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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2017 용흥궁 '강화도령 첫사랑길'
청하동약수터
강화도 남산 남장대
.........'고려와 조선의 보루' 강화도..............
강화도는 경기만 일대 가장 큰섬으로 일찍부터
거대한 지석묘를 축조한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 하구에.,해상교통 요충지
강화도가 가장 주목을 받은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1231년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1232년 강화도로 천도.
육지 세계최강 몽고군은 바다에서만은 약점을 보였다.
육지와 강화도 사이 강화해협은 고려에게 최고의 방어벽.
고려때 강화도는 군량미 확보를 위해 대대적으로 간척사업.
고려는 강화도 남쪽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 제사를 지내며 국난을 극복할 구심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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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산을 연개소문의 유적지와 관련시키고, 전등사를 비롯
여러 사찰들의 연원을 고구려시대로 소급시켰으며 강화도는
고조선과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통의 고장으로 탈바꿈.
또한 내륙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이 조운을 통해 집결하며
물적, 인적 기반이 축적되었으며 고려왕궁과 강화산성을 축성.
해안가에는 제방을 겸한 외성을 축성,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간행.
하지만, 지배층이 강화도에서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피난간 동안에 육지의 백성들은 몽골군에게 시달렸다.
1270년 고려조정이 개경환도 후 강화도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조선시대 때 피난처로 지목되어 강화유수부가 설치되었던 것.
또한 군량의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간척사업이 벌어져서
마니산이 강화도 본섬과 연결되는 등 섬의 면적이 늘어났다.
1627년 후금(청)의 조선침략때 인조는 강화도로 100일간 피신.
.
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다가 곧 항복.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강화도는
조선 최후의 방어처로 주목받아
효종, 숙종 때 53개 돈대를 설치.
강화도 섬 전체가 요새가 되었다.
한양으로 통하는 입구에 자리한 강화도는
조불(佛)전쟁, 조미(米)전쟁,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등 외적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고려와 조선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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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약 천년간 간척 사업에 의해
오늘날, 규모의 큰 섬들로 변모된.,강화군 일대.
...................강화군의 자연환경.....................
강화군 자연환경은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강화도, 교동도·석모도 등 10개 유인도와 18개 무인도.
강화군은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바다, 동쪽은 좁은 염하를 끼고 김포군 지역.
강화군은 원래 김포반도와 연결된 육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분리되었으며.,마니산(468m)·혈구산(466m)·
진강산(443m)·고려산(436m) 등 저산성 산지가 솟아 있다.
황경내·천하골내·용목내 등
계천이 천정천을 이루면서
해안의 충적지를 통과하여
바다로 흘러가는데 충적지는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것.
연평균기온 10.8℃ 내외, 1월평균기온 -4.5℃ 내외,
8월평균기온 24.4℃ 내외, 연평균강수량은 1,321.1㎜
겨울이 따뜻하여
강화도 남서부에는
동백나무·초피나무·보양목
등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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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버스터미널~자전거 20분거리~강화성공회성당(강화읍 관청리).
강화도 강화읍 번화가 중앙시장· 카페·빵집·도서관, 고려궁지·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국화저수지 ·강화나들길· 강화도령 첫사랑길.,여행지.
고려궁지(사적 제133호)는 고려 고종 19년(1232)
최우의 무신정권이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지은 강화읍 궁궐터는 성터 같다.
강화읍에서 가장 높은 언덕배기 위에.,고려궁지.
1270년 39년간 항전후 환도 때 몽골군에 의해 폐허.
조선시대 복구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궁궐 안
도서관인 외규장각 왕실 서적과 유물을 약탈하러 온
프랑스군에 의해 다시 불타 소실되고 말았던 고려궁지.
고려궁지에서 내려오면 성공회 강화성당과 용흥궁.
용흥궁은 조선말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
원래 초가집이었다가 철종 4년 다시 건축한 한옥집.
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가까이에서 "땡~땡~" 들려오는 종소리.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이곳 한옥 성당은 강화도에서 만난.,최고의 선물.
'육지의 끝' 김포반도 통진에서 694m 강화대교 건너
강화도에 들어가면 제일 처음으로 반기는 땅이., 갑곶.
강화읍에서 '고려궁지' 올라가는 언덕길 오른쪽에 용흥궁.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열 아홉살까지 살았던 잠저.
실제로 '철종실록'에는 동네 무뢰배가 술에 취해
원범이에게 말을 함부로 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원범에게 힘이 있었다면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왕손에게 동네 사람이 그렇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것은 당시 원범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하고 딱했을지 짐작될 만큼 뒤를 봐줄 배경이 없었다.
그는 소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었다.
조선시대는 한 스승 밑에서 배운 제자끼리
학맥을 이어가면서 세력을 넓히는 시대였는데
원범은 그런 학맥 역시 없었고 혼맥 역시 없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인 전계군은 강화도에 유배 왔다가
그곳 처녀와 결혼했고 외삼촌은 대이을 손도 남기지 못해
원범에게는 외사촌도 없었고 내세울 만한 외가도 없었던 것.
그는 단단하게 구축이 되어있는 정치권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맨 몸으로 부딪히며
외롭게 견디어 나간 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강화도령'이라는 말에는
기득권 세력들의 비아냥이
숨어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백성은 철종에게 희망을 가졌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아실 임금님이니
분명히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 것이라는 믿음.
철종은 재위동안 그 기대를 스스로 저버리지는 않았다.
비록 제 뜻을 다 펼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한 부분이 담긴 철종실록.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살았던 강화도.
특별한 마음 역시 가지고 있었던 듯 보인다.
철종은 강화도 주민들만 위한 특혜를 베푼다.
"내가 강화부에 어찌 특혜를 입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과 곡식과 묵은 세금 빚 가운데 징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없애 주고,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강화유수로 하여금 조정과 상의하여
그 장점을 따라 조치하도록 하라." <철종실록>
또 철종 4년에는 강화도 유생들만이
응시할 특별과거를 시행하도록 하교한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조선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더구나, 철종은 힘이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용흥궁에는
대여섯 가구가 복닥대며 살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도 당시에는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그 우물을 마셨다.
생전에 강화를 위해 특별한 마음을 낸 것처럼
사후에도 강화 사람들에게 곁을 주었던.,철종.
그는 비록 그곳 초가에서 옹색하게 살았지만
왕이 된 덕분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남겼다.
초가삼간이라면 어찌 대여섯 가구가 살았을까?
비록 역사책에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져 있지만
강화도 사람들에게는 특별하면서도 가까웠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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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머무는 용흥궁의 담장 아래
복수초가 막 머리를 내밀고 있는 봄.
추운 겨울을 견뎌낸 복수초의 노란 꽃.
사람이 살지 않는 용흥궁에도 봄기운.
마치 용(龍)이 되어 떠난 원범(철종)이
잠시 놀러오기라도 한듯한 봄날 용흥궁.
2017.6.19 (월) 서울 매일 - 강화군이 골목길에 야간경관 조성
새로운 볼거리와 야간보행자 안전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인천 강화군(군수 이상복)은 구도심 지역인 강화읍 용흥궁 주변
'심도파출소~성공회 후문' 담장벽화 ‘골목길 야간경관 조성사업.
이번에 설치된 벽화 및 경관조명은 군비 2억원을 투입
강화경찰서 정문~용흥궁~ 강화성공회성당 골목길까지
연장 350 m 구간에 설치되었고 기존 골목길 양측 담장에
‘강화도 행렬도’와 ‘전통 문양’을 이용한 벽화를 설치하고,
'야간보행자 안전 확보'를 겸한 경관조명도 설치한 것이다.
