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코메디라니, 무슨소리야"
두 학생이 떠난 후, 빈 벤치에 앉아 조용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진욱
-뭐, 어떻게 보면 시시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일단은 들어봐.
김유아, 박나향, 시미현. 이렇게 세명은 초등학교시절때부터 알아주는 삼인방이었어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때 우연히 세사람은 같은반이 되었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주리도 그아이들과 같은 반이 되었어
'후..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아닐까, 어짜피 여자아이가 범인일리 없는데'
이어지는 주설의 긴 설명을 들으며 이런 여자애들 이야기가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심을 마음 한구석에 꾹 밀어넣는 진욱
-당시 같은반 친구였던 아이들을 찾아가 물어봤는데
그 한주리라는애, 평소에도 분위기가 음침하고 다른 친구들이랑 어울리질 못했데
뭐, 어느반에나 있는 외톨이 같은 애였지
그러다 그 3명이 어느날부턴가 한주리랑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어
한동안 아무일없이 잘 노는가 싶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한주리가 자살해버렸데
"..자살이라니?"
난데없는 '자살'이라는 단어에 인상을 찌푸리고.
-넌 이쪽지방으로 온지 얼마안돼서 모르겠지만
약 5년전쯤에 지하철내 자살사건이 있었어. 그래 그때 죽은사람이 한주리야
달려오는 지하철에 그대로 몸을 내던졌어.
사체는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심하게 으깨져있었지
"갑자기 왜 자살해버린거지?"
진욱의 물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기운빠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 주설
-뭐..단순한 추측이긴 하지만 그 3명이 한주리를 괴롭혔다던가, 그런거 아니겠어?
"후.. 그래, 어쨋든 조사해줘서 고맙다. 참고하지
그치만 그다지 범인을 찾는데엔 도움이 될것같진 않네
이미 죽어버린자를 용의자로 지목할순 없잖아, 더군다나 어린 여자앤데"
넋두리하듯 투덜거리는 진욱의 말을 들으며
목소릴 내리깔며 진지하게 물어오는 주설
-너.. 귀신이라는거 믿어?
"장난하냐, 그런거 있을리 없잖아"
-흠.. 난 말이야.. '귀신'이란 존재를 무작정 배제해선 안됀다고 생각해
혹시 모르잖아, 조금은 의심해보라구
"우리가 건드릴수 없는 존재라면 그들도 우릴 손댈수 없어야 돼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여튼,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 하지마. 다음에 또 연락하지"
-풋.. 알았어, 그냥 해본말이니까. 범인 잡으면 밥이나 한끼 사줘~
주설의 말을 마지막으로 플립을 탁 닫고는 학교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진욱
'후.. 귀신.. 복수극이라 이건가, 하.. 웃기는군'
말도 안돼는 억측이라 생각하며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옮겨본다
'복수극이라.. 그래, 죽은 딸에 딸에 대한 복수극이라면.. 가능할지도'
알수없는 긴장과 초조를 가슴 깊히 묻으며 수소문 끝에 주리의 집으로 향하는 진욱
데레사 여고 하교시간
하나둘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점점 조용해져가는 교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향
'하아... 기분이 나른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같아..'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가방속 구겨진 하얀 원피스를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가방을 들쳐매고 어딘가로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런 나향의 뒤를 주심스레 따라 걷는 미현
'..이상해.. 나향이.. 뭔가 잘못된것 같아..'
밤 11시가 가까워 오는 시각.
하얀 원피스를 입은채 밤거릴 정처없이 헤매는 나향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향의 뒤를 쫓는 미현
'어떡하지.. 무서워서 말을 못걸겠어..'
뭔가 잘못되어간다는걸 느끼면서도 미현은 그저 나향의 뒤를 쫓는것밖에 할수 없었다
자꾸만 밀려오는 커다란 공포심에 나향을 뒤쫓는일을 그만두려 할때쯤
미현은 지하계단을 향해 터벅터벅 내려가는 나향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계단 옆에 세워져 있는 기둥에는 [범일동]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세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나향의 코앞에 닥친 위험을 깨달은 미현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닐 뒤적거려
한장의 명함과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예, 최진욱입니다
"..아..아저씨.. 나향이가..나향이가.."
