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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地志’로 본 본시(本是)의 함경도(咸鏡道) 땅 [제1편]
2025년 01월 26일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출처(出處) / 한국고전번역원 DB 해제(解題)】은, 말 그대로 “동국(東國) 땅의 지리지(地理志)”라고 전(傳)해지는데, 냉정(冷靜)하게 판단(判斷)해보면 「과거(過去) 반만년(半萬年) 이래(以來) “동국(東國)”이라는 나라 이름(國名)을 가진 왕조(王朝)는 없다」라고 가르쳤고 지금까지 배우고 있다.
「동국(東國)」이라는 국명(國名)【나라 이름】을 보면 : 「동(東)쪽에 있는 나라(國)」란 뜻인데, 그렇다면 「서(西)쪽에 있는 나라(國)」는 왜 없는 것일까?
➥ 동(東)쪽의 나라인 동국(東國)이 있었다면 : 서(西)쪽에 있었던 서국(西國)이 있었어야 당연(當然)한 이치(理致)요, 남국(南國)이 있었다면 북국(北國)이 있었어야 함은 역사(歷史)의 순리(順理)요,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당(唐) 때의 ‘죽은 자(者)의 비문(碑文)인 지석문(誌石文)’에서는 “백제(百濟)”를 지칭(指稱)하여 「남국(南國)」이라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그럼 서국(西國)이 중국(中國)인가? 중국(中國)을 서국(西國)이라 칭(稱)한 예(例)는 없다. 오히려 ‘서국(西國)’이라 함은 ‘서방(西方)’을 뜻하는 말로 서융(西戎)【서호(西胡)=호(胡)=호자(鬍子)】이 사는 서방(西方)【구라파(歐羅巴)】땅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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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인용(引用)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 해제(解題) 편을 보면 :
〈❶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中宗)이 즉위하여는 역시 전대의 편찬 간행 사업을 계승하여 종종의 서적을 간행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이었다. 이 《신증》의 명(命)을 받은 사람은 이행(李荇)ㆍ홍언필(洪彦弼) 등이니 이들은 동왕 23년에 《승람》에 대한 재차 교오(校誤)와 증보(增補)에 착수하여 동왕 25년(1,530년)에 끝을 맺었다. 권질에는 역시 변동이 없고, 단지 증보처에 《신증》 두 글자로 표시하여 따라서 책명도 그와 같이 하였다. 이 중종 때의 《신증》 본은 동년에 계축자(癸丑字)【성종 23년 소주】로 인쇄된 활자본으로, 그것의 존전(存傳)이 매우 희귀하다. 중략(中略). ➋ ‘한국고전번역원’은 이것을 매우 유감으로 여기어 서울대학본과 기타 본에 의거하여 거창한 국역에 착수하고 있거니와 중종조(中宗朝) 《신증》 이후의 변천된 사항을 증보하는 의미에서, 경도(京都)와 한성부(漢城府) 편 말에는 ‘비고’ 편으로 고종(高宗) 초의 저자 미상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경도편과 한성부편을 전문(全文) 역재하고, 기타에 있어서는 근세 여지학(輿地學)의 대가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참고하고, 또 갑오경장 이후의 변동은 《신증문헌비고》의 여지고(輿地考)를 참고하여 역시 각 군현조 끝에 부기하였다. 이러한 비고를 아울러 통해 본다면, 본국역본은 《재신증여지승람》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것이 본 국역본의 한 가지의 특색이라고 하면 특색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 〈필자(筆者)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이상한 행태(行態)는 : ‘번역(飜譯)은 번역(飜譯)으로 끝내야 하는 것이다.’“저자(著者) 미상(未詳)의 지리지(地理志)를, 또 진짜 생존(生存)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김정호(金正浩)라는 분의 저서(著書) 등을 참고(參考)하였다”라는 말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 바로 화사첨족(畫蛇添足) 곧 사족(蛇足)을 단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가치(價値)를 스스로 떨어뜨린(훼손하는) 결과(結果)를 가져온 것이다〉라는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해제(解題)하면서 이곳에 「김정호(金正浩)라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인물(人物)이 저술(著述)했다」라는 대동지지(大東地志) 부분(部分)을 함께 소개(紹介)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지리지(地理志) 중에서 왜 하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만을 함께 수록(收錄)해 놓은 것일까?
“김정호(金正浩)”라는 인물(人物)의 모호(模糊)함은 또 무엇이며, 이러한 인물(人物)이 있었다는 것 자체(自體)도 명백(明白)하게 확인(確認)되지 않은, 불분명(不分明)한 인물(人物)일진대 말이다.
또 “저자(著者) 미상(未詳)”이라는 말은 누가 저술(著述)했는지조차 모른다는 이야기다.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김정호(金正浩)”라는 사람이 저술(著述)했다는 대동지지(大東地志) 속에서 말하는 함경도(咸鏡道) 땅은 지리적(地理的)으로 어디를 지칭(指稱)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고전번역원」 에서는 그 실체(實體)를 알고 한 것일까? 아니면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주장(主張), 그 주장(主張)을 확인(確認) 고증(考證)하려는데 이용(利用)한 것일까?