용흥궁 주변
성공회
또한, 용흥궁 입구와 성공회 쪽으로도 볼라드등과
전통모양 가로등을 설치해 주변건물과 잘 조화되도록
지역 특성을 살린 아름답고 안전한 거리로 탈바꿈시켰다.
그동안 어둡고 노후됐던 구도심 골목길이
주민 및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강화군의 명품거리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
군 관계자 “앞으로 도시지역 내 도시계획도로 개설사업과
각종 도시재생사업 등 용흥궁 주변 골목길 조성사업과 같은
담장 골목길을 활용한 관광사업을 적극 발굴·시행해 나갈 계획”.
용흥궁공원
강화도., 용흥궁 가는 길.
강화도령 첫사랑길.,출발점.
'떠꺼머리 농삿꾼' "원범"이 살았던 철종의 잠저(潛邸).
철종 4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초가 3칸을 헐고 지은 잠저.
내전1동, 외전1동, 별전 1동을 지어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경내에는 강화도령 원범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한 철종잠저구기비,
정치적 배경 없고 직계 친인척 없는 철종.
후대 고종의 잠저 운현궁과 비교하면 초라.
지금은 다도예절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문 앞에는 영의정 정원용 비 & 유수 정기세 비.
영의정 정원용
강화유수 정기세
두 사람은 부자지간.
........................정기세(鄭基世) .................
1814(순조 14)∼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성구(聖九), 주계(周溪), 강화유수,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九), 호는 주계(周溪).
영의정 정원용 아들이며, 우의정 정범조(鄭範朝) 아버지.
1837년(헌종 3) 정시(庭試) 병과 급제, 충청우도 암행어사.
응교·규장각직제학· 이조참의를 지냈고
1853년(철종 4) 강화도 조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강화유수, 그후 전라도관찰사·의정부좌참찬·예조판서를 지냈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와 형조판서
이정청당상(釐整廳堂上)이 되었고 고종 즉위 후 더욱 중임.
권강관(勸講官)·병조판서·한성부좌윤·철종실록찬집당상·제학·우찬성.
『대전회통』 편찬을 위한 교식찬집소(敎式纂集所) 교정당상(校正堂上).
신미양요 때에는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각조의 판서·제학·시강원 빈객.
임오군란 전 수원유수로 있다가 난이 수습된 뒤에도
요충지라고 유임되었고 한성부판윤으로 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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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술관(製述官)과 문서사관(文書寫官)에 몇차례 임명.
이로보아 문장과 서예에 조예가 있었던듯 성격이 겸손하여
다른 사람 뜻을 거스르지 않고 기쁜 일을 잘 알려주어 까치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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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범이를 한양으로 떠나보낸 이후에 양순이는 매일같이
해질녘이면 갑곶나루터에 나가 원범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원범이는 돌아오지 않고
무심한 갈매기만 "끼륵끼륵~" 울어댈 때 양순이도 같이 울었다.
'고려~조선시대' 강화도 관문., 진해루.
강화 외성 6개 문루 중 하나(사적 452호)
강화대교와 구 강화대교 사이에 외성 문루.
양순이는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은 원범이를 생각하며
시집도 안가고 살다가 이름없는 들꽃처럼 스러져 갔다.
양순이가 생전에 원범이가 돌아오길 기다렸던 갑곶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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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문수산 자락에 야트막한 고개 하나.
이 고개를 넘으면 강화도가 보이지 않는다.
원범이가 강화도를 떠날때 넘었던 고갯마루.
김포 문수산.,문수산성.
가마 속에서 바다 건너 강화도를 바라보던 원범은 생각했다.
'생전에 강화도를 다시 볼수 있을까?' 팔자에 없는 가마 타고
호사스럽게 가는 길이지만 아무래도 죽으러 가는 길 만 같았다.
그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원범은 강화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13년 후에 한양 땅 창덕궁에서 운명했다.
고갯마루에 가마를 멈추게 한., '원범이'
가마에서 내려 강화도를 향하여 소리쳤다.
"강화도야 잘 있거라, 다시 보마 강화도야"
바다 건너 강화도를 바라보며 목울대에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울리는 목소리가 천둥이 치는 듯.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가마꾼들이 기절초풍할 일.
이때부터 강화도와 통진 사람들은
이 고개마루를 천둥고개라 불렀다.
김포 문수산자락.,문수산성
강화도라고 했지만 기실은 '양순이'일런지 모른다.
외롭게 살던 떠꺼머리총각 원범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 여인이 양순이였고 그것으로 둘 사이에 영원한 이별.
이것으로 원범은 강화도를 다시보지 못했다.
이것이 원범이가 마지막으로 본 강화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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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처녀는 통진으로
시집가서 살 수 있지만
통진처녀는 강화에
시집와서 못 산다."
해안선 길이 99km 강화도에서 내려오는 말이다.
갑옷만 벗어놓아도 건널 수 있다는 섬 강화도는
김포반도 통진에서 빤히 보이지만 서로 배타적.
고려시대 충정왕과 창왕 그리고 우왕이 쫓겨 왔으며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과 능창대군이 유배당하여 왔고
영창대군도 이곳으로 쫓겨와서 유배지에서 불에 타죽었다.
광해와 연산 임금도 군(君)이라는 칭호를 달고 귀양살이.
고려시대~조선시대 1000년 간 강화도는 유배의 땅이었다.
지금이야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뭍으로 연결되어 육지화.
19세기 말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전함 공격.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의 강요에 못이겨 강화도조약 체결.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나온 조선 25대 국왕 철종이 강화도령 원범.
1835년 조선 24대 국왕 헌종이 후사없이 갑자기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없어 왕실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때 왕실의 제일 웃어른이신 대왕대비가 순원왕후 김씨.
순조비 순원왕후를 축으로 하는 안동김씨와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익종)비 신정왕후의 축
풍양조씨는 어느 쪽에서 먼저 왕을 내느냐 대립각.
종친부를 꺼내 찾아보니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원범이 떠올랐다.
안동김씨의 좌장격인 김문근과 대왕대비는 원범을 택했다.
직계혈통에 마땅한 사람도 없었지만 정치적 배경이 있거나
성군이 될 여지가 있는 사람보다 농사꾼 원범이 적임자였다.
또한 풍양조씨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촌각을 지체해선 아니되어 대비의 명이 떨어졌다.
종묘사직을 이어갈 왕으로 원범이를 택한다는 교지.
조선 왕실사에서 이처럼
슬픈 택군(擇君)은 없었다.
왕이 신하를 임명하고 면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군왕을 선택하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비록 대왕대비 명을 거치는 요식행위를 거쳤지만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것은.,권위를 기반으로
군림해야 하는 왕실로서는 몰락으로 가는 막차였다.
안동김씨에 의해 간택(?)된 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대왕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로서 할아버지 은언군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하고 아버지 전계군은 이원경,
경응, 원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형 이원경은 민진용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당했고 이에 놀란 아버지 전계군이 두 아들을 데리고
한양을 빠져나와 강화도에 숨어들어 원범에게 농사만 짓게 한 것이다.
글을 읽고 깨우치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
원범의 아버지는 원범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잃고
작은형마저 죽자 원범은 천애의 고아가 되어 외톨이가 된 원범.
그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 "양순이"가 있었으니 애칭이 '복녀'.
"동네사람들이 그러는데 양순이 너는 복녀래,
너를 데려가는 신랑감은 복 받는 복돌이가 된다구…
나, 너한테 장가들고 싶은데 내 색시 되어 줄래?"
"……."
나뭇짐 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원범이가
밭에서 콩밭 메던 양순이를 발견하고는
지게를 받쳐놓고 잠시 쉬면서 고백한 것.