-..시미현?
"나향이가 이상해요.. 그 흰원피스 입고 막... 방금 그 지하철로.. 유아가 죽은데로.."
두서없이 더듬거리는 미현의 말을 들으며 바짝 긴장하는 진욱
-박나향이 범일동 지하로 내려갔단 말이지. 그 하얀원피스 입은채로
"네.. 어떡해요.. 나향이.. 죽으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나향은 힘없는 발걸음을 계속 옮겨 계단 밑으로 내려갔고
마침내 미현은 더이상 나향의 모습을 볼수 없었다
-후.. 지금 곧 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넌 최대한 사람 많은 곳에 피해있어
그 말과 함께 뚝 끊어진 전화
전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미현은 얼른 지하계단 가까이로 다가갔다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는 나향의 모습
어째서 였을까.
사람 많은 곳에 피해있으라던 진욱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서있을수도 없을만큼 겁에 질려있으면서도 미현은 타닥 타닥 계단 밑으로 뛰어내려갔다
"나..나향아!! 박나향!!!"
앞서 걷는 나향을 향해 미친듯이 뛰어가는 미현
'여기만 벗어나면 괜찮을꺼야, 나향이 데리고 곧장 위로 다시 올라가는거야
아저씨 올때까지 기다리면 늦어!'
그렇게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으며 미현은 나향의 어깨를 덥석 움켜 쥐었다
천천히 미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나향
그리고.
"꺄악!!!!"
고갤 돌린 나향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향을 힘껏 떠밀고는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미현
분명 나향의 얼굴이 있었어야 할 그자리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하..한주리 너 왜이래!!!!!"
두손으로 머릴 감싸쥔채 소릴 지르는 미현
"아야야.. 아우, 뭐가 갑자기 떠밀어"
겁에 질린 미현의 두 귀에 들려온건 평소와 다름없는 나향의 쾌활한 목소리
의아함에 슬며시 고개를 든 미현의 눈동자엔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나는 나향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어, 미현이? 너 거기서 뭐해? 어라, 여긴 또 어디냐"
"바..박나향.. 너 맞아..?"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향을 올려다보는 미현
"당근이지, 그럼 내가 누구겠냐? 근데 너 왜그러고 있는거야
어..? 잠깐만..
나 언제 이옷 갈아입었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듯,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이 입고있는 옷자락을 들어올리는 나향
그런 나향의 행동에 점점더 겁에 질려가는 미현의 얼굴
"나..나향아, 일단 밖으로 나가자.. 여기 위험해"
자꾸만 떨려오는 다리에 꾹 힘을주고는 벌떡 일어나 나향을 잡아끄는 미현
그렇게 한발짝 한발짝 그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는데..
".....가..지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
깜짝 놀란 두사람은 그대로 그자리에 멈춰 서고
"...이..리...와.....놀아...줘......"
또 한번 들려오는 이상한 목소리에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미친듯이 둘러보는 미현과 나향
"누..누구야!! 장난치지 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나향이 소리치자
그때 갑자기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져버리는 전등하나
"꺄악!!"
깜짝 놀란 미현이 소릴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아버리자
나향은 그런 미현의 팔을 잡아 끌며 계단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사람이 미친듯이 달려 도착한 계단에는.. 이미 누군가가 서있었다..
"....또.. 혼자.. 버려두..지.... 마......."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분명히 있었다. 그곳에는
5년전 자살해버린 그녀, 한주리가.
차갑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띄고 있는 그녀는 그렇게 두사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친듯이 소릴 지르는 미현을 질질 끌며 또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계단과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나향
'거짓말, 거짓말이야!! 한주리는 죽었어!! 분명 죽어버렸단말이야!!!!'