어찌 됐든 그 결과(結果)는 : 「대동지지(大東地志) 함경도(咸鏡道) 편에 기록(記錄)된 땅은, 반도(半島) 땅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과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지칭(指稱)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걸 하나하나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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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東地志 卷十九 / 咸鏡道 / 咸鏡道 號關北。
〈本肅愼國地。 唐虞三代曰肅愼, 漢、晉曰挹婁, 北朝曰勿吉, 隋、唐曰靺鞨, 渤海、宋、元曰女眞。 : 본래 숙신국(肅愼國) 땅이다. 당우(唐虞) 삼대(三代)에서는 숙신(肅愼)이라 하였고, 한(漢)ㆍ진(晉)에서는 읍루(挹婁)라 하였고, 북조(北朝)에서는 물길(物吉)이라 하였고, 수(隨)ㆍ당(唐)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하였고, 발해(渤海)ㆍ송(宋)ㆍ원(元)에서는 여진(女眞)이라고 하였다. 漢武帝元封四年, 置玄菟郡, 今咸興。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驪西北。 後爲沃沮國地。 : 한무제(韓武帝) 원봉(元封) 4년에 현도군(玄菟郡)을 두었다 지금 함흥(咸興)이 뒤에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군(郡)으로 옮겨 구려(句麗) 서북이 되었다. 뒤에 옥저국(沃沮國) 땅이 되었다. 沃沮在蓋馬大山之東。 東沃沮界曰咸興、定平、洪原, 而狼林山以東, 黃草、赴戰兩嶺以南也。 : 옥저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고, 동옥저의 경계는 함흥ㆍ정평(定平)ㆍ홍원(洪原)이 낭림산(狼林山) 이동(以東)이며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 두 영의 이남(以南)이다. 北沃沮界曰北靑、利原、端川, 而限以長白山。 南沃沮界曰永興、高原、文川、德源、安邊, 而限以鐵嶺。 其西則劍山連亘大幹。 북옥저의 경계는 북청(北靑)ㆍ이원(利原)ㆍ단천(端川)이 장백산을 한계로 하였고, 남옥저의 경계는 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문천(文川)ㆍ덕원(德源)ㆍ안변(安邊)이 철령(鐵嶺)을 한계로 하여 그 서쪽이 곧 일산(釰山)이며 대간(大幹)과 연달았다. ○ 東、南、北沃沮非別有, 三國以地界而言之。 高句麗太祖王四年, 漢光武建武丙辰。 伐東沃沮取其城邑, 拓境東至滄海。 晉初, 新羅北界止于泥河。 今德源北界。 : 동남북 옥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삼국(三國)의 땅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태조왕(太祖王) 4년 한(漢) 나라 광무(光武) 건무(建武) 병진년.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성읍(城邑)을 취하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창해(滄海)에 이르렀으며, 진(晉) 나라 초에 신라(新羅) 북쪽 경계 이하(泥河)에서 멈추었다 지금 덕원(德原) 북쪽 경계이다. 唐中宗時, 渤海國南界至于永興。 新羅之末, 爲女眞所據。 高麗成宗十四年, 以定平以南屬朔方道, 以都連浦爲界。 :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 발해국 남쪽 경계 영흥(永興)에 이르렀으며, 신라 말엽에는 여진이 거(據)하였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14년 정평(定平) 이남으로써 삭방도(朔方道)에 예속하게 하였고, 도련포(都連浦)로써 경계 삼았다〉라고 하였다.
➥ 위의 「대동지지(大東地志) 함경도(咸鏡道) 편의 함경도(咸鏡道) 설명(說明)」을 고전(古典) 기록(記錄)과 함께 하나하나 고찰(考察), 고증(考證) 및 비교(比較) 검토(檢討)해보기로 하자. 과연(果然) 그곳이 어디에 있는, 어떤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중요(重要)한 것은, ➥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 땅일 수 없다」라는 것이다.
(1) 「本肅愼國地。 唐虞三代曰肅愼, 漢、晉曰挹婁, 北朝曰勿吉, 隋、唐曰靺鞨, 渤海、宋、元曰女眞。 : 본래 숙신국(肅愼國) 땅이다. 당우(唐虞) 삼대(三代)에서는 숙신(肅愼)이라 하였고, 한(韓)ㆍ진(晉)에서는 읍루(挹婁)라 하였고, 북조(北朝)에서는 물길(物吉)이라 하였고, 수(隨)ㆍ당(唐)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하였고, 발해(渤海)ㆍ송(宋)ㆍ원(元)에서는 여진(女眞)이라고 하였다.」하였는데… …에서의 핵심(核心) 요지(要旨)는「숙신(肅愼)이 어디에 거점(據點)을 두고 있었는가?」하는 것이다.
(1) -1) 「당우(唐虞) 삼대(三代)의 숙신(肅愼)【숙신국(肅愼國)=숙신씨(肅愼氏)=숙신민(肅愼民)】」 :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당우(唐虞) 삼대(三代)」란 뜻이 무엇일까? 바로 「요순(堯舜)과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시대(時代)」를 일컫는 말이다. 이걸 년대(年代) 순(順)으로 나열(羅列)하면 :
B.C 2,357年의 당요(唐堯)【단군(檀君) 임금과 겹친다】로부터
B.C 2,257年의 우순(虞舜)【우순(虞舜) 임금은 ‘동이(東夷)=동국(東國)’인】과
B.C 2,207年의 우(禹) 임금
B.C 1,765年의 상탕(商湯) 임금【‘동이(東夷)=동국(東國)’으로 알려져 있다】괴
B.C 1,121年의 무왕(武王)【B.C 1,121年∼B.C 249年 : 計 873年】의 시대(時代)를 일컫는 말로, 무려(無慮) 2,000年이라는 장구(長久)한 시대(時代)를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나열(羅列)한 「당우삼대(唐虞三代)」는 바로 조선사(朝鮮史)와 함께한다. 당요(唐堯)는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같은 시대(時代)를 말하고 있는데, 「당요(唐堯)와 단군(檀君)」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닌 ‘동일인물(同一人物)’임이 확실(確實)한 것이다.
「우순(虞舜)」은, 「동이(東夷)=동국(東國)”인(人)이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상탕(商湯)의 은(殷)나라 역시 “동이(東夷)=동국(東國)”인(人)이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무왕(周武王)」은 서인(西人)이라고 했지만, 당시(當時)의 서인(西人)이라는 말은 곧 ‘서주(西周)의 문왕(文王)’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으로, 「주무왕(周武王)은 하백(河伯)【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 바로 주몽(朱蒙) 또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의 결정적(決定的)인 도움으로 강(江)을 건너 ‘은(殷)’을 쳐 굴복(屈伏)시켰다」라고 하였기 때문인데,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 바로 「고구려(高駒驪) 시조(始祖) 주몽(朱蒙)」이다.
조선사(朝鮮史)를 해설(解說)하는데, 당우삼대(唐虞三代)를 빼놓고 말할 수 없으며, 「왕건(王建)이 “삼한통일(三韓統一)=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루고 난 뒤에 “고려(高麗) 땅의 백성(百姓)들은 당우삼대(唐虞三代)의 복장(服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 「당우삼대(唐虞三代)」는 중국사(中國史)가 아닌 조선사(朝鮮史)에 포함(包含)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중국사(中國史)라고 주장(主張)하는 오늘날의 중국사(中國史)는, 어디에서 발원(發源)했는지조차 불분명(不分明)한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다는 한족(漢族) 중심(中心)의 근거(根據) 없는 일방적(一方的) 주장(主張)」이기 때문이며,
➥ 「당우삼대(唐虞三代)」의 주인공(主人公)들은 모두가 ‘동이(東夷), 동국(東國)’과 깊은 관련(關聯)이 있기 때문이다. “동이(東夷)는 서이(西夷)”와 대칭(對稱)되는 말로 ‘동국(東國)과 서국(西國)’과 같은 말로, ‘동방(東方), 서방(西方)’과 같은 말이고, 바로 21세기(世紀) 오늘로 보면 「구라파(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와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숙신(肅愼)【숙신국(肅愼國)=숙신씨(肅愼氏)=숙신민(肅愼民)】은 어디에 있었을까? 「당우삼대(唐虞三代)」 시절(時節)이라면 “산해경(山海經)”을 찾아볼 수밖에 없는 시대(時代)이기도 하며, 「산해경(山海經)은, 고조선(古朝鮮)의 기록(記錄)이다.」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程度)이다.