더벅머리 뒷머리를 긁적이며 양순이를 만나면
'말해야지' 예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이지만
막상 양순이 앞에서 말을 꺼내니 목소리가 떨렸다.
더듬거리며 말을 마친 19살 더벅머리
숫총각 원범이는 얼굴이 그만 빨개졌다.
"어머, 이 땀 좀 봐."
그러한 원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양순이.
치맛자락을 당겨 원범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콩당콩당 뛰는 처녀의 가슴을 진정시키며
더벅머리 총각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양순은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양순이는 자신의 콩당콩당 뛰는 가슴과
원범에게서부터 전해져 오는 뜨거운 열기로
자신의 콧잔등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것.
떠꺼머리총각 원범과 섬처녀 양순의 사랑은 길지 못했다.
1850년 6월 5일에 영의정 정원용이 이끄는 제왕봉영 일행이
깃발을 앞세우고 갑곶나루를 건너 강화도에 들이닥친 것이다.
강화도 갑곶나루
진해루(동문)를 통과하여 들어오는 일행을 발견한 원범은
그들이 자기를 잡으러온 것으로 착각하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그로인해 난감해진 것은 한양에서 강화까지 내려온., 봉영 일행.
그리하여 강화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틀 밤을 강화유수 관아에서 묵은
봉영 일행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동문
더 더욱 몸둘 바를 몰라 하는 것은 강화유수 정기세였다.
한양에서 봉영일행을 이끌고 강화까지 행차한 정원용은
관직으로는 영의정이었고 사적으로는 아버지였기 때문.
한양에서 내려온 봉영 일행이 불편하지 않게 보살피고
임금을 모셔가는 일이 순조로워야 출세 길도 열릴 텐데
원범이는 산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
강화유수 관아.
마지막 수단으로 강화유수는
양순이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강화유수는 양순이를 설득하고 양순이는 원범이를 타이르는 형국.
원범이를 모셔갈 봉영일행이 강화도에 당도하였을 때 양순이 역시
원범이를 잡아갈 무리라 생각 "내가 나오라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
양순이가 원범이를 깊은 산속 동굴에 밀어 넣었던 것.
원범이 먹을 밥을 보자기에 싸들고 산을 오르던 양순이.
강화유수 관아에서 갑곶 나루까지 줄지어 있는 봉영일행.
양순이 눈에도 그들이 예사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350여명이 더 되는 행렬과 기품 있는 가마가 준비된 것.
강화유수 말처럼 원범이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아닌듯 했다.
그렇다면, 강화유수의 말처럼
'원범이가 왕노릇 하러 한양가면.,'
'나는?'이라는 자문에 답이 없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마음씨 착한 원범이의 각시가 되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살겠다는 순진한 섬 처녀의 꿈은
유효한 것일까? 물거품 되는 것일까? 답이 없었던 양순이.
"원범아~ 널 잡으러 온 게 아니라., 모시러 왔데."
"무에 할일이 없어 예까지 농사꾼을 데리러 오냐?
한양에서 날 죽이려고 여기까지 잡으러 온게지…."
"아냐, 유수가 그러는데 널 왕으로 모시려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널 기다리고 있데."
"왕은 무신 얼어 죽을 왕?
감언이설로 날 꼬여서
배에 태우면 통진에 닿기도 전에
바다에 쳐 넣어 나를 죽일 텐데."
"아니래두,
며칠 전에 하얀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좋은 징조야,
내 느낌이 좋으니까 날 믿어봐."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가는 하얀 기러기를 원범이도 보았다.
그것을 양순이도 보았다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더더구나
양순이가 좋은 징조라고 말하면서 믿어 달라는데 믿음이 갔다.
"내가 한양으로 간다면 너는 어떡하냐?"
"뒤따라 갈 수 있으면 같이 가고, 따라오지 못하게 하면
니가 한양 가서 가마 보내면 되잖아, 왕은 사람도 죽이고
살린다는데 니가 왕이 되면 가마 하나 못 보낼려구."
"그래, 한양 가면 가마 보내 널 데려갈게."
양순이 손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온 원범이는 강화유수 관아에 도착.
자신을 잡아다 죽일 수 있는 무리라는 의심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 원범은
기다리고 있는 영의정 정원용 앞에 넙죽 절하며 무릎을 꺾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또님! 살려주세요.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영의정을
사또란다.
'하기야,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영의정을 본 일이 없었던 원범이는
사또가 제일 높은 사람으로 알 수밖에.,'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덕완군(德完君) 나으리~."
호칭이 달라졌다. 아직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니까 나으리다.
언제부터 덕완군이었던가? 원범은 원범이고 농사꾼은 농사꾼이었는데
권력의 필요에 의해서 덕완군 군호가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내려졌던 것.
당황한 영의정 정원용이 예를 갖추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19살 총각 원범이는 왕이 되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이제껏 농사꾼 원범이가 하룻밤 자고나니 신분이 수직 상승.
이때부터 시위하는 군사들 창에 의하여
양순이는 원범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강화유수 관아에서 부랴부랴 봉영의식을 거행.
이렇게 하여 원범이는 꽃가마보다 더
지체 높은 가마를 타고 한양으로 떠났다.
옷고름 입에 물고 원범이가 떠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양순이는 흐르는 눈물을
삼베 적삼 저고리 섶으로 닦고 또 닦으며 울었다.
가마행렬이 갑곶 나루에 도착했다.
강화 고을 대장이라는 사또는 감히
타보지도 못할 호사스러운 배에 탄
원범이는 군중 속을 헤집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양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양순이는 원범이를 멀리서 보았다.
이것이 양순이가 원범이를 마지막 본 모습.
가마에 실려 한양으로 떠나는 원범이를 멀리서
바라보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통진에 도착한 봉영일행은 걸음을 재촉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국왕은 만백성의 어버이라서 용상은 하루라도 비어서는 안된다.
임금 없는 나라는 주인 없는 나라와 같다.
원범이 산 속으로 숨어버려 사흘간을 허비한
영의정 일행은 순원왕후로부터 재촉받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새임금 모셔오는 일이 지체되니
채근하는 파발마가 매일같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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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6월 9일. 창덕궁 인정전 즉위식 거행.
어제 강화에서 도착한 즉시 창덕궁 희정당에서
거행된 덕완군 봉영식 후 거행되는 공식행사였다.
이로서 비어있던 용상 자리가 채워졌고
조선 25대 국왕 철종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떠꺼머리 농사꾼을 왕으로 밀어올린 안동김씨는
좌장격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여 국혼을 치름으로서
김국근은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천하는 안동김씨 세상이 되었다.
원범이 철종 등극 후 자신을 왕으로 점지한
순원왕후 사망을 기회로 정사를 챙기려 했으나
안동김씨 견제로 왕권을 행사 못하고 주저앉았다.
안동 김씨의 전횡으로 국법질서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인내 한계점에 도달하자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에서 대규모 민란.
또한 부활을 약속하는 그리스도 사상과
래세(來世)를 예견하는 미륵신앙이 퍼졌다.
이때 나타난 것이 동학. 자의반 타의반이었을까?
타의에 의해서일까? 국정중심에 있어야 할 철종.
국정의 변방을 헤매다 주색(酒色)에 빠져들었다.
철종은 김문근의 딸 철인왕후 외 7명의 후궁을 두어
여러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숙의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 한 명만 성장하여 혼례를 올렸고 그 남편이 박영효.
아직 젊은 나이 서른셋.
재위 14년만에 철종이 죽자
또 한 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왕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한참 탄탄해지는 세도정치 달콤함에 취해있던 안동김씨는
망연자실 넋을 놓은 반면에 풍양조씨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철종을 옹립하는데 실패한 풍양조씨는 이번에는 안동김씨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원군 이하응과 함께., 치밀한 계획.