그렇게 부정하는 나향의 마음을 조롱하듯이
복도의 저편에는 또다시 희미하게 웃고있는 주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죽었으면 곱게 가버려!! 이제서야 나타나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향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치자
살포시 감고있던 눈을 번쩍 치켜뜨는 주리.
눈 깜빡할사이 나향의 코앞에 다가온 주리가 나향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헤에ㅡ 웃는다.
나향은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자신의 볼을 스쳐 지나가는 섬뜩함에 꼼짝없이 그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랑.... 놀자...."
조그맣게 벙긋거리는 주리의 입술
그러나, 소리를 감지하는것은 귀가 아닌 머릿속
귀를 꽉 틀어막은채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미현과
자신을 빨아들일듯한 주리의 눈동자를 바라보고있을수밖에 없는 나향
그런 그 둘을 바라보며 헤헤 웃는 주리
나향은 마침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이러지..마.. 넌 5년전에 죽었어... 지하철에 뛰어들었잖아..
우린 잘못없어....어째서 우리한테 이러는거야.....어째서 유아를 죽여버린 거야!"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주행하는 듯한 느낌.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와 섬뜩하리만치 헤맑은 주리의 미소에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나향의 마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주리의 어깨를 꽈악 움켜쥔다
'잡힌다..'
죽어서 이미 '육체'라는것이 남아있을리 없는 주리인데..
분명 나향의 손에는 얼음만치 차가운 뭔가를 움켜쥔 감촉이 전해져 왔다
"..기억났다.. 이옷, 어디선가 한번 본적있다 싶었는데.. 그래.. 니꺼였어.."
나향의 낮은 목소리에 양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미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나향을 바라보았다
"벌써 5년전 일인데, 고작 그것때문에 유아를 죽인거냐..?
그때 너한테.. 이옷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소중한 거였을 줄은 몰랐어.
니가 죽고나서, 우리도 죄책감 받을만큼 받았어
이제와서 이런 갖잖은 복수극 따윌 벌이는 이유가 뭐야..
그때 니가 선택한건 자살이었잖아, 용기없는 자의 최후였잖아!"
나향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주리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아무 힘없이 나향의 손에 끌려다니던 주리가 우뚝 멈춰 고개를 든다
그녀의 눈빛은 살의를 가득 담은채 나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주리의 눈을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나향은 뭔가에 홀린듯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살아갈 용기도 없었던 주제에 강제로 산자의 목숨을 배앗지마.
미련이 남아 이승을 떠날수 없다면 어디 구석에 처박혀 찌그러져 있으란 말야!"
'슈각ㅡ'
나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향을 뒤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미현의 얼굴엔 끈적이는 뭔가가 투둑 튀어왔다
"...어..?"
얼굴로 손을 가져가던 미현의 눈에 들어온건 주리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나향의 양팔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곤두박질 치는 장면
그리고 나향은 그제서야 허전한 양팔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놀랄새도 없이 그녀의 시선을 단숨에 가리며 '촤악'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꺄아아아아악!!!!!!!!"
찢어질듯한 미현의 비명소리와 함께 새하얗게 질린 나향이 한걸음 한걸음 뒷걸음질 치고
잘려나간 양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마치 스프링클러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히죽 웃고있는 주리가 천천히 치마자락을 끌며 나향에게 다가가고
조그맣게 입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혼자가.... 싫..어졌...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리를 바라보는 나향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함과 동시에
나향의 머리를 두손으로 꽈악 움켜쥐는 주리
그리고..
'우드득'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그들 뒤에서 지켜보던 미현의 눈동자와
겁에 질린채 굳어버린 나향의 눈동자가 마주쳐 버렸다
"으..아...아....."
미현이 소릴 지르려는 찰나,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나향의 몸
그리고 미현을 바라보며 입꼬릴 씨익 올리고 섬뜩한 미소를 짓는 주리
"시..싫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나 무작정 달리기 시작하는 미현
유아의 피로 한번 물들었을 지하 복도는
나향의 피로 다시한번 끈적하고 소름끼치는 피빛으로 붉게 번져있었다
마치 페인트 칠을 한듯이.