「산해경(山海經)」의 「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숙신민(肅愼民)」은?
❶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 : 「肅慎之國在白民北, 有樹名曰雄常,先入伐, 于此取之. : 숙신국(肅愼國)은 백민(白民) 북(北)에 있는데, 웅상(雄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는데, 먼저 들어와 베어, 이것을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해외서경(海外西經) 편에 기록(記錄), 설명(說明)하고 있다라는 것이고,
➋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慎氏之國. : 대황 가운데(大荒之中)) 산(山)이 있는데 이름이 불함(不咸)이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 주(注)에서 곽박(郭璞) 이르기를 : 「1. 郭 璞 云 : 今 肅 慎 國 去 遼 東 三 千 餘 里, 中 略. 今 名 之 為 挹 婁 國, 出 好 貂、 赤 玉. 中 略. : 곽박(郭璞) 이르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요동(遼東)에서 3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 지금의 이름은 읍루국(挹婁國)이다. 郝 懿 行 云 : 肅 慎 國 見 海 外 西 經 。 학의행(郝懿行) 이르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라 하였다.」
위의 글 “❶+➋”에 의하면 : 〈「숙신국(肅愼國)은 북(北)쪽과 서(西)쪽에 있었다」라는 것이니, 「북(北)쪽과 서(西)쪽 사이(間)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수만리(數萬里) 떨어져 있어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
「산해경(山海經)」은, 「BC 2,200년(年) 우(禹) 임금 때에 저술(著述)된 것이다」라고 전(傳)해지고 있으니, “숙신국(肅愼國)”이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말대로라면 :
「산해경(山海經)의 저자(著者)인 백익(伯益)과 우(禹) 임금」은 : 「오늘날의 동남(東南) 태평양(太平洋) 바다 곧 필리핀【여송(呂宋)】의 동(東)쪽 태평양(太平洋) 바다(海) 위에 “백익(伯益)과 우(禹) 임금”이 있어야 한다.」이건 예나 지금(只今)이나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➌ 따라서 「“김정호(金正浩)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한 함경도(咸鏡道) 땅”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西)쪽으로부터 북(北)쪽 땅에 있었다.”」라는 것으로 해석(解釋)될 수밖에 없으며, 반도(半島) 땅과는 ‘십 원 한 장’도 관계(關係)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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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전한(前漢) 때의 숙신(肅愼), 양한(兩漢)의 읍루(挹婁) : 「회남자(淮南子)」에서는?
「회남자전(淮南子傳) 【淮南王, 劉 安 : 기원전(紀元前 BC) 179-122年】」을 보면 :
❶ 「천문훈(天文訓)」에서는 : 〈何謂九野 : 西北方曰幽天【中央曰鈞天 其星角亢氐 東方曰蒼天 其星房心尾 東北曰變天 其星箕斗牽牛 北方曰玄天 其星須女虛危營室 西北方曰幽天 其星東壁奎婁 西方曰皓天 其星胃昻畢 西南方曰朱天 其星觜雟參東井 南方曰炎天 其星輿鬼柳七星 東南方曰陽天 其星 張翼軫.】이라고 하였고, 何謂五星 : 西方金也 其帝少昊【東方木也 其帝 太皥 其佐句芒 執規而治春 其神爲歲星 其獸蒼龍 其音角 其日甲乙 南方火也 其帝炎帝 其佐朱明 執衡而治夏 其神爲熒惑 其獸朱鳥 其音徵 其日丙丁 中央土也 其帝黃帝 其佐后土 執繩而制四方 其神爲鎭星 其獸黃龍 其音宮 其日戊己 西方金也 其帝少昊 其佐蓐收 執矩而治秋 其神爲太白 其獸白虎 其音商 其日庚辛 北方水也 其帝顓頊 其佐玄冥 執權而治冬 其神爲辰星 其獸玄武 其音羽 其日壬癸.】하였고, 지형훈(墜形訓)의 乃有八極 : 西北方曰不周之山 曰幽都之門【自東北方 曰方土之山 曰蒼門 東方曰東極之山 曰開明之門 東南方曰 波母之山 曰陽門 南方曰南極之山 曰暑門 西南方曰編駒之山 曰白門 西方曰西極之山 曰閶闔之門 西北方曰不周之山 曰幽都之門 北方曰北極之山 曰寒門 】〉이라 하였다.
❶-1) 구야(九野) : 「서북방(西北方)에는 유천(幽天)【서북(西北)쪽 하늘】이 있고」, 【그곳이 바로 유주(幽州)의 땅이요, 유도(幽都)이며, 유릉(幽陵)이라 한 곳이다】
❶-2) 오성(五星)【金星, 木星, 水星, 火星, 土星】: 「서방(西方)은 금(金)이니, 곧 임금(帝)은, 소호(少昊)다【소호(少昊)는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다. 또 소호(少昊)의 손(孫)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는, 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의 시조(始祖)다】」
❶-3) 팔극(八極) : 「서북방(西北方)에는 불주산(不周山)이 있고, 유도(幽都)의 문(門)이다. 【유도(幽都)는, 유천(幽天)이며, 유릉(幽陵)이요, 유주(幽州)다】」
➋ 「지형훈(墜形訓)」에서는 : 〈「何謂六水 曰 : 河水 赤水 遼水 黑水 江水 淮水 闔四海之內」이라 하였고, 「河水出崑崙東北陬 貫渤海入禹所導積石山」이라 하였으며, 「乃有八極 : ➨西北方曰不周之山 曰幽都之門【自東北方 曰方土之山 曰蒼門 東方曰東極之山 曰開明之門 東南方曰 波母之山 曰陽門 南方曰南極之山 曰暑門 西南方曰編駒之山 曰白門 西方曰西極之山 曰閶闔之門 ➨西北方曰不周之山 曰幽都之門 北方曰北極之山 曰寒門】하였으며, 「凡海外三十六國 : 自西北至西南方 肅愼民【自西北至西南方 有修股民 天民 肅愼民 白民 沃民 女子民 丈夫民 奇股民 一臂民 三身民 自西南至東南方 有結胸民 羽民 讙頭國民 裸國民 三苗民 交股民 不死民 穿胸民 反舌民 豕喙民 鑿齒民 三頭民 修臂民 自東南至東北方 有大人國 君子國 墨齒民 玄股民 毛民 勞民 自東北至西北方 有蚑踵民 句嬰民 深目民 無腸民 柔利民 一目民 無繼民】이라고 하였다.