왕실의 종친으로서 안동김씨의 바짓가랑이를 기어야 하는
수모와 모멸을 당하며 칼을 갈고 있던 대원군 이하응의 계책과
조 대왕대비와의 밀약에 따라 수순대로 진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조대비와 대원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안동김씨에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새 임금이 결정되었으니 그가 대원군의 아들 조선 26대왕 고종.
용흥궁 일대.
용흥궁 공원은 2008년 심도직물 옛터에
관광객의 편의 제공을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길 직전에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내리면 우선 정면 언덕에.,성공회 강화성당.
성당보다는 철종의 잠저였던 용흥궁을 먼저 보기 위해
길을 잡는데 공원 우측 끝에 심도직물 기념 표석이 있다.
표석의 내용에 의하면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70년대에는 종업원이 1,200명에 달해
지역 경제발전은 물론 외화 획득에도 크게 기여한 향토기업이었다.
강화읍 용흥궁 공원 주위에는 성공회 강화성당
외 용흥궁과 예전 심도직물 공장의 굴뚝이 있다.
용흥궁은 강화도령 원범이가 19세까지 살았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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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궁이지 그냥 일반 기와집.
당시 권신들의 허수아비가 되느니
그냥 강화도령으로 살고 싶었을지 모를
조선제25대왕 철종을 떠올리면 짠한 공간.
용흥궁을 나오면 커다란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1960/70년대 강화의 산업을 이끈 심도직물 흔적.
안내글을 읽으면 강화 주민들이 그 기업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심도직물은 향토 기업으로서 강화의 상징이자
많은 이들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징표인듯.
.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를 통해 수도권에서 이동하기
가까워지면서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관광지.,강화도.
2017.6. 27에 석모대교가 개통하면서 배를 타지 않아도
강화도 옆에 딸린 석모도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석모도는 강화 관광객 절반 이상이
방문할 만큼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강화도는 볼거리뿐 아니라 먹거리도 풍부지.
2013년도에는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를 통해
네티즌이 선택한 휴가철 여행지 1위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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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문화재의 보고다
발걸음마다 문화재가 밟히는 섬.
하여, 발 딛는 걸음마다 조심스럽다.
어디든 땅을 파보면
유물 파편이 나온다.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발굴하고 개발을 해야 할지
모호할 만큼 유물 유적이 많다.
'단군 신화'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고려궁지 삼별초 항쟁사를 비롯하여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역사가 공존.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가득한 곳.
그러면서도 지중해 스타일 카페들도 많은 편.
'세계적인 "신혼여행의 천국" 산토리아섬 아닐까?'
그런가 하면, 강화도 특유의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음식점들.
밴댕이회, 장어, 순무김치, 돌게장.
삼식이회는.,"숫놈",
삼숙이탕은.,"암놈"
.
강화도에는 알게 모르게
볼거리 먹거리들이 참 많다.
그래서, 자주 즐겨 찾게 된다.
매번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인 곳.
아내는 카페 음식을 좋아한다.
나는 토속 음식을 좋아하는 편.
그래서, 번갈아 골고루 찾게 된다.
신세대는 신선한 카페를 좋아하는 편.
'쉰세대'는 토속 음식이 입맛에 맞는 편..
환갑 훨씬 넘은 우리 부부는 '순세대'일까?
그래도, '순세대' 마음은
'신세대 취향'을 추구한다.
강화도는 일몰이 아름다운 해변이 많아
낭만적인 분위기 물씬한 카페들이 즐비.
마치, 지중해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
동막해수욕장 야영장.
강화 최남단.,동막해수욕장.
강화도 고려산.,진달래꽃 축제
강화도., 고인돌광장
강화대교
석모대교., 2017.6.28 개통.
석모도 미네랄온천 노천탕.
석모도 낙조
석모도 해명산 보문사
석모도 해명산 보문사
석모도.,'해명산 ~ 상봉산' 능선 등산로.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보다 짜릿한 암릉미.
강화도 일대 등산로 중에서 가장 경치가 백미.
낙가산.
서포리
외포리 선착장
석모도를 오가는 뱃길 선상에서
새우깡을 받아 먹는.,'괭이갈매기.'
사람들은 "거지갈매기"라고 부른다.
.
강화도는 넓이 410㎢, 남북 27km,
동서 16km로 우리나라 5번째 큰섬.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섬.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서해.
'강화도 지역경제 및 관광자원' 활성화.
'서해 도서지역의 경제 활성화'와도 직결.
유럽의 문화재들은.,세계적인 관광산업의 보고.
강화도 문화재들은.,잠재적으로 세계적인 관광자원.
보물 진주는 많은데, 진주목거리로 꿸 스토리텔링 절실.
'설민석(1970년 10월 10일~) 사단
인재들이 동원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강화도에는 의문점과 논란의 역사가 많다.
재조대장경 판당의 위치, 집정 최이(?~1249)와
최항(崔沆, ?~1257)의 무덤 등이 밝혀지지 않았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127점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강화도.
한반도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간직한 보물섬.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바다에 몸을 푸는 지점.
그곳에 위치한 우리나라 네 번째로 큰 섬이 강화도.
'서울~개성' 수로이자 국토의 심장부를 막아주는 방패.
강화도는 한국사를 집약해 놓은 터이자
한반도 엄마 품에 안긴 아기와 같은 산세.
실제로 국난을 당해서는 하나의 독립국 역활.
마니산 정상에 올라보면 사방으로 신성한 기운이 그윽.
강화도는 고려시대 항몽기에 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최씨 무인정권은 1232년 여름 장마 때, 천도를 단행했던 섬.
그 시절 강화도는 강도(江都)로 통했고
몽골 기마군단이 건너지 못하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는 39년간이나 버티며 저항.
천하를 통일하여 세계사를 다시 쓴 몽골군이
왜 이 비좁은 강화해협을 건너지 못했던 걸까?
초지진에서 바라본.,강화해협.
전쟁터에 기술자와 공병을 대동하고 다닌 몽골군.
동유럽 정복 루트에서 숱한 강들을 그들은 곧 잘 건넜다.
고려에서도 그들은 임진강과 한강을 누차 건너 남하했다.
그러나, 강화해협은 한강보다
오히려 훨씬 더 비좁은 편이다.
천연적인 '천혜의 요새'였던 때문일까?
'삼별초 저항'이 녹녹치 않았던 때문일까?
강화도 ~영흥도~ 진도~제주도~일본~유구국.
삼별초 잔여세력이 정착했다는.,유구국.
정조 때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은 고려궁지 안에 있다.
북산 가파른 계단 끝 고려궁지에 들어설 때마다 답답함.
피난지에 세운 궐터라지만 이궁 터보다 협소한.,고려궁지.
39년간 고려의 황궁 자리가 아니었던가?
고려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으리라는게 사학자들의 의견.
북산을 등지고 앞쪽과 왼쪽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이 궐터 였으리라는.,고려궁지.
고려궁지
‘一滿 시냇물에 비친 달의 주인장’.,홍재(弘齋).
조선에 르네상스 시대를 연 정조 스스로 지은 호.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지상 수많은 냇물에 비친다.
하여, 시냇물이 1만 개면, 달도 1만 개가 된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달은 군주이고 시냇물은 백성을 상징한다."-정조.
군주와 백성이 하나라는 군민일체론(君民一體論)
그러한 정조의 인식이 탕평책(蕩平策)으로 이어진다.
‘민국(民國)' 군주와 백성이 모두 나라의 주인. - 정조.
자신의 분신인 백성이 천대받는 걸
묵과할 수 없었던 그는 노비제도 혁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국 정치’가
더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한 건 조선역사의 비극이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정조는 국립도서관 규장각을 중심으로 과거사를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는 연구 편찬사업을 왕성하게 벌였다.