"하악..하악.."
정신없이 달려가던 미현의 눈에 마침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되자
그녀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친구가 죽었다. 바로 눈앞에서
양팔이 잘리고 목이 돌아간 끔찍한 모습으로
그것도 5년전 한때 그녀들과 친했던 한 아이에 의해서
그렇게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미현의 머리위로 투둑 투둑 떨어져 내리는 따뜻한 무언가
깜짝 놀라 머리로 가져간 손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갤 들어올려 위를 바라본 미현은
찢어질듯한 비명과 함께 다시 어딘가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겁먹은 눈으로 미현이 바라본것은.
천장에 매달린채 두 눈을 부릅뜨고 미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은.
5년전 지하철에 치인 갈기갈기 찢어지고 으깨진 주리의 씨익 웃는 얼굴이었다
털썩, 떨어져 내리는 소리따위 무시했다. 스르륵 치맛자락을 끌며 다가오는 소리도 무시했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애쓰며 미현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갔다
뒤에서 들려오던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더이상 들려오지 않을 때쯤
슬며시 고개를 들어올려 앞을 바라보는 미현.
그러나.. 버젓이 복도 끝에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리로 인하여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나랑... 놀..자..."
또다시 미현의 머릿속에 음산한 주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을 때
'와장창!!!'소리와 함께 전등이 차례로 터져나가고
미현은 머릴 감싸쥐며 미친듯이 소릴 지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치직 치직 소릴 내며 깜빡거리는 전등
마침내 지하에 새카만 어둠이 드리워졌을때 붉은색 비상등이 깜빡거리며 번쩍 켜지고
새빨간 조명속에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리는
지금 미현에게 있어 사신과도 다름없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 휙 돌아서 다시 달려가는 미현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향의 사체가 가까워져 올때쯤
옆에 삐꺽 열려있는 문을 발견하고 얼른 그곳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문에 얼굴을 기댄채 스르르 주저 앉으며 하악 하악 숨을 몰아쉬는 미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5년전 눈앞에서 으깨져버린 주리를 목격했을 때의 그것보다 더 자신을 괴롭혀왔다
터져나가버릴듯한 심장.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공포.
눈앞에 닥친 목숨의 위기.
'죽고싶지..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돌아 앉아 문에 등을 기댄채 슬며시 눈을 떴다
"....너도.. 죽..어버..려...."
꼼짝없이 그자리에 굳어버렸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채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주리는..
그야 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대는 그 마지막 한단어 '죽어버려'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주리의 양손을 바라보며 미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을 꽈악 감았다
그때ㅡ
"시미현!!!!!!!!!!!!!!!!!!"
미현의 귓가에 들려온것은.. 마치 구세주와도 같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다급하게 미현을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진욱이었다
번쩍 눈을 뜬 미현
이제 막 주리의 손이 자신의 목을 짓눌러 오고 있었다
마침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외치는 미현.
"콜록.. 아..아저씨!! 여기..컥.. 여..여기..!!!"
미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때쯤
찰칵찰칵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미현의 귀에 들려오고.
'탕!'
짧은 총성과 함께 문고리가 부서지고 다급히 진욱이 들어옴과 동시에
주리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같은날 오후 3시경
'끼익ㅡ'
짧은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지어져 있는 커다란 저택에 멈춰선 진욱
'후.. 여기가.. 한주리네 집인가'
울창한 나무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집은 그냥 보기에도 왠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주리.. 어머님 맞습니까"
"......"
고갤 푹 숙인채 바들바들 떨며 고갤 끄덕이는 가냘픈 여인
그 큰 집에는 오직 이 여인 한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후.. 5년전.. 한주리가 자살한 이유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만.."
"..내탓이에요.. 주리가 그렇게 죽어버린거.. 다.. 내탓이에요.."
