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은 없다.
-경제학적으로 바라 본 헤이케 이야기-
진유성
경제학과.
/서론/경제학도로서 본인은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소설보다는 본인 전공을 위한 정보가 쓰여진 글들을 좋아하고, 자료 읽고 정리하는 것이 귀찮아 질 때는 잡지나 신문을 볼 뿐이다. 이런 본인에게 헤이케 이야기는 ‘소설’보다는 ‘정보가 많은 역사 이야기’정도로 처음에 다가왔다. 그러나 헤이케 이야기를 읽다보니 방대한 자료와 방대한 인물들, 그리고 당시의 세계관 그리고 그 속에서 전해져 오는 흥망성쇠등을 통해 기존에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본론1/헤이케 이야기는 1000년전 일본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글을 느끼며 현대 기업가들의 모습, 특히 지금은 해체한 대우그룹을 볼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보이는 서울스퀘어, 미생의 배경이기도 한 그 건물의 원래 주인은 대우그룹이었다. 그리고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당시 ‘해가 지지 않는 경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열정과 패기를 가진 경영의 남자였다. 대우 그룹은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뻗쳤으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고 한때 재계서열 2위의 굴지의 기업으로 우뚝섰다. 1999년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은 분식회계와 위험자산 과다(부채비중 高) 상태가 적발되었으며 결국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해체되었고 김우중 회장은 현재 건국이래 최대의 추징금(약 17조 8000억)을 아직 미납한 상태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기업이 아닌 철학의 변화 역시 일맥상통한다. 과거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는 미국의 황금의 세대(50 60년대)를 개막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라는 영예를 얻었다. 그리고 정부의 시장개입은 당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간단히 말해 물가는 상승하는데 경제는 하락하는 것)이 발생하며 케인즈 주의는 막을 내리고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미국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일본을 뿌리치고 압도적 1위의 초강대국으로 우뚝섰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에서 이 바람은 다시 멈추고 다시 케인즈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 경제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재계1위인 삼성이 언제 2위가 될지 모르고 이는 가능하다. 과거 록펠러가 그랬듯, 카네기가 드랬듯 언제든 1위는 바뀔 수 있다. 그리고 불과 200년 사이에 벌어진 이 모습들은 1000년 전 다이라씨의 곡선과 너무나 일맥상통한다. 한때는 상왕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압도적인 모습의 다이라 세도 정권도 결국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은 1권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인 동시에 현대 경제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본론2/2학년으로 올라온 뒤 경제학에 대해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필자에게 헤이케 이야기는 사실 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인 주제보다는 경제적인 화두를 많이 던져 주었다. 경제학에서 인간이랑 최소 노력을 통한 최고 이윤을 창출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경제학의 많은 사례에서 높은 위험이 높은 이윤을 부른다. 사람들은 더 많은 노력을 통한 안전성 보다는 좀 더 높은 위험성을 통해 더 높은 수익을 창출하려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이윤을 누적할수록 그 뒤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최근 발생한 사례가 누구나 알 수 있듯 2008 금융위기이다. 위험성이 수익에 비례하는 사실을 염두하고 냉정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당시 정부, 은행, 회사, 개인 모두 그러한 생각에 빠졌고 ‘부동산은 영원히 오를것이다.’’ ‘위험성은 높을수록 좋다’ 등의 생각으로 일관하며 투자를 벌였고 2008년 9월, 모두 소위 ‘거지’가 되었다. 이들이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간단한 진리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높은 수익을 벌었을 때 집착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누군가가 정말 올곧게 조언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든다. 은행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상품을 속여 파는 전형적인 간신이 되었고 충신은 쫒겨 나 있었다.
/본론3/이런 점에서 다이라 씨의 몰락은 기요무리의 폭정도 있지만 그의 아들인 시게모리의 죽음도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필자는 시게모리(경)의 이야기에서 많은 아쉬움을 가진다. 섭정 습격 사건에서 스케모리의 만행과 기요모리의 재상답지 못한 행위를 비판하고 스케모리를 근신시킨 사람은 스케모리의 아버지이자 기요모리의 장자인 시게모리였다. 시게모리는 명망이 높았고 자비심이 강해 초롱동자라고 불렸다. 그는 폭정을 일삼는 그의 아버지인 기요모리에게 간언을 꾸준히 드렸으나 이는 결국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저희 아머님 하시는 것을 보면 악역무도하기 짝이 없어 상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기 일쑤입니다. 저는 장남으로서 늘 간하고는 있사오나 불초한 탓에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시게모리는 결국 쓸쓸이 죽음을 맞이했다. 능력이 아닌 조언이 인정받기를 바랬던 한 젊은 선각자는 무너졌고 이는 다이라 가문의 위기에서 냉정한 분석과 파악으로 대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정 엘리트의 부재는 때때로 전체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장기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다이라 일문은 정확히 그 상황에 빠지게 된다.