왕실의 여러 행사에 관한 어람용 의궤도 화려하게 제작했다.
의궤란 왕실의 혼례,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장례, 궁궐 건축 등.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의 전말을 그림을 곁들여 기록한 것.
이 의궤와 서책 영구보전 규장각 부속 도서관이 강화도 외규장각.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약 6,000책이 소장돼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대부분 태워졌다.
의궤를 포함한 중요 도서 약 300권은 프랑스군이 약탈.
2002년 외규장각 건물을 복원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2011년 297책(의궤 294책) 반환,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강화도는 바다와 갯벌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강화도는 반만년 신화, 전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한반도를 둥지에 깃든 봉황이라면 강화도는 봉황의 알.
봉황은 예로부터 왕을 수호하는 길조이며
왕은 용(龍)에.,잠룡은 '미래의 왕'에 비유.
강화도 용흥궁(龍興宮)은 철종이 살던 집터.
........용흥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철종이 강화도령 때 살던 민가.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명명, 1903년 이재순(李載純) 중건.
현재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한옥.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건평 90㎡),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 ㄱ자형(건평 95㎡).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
......................철종(재위1849~1863)..................
조선 25 대왕 1831(순조 31) 출생 1863(철종 14) 사망.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지고 즉위 직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1852년 친정을 시작했지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삼정개혁을 공포했으나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지배층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고 당시 동학이 창시되었다.
동학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이라는 죄를 씌워 체포했다.
철종은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
.........................................................................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아버지 전계대원군 광,
어머니는 용성대부인 염씨
정조 아우 은언군 인(裀)의 손자로
1831년 경행방 사제에서 태어났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강화로 옮겨져 교육도 못받고 농사짓고 살았다.
1849년에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영조의 유일한 혈손.
그는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국구가 된 김문근이 정권장악,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점차 나이가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며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적극 정치에 참여했으나 삼정 문란이 더 극심
1862년 진주 단성지방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했다.
용흥궁 주변 길
고려궁지.
강화성당.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전등사
강화도 마니산 북동쪽 끝에 위치한.,정족산(220m)
1600년전 정족산 자락에 터를 잡았던.,사찰 전등사.
사찰 뒤편 산길을 따라 약 50m 올라가면.,정족사고.
적상산 사고.,안국사.
정족산 사고.,전등사.
태백산 사고.,각화사.
오대산 사고.,월정사.
'고려 ~조선'시대까지 운영하였고.
왕조의 기록을 보관한.,사고(史庫).
조선왕조실록은 1,893권 888책. 필사본·인본.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 등.,국보 제151호로 지정.
1997년 훈민정음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일제 강점기에는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 했으나,
이것은 ‘조선’ 국호를 무시한 명칭으로서 정당하지 않다.
더욱이 ≪고종황제실록≫·≪순종황제실록≫ 같은 경우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편찬되었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 등이 심하여 실록의 가치를 손상한 것이 사실이다.
즉, 편찬의 각 반위원에 의하여 편찬된 고서(稿書)는
필히, 감수부의 총책임자 경성제국대학 교수에 의하여
일제시대에 감책(監冊), 감증(監增) 등 손질이 가해졌다.
일제때 조선왕조실록 원고는 일본인 위원장인
이왕직(李王職) 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되었다.
그래서, 엄밀히 <조선왕조실록>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이라 하면
'태조 실록~ 철종 실록'까지를 의미.
조선 후기 25대 왕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5~19세까지 살던 집.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용흥궁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한옥을 구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건물로 축조하고 용흥궁이라고 이름하였다.
용흥궁~청하약수터~남장대~찬우물약수터 ~철종 외가.
강화나들길 16코스는.,"강화도령 첫사랑길."
철종이 강화도령 "원범이~" 시절에 장래를 약속한.,봉이
강화도령 첫사랑길은 "원범이 봉이 손을 잡고 다녔다."는 길.
원범이 19살까지 살던 용흥궁 그리고 외숙 염보길이 살던.,외가.
'강화읍~전등사' 84번 지방도로 우측에 위치한.,외가.
철종 4년(1853년) 지어졌다고 하며 염보길(廉輔吉) 거처.
이 시기는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이 지어진 시기와 일치한다.
이런 시기를 고려하여 볼 때 철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강화유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종 외가가 철종 아버지와 함께 한양에서 왔는지
또는 강화도 토박이였는지 기록이 전해오지 않으나
이미 심한 감시 속에 살았던 역적 집안이었기 때문에
철종 즉위 전에는 염씨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을듯.
그후 철종이 25대 왕에 등극하자 왕의 외척으로서
걸맞는 대우를 하기 위하여 이 집도 새로 짓게 된 것.
철종이 한양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14살 때인
1844년 이원덕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
외숙 염보길도 그때 같이 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도세자의 4대 손' 강화도령 "원범이~"는
원래, 이곳에 있었던 초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지금은 그 사실을 기록한.,비문이 들어선.,비각.
순조 때부터 시작된.,'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이 성행
국정이 문란해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시기.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
헌종의 7촌 아저씨벌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
안동 김씨 척족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가의 법도를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민진용의 옥’(헌종 편 참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 아들 원경이 사사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원범 만 강화도로 유배.
이리하여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이 지난 어느날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조선후기.,제 25대 왕.,철종
용흥궁 가는 길인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
강화도령이라 불리우던 철종의 잠저(潛邸)를 거쳐 가는 길.
철종이 어떤 인물이었던가? 평민에서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철종.
19살 나이가 되도록
제때 결혼도 하지 못한
강화도령 노총각.,"원범이~~"
역적 집안의 후손이기에
그 누구도 돌보아 주지 않기에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던.,"원범이~~"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 상에서
이처럼 신분상승이 획기적인 이는
조선시대의 철종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당시 왕으로 옹립된 강화도령을 모시러 관리들이 내려갔다.
봉영(奉迎)의 중책을 안은 책임자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원용.
정원용(1783년~1873년)은 정조 7년부터 고종 10년까지 살았던 분.
...........................정원용(鄭元容)..........................
한양에서 태어나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와 예조, 병조의 참판 등 관직을 두루 거쳤다.
1821년(순조 21) 괴질이 서북 지방에 번지고
10만 사상자와 천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관서위유사로 평안도 순찰하고 실상을 파악하여 대책 마련.
1831년(순조 31) 동지사로 청나라 연경을 다녀왔다.
1843년(헌종 9) 판중추부사, 1848년(헌종 14) 영의정.
이듬해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 옹립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방 행정의 문란과 민란이 발생하자
암행어사 제도의 부활을 건의 하였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승정원에 나와 왕을 보좌하고
육조를 관리하는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을 주관
72년간을 조정에서 보냈으며 6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1862년 철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고, 91세 잔치에
고종이 어전악(御前樂)인 이원락(梨園樂)의 연주를 하사
검소함과 청렴함을 본분으로 삼았고
학문을 즐기는 자세로 관직에 임하였다.
조선 후기 관기(官紀) 문란과 어려움 속에서
삼정(三政)의 문란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암행어사 제도를 바로 잡고 삼정의 총재관이 되어
국가재정을 바로잡는데 일조한 조선후기 문신 정원용.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그리고 고종까지 5왕을 모신 분.
...........................................................................
과거급제한 19살 때부터 91세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70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경산일록(經山日錄).
그의 일기에는 철종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많이 담겨있다.
일기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들을 담고 있지만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과 문화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17세기 정묘호란 때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인조를 호종
강화로 왔던 신달도(申達道)는 당시 '강도일록(江都日錄)'을 남겼다.