➋-1) 「육수(六水)」 : 〈河水 赤水 遼水 黑水 江水 淮水 闔四海之內 : 여섯 개의 큰물은 하수(河水), 적수(赤水), 요수(遼水), 흑수(黑水), 강수(江水), 회수(淮水)로, 전부 사해(四海) 안(內)에 있다〉라고 하였고,
여기서 「사해(四海)」란 「온 천하(天下)」를 말하는 것으로, “요수(遼水) 또한 천하(天下)에 큰 강물이었다”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요수(遼水)”로써는 자격미달(資格未達)인 셈으로,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억지로 만들어 진 것이다.
➋-2) 「팔극(八極) : 〈서북방(西北方)에는 불주산(不周山)이 있고, 유도(幽都)의 문(門)이다.【西北方曰不周之山 曰幽都之門 : 유도(幽都)는, 유릉(幽陵)이요, 유주(幽州)이며, 유천(幽天)이다】〉
「유도(幽都)는 유릉(幽陵)이며, 유주(幽州)」라는 것은, 사학(史學)을 공부(工夫)한 분들이라면 기본지식(基本知識)에 속하는 문제(問題)다.
「유주(幽州)의 땅」은, 서방(西方)과 동방(東方)을 가르는 땅의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녹안(綠眼)=벽안(碧眼)”의 호인(胡人)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➋-3) 「해외(海外) 36국(國)」 : 〈서북(西北)에서 서남방(西南方)에 숙신민(肅愼民)이 있다【凡海外三十六國 : 自西北至西南方, 肅愼民】〉라고 하였으니,
「숙신민(肅愼民)【숙신국(肅愼國)=숙신씨(肅愼氏)】는 서북(西北)에서 서남(西南) 사이의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마자르’【magyar(ok), 또는 Hungarian(s) :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이다. 항가리인(Hungarian)이며, 동구라파(東歐羅巴) 여러 곳에 흩어져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족(族)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과 정확(正確)하게 일치(一致)하고 있다.
➨➨➨【한국(韓國), 이 땅의 국민(國民)들에게 “조선사(朝鮮史)”는 과연(果然) 무엇일까? 조상(祖上)을 인정(認定)하고는 있는 걸까? 「오늘도 일부(一部) 학자(學者)들과 이를 추종(追從)하는 무리들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동북삼성(東北三省) 땅에 옛 숙신민(肅愼民)이나 말갈(靺鞨)들이 있었다」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반도(半島) 조선사(朝鮮史)를 고착화(固着化)하는 작업(作業)을 끊임없이 시도(試圖)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은 짓은 ‘조선족(朝鮮族)’ 스스로 ‘조선족(朝鮮族)’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며 ‘에미애비(어미아비)’없는 자식(子息)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에 “숙신민(肅愼民)”이 있었다」라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기극(詐欺劇)”이다.」
➌ 「인간훈(人間訓)」에서는 : 〈秦皇挾錄圖 見其傳曰 亡秦者胡也 因發卒五十萬使蒙公楊翁子 將築脩城 西屬流沙 北擊遼水 東結朝鮮 中國內郡 輓車而餉之. : 진시황(秦始皇)이 녹도서(錄圖書)를 의지하였는데, 거기에서 전하기를 : ‘진(秦)을 망(亡)하게 할 자는 호(胡)다’라고 하여, 50만 군사(軍士)를 발병(發兵)하여 몽공(蒙公)과 양옹자(楊翁子)를 장(將)으로 하여 성(城)을 쌓게 하였는데, 서(西)쪽으로는 유사(流沙), 북(北)쪽으로는 요수(遼水)에 닿게 하고, 동(東)쪽으로는 조선(朝鮮)과 이어지니, 중국(中國) 내부(內部)에서는 수레로 군량(軍糧)을 실어 날라야 했다〉라고 하였는데 【진시황(秦始皇) 32년(B. C. 215), 동방(東方)의 해상(海上)에서 돌아온 연인(燕人) 노생(盧生)이, 귀신(鬼神)의 말이라 하며 ‘녹도서(錄圖書)’를 바쳤다고 전(傳)해지고 있다】
➨ 「2,100여(餘) 년(年) 전(前)에 저술(著述)된 회남자(淮南子)【淮南王, 劉安 : 기원전(紀元前 BC) 179-122年】」에서는 말하기를 : ‘진(秦)의 장성(長城)’은, 「서(西)쪽에 속한 유사(流沙)로부터」라고 하였으니, 「감숙성(甘肅省) 림조(臨洮) 땅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유사(流沙)”는 오늘날의 “서역(西域)=서방(西方)”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걸 확실(確實)하게 알아야 ‘진(秦)의 장성(長城)’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쌓아놓은 하새(河塞) 곧 황하(黃河)를 따라 쌓아놓은 장성(長城)은 진(秦)의 장성(長城)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 「요수(遼水)는 반도(半島) 북방(北方) 심양(瀋陽) 주변(周邊)을 흐르는 하천(河川)이 아니라, 시황제(始皇帝) 진(秦)나라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내지(內地)라고 말하는 중원(中原)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이러한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모르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 알면서도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기 위해 미친 척하는 것이다.
➍「수무훈(脩務訓)」에서는 : 〈西敎沃民 東至黑齒 北撫幽都 南道交趾 : 서(西)쪽으로는 옥민(沃民)을 교화(敎化)하고, 동(東)쪽으로는 흑치(黑齒)에 다다르며, 북(北)쪽으로는 유도(幽都)【유릉(幽陵)=유주(幽州)】를 누르고, 남(南)쪽 길은 교지(交趾)로 통한다〉라고 하였다.