/결론/
최근 금수저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 노력의 가치가 평가절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사회가 금수저니 노력해도 안된다 라는 말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어 안타깝다. 심지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조력자이자 멘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안타깝다. 경제학 중 미시경제학을 보면 사람은 예산선을 우향(右向)시킬 수 있으며 그에 따라 효용을 극대화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물론 효용을 무작정 극대화 시킬 수 없다. 하지만 거시경제학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자. 거시경제학에서 ‘잠정 GDP’라는 용어가 있다. 현재가 아무리 안정된 상태라도 국가경제는 언제든지 잠정 GDP로 갈 수 있으며 이 GDP에 도달한 상태가 최적상태이고 여기서 더욱 욕심을 낸다면 경제는 위기에 빠진다. 기요모리의 경우는 이미 이 최적상태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잠정 GDP 상태를 인지하지 않고 더 큰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위기에 빠지고 결과적으로는 멸문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학생인 우리의 모습을 우리 인생의 최적 상태라고 말할 수 없으며 언제든 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지금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지금은 인간이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할 때다] 우리는 아직 현실에 좌절하기에는 너무 젊다. 조금 더 희망을 가지고 산을 올라갔으면 좋겠다. 부디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잊지 않길 바라며 언제나 정점에서는 잠시 멈출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길 기원한다.
시게모리의 교훈은 좋은 동지를 얻고 이를 구별하자는 교훈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좋은 동지를 사귄 자들이 함께 역사를 쓴 경우가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도원결의 3형제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좋은 인연은 좋은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하지만 이 인연을 처음부터 좋은 인연 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처음에 이를 좋은 인연이라 느끼지 못한다면 시게모리처럼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역사에서는 많이 나타났다. 경제학에서는 개인의 이윤과 효용을 극대화하려하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경우는 내쳐질 수 있다. 그렇기에 경제학과의 관점에서는 이윤을 보고 오는지 아니면 진정 나를 위해 오는지를 구별할 필요가 생긴다. 이에 대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우선 거짓 인연, 즉 이윤을 보고 들어오는 자들을 짜라투스트라는 ‘독파리’로 표현했다. [그들은 그대 주위에서 윙윙거리며 찬양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그들의 찬양은 성가실 정도로 집요하다. <중략> 그것들은 신이나 악마 앞에서 하듯 그대 앞에서 알랑거리며 징징댄다] 이 알랑거리는 소리에 귀가 멀어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영혼은 사그라들 것이며 조력자(피)를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짜라투스트라는 간신을 멀리하고 그들로부터 멀어지라고 조언했다. 반면 진실된 벗에 대해서는[하나에 하나를 곱하지만 둘이된다]라고 말한다. 즉 1x1=2'가 바로 벗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력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제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것을 연출해 주는 자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한 연출자를 군중은 위인이라 부른다] 우리는 연출자보다 배우에 집중하지만 훌륭한 연출이 없다면 좋은 배우도 나올 수 없다. 연출자의 연출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를 내치면 안된다.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꿈꾸는 이야기이다. 좋은 벗을 사귀고자 한다면 우선 독파리를 내칠 수 있는 파리채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좋은 연출자를 알아볼 수 있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여러분에게 노력해도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노력이 아닌 시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의 멘티가 아니라 ‘독파리’이다. 이를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영광을 추구하며 그 순간의 짧음을 느끼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산 꼭대기의 바람과 풍경이 아름답다고 산 꼭대기에 집을 짓지는 않는다. 사람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며 중간에서 물도 마시고 잠시 숨도 쉬며 뒤를 바라보며 정상을 쳐다보고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기요모리는 그냥 말 그대로 숨겨진 케이블카를 발견해 한 번에 정상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고통은 일말 알지 못한 채 날뛰다가 산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용어가 관통하는 헤이케 이야기 1권과 2권은 산을 오르는 꼭대기에서의 쾌감, 그리고 언젠간 그 산에서 내려와야 함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산 꼭대기에서 내려갈 가장 적절한 시기를 가르쳐 줄 조력자를 알아볼 필요가 있음 역시 역설한다. 필자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고 산을 오르는 중이다. 필자에게는 꼭대기 뿐이었으며 꼭대기에서 얼어 죽으면 죽지 내려가긴 싫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은 그런 필자의 마인드에 작은 경종을 울렸다. 꼭대기가 있는 산은 다시 내려가야 함을, 그리고 지금 내 주위에 진정 나를 위한 쓴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라는 안목을 소설은 방대한 자료속에 아주 날카롭게 이야기 해 주고 있다.