강화도의 전반적인 상황들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을 한 개인 일기였다.
이 일기는 전란의 상황뿐만 아니라 상소문들의 내용과
청나라와 화의과정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긴 역사적 자료.
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학 작품.
한 궁녀가 쓴 '계축일기'는 내밀한 궁중 비화들을 엿볼 수 있다.
충무공이 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 역사적인 고증(考證) 자료.
글은 말과 달라서 기록으로 오래 남게된다.
그러니 한 번 잘못 쓴 글은 평생 자신의 족쇄
심지어, 글을 잘못 써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쟁으로 얼룩졌던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글을 남긴다는 것은.,곧,
정적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일기를 비롯하여
기록을 남기는 것에서는 인색했던 것 같다.
살아 남기 위하여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 같다.
정원용이 70년간 쓴 일기.,경산일록(經山日錄).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기를 썼는지도 모른다.
그가 쓴 경산일록 일기 중 철종에 관련된 기록이 많다.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고조할아버지는 영조이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철종의 증조할아버지이다.
그러니까 그당시 왕 헌종과는 7촌 사이로 가까운 친척이다.
그당시 조정은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왕실의 인물들은 역모로 몰려 다 죽고 몇명 남지 않았던 형편.
그러한 상황에서 헌종은 세자 없이 운명하자 철종을 왕으로 옹립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그야말로 "강화도령.,원범이~ "
바로 그런 식으로 왕위에 오른.,철종
조선왕실의 왕족이었지만 또한 역적의 후손.,철종.
강화 유배지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가 왕이 되었다.
철종의 집안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철종이 왕이 되자
강화도령의 신분 세탁을 위해
자료들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의 집안에 관한 문적(文蹟)을
모조리 세초(洗草)하라."고 사관들에게 비밀리에 명을 내렸다.
세초(洗草)란 조선 시대,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후
훗날 구설을 막기 위하여 그 초고를 없애던 일을 말하는데,
순원왕후는 은언군에 관한 기록들을 물로 씻어 글자를 없앤 것.
역적 집안의 후손이 왕이 되었으니
어찌 정치적으로 뒷말이 없을 수 있을까?
왕으로 옹립이 된 철종을 모시러 한양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다.
봉영(奉迎)의 중책을 안은 사람은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이었다.
헌종 재위 때 66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영의정이 되었던.,정원용
철종 때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다. 그리고 철종 11년,
77세에 세 번째로 영의정이 되고 철종 13년, 철종 14년.
정원용은 철종 재위 시절에 영의정에 4번이나 임명되었다.
영의정 재임기간은 짧았으나,
철종은 재위기간에 그를 4번이나
영의정으로 세워 신임을 보여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영의정에 임명된 시기는
고종 10년으로 그의 나이 여든여섯 살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
91세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 년을 관직생활을 했던 정원용.
높은 관직에 올랐으면서도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고
자식들뿐만 아니라 왕에게도 늘 소박한 생활을 권한.,정원용.
1874년 1월 3일, 정원용은 "추운 날씨에 찬 공기를 쐬지 말고
이불에 들어가라."는 주변의 권고에 "추운 날씨에 불도 못 때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 같은 날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 " 답변.
그로부터 몇시간 뒤 운명했고, 향년 91세였다.
70 년 이상을 관직생활을 하고 더불어 장수를 누린
정원용은 죽음 또한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맞이하였다.
정원용은 정조 7년에 태어나
고종 10년까지 살았던 분이다.
정조를 비롯해서 순조, 헌종, 철종 그리고 고종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왕을 모셨고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선 19살 때부터
91세로 숨을 거두는 날까지 70 년간 썼던 일기.,경산일록(經山日錄).
개인이 쓴 일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록한 일기일 것이라고 한다.
▲ 정원용을 비롯한 봉영단이 찾아간 용흥궁. 자료 : <강화도령, 1963> 영화, 감독 : 신상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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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용의 일기에서 특기할 점은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 하던 때를
왕조실록보다 세세히 기록으로 남긴 것.
긴박했던 순간들을 자세히 묘사한 그무렵 일기는
마치, 소설을 읽고있는듯한 기분마저 들게 할 정도로
그당시 장면들을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듯 기록되었다.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는 무렵에는
매일 6~7 장씩 한자로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그 일기를 한글로 번역하면 하루 원고지 30매 이상
'경산일록(經山日錄)'은 정원용이 살았던 90 년간
조선시대를 보여주는 활동사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원용이 쓴 '경산일록'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그렸던
철종의 등극 과정이 실제로는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가 봉송 책임자였으니 이보다 더 자세히 기록할 자가 없을듯..
헌종실록이나 철종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그때 그시절 상황들도
'경산일록'을 통해서는 알 수가 있다.
헌종의 죽음에 대해 '헌종실록'에는 명약원윤직(命藥院輪直),
'약원에 명하여 윤직(숙직)을 하게 하였다'라는 다섯 글자 뿐이다.
정원용의 일기에는 이 날의 숨가빴던 상황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저녁에 약방장무관이 왕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전언.
.,,왕의 얼굴이 누렇게 떴으며 통통했던 피부도 말랐다.
.. 대신들과 각신들은 입시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
.,들어가려는 즈음 중희당에서 이미 곡성이 났다."
-1849년 6월 5일- 정원용이 쓴 경산일록(經山日錄)
.
▲ 강화도행렬도 江華島行列圖 - 조선미술박물관(평양) 소장 , 자료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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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이 승하한지 이틀 뒤 정원용은 유배 중이던
강화도령을 한양으로 모셔오는 중책을 맡게 된다.
정원용의 일기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왕의 )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 자(字)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씀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철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그 일기를 통해 철종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철종은 당시 존재가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원용이 쓴 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가 왕이 될 사람을 모시러 갔지만
그는 왕의 이름도 왕의 생김새도 몰랐다.
대왕대비가 내린 전교에 있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기 위해 이름을 한 글자씩 끊어서
알려달라고 한 기록은 역사보다 정확하게 묘사.
역사적인 사실을 마치 현장중계하는듯한 '경산일록'
그당시 그날 그날의 그순간들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에 원범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형과 아버지가 역모로 몰려
관원들에게 오라를 받고 잡혀갔을 때
그 광경이 떠올라 벌벌 떨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도 죽는구나,
나를 잡으러 관원들이 왔다'
열아홉 살 총각에게 닥친 일은 너무나도 커서
원범이는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철종이 자신을 모시러 온 사람들을 보자
울면서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도망을 갔을지 모를 일.
그 상황에서 누구인들 그러지 않을까?
그 상황에서 누가 떨지 않을 수 있을까?
철종이 형과 함께 가난하게 살던 초가집은
그 이후에 번듯한 기와집으로 다시 지어진다.
강화유수였던 정기세가
왕이 살았던 집과 왕의 외갓집을
왕의 지위에 어울리게 크게 짓는다.
그 집이 '잠저' 용흥궁(龍興宮).
용흥궁에서 철종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정원용'과 '정기세'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듯.
정기세는 정원용의 아들이니 父子가 나란히 철종과 깊은 인연.
용흥궁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 두 부자의 치적을 담은.,비석.
정원용이 남긴 '경산일록'
그의 증손자 정인보에 의해
연세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정인보.
증조부인 정원용이 70여 년간 쓴 일기와
또 종조부 정기세가 50년간 기록한 일기 15권
백부 정범조가 39년간 기록한 일기 19책을 모두 기증.
정인보는 정제두에서 시작된 '강화 양명학파' 마지막 계승자
'동래 정씨' 집안과 강화도가 맺었던 인연은 참으로 각별하다.
정원용이 쓴 일기를 통해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당시 개인의 일기 기록이 오늘날 역사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일기를 쓰는 전통을 이어 내려왔다.