그렇게.. 반신반의 하며 찾아왔던 한주리의 집에서..
난 '귀신'이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조금은 의심하게 되었다
"나.. 주리 친엄마가 아니에요.. 10년전쯤.. 그사람하고 결혼을 했죠..
처음엔.. 주리랑 잘 지내보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앤.. 도저히 날 엄마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언제나 날 무시했죠..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도저히 변하지 않는 그 아이의 태도 때문에..
나도 주리에게 삐딱하게 굴었던것 같아요..
주리.. 흰색을 정말 좋아했어요..
음침하고 검은옷만 입고 다녔어서 전혀 몰랐죠..
..하루는 몰래 주리방을 훔쳐보게 됐어요..
그런데 주리.. 하얀 원피스를 입고 거울앞에서서..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었어요..
나.. 이상하게 주리가 행복해하는게 싫었어요..
왠지 그 하얀 원피스를.. 뺏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주리에게서.. 행복을 빼앗고 싶었어요..
그래서 돌려달라며 울고불고 난리치는 주리를 떠밀면서 그렇게 옷을 빼앗았어요..
너무나도 애절하게 울고있는 주리를 보면서 난 희열을 느꼈어요..
그이후로.. 주리에게서 보물과 같은 옷을 빼앗은 이후로..
주리는 더욱더 음침해져 갔어요.. 더욱더 사람을 기피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어요..
그러다가.. 방 구석에 쳐박아놨던 하얀원피스가 보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던 날..
그날밤.. 주리는 지하철에 뛰어들었어요... 그 하얀원피스를 입은채로.."
긴 이야기를 끝내며 입을 꾹 다문 주리엄마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는 진욱
"..옷에 대한 강한 집착이.. 정신에 문제를 일으킨 건가 보군요.."
가볍게 고갤 끄덕이는 주리의 엄마.
여기서의 볼일은 끝났다고 생각한듯 진욱이 꾸벅 고갤 숙인뒤 돌아서려는데
주리엄마는 그의 등뒤에 대고 말을 이었다
"..주리는.. 죽지않았어요.."
우뚝 멈춰서 그녀를 돌아보는 진욱
"..죽지 않았다니.. 무슨 뜻입니까"
주리의 사체는 산산조각이난채 부서졌다.
그런 주리가 죽지않았을리 없잖은가
"..그사람도.. 주리가 데려가버렸어요..
아빠..나랑 놀아줘.. 그렇게 자꾸만 꿈속에서 말했데요..
그러다가.. 그사람.. 모습을 감춰버렸어.. 주리가 데려간거에요.."
"..남편분께서.. 실종되셨습니까"
진욱의 물음에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주리엄마
"실종이 아니에요.. 주리가 데려간거야.. 그사람도.. 죽은거에요..
주리.. 귀신이 되어서.. 그 지하철을 떠돌고 있어요..
매일밤 꿈속에 나타나요..
나.. 매일밤.. 그 지하철에서 살해당하는 꿈을 꾼다구요.."
그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고갤 푹 숙인채 가냘픈 어깰 들썩이는 그녀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였다
"휴.. 죄책감으로 인한 현상일 겁니다.
정신과 상담을 조금 받아보시는게 좋을듯 하군요
따님은 분명 죽었습니다. 죽은자가 이세상에 남아 누군가를 살해할수 있을리 없어요
남편분은.. 경찰에 실종신고 해두시길 바랍니다.
뭔가 궁금한게 있으시면 여기로 연락주십시요. 그럼, 이만"
명함을 바닥에 슬며시 내려놓으며 돌아서 걷는 진욱
현관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을 때쯤
주리엄마의 목소리가 또다시 진욱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얼마전 지하철살인사건.. 주리가 그랬을 꺼에요..