➨ 이러한 기록(記錄)을 보면 : 「유주(幽州)=유도(幽都)=유릉(幽陵)」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 아니라 북방지대(北方地帶)와 서방지대(西方地帶)의 분기(分岐)하는 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한다. 곧 「불주산(不周山)【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이 유도(幽都)의 문(門)」이라고 하였으니, 「장안(長安)에서 보면 1만 5 천리(千里) 서북방(西北方) 땅에 “유주(幽州)”가 있었다」라는 것인데, 이는 “당서(唐書) 기미주(羈縻州)”편에서도 확인(確認)이 된다.
◆ 「반도(半島) 땅의 북방지대(北方地帶) 혹(或) 동북방(東北方) 땅에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女眞)”이 살았다」라는 말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기극(詐欺劇)”이다.」
21세기(世紀) 오늘날도 :「숙신국(肅愼國)=숙신씨(肅愼氏)=숙신민(肅愼民)」은, 수천(數千) 년(年) 변함없이 예나 지금이나 서북방(西北方)으로부터 서남방(西南方) 지대(地帶)에 거점(據點)이었고, 지금도 그곳에서 변함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 함경도(咸鏡道) 편의 설명(說明)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본래(本來)의 조선사(朝鮮史) 강토(疆土)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事實)이 있을까?
➨ 아래의 「유주호마객가(幽州胡馬客歌)」필자(筆者)의 해설(解說)을 보자.
유주호마객가[幽州胡馬客歌]
〈幽州胡馬客, 綠眼虎皮冠, 笑拂兩隻箭, 萬人不可干 : 오랑캐 말 탄 유주(幽州) 사나이, 녹안(綠眼)에 범 가죽 갓. 웃음 띠며 화살 두 대 뽑아 들자, 만인 중 그 누구도 얼씬 못하네.
【 ❶‘유주(幽州)’는, 유천(幽天)이며, 유릉(幽陵)이며, 유도(幽都)이며, 유명(幽冥)과도 같은 말이다. ‘녹안(綠眼) 곧 벽안(碧眼)’을 가진 종족(種族)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서방(西方) 곧 ‘색목인(色目人)’을 말하며, 바로 ‘호(胡)=되놈=오랑캐’를 말한다. ➋ 유주(幽州) 대도독부(大都督府)에 “철문관(鐵門關)”도 있다고 하였는데 : “유주(幽州)는, 幽都(유도)이며, 幽陵(유릉)”과 같으며 北方(북방)을 뜻하고, 유명(幽冥)과 같다. 본시(本是) 요동요서(遼東遼西)의 북(北)쪽이 “한해(瀚海)이며, 북해(北海)”라고 하였다. ➌ 山海經 : 「北海之內,有山名曰,幽都之山,黑水出焉,中略. : ‘북해지내(北海之內)에 유도산(幽都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山)이 있는데, 흑수(黑水)가 나온다’」라고 하였는데, 흑수(黑水)는, 북정도호(北庭都護) 경내(境內)에도 있다고 하였다.】
彎弓若轉月, 白雁落雲端, 雙雙掉鞭行, 游獵向樓蘭 : 만월(彎月)처럼 시위를 한껏 당기자, 흰 기러기 구름 가에 떨어진다네. 나란히 말채찍을 휘두르면서, 누란(樓蘭)으로 사냥하러 길을 떠나네.
【‘누란(樓蘭)=누란왕국(樓蘭王國)’은, ‘포창해[蒲昌海=염택(鹽澤)]’ 동북안(東北岸)에 있었던 고대(古代) 왕조(王朝)로, 백룡퇴(白龍堆) 남(南)에 있었으며, 서북(西北)쪽으로는 흐르는 모래를 말하는 유사(流沙)가 수백(數百) 리(里)에 펼쳐져 있었다고 하였다. ‘선선(鄯善)’이라고도 한다. 근래(近來)에 발굴(發掘)된 「누란의 미라 : 누란의 미녀)」로 알려진 ‘미라’는 입고 있던 의복의 탄소연대 측정으로 BC 19세기 때의 인물이라고 추정된다고 알려져 있다. 동방(東方)과는 1만(萬) 5 천리(千里) 이상(以上) 떨어진 곳에 있다. 누란(樓蘭)과 멀지 않은 곳에 “유주(幽州)”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出門不顧後, 報國死何難, 天驕五單于, 狼戾好凶殘 : 문을 나서면 뒤돌아볼 생각지 않고, 나라 은혜 갚자 하니 죽음이 무엇이 두려우리, 타고난 오만한 오랑캐 다섯 선우(單于), 흉포하고 잔인하기 그지없거늘,
牛馬散北海, 割鮮若虎餐, 雖居燕支山, 不道朔雪寒 : 북해(北海)에 소와 말을 흩어놓고는, 산채로 찢어서 범처럼 먹으며, 연지산(燕支山)에 모여 살아도, 북풍한설(北風寒雪)을 춥다하지않네.
【북해(北海) 또한 “바이칼(Lake Baikal)호(湖)가 아니었다”라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요, ‘연지산(燕支山)’ 〔문무의 조선사 해설 / 송대(宋代)의 고려(高麗)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主人) [1편] 2023년 10월 31일, 참조(參照)〕 또한 동방(東方)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방(西方) 땅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금산산맥(金山山脈)=알타이(Altai)산맥=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동(東)쪽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방(西方) 땅의 일이다.】
婦女馬上笑, 顔如赬玉盤, 飜飛射鳥獸, 花月醉彫鞍 : 말 위에서 웃는 아녀자들의 모습, 마치 붉디붉은 옥쟁반 같은데, 몸을 날려서 짐승들을 쏘아 잡고, 꽃 피고 달 뜰 적에 말 안장에서 취한다네.
旄頭四光芒, 爭戰若蜂攢, 白刃灑赤血, 流沙爲之丹 : 모두성(旄頭星) 별빛이 사방에 가득하고, 싸우러 모인 것이 벌떼와 같네. 은빛 칼로 붉은 피를 흩뿌리니, 흐르는 사막(沙漠) 온통 붉어 끔찍하네.