안타깝게도 정인보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예릉(睿陵).
철종의 후손이 영혜옹주 뿐이라
고종이 등극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철종이 남긴 유일한 혈육.,영혜옹주.
태극기를 제작하고 개혁파 박영효에게
시집갔지만 몇 달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아
철종의 후손은 완전히 대가 끊어지고 만다
철종이 죽고 흥선대원군이 권좌에 오르자
안동 김씨를 척결하고., 철종의 국장을 주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고
예릉(睿陵)을 거창한 왕릉으로 조성한 것.
이곳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라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정자각도 크고 웅장하며 석물도 우람하다.
.....................철종 (재위 1849∼1863)...................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 명으로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이원범이 19세에 왕위를 계승.
학문과 거리가 먼 농부로 1844년 형과 함께 강화도 유배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고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
농사짓다가 왕이 되었기에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
1851년(철종 2) '김조순 7촌 조카' 김문근 딸을 왕비로 맞는다.
국구(國舅)가 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
'철인왕후(哲仁王后)'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다시 이어진 셈.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진대(賑貸).
또 그 해 여름에 한재가 심한데도 재곡이 없어
구활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 : 욕심이 많고 비리를 저지름.) 징벌을 엄명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여주의 민가 약 1,000호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 주어 구활하게 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 해 7월에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 적극 구제.
점차 나이가 들고 친정 경험도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한편
1861년 권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군사력 강화.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 :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
모든 관료에게는 민란 대비책을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정치의 굴레에 얽매여
철종은 제대로 왕도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
1862년 진주 단성을 시발로 삼남지방 곳곳에서 농민항쟁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봉건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렴.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그해 5월 이후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설립, 삼정 개혁을 공포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를 일체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당시 사회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려는.,동학(東學).
동학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체포했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처형.
철종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 승하.
수용(睟容 : 임금의 畵像)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묘호는 철종(哲宗).
능호는 예릉(睿陵).
..........................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
강화도령 원범이 시절에 사랑했던 첫사랑 양순이
답답한 궁중 생활을 한탄하며 젊은 나이에 죽은 철종
죽음의 목전에서도 철종이 그리워했던 강화처녀 양순이
철종이 강화도 유배지에서 농사짓던 시절에
원범이를 위로하며 삶의 희망을 심어준 양순이
양순이는 강화도령 원범이의 첫사랑이었고
철종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워했다.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찬우물샘
이곳은 강화도령 원범과 강화처녀 양순이가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약속했다던., 약수터
그러나, 강화도령과 양순이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었다.
천민 양순이를 궁에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종이 천민인 양순이에게 정을 준다.'는 것은
왕실에서 인정하지도 용납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왕실에서는 '철종이 유배시절을 잊어야 한다.' 여긴 탓.
천민은 원칙적으로 왕후가 될 수 없는 왕실 법도
과거, '영조대왕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다.
철종 때는 종친들이 앞장서서 왕실의 자존심을 지키려한듯.
일설에는 헌종비 효현왕후와 익종비
신정왕후를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양순이를 독살
구전에는 양순이는 철종을 생각하며
평생 수절하고 살았다고도 전해온다.
또는 동네 불량배에게 강간을 당한 후
왕실 사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뒤늦게야 양순이 죽은 사실을 알고
철종은 비탄을 이기지 못해., 방탕생활
삼정의 문란과 국가의 잇다른 민란을 자초
철종은 안동 김씨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갔다.
재위기간 1849. 6 - 1863. 12
14년 6개월 / 부인 8명., 1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어떠한 수습할 의욕도 갖지 못한 채
33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다.
"강화도가 좋았다." - 생전의 철종.
생전에 철종이 강화도를 그리워하며 늘 하던 말.
첫사랑 양순이를 못잊어 상사병까지 걸렸던.,철종
궁궐 안에 황토방까지 지어 철종을 위로한., 조선 왕실
내 손은 내 손이 아니고
내 발이 내 발이 아닌
허수아비 노릇 15년
화려한 옷에 기름진 궁궐 음식을 채웠지만
허기진 마음 속으로는 늘 그리웠던., 양순이
바라만 봐도 가슴뛰던 철부지 시절의 첫사랑
겨울밤 야참으로 양순이가 해주던 동치미 메밀국시
갑곶진 떠나올 때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없던 양순이
멀리 숨어 남몰래 바라보던 양순이 눈에만 보인채 생이별
끝내 부서져 버린 신랑각시의 꿈
철종은 임금으로서 궁궐 내에서의 생활보다는
초가 단칸방에 살던 강화도령 시절이 좋았던듯
그로부터 오늘날 대중문화로 자리매김한 황토방.
강화섬 꽃바람이 물결에 실려오면
머리위에 구름이고 맨발로 달려나와
두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갑곶진 나루터에 돛단배 떠나던 날
노을에 타버리는데 임금님의 첫사랑
어려서 같이놀던 그리운 강화섬에
흐르는 세월따라 꽃은 피고 지는데
보고픈 그리운 님 언제나 오시려나
갑곶진 나루터에 빈배만 돌아 오네
어디로 가시려나 임금님의 첫사랑
-1975년 TBC
"임금님의 첫사랑"
TV 연속극 드라마 주제가-
2016.11.10.
강화도령 첫사랑길.,강화도 시외버스터미널~용흥궁
~ 청하동 약수터 ~ 남장대~찬우물약수터~철종 외가.
.
강화에는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 외에도
철종과 관련된 외가집이 한 채 더 있다.
철종 외가 (문화재 자료 제 8호)
'강화읍~전등사' 84번 지방도 따라가다 보면 우측에 철종 외가.
철종 4년(1853년)에 지어졌고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廉輔吉) 집.
이 시기는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이 지어졌던 1853년과 일치한다.
이런 시기를 고려하여 볼 때 철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강화유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지어진듯 여겨진다.
철종의 외가가 철종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서 옮겨왔는지
또는 강화도 토박이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심한
감시 속에 살았던 철종 집안이라 염씨도 넉넉하지 않았을 것.
그후 철종이 왕에 등극하자 왕의 외척으로서
걸 맞는 대우를 하기 위하여 이 집도 건축된듯.
철종이 서울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14살 때인
1844년 이원덕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로 유배를
왔으므로 염보길도 그때 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인 전계군은 강화도에 유배 왔다가
그곳 처녀와 결혼했고 외삼촌은 대이을 손도 남기지 못해
원범에게는 외사촌도 없었고 내세울 만한 외가도 없었던 것.
그러므로, 철종 외가는 이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신분 상으로는 왕실 종친에 걸맞는 신분은 아니었던듯.
그러나, 철종4년에는 철종외가의 신분도 수직상승 된듯.
......................
........................
철종 외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246번지.
철종이 강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할아버지 은언군 때.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 모반죄로 유폐당한후 자살.
이 사건으로 그 일가족 모두가 강화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세례받은 천주교 신자.
이로 인해 신유박해 때 은언군은 부인· 며느리와 함께 사약 사사.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으로서)
(영조 계비 정순왕후가 죽이려하자)
(정조가 은밀히 은언군을 살리기 위해)
(강화도로 보내어 보호한 것으로 전한다.)
(결국, 은언군의 손자 원범이가 철종으로)
(훗날, 즉위하게 된 것은 정조의 보살핌 덕분.)
..........은언군(恩彦君 :1755 영조31~1801 순조1)..........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10세에 은언군에 봉군되었다.
1771년(영조 47) 바람직하지 않은 행실로 은신군 진과 함께
관직에 기용되지 못한다는 처벌을 받고, 이어 시전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았다 하여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유배된다.
이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774년 풀려났다.