그리고..오늘밤에도.. 주리가 두명 더 죽일꺼에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제서야 자신이 왜 이집에 온건지를 깨달은 진욱
휙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리엄마의 눈을 마주 바라본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주리가.. 꿈에서 말해줬으니까.. 오늘은.. 내친구 두명.. 더 죽일꺼야.. 라고.. 말해줬으니까.."
"...6일 새벽 2~3시경에.. 어디 계셨습니까"
진욱의 의심섞인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리는 주리엄마
"..이렇게 삐쩍 마른 손으로 사람 목을 단숨에 벨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시각엔.. 집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주리엄마의 말에 움찔하는 진욱
그래.. 사체의 절단면은 단숨에 아주 날카로운 무언가로 쳐낸것.
아무리 성인남자라해도 그렇게 깨끗하게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귀신을 믿으세요.. 주리는.. 그 지하철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진욱은 그 기분나쁘게 커다란 저택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다
"한주리 집에 갔다 온거야?"
피곤함에 절은 몸을 이끌고 의자위에 털썩 주저앉는 진욱을 바라보며
궁금한듯 물어오는 주설
"어. 별 도움되는건 없었지만.. 아, 저기 혹시
김유아 살인 이전에 지하철에서 성인남자가 살해당한적 있었나?"
진욱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얼굴을 받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주설
"흐음..글쎄.. 잘 기억이...
아! 맞아, 살인은 아니고 자살은 한번 있었어
어우, 맞아맞아 왜 그걸 까먹고 있었지?"
박수까지 쳐가며 기억해낸 자신을 뿌듯해하는 주설을 바라보며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는 진욱
"혹시.. 그사람 한주리 아버지였나?"
"으음.... 잠시만 한번 찾아볼께"
그렇게 주설이 자리를 뜬지 약 10분후,
주설은 '그렇다'라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왔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귀신 따위를 믿으란 말인가
하.. 설사 있다고 한다면.. 그럼 그 아이들은 대체 어떡해야 하는거지..'
나향과 미현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진 진욱
정말 이번 사건의 범인이 귀신이라면 그가 할수 있는것은 아마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방관한다면 나향과 미현은 아마 100%죽게될것이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렇게 고민에 빠진지 몇시간후
진욱은 미현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곧장 범일동으로 뛰쳐나갔다
'치직.. 연쇄살인입니다, 장소는 지난번과 같은 범일동 지하철...'
이전에 한번 노란 띠가 둘러쳐졌던 곳에
다시 한번 같은 띠가 둘러지고
처참한 몰골이 되었던 나향의 사체는 잠깐의 조사후 침대에 실려나갔다
"...나도.. 나향이처럼.. 죽게될꺼에요.."
양무릎에 고갤 푹 파묻으며 바들바들 떨어대는 미현
"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테니까, 그렇게 체념한듯 포기하지마"
진욱이 아무리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건네도
미현의 불안은 조금도 가시질 않는듯 하다
"그러니까 사람들틈에 숨어있으라고 했잖냐
내려가면 위험하단거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기어들어갔어?"
"...나향이가..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두고볼순 없었어요..."
"결과적으로 박나향은 죽어버렸고, 너까지 위험했잖냐"
짜증내는 듯한 진욱의 목소리에 조금씩 어깰 들썩이는 미현
"그치만.. 그치만.. 죽을꺼란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보고만 있으면..
또.. 5년 전처럼.. 눈앞에서 친구를 잃게 될까봐.. 그래서.."
흐느끼는 미현의 말을 들으며
후우.. 한숨을 깊게 내쉬는 진욱
"너희, 한주리랑 대체 어떤 사이였냐. 그녀석 왜 자살해버린거야"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진욱을 바라보며
천천히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미현
"5년전에..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때 주리를 처음 만났어요..
분위기도 음침하고.. 남들하고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어요..
처음엔 유아가 주리한테 먼저 접근했고.. 자연스럽게 나랑 나향이도 주리랑 놀게 됬어요..
같이 다니면서.. 주리는.. 참 착한아이란걸 알게 됬죠..
그러다가.. 하루는 주리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왔어요..
