일까? 젊은 날의 열정은 식고 주름진 얼굴에 배가 나온 중년이 돼 있을까? 오늘의 성공은 그들의 인생에서 어떤 교훈을 남길것인가. 대중적인 인기는 아직도 그들의 것이고 적어도 현재까니는 그들의 반성을 요 구하지 않고 있다. 보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오늘의 인터뷰와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을 듣게 될지 모르지만 그때가 되어도 한가지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 다. "우리는 참 좋은 동지들이었다."
"현석씨는 순수하고 아이같은 사람이에요. 주노 형은 생각이 깊고 무엇이든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구요." 서태지는 팀이 해체된 후에도 그들 두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 룹활동을 하면 구성원들 간의 불화와 음악적인 견해 차이가 끊이지 않는 법 이지만 끊임없는 외부와의 마찰로 인해 그들 세 사람은 내적인 마찰을 일으 킬 새가 없었다. 그들의 적은 개인일 때도 있었고 조직일 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연예계를 지배해 온 해묵은 관습, 관행, 부조리가 대부분이었다. 그에 맞서기 위해 세 사람은 하나로 뭉칠 수가 있었고 인기는 그들에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고 또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어렵게 싸웠지만 외롭게 싸우지는 않은 셈이다. 그들 세 사람.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으큰 돌풍은 비단 가요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재능있는 가수들이 부조리에 눈감거나 야합하지 않고 또 언더그라운 드로 물러서지 않고도 자신들의 고집과 영역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1,2 등 순 위보다 더 소중한 돌풍을 찾을 수 있다.
"근데, 인기가 뭐라고 생각해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타로 불리는 젊은이, 서태지에게 물어보았다. 그라면 충분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얀 얼굴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 젊은이는 금세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우와. 세상에 그런 질문을..... 무지하게 어려운 걸 묻네요." |
첫댓글 너무 길어서 복사해서 저장하고 찬찬히 읽어보아야겠소...허허
저두요... ㅋㅋㅋ 인쇄해서 봐야겠다눈~
요즘 빼곡히 써진 글씨 읽는게 왜케 싫은지... 저도 한가할때 읽어봐야겠삼....
근데... 오랜만에 보이는 닉이삼... 자주자주 뵈요~ ^^ 닷컴 태지처럼살자님과는 동일인물??
아니..-_- 뭐가 이리기삼!!! 그냥 길구나 하고 암생각도 없삼;;;
스압으로 인해 패쓰 -_-
귀차니즘이 ==... 이럴수가 ㅠ ㅠ
전 완전 전자파의 압박이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