1776년 영조가 죽자 수릉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흥록대부가 되었다. 당시 실권자이던 홍국영이
은언군의 맏아들 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이라 하고 왕위를 잇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담은 홍국영과 틀어져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1786년 독살.
이 일로 은언군도 정조의 명에 따라 강화도로 옮겨져 살았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와 담의 처인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도라 모두 사사. 1849년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신원.
............................................................................................
강화에는 은언군의 차남 전계군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에게는 부인 최씨와 염씨·이씨 2명의 첩이 있었다.
철종의 어머니 용담염씨(龍潭廉氏)는 강화 출신이다.
전계군은 순조 특명으로 유배에서 방면되어 도성 거주.
이때 철종(1831~1863)이 태어났는데 초명은 원범이었다.
철종이 11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민지용에 의해 이복형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니 원경은 사사되고
이씨 소생의 형 경응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원범이는 나이 14살 때 강화도로 들어왔다.
세간에 알려진듯 강화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
어머니 염씨(1793~1863)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천애고아도 아니었고 무지렁이 농사꾼도 아니었다.
무식한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것은 당시 권력자들이
철종의 미천한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철종이 어머니따라 강화에 들어와 산 기간은 불과 5년.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 소재 용흥궁은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유배 때 살았던 곳.
원범이는 자주 냉정리에 있는 외가에 들렸다.
외가는 매헌서당(梅軒書堂) 현판으로 보아 서당.
원범이는 외삼촌 염보길에게 글도 배웠을 것이다.
또 강화집과 외가 중간에 찬우물 가에서
양순이(봉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원범이.
헌종은 3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후대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집안 간 벌어진 각축전.
풍양조씨는 흥선대원군의 형 이하전을
그러나, 안동김씨는 원범이를 택하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원범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왕으로 지명하였다.
원범은 14살에 강화에 와 5년 후 왕이 된 것이다.
원범이 살았던 집터 용흥궁과 외가댁.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일 수도 있다.
용흥궁은 강화 주산인 송악산의 맥(脈)이
성공회강화성당을 거쳐 내려온 곳에 위치한다.
집뒤가 높고 앞이 평탄한 것으로 보아 용맥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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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외가 묘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철종 생모(1793. 7. 20 - 1863. 3) 염씨는 조선 후기의 왕족.
전계대원군의 첩으로, 철종의 생모이며 그녀의 작위인
'용성부대부인 염씨'는 아들 철종이 즉위한 뒤에 내린 것.
본관은 용담(龍潭). 강화군 출신. 철종의 외가 및 행적은 미상.
본관은 용담으로, 1793년 7월 20일 사후 증 대광보국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염성화(廉成化 다른 이름은 성화(星華))와 상주지씨 딸로 출생.
아버지 염성화와 할아버지 염덕석(廉德碩)은 관직이 없는 평민이었다.
따라서, 할아버지 염덕석의 의정부좌찬성의 벼슬 역시 사후 추증된 것.
그녀의 가계는 한미했는데, 아버지 염성화는 관직이 없었다.
할아버지 염덕석이 생전에 사과를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염상임이
생전에 통정대부를 역임한 것이 전부였고 근처에 살던 염종수(廉宗秀)는
호적신고 할 때 자신을 염성화의 아들이자 철종의 외척으로 사칭했다가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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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친정 선조들의 묘소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일대와
강화군 송산에 있었다 하며, 증조할아버지 염상임의 묘소를
냉정리에 안장하면서 조부와 친정아버지 묘소도 인근에 조성.
친정오빠 3명 중 염보길을 제외하고는 이름이 실전되었다.
그밖에 천안김씨 김경영에게 시집간 친 언니가 1명 있었다.
그녀의 증조부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 기록은 미상.
그녀의 외가는 불분명, 강화도 지역 전승에 의하면
염씨는 생애 초년에 함바집 주모였다는 전승이 있다.
왕실문서인 8고조도에서도 그의 외가쪽은 다소 불확실.
외할아버지 상주지씨 지우영(池右英),
외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인 김해김씨 김동악(金東岳)
등의 이름이 전하지만 이들은 모두 관직이 없어 학생으로 기술.
그밖에 염씨의 외할머니의 친정아버지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염씨는 은언군의 서자로 후일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에 추증된
이광의 첩이 되었다. 전계군의 본부인
최씨와는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철종의 행장을 보면
'어릴 적에 완양(完陽)·용성(龍城)
두 부대부인(府大夫人)을 섬김에 있어
전혀 차이가 없었다'고 기술해놓았다.
당시 이광에게는 정실인 완양부대부인 최씨와 첩이 몇인 있었다.
전계대원군 이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원범(李元範)이 철종.
철종은 외조부부터 외가 5대 조상과 외삼촌 3명에게 증직을 추서.
본래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이 상계군 사건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사건 등에 연루되어으므로 작위를 받지 못했다.
철종이 즉위한 뒤 남편이 전계군의 작위를 받은 뒤
다시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면서 1849년(철종 즉위년)
6. 23 용성부대부인에 봉작되었다. 강화지역 전설에 의하면
철종은 가난했던 친외가에 선원면 냉정리에 전답 3천평을 하사.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는 1853년(철종 4년) 철종이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집한채를 건립.
여기에는 생모의 친정오라비 염보길이 거주했다 한다.
처음 전계대원군의 장인과 처조, 처증조부를
영의정, 좌찬성, 판서로 각각 추증하는 일을 놓고,
한미했던 염씨의 친정 대신 명문가문인 전계대원군의
본처 전주최씨의 친정만 증직하자는 논의가 나왔다가,
생가도 추증해야 한다고 하여 첩 염씨의 친정 3대도 증직.
1834년부터 30년 가까이 가벼운 소갈증에 시달리던 생모.
만년에 음수증 합병증으로 1863년 3월에 향년 71세로 별세.
아들 철종은 같은 해 1863년 12월 8일에 33세로 붕어하였다.
처음 한성부 홍은동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양주군 수동면 답동리 경좌로 이장
다시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포천 선단동) 산11번지
해룡산, 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 최씨가 합장된
묘소 왼쪽 아래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이후에도 그녀의 친정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종 때에는 그의 친정조카 염호관이 궁내부 주사를 지냈고,
종증조부 염상욱의 증손자이며 8촌 동생 염재흥도 궁내부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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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이길 제 14코스 - "강화도령 첫사랑길."
'용흥궁공원~ 철종외가' 11.7km 4시간 소요거리.
19살에 즉위하여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진 철종.
오색깃발을 휘날리며 자신을 모시러 온 영의정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 "사또님! 살려주세요."애원하던.,"원범이"
세도 정치가들 때문에 왕 노릇도 제대로 못한.,'비운의 왕'
짧은 재위기간 내내 강화도 산천을 그리워했던.,원범이.
강화도령 첫사랑길은 원범이가 양순이와 함께 놀던 옛길.
원범이 첫사랑 양순이와 소근거리는 정담이 들리는듯 하다.
찬우물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선원면 냉정리 철종 외가.
부모가 안계신 원범이는 외가집에 많이 의지하며 살았던듯.
그래서, 왕이 된후 생전에 외가 식구들을 많이 보살피게 된듯.
외가 5대에게 벼슬을 추증케 하였고
선원면 냉정리 전답 10정보 하사 특전.
외가집은 철종4년(1853)에 지어진 것으로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었다고 하는데
사대부집의 법도에 맞도록 고졸하게 지은 건물.
철종외가 입구에
외숙부 3인 묘가
비석과 함께 있다.
강화도.,동막해수욕장
철종 외가집에서 가까운.,동막해수욕장.
원범이는 양순이와의 추억도 많았으리라.
전주 어진박물관.,철종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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