정말 너무나도 이쁜 옷이었지만.. 왠지 주리에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주리는 항상 어두운계열의 옷만 입었었고.. 흰색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거 같아요..
그런데.. 유아가 먼저 그 옷에 집착하기 시작했어요..
주리한테.. 이옷 너랑 안어울려, 니가 입을만한게 아냐.. 그런식으로 유아가 막말을 했어요..
조금뒤엔 나향이까지 유아랑 같이 주리를 헐뜯기 시작했어요..
난 둘이 너무 심한것 같아서..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어요..
주리.. 그날 엄청 상처입었나봐요..
그나마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한테 욕지꺼릴 들으니까 배신당했다고 여겼나봐요..
더군다나 그 하얀원피스가 주리가 가장 좋아하던 옷인지는 몰랐어요..
어이없게도.. 주리는 내가 보는 앞에서.. 지하철에 뛰어들어버렸어요..."
얼굴을 푹 파묻은채 중얼거리는 미현을 바라보는 진욱
'단순이 좋아했던게 아니라.. 그 하얀옷에 거의 집착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
정신이 헤까닥할정도로 옷에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주리가 자살을 해버린것도 조금은 이해가는 진욱
귀신을 떠나 보내려면 생전의 미련을 버리게 하는것.
진욱은 낮에 찾아갔던 주리의집에 한번더 찾아가
주리가 13살이었을 무렵 입었던 그 하얀 원피스를 가지고 주리가 있는 납골당으로 갔다
"흠... 한주리.. 죽어서까지 이 옷에 집착하는 네 마음은 잘 알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것은.. 너한테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야
여기, 이 옷은 두고 간다. 질릴때까지 평생 입어. 그리고, 부디 좋은곳으로 가라"
진욱은 그 말을 남기고 납골당에서 벗어났다
부디 이번 사건이 이것으로 해결 되기를 빌며.
몇일 뒤 데레사여고
학생들이 하나둘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향하고 있는 시각
멍하니 책상위에 앉아있는 소녀가 한명 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불마저 꺼진 컴컴한 교실안에 앉아 아무 생각없이 그저 멍하게 있는 소녀
1학년 교실을 한바퀴 빙 둘러보던 교장선생님이 그 학생을 발견하고 교실로 들어선다
"...집에 안가고 뭐하니?"
"...교장선생님..."
천천히 교장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소녀는
얼마전 살인사건에 휘말렸던 시미현이었다
"뭐, 고민이라도 있어? 선생님이 상담이라도 해주련?"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며 미현 앞의 의자에 살포시 앉는 교장
"선생님.. 있잖아요.. 5년전에 지하철내자살사건..
그건 자살이 아니었어요.. 엄연히.. 살인이었어요.."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살인이었어요'를 되내이는 미현을 놀란 눈동자로 바라보는 교장
"내가 밀었어요.. 주리.. 아무생각없이 서있는 그아이를.. 내가 떠다 밀었다구요..
아무것도 모르는 음침한 녀석이.. 내 친구들을 뺏아가는게 싫었어요..
유아도.. 나향이도.. 주리에게 모두 빼앗길것만 같아서.. 그래서.. 떼밀었어요.."
같은 시각 미현의 집
'띵동ㅡ'
"예~ 누구세요~"
맑게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다급히 문밖으로 나서는 미현의 엄마
"..소포..왔어요.."
그녀에게 교과서 크기만한 작은 소포박스를 내미는 소녀.
미현의 엄마에게 소포를 내미는 그 소녀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아주 예쁜 여자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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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처음으로 공포물에 도전해봤습니다만;;
끝이 많이 허접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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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닷단편소설
[단편]
[〃겸둥。♣ ] 공포) 하얀원피스.. 이름없는 소포 下
〃겸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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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22 23:3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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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우. 정말 무서워요~. 공포라고 할 만해요!! 반전도 섞여있으니..!! 잘 쓰셨네요 ㅋ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