【‘모두성(旄頭星)’ : 28수(宿)의 하나로, 묘성(昴星)을 지칭하는데, 오랑캐(胡)를 관장하는 별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별이 나타나면 변경(邊境)에 전쟁(戰爭)의 기운(氣運)이 인다고 하였다. ➨서방(西方) 백호(白虎) 묘성(昴星) : 서방(西方)을 가리킨다. 또한 “유사(流沙)의 땅”은 동방(東方)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방(西方)의 흐르는 모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일컫는 말이다.】
名將古誰是, 疲兵良可嘆, 何時天狼滅, 父子得安閑 : 예로부터 명장(名將)이 누구라던가, 지친 병사들 너무나 안타깝네. 어느 때나 천랑(天狼)이 사라져, 부자(父子) 다 함께 편히 살 수 있을까〉라고 하였는데,
【천랑성(天狼星)은, 「늑대(狼 :이리)를 상징(象徵)하며 도적(盜賊)을 뜻하는 말이며, 반란(叛亂) 또는 전쟁(戰爭)을 상징하는 불길(不吉)한 뜻이기도 하다」라고 전해진다】
➥ 위의 「유주호마객가(幽州胡馬客歌)」는, 당(唐) 이백【李白 : AD701-762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쇄엽(碎葉 : 키르기스스탄(Kyrgyzstan)의 토크마크(Tokmak) 출신(出身)의 위대(偉大)한 시인(詩人)으로 알려져 있다.】이 지은 시(詩)로써, 출생지(出生地)인 토크마크[Tokmak : 쇄엽(碎葉)]도 포함(包含)되는 바로 「유천(幽天)이요, 유릉(幽陵)이며, 유도(幽都)이자, 유주(幽州) 땅이다.」 이렇다 보니 “이백(李白)”은 “유주(幽州)”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자세(仔細)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➍ 「여진족(女眞族) 옛 숙신국(肅愼國)은,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➎ 그러나「조선(朝鮮)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여진족(女眞族) 옛 숙신국(肅愼國)이 있었다」라는 것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곧,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에 “조선왕조(朝鮮왕王朝)”는 없었다」라는 뜻이요, 이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고전(古典) 원문(原文)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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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이자면 :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 / 대황북경(大荒北經) :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不 咸 。 有 肅 慎 氏 之 國 1. :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불함산이 있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곽박(郭璞)” 이르기를 : 「1 郭 璞 云 : 今 肅 慎 國 去 遼 東 三 千 餘 里, 中 略, : 곽박(郭璞) 이르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요동(遼東)에서 3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 今 名 之 為 挹 婁 國, 出 好 貂, 赤 玉. 中 略. : 지금의 이름은 읍루국(挹婁國)인데, 아름다운 담비(貂)와 적옥(赤玉)이 나온다. 郝 懿 行 云 : 肅 慎 國 見 海 外 西 經 。中 略 : 학의행(郝懿行) 이르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라 하였다.」
➥ 「숙신국(肅愼國)」이 시대(時代)가 흐름에 따라 「읍루국(挹婁國)」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고, 「숙신국(肅愼國)은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라 하였으니, 산해경(山海經)의 해외서경(海外西經) 편에 기록(記錄)되어 있다」라는 이야기다.
「해외서경(海外西經)」이란 「서(西)쪽 나라 밖(外)의 먼 서(西)쪽 땅에 대한 기록(記錄)」이라는 것이니, 「해외서경(海外西經)의 땅이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될 수 없음은, UFO를 타고 다니는 외계인(外界人)은, “조선인(朝鮮人)”이다」라는 말과 같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란 뜻이다.
(1) -3) 후한서(後漢書)【後漢書 卷85 東夷 列傳 第75】에서의 읍루(挹婁)는 : 「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余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土地多山險。人形似夫余,而言語各異。: 읍루(挹婁)는,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부여(夫余) 동북(東北)쪽 천여(千餘) 리(里)에 있는데, 동(東)쪽의 끝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쪽과 북(北)쪽은 옥저(沃沮)와 접(接)했는데, 그 북(北)쪽 끝은 알 수 없다. 토지(土地)에는 산(山)이 많고 험하다. 사람의 형상(人形)은 부여(夫余)와 같은데, 언어(言語)는 각기 다르다.」라고 하였다.
「읍루국(挹婁國), 부여(夫余)의 동북(東北)쪽에 있다」라는 말은, 「부여(夫餘)는 읍루(挹婁)의 서남(西南)쪽에 있다」라는 말이 된다. 아래의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 대황서경(大荒西經)」 편을 보자.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 대황서경(大荒西經) : 〈大荒之中, 有山名曰大荒之山. 日月所入1. 有人焉三面, 是顓頊之子, 三面一臂 2, 三面之人不死3, 是謂大荒之野 :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대황산(大荒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山)이 있는데, 해와 달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 삼면(三面)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전욱(顓頊)의 아들이다. 얼굴은 삼면(三面)이고 팔(臂)은 하나다. 삼면(三面)의 얼굴을 가진 사람은 죽지 않는다(不死). 이곳을 대황(大荒)의 들(野)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이르기를 : 「3 郭璞云 : 言人頭三邊各有面也. 玄菟太守王頎至沃沮國, 問其耆老, 云 : 復有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上有一人, 頂中復有面, 與語不解, 了不食而死. 此是兩面人也 : 곽박(郭璞) 이르기를 : 사람의 머리 세 변 각각에 얼굴이 있다라는 것이다. 현토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옥저국(沃沮國)에 이르러, 나이 많은 노인에게 물으니 전하기를 : 배 한 척이 전복되어 부서졌는데, 해안(海岸) 가로 파도를 따라 나왔는데, 그 위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 가운데에 얼굴이 또 있었는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먹지 않고 죽었다. 이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위의 글에서 주목(注目)해야 점은, 「대황서경(大荒西經)의 원문(原文) 주해(注解)」속에서 「옥저국(沃沮國)과 현토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등장(登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왕기(王頎)가 누군가? 「왕기(王頎)」는 : 「AD 240∼242年 현토태수(玄菟太守)를 역임(歷任)한 인물(人物)로, 관구검(毌丘儉)과 고구려(高駒驪)와의 전쟁(戰爭) 중에 부여(夫餘)를 구하기 위해 군량(軍糧)을 운반(運搬)해준 인물(人物)이며, 관구검(毌丘儉)과 함께 고구려(高駒驪)와의 전쟁(戰爭)에 참여(參與)했는데… …AD 246년에 고구려(高駒驪) 장수(匠手) “유유(紐由)”에게 패(敗)하고 되돌아갔으니, 정시(正始) 八年[AD 247年]에 대방군(帶方郡) 태수(太守)를 지냈다」라고 하는 인물(人物)이다.
➥ 위의 「산해경(山海經)과 그 주석(註釋) 설명(說明)」에 따르면 : 3세기(世紀) 때의 「고구려(高駒驪)•부여국(夫餘國)•옥저국(沃沮國) 등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동구라파(東歐羅巴) 등지(等地)의 대황서경(大荒西經)의 동(東)쪽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관구검(毌丘儉)과 왕기(王頎)」가 고구려(高駒驪)와의 전쟁(戰爭) 중에 옥저국(沃沮國)까지에 이르렀으며, 그곳의 나이 많은 노인들로부터 “위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니,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 :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이들 조선(朝鮮) 국가(國家)들을 놓고는 역사(歷史) 설명(說明)이 불가능(不可能)하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황서경(大荒西經)”원문(原文)에 대한 주해(注解)이기 때문이며, 대황서경(大荒西經)은, 사해(四海) 밖의 서(西)쪽 땅에 대한 기록(記錄)이기 때문이다.
「여자국(女子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기록(記錄)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동구라파(東歐羅巴) 땅에 있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읍루국(挹婁國)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없었다는 명백(明白)한 근거(根據)요, 증거(證據)이며, 고증(考證)되는 자료(資料)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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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沃沮在蓋馬大山之東。 東沃沮界曰咸興、定平、洪原, 而狼林山以東, 黃草、赴戰兩嶺以南也。 : 옥저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고, 동옥저의 경계는 함흥ㆍ정평(定平)ㆍ홍원(洪原)이 낭림산(狼林山) 이동(以東)이며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 두 영의 이남(以南)이다.」라고 하였는데,
❶ 후한서(後漢書)【동한서(東漢書)】에서의 옥저국(沃沮國) : 동옥저(東沃沮)【동옥저국(東沃沮國 : 後漢書 卷85 東夷 列傳 第75】는,
「東沃沮國 : 後漢書 卷85 東夷 列傳 第75 /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一], 東濱大海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駒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는데, 동(東)쪽으로 대해(大海)에 닿는다 ;北與挹婁、夫余,南與濊貊接。其地東西夾,南北長,可折方千里 : 북(北)쪽으로는 읍루(挹婁), 부여(夫余)가, 남(南)쪽으로는 예맥(濊貊)과 접(接)해 있다. 그 땅은 동서(東西)는 좁고, 남북(南北)은 길어, 사방 가히 천리(千里)쯤 된다.」라고 하였다.
➥ 그 주(注)에서 이르기를 : 「注[一]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 개마(蓋馬),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개마대산(蓋馬大山)】은 지금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주(注) : ㈠ 본기(本紀)와 열전(列傳) 88권 등 100권은 당(唐)의 장회태자【章懷太子 : 651~684年 : 사천(泗川) 파주(巴州)에서 31살의 나이에 무후(武侯)의 미움을 받고, 자살(自殺)로 마감】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달았고【唐時,李賢與張大安、劉訥言、革希玄、許叔牙、成玄一、史藏諸、周寶寧等人共注後漢書,析原90卷為紀12卷、傳88卷,為100卷】 ㈡ 「지(志) 30권은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에 양(梁) 유소(劉昭)가 주석(註釋)한 것이다」라고 전(傳)해지고 있다.
이로 보면 : 「注[一]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 개마(蓋馬),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개마대산(蓋馬大山)】은 지금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주석(註釋)을 단 것은 : 「장회태자(章懷太子 : 651~684年)와 그를 보좌(輔佐)한 관료(官僚)들에 의해 열전(列傳) 88권을 주석(註釋)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동옥저(東沃沮)”등은 제85권에 포함(包含)되어 있으므로, 장회태자(章懷太子 : 651~684年) 등이 주석(註釋)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唐) 황실(皇室)의 장회태자(章懷太子 : 651~684年)와 그를 보좌(輔佐)한 관료(官僚)들에 의해 열전(列傳) 88권을 주석(註釋)【後漢書 注 : 唐時,李賢與張大安、劉訥言、革希玄、許叔牙、成玄一、史藏諸、周寶寧等人共注】과 함께 설명(說明)한 기록(記錄)에 대해서 후대(後代)의 누가 “아니다 또는 오류(誤謬)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 중요(重要)한 것은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고, 그곳이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서(晉書) 재기(載記) 서두(序頭)’ 기록(記錄)에서도 확인(確認)이 된다.
즉(卽),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옥저(沃沮)가 있고, 옥저(沃沮) 동(東)쪽에 평양성(平壤城)인 왕험성(王險城)이 있다」라는 것인데,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가 딱 어울리는 곳은, 바로 본래(本來)의 천산(天山)【한텡그리산(汗騰格里峰 : 6,995m)】과 그 동(東)쪽 땅이다.
○ 아래의 산해경(山海經) 본문(本文)과 그 본문(本文)의 주석(注釋) 편을 보자. 매우 흥미(興味)로운 결과(結果)를 볼 수 있다.
㈠ 山海經校注 第十六 / 大荒西經 : 「有 女 子 之 國 1 。: 여자국(女子國)이 있다.」
「注釋 : 1 郭 璞 云 : 王 頎 至 沃 沮 國, 盡 東 界, 問 其 耆 老, 云 : 國 人 嘗 乘 船 捕 魚 遭 風, 見 吹 數 十 日, 東 一 國, 在 大 海 中, 純 女 無 男. 即 此 國 也 : 곽박(郭璞) 이르기를 : 왕기(王頎)【현토군(玄菟郡) 태수(太守)】가 옥저국(沃沮國)에 이르러, “동계(東界) 끝에 다 달아, 그곳의 나이 많은 노인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 나라【옥저국(沃沮國)】사람들의 고기를 잡으려 배를 타고 가다가 사람들이 바람을 만나, 십여 일 만에 불을 보았는데,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한 나라에 가 있어, 남자(男子)는 없고, 모두 여자였는데, 바로 이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珂 案 : 女 子 國 已 見 海 外 西 經 。 郭 注 本 三 國 志 魏 志 烏 丸 鮮 卑 東 夷 傳 : 원가(袁珂)가 이르기를 : 여자국(女子國)은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라. 곽박(郭璞)의 주석(注釋)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❶ 오늘날의 동구라파(東歐羅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여인국(女人國)은, 총령(葱嶺)에서 3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에 있었던 “여인국(女人國)”에 대해서 : 그 동(東)쪽으로 수만리(數萬里) 떨어져 있던 반도(半島) 동해(東海) 변(邊)의 옥저국(沃沮國) 노인네들이 무슨 재주로 여인국(女人國)에 대해서 알 수 있었겠는가?
가능성(可能性)은 단 하나의 주장(主張) 밖에 있을 수 없다. 「곧 옥저국(沃沮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의 흑해(黑海)와 카스피해 사이에 여인국(女人國)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옥저국(沃沮國) 또한 그 주변에 있었어야 가능(可能)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 「동여인국(東女人國)은 서장(西藏)」에, 「서여국(西女國)은 총령(葱嶺) 서(西)쪽에 있었다」라는 것이 원전(原典)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토군 태수(玄菟郡 太守) 왕기(王頎)’에 의해 전해진 이 놀라운 기록(記錄)의 대상(對象)은, 「옥저국(沃沮國) 백성(百姓)」이며, 「옥저국(沃沮國)은 이들 여인국(女人國) 가까운 곳에 있었어야 이러한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최(最) 정보(情報)를 얻을 수 있었다」라는 것이다.
북한(北韓)에 대한 가장 핫한 정보(情報)를 가장 먼저, 빨리 알 수 있는 것은 남한(南韓)이다. 똑같은 이치(理致)요, 당연(當然)한 순리(順理)일 것이다.
○ 여인국(女人國) 【동여국(東女國)과 서여국(西女國)이 있었다고 원전(原典)에서 전하고 있다】에 대한 것은, 「문무의 조선사 : 2017년 10월 21일 / 여인국(女人國)과 옥저(沃沮) 〈2편〉/ 달단(韃靼) 서(西)쪽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다. / 령(葱嶺)의 서남(西南) 강연천(康延川)에 여인국(女人國)이 있었다.」를 보면 : 어떤 기록(記錄)보다도 잘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정리(整理)해 놓았다.
그래서 “제2편”으로는 당시(當時)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서, 보완(補完)과 보충(補充)을 하였다. -제2편으로 계속(繼續)- 2025년 01월 2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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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2편]에서는 "예고"한 대로, "옥저와 여인국"에 대한 옛 고전원문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합니다.
"현토군 태수 왕기"로부터 전해지는 이러한 조선사 이야기는 "옛 조선의 여러국가들은 오늘날의 반도 땅에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 고증되는 놀라운 기록임에 틀림이 없으나 기존 사학계는 이를 마치 벌레보듯 합니다.
* 고전원전에서 말하는 "여국 또는 여인국"은 동아세아가 아닌 서역과 서방 땅의 (1) 서장과 인도와 북방지대 (2) 총령의 서쪽 3천리에 있다라는 것이 "여국'이기 때문에 한반도 북방의 동해 연변에 있었다는 "옥저" 노인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UFO를 타고 다니는 외계의 석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나 "왕기"는 말하기를 "기노 곧 '나이가 많은 현명한 노인'이라고 하였기때문에, 외계인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곧 당시의 "옥저"는 오늘날의 중앙아세아와 동구라파 사이의 땅에 있었어야만 : 서방 땅의 여인국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정보는 "옥저국 백성들이 유일무이했다"는 것입니다.
* 또 옥저(沃沮)의 북쪽에는 '숙신=읍루=물길=말갈'이 있었다는 것고, 옛 조선왕조는 "한반도=조선반도=반도' 땅에 없었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반도 북방지대, 동북삼성 땅에 옛 숙신이 있었다며, 이들이 고조선과... ...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식민사관의 연속일 뿐입니다"
이분들의 이런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바로 "일제 식민사관 논리에서 나온 반도조선사"일 뿐인 것을... ...이걸 지금도 추종한다니.....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자세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천년 전의 역사 연구는 고전원전을 떠나... ... 공부도, 연구도 할 수 없습니다.
족보연구를 하면서 족보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인간으로써 수백년 이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공부하고 연구를 할 수 있을까요?
선인들이 왜 기록을 남겼을까요?
기록을 무시하고 20세기에 만들어 놓은 한글해설서를 달달 외워본들 맨날 똑같은 레파토리일 뿐이며, 그것은 한반도를 벗어날 수 없는 두 날개가 없는 새처럼 반도 땅을 기어다닐 뿐입니다. 그러니 반도 땅 수천 수백리를 파헤쳐도 "왕릉" 하나 건져낼 수 없는 것입니다.
반도조선사에는 모든 것이 "추정한다. 추측한다. 비정한다. 예측된다. 그것도 되지 않으면 미상(未詳)이다"라고 합니다.
도대체 아는 것이 뭐 있습니까?
* 요즘들어 소위 "친일주의자, 친일사대주의자"들이 활개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보수우파'라고 자칭하는 집단에서 이러한 분들이 활개를 친다는 것이, '이율배반적'입니다.
* 옛 '한민족=조선족'의 '얼과 혼'을 망가뜨린 원흉이 바로 일제(日帝)입니다.
이러한 일제(日帝)를 추종한다는 것은 곧 매국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반역(叛逆)이나 내란(內亂)등은 매국노(賣國奴)와 동격(同格)입니다. 대한민국의 검사출신이, 지검장 출신이, 검찰총장 출신이 "친일사대주의자"인 것도 모자라 '반역 곧 친위 쿠데타 곧 내란'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는 것은 어떤 핑게를 대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大逆罪)와 같습니다. 이런한 사람을 옹호(擁護)하는 무리들은 또 무엇입니까?
* 이러한 무리를 옹호하는 것은 좌우를 떠나 용서할 수 없는 무도한 짓입니다.
만약 이러한 자(者)를 옹호한다는 것은, 또 다시 내란이나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 일제의 식민통치도 모자라,
미군의 군정시대,
한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부모자식, 형제간에 총대를 맞대고 있는 이 비극이 아직도 모자라다는 이야긴가?
* 대한민국의 국민들이여!
도대체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무엇입니까?
'뭔 생각을 갖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끼리끼리 허구헌 날 싸움질로 날을 샐건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설날 연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많은 분들이 국내로,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고 법썩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적이득을 취하고자 국민들을 두 패로 분열시키는 자(者),
일제(日帝) 사대주의자,
사적인 욕망을 채우고자 내란(內亂)을 일으킨 자(者),
이런 자(者)는, 결코 용서(容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설날을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나의 미래는 국가의 미래요,
나의 나은 삶은, 곧 국가의 나은 미래가 됩니다.
* 잔소가가 많았습니다. 용서하시고... ...즐거운 설날 연휴(連休)를 즐기시기를 바립니다.
문무선생님 감사합니다. 명절은 잘 보내셨지요
유주, 황하등 모두 이동 된 지리에 마춰서 역사를 바꿔버리고 바뀐 위치로 역사를 배우니
너무 안타깝네요.....
안녕하세요!
"대진"님!
며칠간은 추위가 절정에 이를 것 같습니다.
관심과 성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